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ACT! 87호 Me,Dear] 미디액트에서 일을 시작하며

'Me, Dear' 원고를 쓰게 되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미디액트에서 일한지 6개월 조금 넘은 시점에서 어떻게 미디액트에서 일을 하게 됐는지 과정과 고민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물론 나의 경험과 과정이 미디액트에 일을 하게 된 것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디액트에서 일하는 것 역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고민의 여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가 처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3년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연을 맺은 선배들의 제안에 난생 처음 철거촌을 가보았고, 황폐한 동네의 풍경과 '골리앗'의 우악스러움이 마냥 신기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철거촌에 있는 아이들과 공부방을 진행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낮,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철거촌이 침탈을 당할지도 모르니 주변에 있는 사람은 빨리 이곳으로 와달라는 문자였다. 마침 근처에 있던 나도 그 곳으로 향했다. 골리앗의 좁은 방 안에는 인근 학교에서 모인 내 또래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선배가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용역 깡패들이 좀 전에 치고 들어왔는데 또 올지도 모른다고, 만약 들어오면 우리가 가서 막거나 아니면 다시 오지 못하도록 우리가 나가서 먼저 위협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방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나는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은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다행히도 그날은 별다른 일은 없었고 우리는 용역사무소 앞에서 항의집회를 하고 해산을 했다.

방학 때 고향인 대구집에 내려온 나는 우연히 저녁 뉴스를 통해서 그 철거촌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알던 곳과는 무척 달랐다. 열악한 화질의 뉴스자료화면을 통해서 보이는 그 장면은 매우 생경했다. 마치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컨테이너 벽면 사이에서 마스크를 쓴 어떤 남자가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가 사라졌고 그 남자가 든 물건에서는 화약소리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뉴스에서는 그것을 사제총(개인이 만든 총기구)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마도 그 남자는 내가 철거촌을 갈 때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인사하던 누군가였을 것이다. 뉴스는 그들이 왜 골리앗에 올랐는지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 없이 오로지 사제총을 쐈느냐 아니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그렇게 재현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용역깡패의 침탈을 막기 위해 기다리던 그 방에서의 공포와.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은 TV뉴스의 생경함, 그리고 지금 나의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문득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의 문제를 다르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그리고 나는 얼마 후에 서울로 올라가서 학교를 휴학하고 다큐멘터리 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하거나 관련된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대한 공부를 하면할수록 단순히 작품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사회운동의 현장에 있기 보다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그 사안을 접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극장 안에서는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고, 삶이 있었다. 하지만 극장을 나온 내 주변은 너무나 치열한 스크린 안과는 다르게 너무나 조용했다. 그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큐멘터리가 타자를 아무리 잘 재현하더라도 거기에는 모종의 외설성과 폭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큐멘터리는 영화를 위해서 어쩌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를 통해서 그들을 잘 재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마침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문화 활동가들에게 제안을 받고 지역에 있는 문화 교육터에서 약 2년간을 상근 활동가로 일했다.

인천에서의 활동은 재밌었다. 미디어 교사로 일하면서 지역의 아이들과 요리도 같이 해먹고, 동네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해보는 등등.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을 지켜보며 자신감이 없어졌고 활동을 그만두기로 했다. 너무나 열악한 아이들의 생활환경을 보면서, 그 아이들에게는 미디어교육보다도 일단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군대를 가려고 인천에서의 활동을 정리한 마지막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약 6개월을 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영상이론과로 지원을 했고, 입학해서 공부만 하다가 우연히 한예종 사태라는 일이 터지면서 이를 계기로 학교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영상원 학생회, 지역-문화-예술 운동 동아리인 돌곶이포럼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졸업할 시기가 될 때 즈음 진로를 선택해야할 시간이 왔다. 여러 가지 활동과 고민은 많이 했지만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졸업논문도 못 써서 논문 쓰는 겸 고민한다는 겸 집에서 빌빌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바로 모아놓은 돈은 다 떨어지고, 돈은 벌어야하는데 30 나이에 편의점 알바는 정말 하기 싫고. 조금이라도 관심영역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미디액트에서 일하는 은정누나에게 사람을 구한다는 연락을 받고 이렇게 지금까지 미디액트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하는 중에도 고민은 계속된다. 미디어 운동의 핵심 키워드였던 퍼블릭 액세스 개념이 지금 시대에 여전히 진보적 미디어운동 전략으로 유효한지. 지금 미디액트가 하고 있는 서울시의 마을미디어 지원 사업이 단지 미디액트의 생존전략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망을 가져올 수 있을지. 미디액트가 광화문 시절 가졌던 미디어 교육을 통한 사회운동과의 연계 - 이주노동자 미디어교육, 장애인 미디어교육 - 을 어떻게 다시금 찾을 수 있을지 등등.

학교 다닐 때 미디어 운동에 대해서 고민할 때 때때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던 [ACT!]를 이제는 내가 함께 꾸려가게 되었다. 내가 만드는 [ACT!]가 미디어운동을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길라잡이가 될 수 있을까. 당장 명확한 전망을 제시할 수는 없어도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ACT!]가 되면 좋겠다.

▲ 2014년 첫 번째 ACT! 편집회의
태그

일을 시작하며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주현(미디액트)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