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늦었지만 다시 한번, ‘다른’ 공공성과 ‘다른’ 운동을 위하여

김명준ㅣ 미디액트 소장

1.이동하지 못하는 이들을 망각한 이동매체

DMB 사업자가 결정났다. ‘지상파이동멀티미디어방송’이라는 긴 이름을 지닌 이 DMB 사업은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쏟아져 들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올 방송통신서비스중의 하나로 이동중인 사람들이 쉽게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게 그 목적이란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아직도 이동을 할 수 없어서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동하며 감상할 매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 이런 매체를 만들지 말자는 건 아니다. 만약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면 DMB도 의미있는 일보전진일 것이다. 바로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논쟁되고 소통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DMB 사업의 얼개에 깊숙이 반영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 ? 아직까진 전혀 (혹은 거의) 그렇지 않다.

2. 모두를 위한 디지틀 미디어 자본주의 ?

누구나 겪고 있지만 별로 고민해보지는 않는 상황을 한번 되새겨보자. 디지틀 미디어 시대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 결정해버리고, 그런데 우리 주머니를 털어 그 사업을 진행하는 기묘한 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세상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살아보면 그냥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쪽 사업은 진도가 항상 거침없이 나간다. 단 한사람도 정부청사앞에 가서 “지금 보는 TV가 워낙 화질이 안좋으니 디지틀로 바꿔라!”고 외친 일도 없거만 이제 수년내로 모든 아날로그 TV는 고물이 될 판이다.

아무런 싸움도 없이 왜 이렇게 진도가 빨리 나가는지에 대한 답변은 다음 두가지중 하나다. 그게 워낙 좋은 것이긴 하지만 대중들이 무식해서 요구를 안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워낙 이권이 크게 걸려있는 것이라 앞뒤안가리고 진행하는 것이든지 말이다. 어느 답변이 맞든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긴 하지만, 이 분야의 사업들이 지난 10여년간 보여준 규칙들을 보면 하나같이 똑같은 궤적이 그려진다. 언제나 시작은 장밋빛 환상이다. 언론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어느날 아침 눈을 뜬 A과장은 이동용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로 어쩌구 저쩌구... 어쨌든 그런 편리한 세상이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따위의 기사들이 분위기를 잡아주고, 새로운 미디어가 유발할 산업 연관 효과가 그럴듯한 통계로 포장되어 등장한다. 그런데, 이 통계들을 다 모아보면 우린 하루종일 온갖 미디어의 숲에서 바보처럼 버튼을 눌러대고, 수입의 대부분을 방송통신장비에 지출하고 있어야 한다. 어쨌든, 주로 영어약자로 암호처럼 이름붙여진 이상한 미디어에 대한 정책이 수립되고 거대한 이권을 노리는 사업자들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이런저런 시비가 붙고 어쨌든 사업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경쟁이 장려된다. 독점되면 안된다고,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하다가 어느 순간 이 사업이 과잉투자임이 드러나면서 수사학은 바뀐다. 소비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지 않고 경쟁은 치열하니 다시 효율성의 논리가 등장하면서 독점이 경쟁을 대체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시장이 경쟁을 낳고 그를 통해서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사실은 경쟁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결국, 경쟁은 오직 사업권을 따기 위한 핑계이자 공적 책임을 떠맡지 않기 위한 변명임이 드러날 뿐이다.

상황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이제 이런 과정 전체가 마치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양 그럴듯한 개념으로 포장되기 시작하는데, 산학협력이라는 이름하에 동원되는 학자들은 이런 자본의 운동에 대해 온갖 논리적 구조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패배주의이거나 혹은 적극적 동참의 표현이다. 게다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기술 개발은 그 기술 자체가 수용자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하기도 한다. 하나의 DVD 규격을 확정하자마자 이번에는 거꾸로 전세계를 멋대로 분할통치해버린 지역코드라는 황당한 발상이 그 예중 하나이다.

긴 호흡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이건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자본은 언제나 세상을 자신의 이름으로 구상하고 만들어왔으니까. 그러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상황을 열심히 분석하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바꿔내는 것이다. 현실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아가 그들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으로 (그것이 민중이든 시민이든) 세상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주목해야할 것중 일단 두가지만 점검해보자.

3. 공공성 - ‘방송 vs 통신’을 넘어서는 융합 시대의 공공성을 향해

그 하나는 공공성이다. 시장근본주의의 문제점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공공성, 공적 영역, 공익성 등의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사적 이익의 파괴적인 욕망과 운동을 제어하려했다.

미디어 영역에 있어서 이 공공성은 아날로그 시대를 관통하며 다양하게 굴절되어왔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면서 함께 확대되기도 했고, 때로는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변화와 맞물리지 못하면서 위축되기도 하는 등, 불균등발전은 불가피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그 변화의 폭은 짧은 시간동안 무척 컸다.

방송 영역에 있어서 공공성의 문제는 우선 공영방송이라는 일종의 대의제 성격을 지니는 방송의 역할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 시청자 주권이라는 무척 추상적이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개념으로 표현되면서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나 시청자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혹은 퍼블릭 액세스의 번역판인 시청자 제작 참여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사업의 확대로 등장하기도 했다. 정보통신 영역은 이와는 달리 주로 보편적 서비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공공성의 담론이 발전되었다. 사람들이 값싸고 손쉽게 누구나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조건과 정책에 대한 논쟁이 공공성을 둘러싼 논쟁의 주요한 축이 되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런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정보통신융합의 시대, 미디어간의 경계가 파괴되고 융합된다는 이 디지틀 미디어의 세상에서 기존의 공공성은 어떻게 재평가되고,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공공성은 정의되어야 할까 ? 그리고 과연 이러한 공공성을 전사회적으로 담보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국가기구는 어떻게 답변하고 있을까 ? 혹은 제안하고 있을까 ? 애석하게도, 답변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다. 워낙 미래가 혼미하고 상을 잡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답답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잡아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방송 혹은 통신중 어느쪽이 주도권을 잡아야할지에 대한 암중모색이나 갈등만이 아직까지 우리 앞에 드러난 현실이라는 것이다.

섣부른 답변을 하기에 앞서서, 하지만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환경에서 산업,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 중심의 논리를 극복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그야말로 미래지향적인 공공성을 구상하기 위한 단서중 한가지를 양쪽 미디어에서 초보적인 논의 수준에서나마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미디어의 발전 역사가 지닌 특수한 지점중 하나는 인터넷이 발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 라디오나 TV 같은 것을 시민들이 소유하고 운영해보는 아무런 경험도 없이 광대역 인터넷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황당한 상업적 용어는 되도록 쓰지말자) 의 경험이 미디어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확대한 유일한 나라라는 점이다. 그것은 허가받은 주체가 컨텐츠의 생산과 소통을 독점하는 기존의 대의제적 미디어 시스템과는 다른 일종의 직접 민주적, 참여 미디어 구조가 가능함이 현실에서 매우 폭발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이 그 접근에 대한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내버려둬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시장에서 벌어지는 자본에 의한 독점 현상을 피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역시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말하자면, 접근권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를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 권리의 보장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정책의 필요성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른바 주류 미디어의 한계는 명확해지고 동시에 그 역할이 더욱 확장되어야 함이 분명해지고 있으며, 주로 정보통신 영역으로 분류되는 새로운 미디어 또한 그 새로움과 함께 이른바 올드 미디어가 지닌 한계를 어떤 수준으로든 내포하고 있음도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존 주류 미디어의 혁신과 그러한 주류 미디어와 새로운 참여적 미디어를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의 프레임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아닐까 ? 말하자면 방송과 정보통신이 모두 공존하는 바로 지금, 이미 드러났지만 공공성의 담론에 아직 포괄되지 않는 방송과 통신 영역의 새로운 의제들을 포괄하면서 아직은 맹아로만 존재하지만 미래에는 틀림없이 드러날 의제를 역시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의 재구성은 불가피하면서도 가능한 것 아닌가 말이다. 이제 공적 이해를 대변해야 할 사람과 조직들은 이 질문에 대해 책임있게 답변해야 한다. 누가 주도적으로 융합을 할지 따위의 논쟁을 벌이기 훨씬 전에 이것부터 해명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4. 운동 - 힘겹지만 해볼만한, 아니 해야할 싸움을 준비하기

하지만, 아직 자본의 힘은 막강하고 국가 기구와 공적 체계도 자본의 힘과 그 힘에 근거한 시장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이 디지틀 미디어의 영역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서야 할 운동주체, 그리고 수용자의 상황을 둘러싼 특수한 조건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이름부터가 부담스러운 이른바 뉴미디어는 마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처럼 언제나 저 높은 고지 위에 서있다. 공적 이익을 고려한 대책을 준비하면 대상 자체가 기술 개발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바뀌어버리기도 하고,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이미 결정난 상태이기 일쑤다. 무엇인가 제안을 하려해도 그 제안을 이해하면서 공공성을 함께 고민할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돈도 벌기 전에 무슨 요구가 그리 많냐는 핀잔도 융단폭격처럼 쏟아진다. 이건 정말 힘든 싸움이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건 해야할 뿐만 아니라 해볼만한 싸움이다. 기존 매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 주로 그 자유를 당장 침해하는 세력에 대항한 수세적인 투쟁의 확대로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이 싸움은 미래를 그려가는 싸움인만큼 공세적인 싸움이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고, 누구도 미래를 단언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지금 한국은 디지틀 미디어의 초기단계가 아니라 이미 그 한계와 성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이른바 IT 강국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상황을 알고 있으며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첫단추들이 꿰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디지틀 TV의 전송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시대의 채널 정책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고, DMB는 어리둥절한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그러니 비록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빨리)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정해놓은 게임의 규칙안에서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말고, 게임의 규칙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운동을 시작하자는 말이다.

처음부터 규칙을 통째로 다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지부터 논의를 해나가면 된다. 새로운 시대의 공공성과 미디어 전략을 한꺼번에 논의에 붙여보든지, 수용자 주권, 커뮤니케이션 권리, 퍼블릭 액세스 권리 등의 각종 권리 개념을 중심으로 인권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논의를 하면서 전체적인 얼개를 잡는 단서를 찾아가든지, 앞으로 남아있는 다른 매체들의 도입 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 정책을 토론하든지, 도입된 혹은 정착된 매체에 대한 재평가를 새로운 개념에 대한 상상력을 기초로 시도하든지,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누가 모여야 할지, 머리를 맞대야 할 때가 왔다.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좁고, 짜임새있게 설명하기에는 내공이 모자란 상태에서 이 거친 원고를 억지로라도 쓰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 아직은 작아 보이는 이런 시도들이 분명 현재의 갈증을 채워주는 강력한 힘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 때문이고,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서의 새로운 시도가 정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현실적으로(!)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핵심이라는 기술 결정론 혹은 생산력 지상주의를 믿어서가 아니라,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이 지닌 해방의 가능성과 참여와 다양성의 확대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를 한껏 키워나가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장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요약하자.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