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ㅣ03월ㅣ 일터다시보기] 보고싶은 아저씨, 샤킬

보고싶은 아저씨, 샤킬...
- 민주노총 경기본부/경기법률원 이종란

‘일터 다시보기’ 원고청탁을 미리부터 받았으나 사실, 대다수가 그렇듯이 글쓰기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으로 선뜻 자판에 손이 가지 않다가 마감을 하루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주제는 진작 정해놓고는...

2005년 7월 일터에 “이주노동자들, 다시 명동성당에 서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 이혜은)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는 낯익은 두 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이주노조 초대 위원장인 방글라데시 출신 아노아르 위원장과 네팔 출신 까지만 사무국장이다.... 그리고 그 기사에는 없지만 그들과 함께 떠오르는 ‘샤킬’ 동지가 있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을 했던 그래서 심한 옥살이를 하고 강제추방을 당한 아노아르 위원장에 대한 나의 기억은 거의 대부분이 신문지상과 잠깐의 집회에서가 전부이나, 까지만과 샤킬, 특히 방글라데시 출신 샤킬 아저씨에 대한 기억은 그가 떠난지 1년반이 넘도록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40대 초반의 샤킬 아저씨는 매우 똑똑했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체불임금이 있는 방글라데시인들을 데려와서 우리 사무실 (민주노총 경기법률원)에서 상담을 시켰다. 사실은 직접 데리고 오는 경우 말고도 그가 미리 상담을 하고 서류만 건네주는 경우도 많았다. (단속 때문에 수원역 근처 민주노총 사무실을 오는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이주노동자들은 떼인돈이 없다면 이상할 정도로 거의 대부분 체불임금의 고통을 당하는데 그런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샤킬을 아는건 큰 행운이다.

어쨌든 그가 고향 사람인 방글라데시인들을 직접 사무실에 데리고 오면 그는 유창한 한국말과 방글라데시어로 통역을 해 주고 또 때론 옆에서 체불임금 계산과정을 지켜보면서 “노무사님 에잇 이것 빠졌잖아요”라고 익살스런 웃음과 선생님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었다. 샤킬은 사실 노무사 자격증만 없다 뿐이지 우리 중 누구보다 체불임금 계산에 능통했다. 그런 샤킬 때문에 가까운 수원노동부 말고도 수원에서 2시간 거리의 의정부 노동부를 수십번은 왔다갔다 했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온지 15년이나 된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한마디로 출입국 단속반의 눈에 걸리면 즉시 추방당하는 너무도 불안한 처지였었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아니 아무리 체불임금 상담이 중요하다고 해도 ‘불법’(?) 신분에 이렇게 돌아다니면 무섭지 않아요?”했더니 그는 속말을 털어놓았다.

“수원역에서 민주노총 경기법률원까지 10분이면 오겠지만 저는 옆길로 돌아서 1시간만에 와요. 마음속 긴장감으로 인한 시간까지 포함하면 여기 한번 오는데 하루종일 걸리는 느낌이에요. 심장 쫄아요....”

완전 뒷통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와 맨날 사무실에서 편하게 상담하고 의정부 노동부까지 가는게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그런 그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체불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심장을 졸이며 우리 사무실을 들락거린 것이다.

정부의 단속추방 때문에 그는 16년이나 살았던 제 2의 고향 한국을 작년 여름에 떠나 지금은 방글라데시에 가 있다. 이주노조를 통해 간간히 그의 소식을 들었으나 “그가 고향에서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다.“고 하는 안타까운 소식만 들려왔다. 그러던 중 최근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아직도 한국말 솜씨 그대로네요?”라고 했더니 그는 “아니,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까먹으면 어떡해요? 하하” 라고 했다. 왠지 코끗 찡해져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가 쫓겨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우리들 곁에서 한국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고 한국의 노동운동에 대해 (심지어 사소로운 야사에 대한 것 까지) 함께 토론하고 술한잔 하는 친구이자 동지로서 함께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와 친구가 되니,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친구처럼 여겨졌고 가까워졌다.
죄도 한 번 안 짓고 보호소에 감금당하고, 결국 추방당하는 서러움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국적과 피부색 때문에 차별하고 멸시를 주는 편견이 싫었다.
국적과 피부색은 달라도 우리는 같은 노동자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사킬을 비롯한 내가 만나본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 감사하다.

한번은 내가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 선전물을 수원역 앞에서 돌리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가 건네준 선전물을 받아보더니 곧 구겨서 그걸 내 얼굴에 던지면서 “너도 외국애냐?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아마 나를 이주노동자로 착각하고 거친 푸대접을 한 것이다. 만약 그 아주머니 분에게도 샤킬과 같은 친구가 있었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이주노조는 380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난 2005년 4월 24일 창립된 이후, 그간 노조간부들이 싹쓸이 추방당하는 시련을 몇 차례 겪으면서도 여전히 건제하다. 지금 이주노조의 위원장은 필리핀 출신의 여성노동자 '미셸‘이다. 다행히 그는 미등록 신분은 아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마세요!”라는 구호를 외치며 노동법조차 적용안되었던 악명높은 ‘산업연수생 제도’에 맞서 이주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이래로 끈질긴 투쟁의 결실은 2003년 고용허가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시켰으나 이 제도는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의 직장이동을 금지하고, 단기체류(최대3년만 가능)만 허용하는 문제속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고용허가제 도입과 동시에 폐지를 주장하는 투쟁을 벌였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고용허가제 폐지와 노동허가제 쟁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구호를 외치고 있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욱 악날하게 이명박 정부는 싹쓸이 추방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또 한국인 노동자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 (그래서 늘 구인란에 허덕이는 영세한 공장들에)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식으로 잘못된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그들의 실정을 전가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조금씩 달라지는게 있다면 한국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7년 금속노조 대구지부 삼우정밀지회에서 최초로 이주노동자를 조직하고 유니온샵을 쟁취한 이래 금속노조 안에서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인 노조가 세 곳으로 늘어났다.

‘금속노조 대구지부 삼우정밀지회’의 뒤를 이어 2009년 1월 경남 ‘마창지역 금속지회 보그워너씨에스 현장위원회’가 이주노동자 고용을 지키기 위해 파업까지 벌여 이주노동자 조합원 조직화에 성공했다. 그리고 12월 금속노조 경주지부 영진기업지회가 베트남과 버마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했다. 금속노조 대의원 중에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도 있다.

이 세 곳의 노조는 모두 공통적으로 고용된 이주노동자들의 고용 보장을 명시한 단협을 체결했다. 이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이 노조들은 모두 사측과 강경하게 맞서 싸워야 했다. 또 내국인 조합원들을 설득하며 많은 토론을 했고, 동시에 이주노동자들에게 끈기있게 노조를 설명하고 함께하자고 호소했다.

결국, 희망은 우리안에 있다. 정부와 지배적인 언론들이 잘못된 편견을 심어주어도 우리 주변에 언제든지 있는 이주노동자들과 조금 더 가까이 가려하기만 한다면, 그들과 친구가 되기만 한다면 이주노동자, 한국인노동자 모두 하나되는 날, 노동해방된 사회가 좀 더 가까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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