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일터10년 5월-특집] 노동자・민중의 눈으로 돌아보는 광주민중항쟁

노동자・민중의 눈으로 돌아보는

광주민중항쟁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유 경 순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어 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광주민중항쟁의 상황을 표현한 '오월의 노래'이다. 1980년대 말 90년대 초 노동자들이 많이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노동자들은 이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다. 아니 모르는 것 같다. 광주민중항쟁은 잊혀 져 가고 있다. 노동자의 역사가 길어진 만큼 기억해야할 역사가 많아져서 일까. 아니면 옆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등 돌리고 있듯이 광주민중들의 ‘피어린’ 역사가 이제는 부담이 되서 애써 등 돌리고 있는 것일까.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었다. 30년이란 시간의 흐름만큼 노동운동도  변했다. 광주항쟁을 기억하며 재현하는 전투를 했던 시기가 있었다면, 기억 저 너머로 밀쳐둔 시기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노동자들은 광주민중항쟁을 어떻게 기억해야할까.

1980년 5월 광주항쟁에는 여러 명칭이 있다. 지배세력들은 ‘광주사태’, ‘폭동’이라 불렀고, 자유 민주주의세력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며, 노동운동세력은 ‘민중항쟁’으로 부른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러한 명칭의 차이는 그 사건을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거꾸로 누가 역사를 전취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1980년 5월 항쟁시기 세 계급의 의식을 현실에서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 계급이라고 한 것은 5월 항쟁에서 민중은 두 계급과 투쟁(전선)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신군부세력과 민중의 투쟁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항쟁 주체 내부에서 자유 민주주의세력과 민중세력 간의 항쟁방향을 둘러싼 대립 전선이었다.

이 글은 1980년 5월 항쟁은 민중항쟁이라는 시각으로, 민중이 어떻게 항쟁의 주체가 되어갔으며, 민중지도력은 어떻게 확보되었는가를 살펴보겠다. 이는 바로 두 개의 전선이 항쟁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1. 광주민중 항쟁의 성격

1979년 들어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YH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 일어났고 그를 기회로 삼아 정권은 야당 당수인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제위기에 따른 경제적 불안감과 위기의식이 쌓여 있던 부산과 마산의 민중들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부마항쟁은 학생시위에서 시작되어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고, 그 결과 권력내부의 균열을 일으켜 독재자 박정희는 10월 26일 부하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10・26사건은 지배체제의 정점에 있는 개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민중저항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직접적으로는 권력 내부의 ‘예방 혁명적 조치’였다. 그 결과 지배체제는 약화되었지만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독점자본은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 자본축적의 위기를 맞게 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통한 새로운 자본축적의 조건을 요구하였고, 민중은 분배구조의 개선 나아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지배권력 내부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12・12사태로 강경파가 승리하면서 신군부권력을 세워냈다.

 

                   ▲ 광주민중시위대

그러나 최고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마자 유신체제에 눌려있던 반독재세력과 노동자들은 거리로 떨쳐 나왔다. 1980년 ‘서울의 봄’과 3・4・5월의 노동자투쟁이 그것이다. 신군부세력은 반독재민주화투쟁과 노동자 저항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5월 15일 서울역에 최대 인원이 모인 집회가 해산되는 것을 계기로 신군부세력은 5월 17일 계엄령을 발포하여 민주화세력과 노동자계급을 본격적으로 제압하려 했다. 계엄령에 맞선 광주민중의 저항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여 그 본보기를 삼으려 했다.

 

이런 정세 속에 펼쳐진 광주민중항쟁은 한 지역의 민중항쟁이라는 성격을 뛰어넘어 자본가 계급과 군사독재권력에 대한 전체 민중의 항쟁이라는 대리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2. 항쟁의 발전과정과 두 개의 투쟁전선

처절한 ‘학살’과 ‘해방’이라는 양극단의 국면 속에서 전개된 5.18민중항쟁은 학생에서 노동자・민중 중심으로 주체가 변화해갔고, 투쟁 형태도 가두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변화해갔다. 지도부 역시 자유민주주의 세력에서 민중지도부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항쟁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항쟁의 시작과 시민들의 시위

5월 18일 전남대 앞에서 ‘5.17계엄선포’이후 최초로 학생들은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교 진입에 실패하자 거리로 나왔다. ‘김대중의 체포와 전두환의 쿠데타’소식에 충격 받은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거기에 시위학생들에 대해 야만적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되어 처음으로 충장로 파출소가 파괴되기도 했다. 오후 내내 수천 명의 시민들의 시위에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처참한 살육극인 ‘화려한 휴가’를 시작했다. 

                 ▲ 공수부대 _ 화려한 휴가

5월 19일,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MBC・KBS 등 진실보도를 외면한 방송사를 공격하였다. 오전부터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으로 바뀌면서 ‘수세에서 공세’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항쟁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가두방송을 통하여 민중들의 투쟁방향을 선도하는 모습이 나타났기도 했다. 바로 광주민중항쟁이 낳은 여성 대중 지도자 전옥주(당시 32세)는 가두 선무방송을 통해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그녀는 ‘아리랑’곡에 즉석에서 노랫말을 만들어 붙여 시민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시민 여러분  /  십리도 못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 꽃같이 어여쁜 우리 형제들은 / 무자비한 계엄군에 끌려서 죽음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 차량시위

또 다른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광주상황을 알리고 투쟁을 고양시키고자 운동세력이 선전물을 배포한 것이다. 선전물에서는 “우리의 적은 전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단당과 전두환 일파”임을 선언하고 그 적을 향한 싸움에 나서기 위해 “5월 20일 정오부터 계속해서 금남로로 총집결할 것”을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군부세력은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의 광주살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특전여단과 2개의 전투사단을 동원했다.


택시노동자의 진출과 무장투쟁

5월 20일, 오후 들어 십만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할머니, 술집아가씨들, 가게 점원, 학생, 회사원, 도우미, 요식업소 종업원 등’, 지방유지급에 속하는 고급관료와 자본가들을 제외한 전체 광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시민들과 계엄군은 격렬한 공방전을 거듭했으나, 아직 ‘맨손과 대검의 대결’이었다.

오후 3시쯤 시작된 ‘금남로 전투’는 투쟁의 질적 비약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계엄철폐’,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를 변화시킨 것은 운전기사들의 차량시위였다. 오후 7시쯤 트럭 4대, 시내버스 11대, 택시 200여대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경적을 울리면 금남로로 들어섰다. 전날 공수특전단에게 운전기사들이 폭행・살해당하자 흥분한 운전사들은 “우리도 싸워야 한다, 공수부대를 격퇴하기 위해 도청으로 가자”고 결의한 것이다. 택시부대의 등장으로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식칼, 낫 등을 들고 돌멩이를 던지며 차량을 따라 엄호하며 돌격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진출, 바로 그것이었다. 운전사들의 차량시위는 광주민중항쟁을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20일 밤을 지나면서 광주시내에서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방되고 있었다. 특히 노동청과 신역의 전투, 그리고 도청 앞의 심야의 공방전은 극도로 치열한 것이었다. 신역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발포를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돌멩이를 쥔 채 쓰러져갔다. 이날 밤 거리에는 ‘선언문’이 뿌려졌다.

무장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무장은 계엄군의 학살・만행・발포로 촉발된 생존을 위한 방어에서 시작하였지만, 상황을 발전시키려는 운동세력의 지하선전작업과 결합되어 진행되었다. 곧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 선전물은 ‘결전의 순간을 선언’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내 곳곳에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전투부대가 형성되고 지휘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쟁이 격렬하게 확대되자 시외로 통하는 교통・통신이 차단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새벽부터 광주시는 육지 속의 섬처럼 완전히 고립된 느낌이었다. 이미 계엄군의 ‘광주시 봉쇄고립화 전략’이 실행되고 있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애국가에 맞춰 일제히 총성이 터져 나왔다.

결국 민중은 총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계엄군을 토벌대로 내세운 신군부세력과의 무장투쟁을 벌여야 했다. 절박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강요였다. 광주민중은 주저 없이 교외로 진출했다. 화순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고, 나주, 화순 등지의 경찰서와 지서에서 카빈 소총 6백정, M1소총 2백점, 탄약 5만발 등을 노획했다. 장성, 영광 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노획된 무기들은 즉시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무장한 시민군’이 탄생한 것이다. 총을 손에 잡은 순간,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에게는 ‘혁명’의 순간이었다.

이 때 총을 든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술집웨이터, 일용품팔이 등으로 노동자・민중이었다. 무장군은 계엄군과 치열한 전투를 거쳐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퇴각시켰다. 드디어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 전역이 민중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되었다.


해방구 광주와 항쟁세력 내부의 대립

5월 22일에서 26일까지 광주는 시 외곽의 교도소와 군부대를 제외한 전 지역이 ‘해방지구’였다. 경찰서, 파출소, 언론기관이 파괴되고 시민군은 자체적으로 치안질서를 유지되기 시작했다. 민중의 자치가 시작된 것이다.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도청을 본부로 정했고 시민군들과 관련하여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지역방어활동을 펼쳤다.

 

 

▲ 시민군

22일 오후 변호사, 목사, 신부 같은 재야세력과 유지들을 포함해 15명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이하 ‘수습위’)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가 결정한 7가지의 요구사항은 “①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 말 것 ②연행자 전원석방 ③ 군의 과잉진압 인정 ④ 사후 보복금지 ⑤ 부상자, 사망자 전원에 대한 치료 및 보상 ⑥ 전일방송 즉시 재개 사실 보도 ⑦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요구사항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방지와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결정되었으나 지금까지 목숨을 내걸고 처절한 투쟁 끝에 광주를 해방시킨 민중들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는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 같은 요구는 들어있지 않았고, 대신 항복을 뜻하는 ‘무장해제’만이 명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민중봉기에 대한 배반의 징후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계엄당국은 허락하기를 거부했고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모인 민중들은 시민궐기 대회에 참여해 협상보고를 듣고 “굴욕적인 협상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운동세력은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채 수습위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지도부의 투항주의적 협상태도를 경계하면서 도청 내에 시급히 민중적 봉기지도부를 결성할 것을 역설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윤상원(노동운동가)은 박남선(골재 채취공)이 이끄는 시민군과 운동세력간의 연관성을 확보하고, 학생운동의 투쟁파를 견인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지하선전작업을 하던 학생, 노동자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투사회보』를 발간하여 봉기에 참여하는 민중들에게 올바른 행동지침을 제시하도록 지도했다.

5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도청 앞 광장에서 ‘제1차 민주수호 범국민궐기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민중의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인 ‘민중 자치’의 한 과정이었다. 민중들은 대회를 통해 연대감을 확인하고 행동의 통일성을 확보해 낼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한 노동자가 직접 작성한 ‘광주애국시민에게’라는 다음의 글을 낭독하였다.

 

▲ 충정작전

“저는 광주 공단에 근무하는 노동자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우리 부모형제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광주시를 정상가동 해가면서 새로 조직된 우리 광주시 민병대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의 권리를 찾고 원수를 갚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5월 24일 투항파의 무장해제 시도는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파와의 투쟁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시내 변두리인 지원동, 소태동, 학운동, 방림동 쪽에서는 끊임없이 총성이 들려오고, 계엄사는 1차로 이날 낮 12시까지 2차로 저녁 6시까지 무기 반납을 요구하면서 시민군 내부의 노선분열과 이탈을 촉구하고 있었다.       

수습위는 시민궐기대회를 반대하면서 한편으로 시 외곽 지역에서 계엄군과 대치중이던 시민군의 무장해제를 촉구하면서 그때까지 회수된 무기의 반납을 시도했으나 투쟁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수습위 가운데 ‘재야인사들’은 민중항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무장 대치는 유혈사태만을 자초할 뿐이므로 일단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의 사과를 받아내자”는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유지급’인사들은 민중항쟁 자체를 불법적인 것을 간주하고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는 것은 폭도행위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입장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본질은 ‘무장투쟁 국면에서의 무장해제’라는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으로 동일한 내용이었다.

한편 학생운동 세력도 투항파와 투쟁파가 대립하였으나 점차 후자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상원은 김종배(학생운동가)와 박남선을 투쟁노선으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25일 이후 민중적 봉기지도부의 핵심을 구성하게 된다.

 

민중지도부의 등장과 계엄군의 충정작전

25일에도 시민군의 무장해제와 거부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2차(24일)와 3차(25일)의 시민궐기대회를 거치면서 민중으로부터 그 노선의 정당성을 지지받은 투쟁파는 도청의 상황실을 장악하고 대학생 50여명을 조직하여 도청으로 진입시켜 학생경비대로 배치하는 등 통일적 지도부의 구축을 시도해 나갔다. 마침내 정치적 정당성과 물리적 기반을 확보한 투쟁파가 투항파를 물리치고 새로운 민중의 지도부로 등장하였다. 민중지도부는 학생운동가 중 일부 투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그동안 무장투쟁 국면에서 부상한 민중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로 개칭하였다.

지도부는 아래와 같은 <80만 광주 민주시민의 결의>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타협적 수습위와는 달리 계엄령해제, 전두환 처단, 민주정부 수립 등의 민중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1. 이번 사태의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가라.

2. 무력탄압만 계속 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3.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처단하라.

4. 구속 중 인 민주인사를 즉시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5.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 보도하지 말라.

6.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수립을 요구한다.

지도부는 무기반납을 중단하고 투쟁의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역할을 분담했으며, 도청 내부의 행정체계를 잡고 민중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했다. 이들은 신군부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는 광주 민중만의 무장투쟁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 민중들로 하여금 일정한 투쟁의 성과를 획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간을 벌면서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면서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갈망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광주를 사수하면서 일전을 불사한다는 것 이외에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는 현실이었다. 26일 마지막 시민궐기대회와 잇따른 시가행진에서의 “무기반납 결사반대, 싸움은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사정이 깔려 있었다.

한편 계엄군과 정부는 끊임없이 시민군 내부의 교란작전을 펴고 곧 무력진압을 시도할 것이라고 공포하면서 민중들의 불안과 이탈을 가속시켰다. 25일 아침 ‘독침사건’이 그 한 예이다. 계엄사령부는 “광주에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고 과격파의 무기 재탈취로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선전했다. 신군부세력은 ‘진압작전의 실행’을 결정했다. 5월 27일 0시 이후에 작전을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26일 새벽, 봉쇄병력이 시내로 압축 전진 배치되었다. 그러나 26일 밤에 이르기까지 민중 지도부는 계엄군의 최후의 진압작전에 대한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계엄군은 ‘충정작전’에 신속히 돌입하였다.

 

                 ▲ 시민궐기대회

계엄군 4천여 병력이 광주의 심장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민중의 군대는 어떤 수준이었던가. 도청에 기동타격대 8개조와 순찰대병력 약 100여명, 경비병력 약 50여명 그리고 비무장인원 80여 명 그리고 주위에 예비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27일 새벽 3시,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하여 광주공원과 도청을 비롯한 광주 전 지역을 장악하여 작전개시 4시간 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 했다. 도청의 벽과 공원의 거리에 민중전사들의 붉은 피를 뿌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투쟁은 그 열흘간의 역사의 막을 내렸다.

    

          ▲ 금남로의 살육

 

           3. 광주민중항쟁의 영향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의 성공적인 수행과 더불어 광주민중항쟁은 패배로 외형상 그 막을 내렸다. 신군부세력은 광주민중에 대한 무차별적인 충정작전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1980년대 이후 민중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이 이후 민중운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우선 신군부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민중학살 정권’이라는 붉은 낙인을 달고 다니면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나아가 민중운동세력은 항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투쟁의 대상이 국가권력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즉, 19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지향하는 정치적 민주주의 확보와 노동자들의 권리확보라는 운동이 갖는 한계를 깨닫고,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변혁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주체가 민중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는 한국전쟁이후 단절되었던 변혁운동의 이념이 민중항쟁을 매개로 민중의 이념으로 복원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1980년대 이후 노동자・민중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5월 항쟁에서 민중의 무장투쟁과 해방구에서 나타난 민중자치의 맹아가 나타났다. 이는 투쟁의 최고 형태인 민중의 무장문제를 부각시켜 무장투쟁을 통한 변혁운동의 경로를 상상할 수 있게 했다. 또 해방구 확보는 민중의 정치를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민중항쟁의 과정에서 자유 민주주의세력의 의식은 민중의 지향과 대립되고 실천에서 장애가 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1980년대 노동운동은 1970년대 사회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주화운동의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의 영향력을 차단시키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 이후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자유로운 민중공동체를 꿈꿀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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