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ACT! 74호] 그는 속죄한다. 우리가 만든 지옥 속에서

올해의 발견 <무산일기>

사내는 하염없이 서 있다. 우두커니. 아니, 온 힘을 다해 그는 서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의 뒷모습 뿐. 그러나 우리는 그의 눈물을 보고 있다. 그의 한없이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다. 지금 그는 굳건한 그 두 다리로 온전히 서 있지만, 동시에 그는 이미 무너졌고, 그의 다리는 꺾였다. 그럴 수밖에. 그는 자기가 사랑한 유일한 그 무언가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두 시간동안 우리는 질릴 정도로 그의 뒷모습을 보아 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똑바로 쳐다보고 견디기 어려운 그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마주해야 한다. 고기 집, 노래방, 술집, 흥청거리는 사람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남한의 어느 거리. 빈 택시들은 무심하게 그의 곁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그는 그 거리의 한 복판에, 마치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서 있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서있음’ 에 우리의 슬픔도 목까지 차오를 무렵. 그는 갑자기 ‘움직인다.’ 죽은 그 것을 그가 그냥 지나쳐 가려는 찰나. 암전. 영화는 끝난다.

  <무산일기> | 박정범 | 2011
영화사상 가장 갑작스런 엔딩일, 그리고 단연코 올해의 엔딩일, 이 장면. 영화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혹시 영사사고가 아닐까, 잠시 당혹해하는 관객들을 향해 감독은 나지막이 짧은 자막을 띄운다. “세상을 떠난 고(故) 전승철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전승철은 이 영화의 주인공. 이 자막은 마지막 승철의 ‘움직임’에 그나마 작은 희망을 보았던 관객들의 기대를 마저 갈가리 찢어 놓고 만다. 승철은 삶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그러면서 이 가슴 먹먹한 이야기를 그래도 희망차게 끝내고 싶어 했지만, 저 암전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잔인한 것은, “그래도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관객들에게 “이것은 현실이야. 전승철은 실제로 스크린 밖에서 너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갔고, 너희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갔어.” 라고 일갈하는 감독의 외침이다. 그 짧은 자막이 사라지고, 아무런 음악도 없이 침묵 속에 묵묵히 흘러가는 엔딩 크레디트 롤. 관객들의 숨 쉬는 소리조차 지금 이 순간엔 들리지 않는다.

전승철은 감독인 박정범의 친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탈북자였다고 한다. 그는 우직하고 순진한 청년이었지만 소심하고 무능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했고 시급 4천 원짜리 알바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지만,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남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던 둔하디 둔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고 하느님을 사랑했고 하느님을 사랑한 한 여자를 사랑했고 “죄 많은 나를 살리신…” 으로 시작하는 찬송가를 사랑했지만, 사랑을 할 줄 몰랐고 신에게 배신당했으며, 죄 많은 그는 결국 신의 무관심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전승철이었다. 감독은 친구 전승철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의 우직함을, 소심함을, 무능함을,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자본주의 한 복판에 내팽개쳐진 그를,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한낱 값싼 동정밖에는 얻을 수밖에 없는 그를. 그러나 감독은 그를 차마 똑바로 응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영화에는 그 토록이나 많은 그의 뒷모습이 담겨야 했던 거다. 아마 이 영화는 사람의 뒷모습이 가장 인상적으로 담긴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무산일기> | 박정범 | 2011


전승철은, 탈북자는, 남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기 위해 남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그는 친구인 경철처럼 약아 빠지지도 못했고, 탈북자의 신분을 이용해 남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돈을 버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는 그저 차가운 서울 거리 곳곳을 홀로 누비며 나이트클럽 전단지를 덕지덕지 벽에 붙이거나, 노래방에서 도우미 아가씨들 젖이나 주물럭거리는 한심한 남한 사내들의 비위를 맞출 뿐이다. 그나마도 그는 그 일들에 무능하기 짝이 없다. 그가 붙인 벽보는 남한의 칼바람에 찢겨 너덜거리기 일쑤이고, 그는 경쟁 나이트클럽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늘 매를 맞는다. 그가 잘하는 일은 오로지 묵묵히 견뎌내는 일 뿐이다. 무참히 뜯겨져 나간 벽보를 그는 묵묵히 다시 붙이고, 매질을 하면 그는 그저 묵묵히 맞는다.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죄가 많아. 그러니 맞아도 싸. 북한을 떠나 온 죄. 그는 그 곳에 아마도 가족을 두고 왔을 거다. (승철은 가족 없이 남한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그는 교회 모임에서, 사람들이 탈북자인 그에게 겨우 동정심을 가질 무렵, 뜬금없이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한다. 최악의 타이밍.) 그는 그런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듯,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남한 땅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야 마는 거다. 그런데도 그는 일이 꼬일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러나 그 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그 대답은 이미 그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무작정 북한을 떠나 도망 온 잘못. 이 무시무시한 남한 땅이 진짜 지옥인 줄도 모르고, 무능한 주제에 겁도 없이 기어들어 온 잘못. 상처받을 줄 뻔히 알면서 남한의 새침한 아가씨를 감히 짝사랑한 잘못. 그의 친구 경철은 남한에 희망이 없음을 진작 깨닫고 이번엔 극락천국 미국으로 도망가려고 계획한다. 하지만, 승철은 그런 허황된 꿈을 꿀 만한 배짱도 용기도 없다. 아니, 그도 허황된 꿈을 꾸기는 한다. 신이라면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허황된 믿음.

  <무산일기> | 박정범 | 2011


그는 늘 서울의 황량한 철거촌 폐허를 어슬렁거린다. 어느 날, 그는 아낌없이 모든 것이 부서져 있는 그 폐허들 사이를 걷다가, 그 날도 어김없이 나타난 경쟁 나이트클럽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매를 맞기 시작한다. 무자비한 린치. 그는 정신없이 얻어터지다가 절벽 끝까지 몰리고, 마침내는 사내들의 모진 발길질에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많이 다치지도 않는다. 이 정도 쯤에 죽고 다쳐서 속죄될 승철의 인생이 아닌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그 모진 탈북 과정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굳이 다루지 않아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며 북한을 탈출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남한까지 올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속죄의 길을 걷고자 한 승철은 당연한 듯이 다시 절벽 위로 올라온다. 하지만, 이 비정한 남한의 사내들은 기어코 그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들은 그의 오리털 잠바 (친구 경철이 모처럼 큰맘 먹고 사준) 에 긴 칼집을 내고, 칼이 지나간 사이로 하얀 오리털들이 주르륵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승철의 피다. 칼이 파고 지나간 상처 사이로 그의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남한 사회였기에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그 고급 오리털 잠바는, 승철 대신 그의 피를 흘려준다. 기어코 피를 본 사내들은 그를 떠나고, 피투성이가 된 승철은 절벽 끝에 있는 문 앞에 주저앉는다. 승철은 가만히 그 문을 열어본다. 절벽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그 크나큰 고통을 겪고, 피까지 흘려가며 이곳에 다다른 승철은 부푼 기대를 안고 그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는 것이다. 무언가 또 다른 세상이 있기를 바라며. 그러나 그 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문은 어딘가로 통하는 제 기능을 이미 상실한, 그저 철거된 폐허 속에 우연히 남은 문일 뿐이었던 거다. 그렇게 그 많은 고통을 겪은 끝에 겨우 문을 열었건만, 승철이 발견한 건, 그 문은 환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절벽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감독 박정범은 영화 속에서 친구인 전승철을 대신 연기한다. 솔직히 그의 연기는 어색하고 대사는 늘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다. 그러나 그의 어색한 연기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한의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하고, 항상 최악의 타이밍만을 선택하고야 마는 승철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그리고 감독은, 결정적으로, 이 영화 속에서 진짜로 맞는다. 남한에 와서 한 것이라고는 맞고 도망치고 다시 맞고 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승철의 삶을 직접 재현하면서, 감독은 실제로 맞고 실제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고 실제로 고통스러워한다. 감독은 그 이유에 대해, 친구인 승철의 삶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실제 자신을 벌하고 영화를 통해 속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나는 <무산일기>가 승철이 속죄하는 과정이라고 썼다. 북한에서의 삶을 생략하고, 탈북 과정을 생략하고, 남한에서의 비루한 삶만을 전시하는 이 영화는, 승철이라는 구도자가 살생의 업보를 진 채로 지옥에서 도망쳐 나와 오히려 더 큰 지옥을 헤매는 이야기로 보인다. 여기에 감독은 남한이라는 더 큰 지옥을 만든 남한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영화 속에서 직접 구도자를 연기하며, 고통 받는 구도자에게 진심어린 속죄의 뜻을 전한다. 남한의 사람들인 우리 모두 역시도 그에게 속죄해야만 한다. 승철이 헤매는 더 큰 지옥을 만든 우리 자신의 죄를. 그를 무능하게 만든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지하는 우리의 무관심을. 그에게 값싼 동정을 쥐어주고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무심함을. 그의 비참한 가난이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를. 그가 환상과 착각 속에 지옥으로 탈출해 오도록, 절벽 끝에 겉만 그럴듯한 문을 지어놓은 우리의 허영을. 그리고 거기에 우리 스스로마저도 속아버린 우리의 환상과 착각을. 우리는 속죄해야만 한다.

지나치게 갑작스런 영화의 엔딩처럼, 승철은 갑자기 감독의 곁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은 속죄의 심정으로, 반성문을 쓰듯, 이 영화를 만들었다. <무산일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고, 이 영화는 단연코 올해의 발견이다. <무산일기>를 통해 우리 모두는 최소한의 속죄의 기회를 얻었다. 당신은 이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인가. 아직 극장에 걸려 있다. 찾아가서 고(故) 전승철 씨를 만나기를 바란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당신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속죄의 기회를 준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낸다. □


[필자소개] 박민욱 -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지금은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 간간이 단편 영화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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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 독립영화 , 무산일기 , 박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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