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ACT! 86호 리뷰] 이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탐욕의 제국>(홍리경, 2013)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1일 현재 포털사이트에 “삼성 반도체”라고 검색어를 입력하면 주로 두 가지 갈래의 기사가 검색된다. 하나는 삼성 반도체가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사상최대의 실적과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삼성 반도체 생산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 2009년 세상을 떠난 고 김경미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대상으로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근로복지공단은 이 재판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홍리경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탐욕의 제국>은 삼성이라는 거대한 공룡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는 어느 여자 고등학교의 졸업식에서 시작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조금 더 멋을 내기 위해 노력했던 소녀들은 눈만 겨우 내어놓을 수 있는 방진복을 입고 생산라인에 서 있다. 마치 군대 막사를 연상시키는 기숙사와 훈련장에서 그들은 이른바 “생산역군”으로 살아간다. “세계일류”기업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일하던 그들은 원인모를 질병을 앓게 되고 그들의 질병에 대해 회사도, 근로복지공단도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노무사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고 함께 일했던 노동자들의 증언을 모아 재판에 응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어려워 보인다.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이 고용한 변호사들과 함께 재판에 응하고 법원의 판결이 나온다 하더라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장과 본사 앞에서 시위하는 것뿐이지만 합법적인 1인 시위 역시 “회장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끌려나기 일수다. 국회에 출석한 회사의 부사장은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상투적인 입장을 반복하지만 그 현장에 있는 대화의 대상에게는 대답은 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영화 속 노동자들은 하나 둘씩 목숨을 잃고 쇠약해져만 가지만 이들의 투쟁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희생된 노동자들의 가족들은 그 투쟁과정에서 연대하며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영화는 현재 진행형의 상태로 마무리 된다. 그들은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죽은 노동자와 투병중인 노동자의 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것은 마치 어떠한 결말을 예상시키는 것 같아서 슬프지만,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고 오히려 희망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에게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 탐욕의 제국 | 홍리경 | 2013


이 영화에서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지점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타지에 대한 고발이다. 영화의 중요한 순간을 지날 때마다 반복되는 것은 항만에 야적되어 수출을 기다리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수없이 되뇌어지고 학습되었던 <수출입국>, <작지만 강한 나라>의 상징인 그 컨테이너 박스들은 우리의 경제를 끌고 가는 견인차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온다. 하지만 그 옆을 지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과 이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그것의 스펙터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컨테이너 안에 포함된 “수많은 우리”들의 희생을 떠올리게 되고, 과연 그것의 보상은 합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떨칠 수가 없다.
영화 안에서 증언하는 그 노동자들이 삼성이라는 기업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인식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 흡사하다. 최첨단 산업, 깨끗한 산업으로 알려진 반도체 공장에서 그들이 다루는 것은 납과 황산, 불산 등의 화학약품들이고 그러한 것은 특별한 보호 장구 없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증언하는 놀라움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놀라게 된다.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CCTV영상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미지다. 한국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TV 프로그램이나 교과서에서 자주 보아오던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CCTV영상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방진복 속에서 익명화된 그들은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의 소모품에 불과해 보인다. 또 하나의 가족을 외치는 기업은 자신의 “진짜 가족”인 노동자들을 폐기하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성실한 노동자들의 복지를 맡은 공단”은 분쟁이 발생하자 노동자들과는 대화조차 거부하고, 사용자들이 고용한 변호사들과 함께 재판에 서고,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법원에 판결에 항소를 결정한다. 관객은 이러한 판타지에서 깨어날 것과 삼성이라는 기업과 한국 사회에 대해 바라볼 것을 요구받는다.

▲ 탐욕의 제국 | 홍리경 | 2013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영화 초반 “그래도 남들 다 가는 곳에는 가 봐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카메라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짓던 한 노동자의 병은 점점 심각해진다. 그녀의 병실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그녀와 남편 그리고 동료들에게 다음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의 배웅 장면은 바로 그녀의 장례식 행렬로 이어진다. 모든 죽음에는 합당한 애도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 애도는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죽음의 행렬이 향한 곳은 그녀가 젊은 시절을 보냈고 병을 얻어 돌아왔던 반도체 공장이었다. 그곳에는 그녀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녀를 막아서는 것은 경찰과 그녀의 동료 노동자들이다. 결국 몸싸움이 벌어지고 카메라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승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녀가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합당한 애도가 이루어야 함을 관객들에게 외치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보여 지지 않는 것들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삼성이라는 탐욕스러운 제국은 찬란한 마크를 빛내며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지배당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피지배자들에게 그 제국을 영속시키고 있는 것은 누구의 희생인지에 대해 눈뜰 것을 촉구한다. 이 영화가 현재 진행형의 상태로 마무리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공고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에서 삼성이라는 기업을 외면하고 용도폐기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을 쓰고/읽고 있는 컴퓨터 안에도 수많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희생이 담겨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 <탐욕의 제국>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변화는 삼성이 만들고 우리에게 형성된 판타지를 깨고 현실을 바라보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변화들이 제국을 붕괴시키고 제국이 아닌 기업의 입장에서 소모품이 아닌 노동자를 대접할 수 있는 날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 먼 길을 위한 첫 발걸음으로 이 영화가 더욱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필자소개] 이창민(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예술전문사과정)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예술전문사과정에 있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 <떠도는 섬>을 제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