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ACT! 80호 Me,Dear] Because it`s a lot of hooey

“Because it`s a lot of hooey.”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오명>에서 한 순간을 꼽으라면 여기를 꼽겠다. 알리샤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데블린(캐리 그랜트)이 알리샤(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묻는다. “왜 저 노래를 좋아해요?” 알리샤는 만취한 채 묘한 감정 위에서 웃더니 “바보 같으니까요. (Because it`s a lot of hooey.) 러브송만큼 웃긴 게 없죠.”라고 답한다. 알리샤와 데블린의 첫 대화 장면이다. 잠깐 마음이 찡해진다. 나는 <오명>을 처음 보는 게 아니라서 알리샤가 영화 내내 사랑 때문에 고생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미련하다. 줄 곧 바보 같다고 조롱해온 일에 자기도 모르게 기꺼이 몸을 담근다. 도대체 왜?

  <오명> | 알프레드 히치콕 | 1946


<오명>은 카메라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재판장에서 시작한다. 기자들은 재판을 받은 독일 스파이 존 휴버먼의 딸 알리샤 휴버먼(잉그리드 버그만)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 정부기관도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방탕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알리샤에게 미국 정부기관원 데블린(캐리 그랜트)이 접근한다.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지만 알리샤는 데블린이 전달한 미국 정부의 극비임무를 맡기로 하고 리오로 향한다. 그러는 동안 알리샤와 데블린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여자를 믿지 않는 데블린은 알리샤를 경계하고, 알리샤는 자신의 방탕한 기질을 자책한다. 알리샤의 처절한 구애는 결국 데블린의 마음을 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국 정부기관은 알리샤에게 아버지의 옛 동료인 세바스찬(클로드 레인즈)에게 접근하라는 임무를 전달하는데, 세바스찬이 오래전부터 알리샤를 사모해온 것을 이용하는 작전이었다. 데블린은 알리샤가 그 임무를 거절하길 바라고, 알리샤는 데블린이 그 임무로부터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다. 알리샤는 임무를 맡게 되고, 데블린은 다시 매정한 남자가 되어버린다. 알리샤는 나치 스파이들의 아지트인 세바스찬의 집에 잠입하기 위해 세바스찬의 애정과 자신의 오명에 따라 세바스찬의 애인이 되기로 한다. 얼마 후 세바스찬의 집에 초대받은 알리샤는 세바스찬의 어머니와 냉정하고 잔혹한 세바스찬의 동료들을 만난다. 세바스찬 가족과 경마장에 나오게 된 알리샤는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데블린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면서 알리샤는 감정에 복받치고 만다. 상황을 목격한 세바스찬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고 데블린에게는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알리샤는 신경쓸만한 일이 아니라고 둘러대지만 세바스찬은 그것을 증명해보이라며 결혼을 요구한다. 미국 정부기관 측이 결혼을 원하는 가운데, 알리샤는 데블린의 의향을 살피고, 데블린은 알리샤의 의향을 살피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에게 확신을 갖지 못한다. 알리샤는 세바스찬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알리샤는 열쇠를 얻어내 집안 곳곳을 뒤지다가 지하 와인창고의 열쇠는 세바스찬이 따로 보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블린은 알리샤에게 본인이 직접 살펴볼 테니 핑계를 만들어 파티를 열고 자신을 초대하라고 한다.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세바스찬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과시할 기회를 주어 안심시키고, 어떻게든 열쇠를 구해두라 한다. 알리샤는 파티 직전에 열쇠를 손에 넣는다. 술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알리샤와 데블린은 창고를 뒤지다가 실수로 깨트린 와인병에서 우라늄 광석을 발견한다. 술을 가지러 내려온 세바스찬은 지하실에 단둘이 있는 알리샤와 데블린을 목격한다. 데블린은 알리샤를 끌어안고 키스한다. 이 일을 밀회로 오해했던 세바스찬은 열쇠의 행방을 알아차리고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세바스찬은 처음부터 알리샤와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던 어머니에게 알리샤가 미국첩보원임을 알리고 도움을 청한다. 세바스찬과 어머니는 알리샤를 서서히 독살하기로 하고 알리샤가 마시는 커피에 독을 탄다. 점점 병약해져 가는 알리샤는 데블린이 스페인으로 전근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알리샤는 데블린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만, 데블린은 좀처럼 자기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데블린이 좋지 않은 안색에 대해 묻자 알리샤는 숙취때문이라며 그를 밀어내고는 작별인사를 남긴다. 더욱더 병약해진 알리샤에게 세바스찬의 동료 앤더슨 박사가 여행을 권한다. 우라늄 지역이 언급되자 예민해진 세바스찬은 선의의 제안임에도 앤더슨 박사의 말을 가로막는다. 세바스찬과 그의 어머니는 알리샤의 커피잔을 든 앤더슨 박사의 혼동을 과도하게 바로잡는다. 알리샤는 이들의 음모를 알아차렸음에도 심리적 충격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만다. 알리샤가 몇일간 접선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데블린은 알리샤의 지난 모습이 심상치 않았음을 깨닫고 세바스찬의 집을 찾아간다. 세바스찬이 동료들과 최근에 감지된 위기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 데블린은 알리샤가 쓰러져 있는 방으로가 그간의 일을 듣는다. 데블린은 드디어 사랑을 고백하고 알리샤를 일으켜 데리고 나간다. 세바스찬은 동료들에게 이 상황을 들켜 곤경에 처한다. 데블린과 알리샤는 차를 타고 떠나고, 세바스찬은 죽음의 계단을 오른다.

  <오명> | 알프레드 히치콕 | 1946


히치콕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전성기 시기, 20세기 초,중반의 감독이지만 한국에서도 ‘서스펜스의 거장’이라는 칭호로 아직까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감독이다. 히치콕과 그의 작품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필진들을 통해 재평가를 받은 뒤부터, 여러 연구자들의 텍스트가 되어 한때는 주류의 흐름에 속하기도 했고, 장르영화와 후대 감독들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히치콕의 영화들은 윤리 혹은 관습 위에서 아슬아슬한 게임을 벌이곤 하는데, 한편으로는 그것을 조롱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비극의 끄트머리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즉 히치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허약하고 위태롭게 서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오명>은 스파이물의 외형을 띈 멜로드라마로 분류된다. <오명>을 스파이물로 본다면 국가 이데올로기를 끌어올 수 있을 테고, 멜로드라마로 본다면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을 지닌 어떤 개인들의 이야기로 따라갈 수 있겠다. <오명>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샹들리에에서 시작해 알리샤의 손에 들린 열쇠에서 끝나는 트랙 샷이다. 이 장면은 롱 샷에서 시작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오명>은 의미심장한 클로즈업들이 영화를 채우고 있는, 클로즈업이 부각되는 영화다. 반면 <오명>의 원제는 ‘Notorious'다. 클로즈업이 주관적이고 밀착된 시점이라면 notorious-오명은 집단적이고 대상화된 시점이다. 결국 <오명>은 이 두 가지가 충돌하는 영화인 셈이다. 스파이물과 멜로드라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세계에는 알리샤를 옭아매고 있는 오명들이 떠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과 사건의 양상들을 클로즈업을 통해 밀착해서 보게 되고, 거기서 생겨나는 감정과 정서에 집중하게 된다.

알리샤는 편견과 국가 이데올로기에 주체성이 희생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알리샤가 겪는 비참한 일들은 사실 데블린의 말 몇 마디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에서 알리샤가 하는 중요한 결정들은 사실 데블린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적 행위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스스로가 그것을 바보 같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이것이 단지 알리샤 만의 일일까? 히치콕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왜 우리는 좌절하고 무너져가는 동안에도 기어이 자기 의지를 꺾지 않으려 할까? 어째서? 바보같이. □

[필자소개] 조민석
몇 편의 장편 작업에 참여했다.
참여작: <고양이가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