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일터10년 5월-이달의 노래]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최도은이 쓰는 이달의 노래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민중가수 최도은 동지와 함께 노동자민중의 노래, 우리의 노래를 곱씹어보는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하는「이 달의 노래」코너를 통해 그간 투쟁의 힘을 다지며,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며 불러왔던 노래에 담긴 이야기들을 나누어봅시다.







민중가수 최 도 은




마다 오월이면 우리들 가슴을 적셔주는 이 말은 5·18광주항쟁시민군 대변인이었던 故윤상원님의 최후 발언 중 한 구절입니다. 윤상원님은 1950년 전남 광산 출신으로 전남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주택은행에 입사했으나 은행원의 자리를 포기하고 광주로 돌아와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 등이 만든 들불야학에서 활동했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죽고 난 후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선포했지만, 80년의 봄은 이 땅 민중들에게 민주화를 염원하는 소망의 꽃을 틔우는 또 다른 봄이었습니다. 유신치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은 청계피복, 사북동원탄좌 등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80년 1월부터 5월까지 511건의 쟁의를 일으켜 평균 25∼50%에 이르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개선, 어용노조퇴진 투쟁을 전개하였고 더불어 대학사회에서도 해직·제적 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복귀하면서 학원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드높았습니다.

주화 데모가 한창이던 80년 봄 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해 옥내·외 집회금지, 언론·출판·보도사전검열과 휴교령, 그리고 파업 및 태업 금지령을 내려 노동자와 학생의 손발을 묶고 대대적인 검거를 자행했습니다. 전남 광주일대에서는 ‘제7공수특전여단’이 5월 17일 밤을 기해 전남대와 조선대, 교육대 등에 배치되어 학생들을 연행하였고, 5월 18일 오전 10시경엔 전남대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려는 50여명의 학생을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을 이용해 잔인하게 테러하는 폭력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시위 초부터 강경 진압에 나선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시위대 주변의 군중들을 분노케 하였고 5월 18일 오후부터 시위는 학생시위를 넘어 광주시민의 항쟁으로 전화됐습니다.

러한 위기 상황에서 윤상원님은 몸을 숨기지 않고 계엄군에 맞서 체계적인 실천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활동가였습니다. 모든 언론이 침묵과 왜곡보도로 일관하는 상황에서 <투사회보>를 제작, 배포하여 광주시민의 눈과 귀, 발이 되었으며, 산발적으로 흩어진 항쟁 대열의 선두에서 시민군을 조직적으로 만들었으며, 최후까지 광주시민군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윤상원님은 도청에 남아 있던 여성과 고등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깁니다. 윤상원님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결사항전을 다짐한 150명의 시민군은 총을 들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으나, 탱크와 헬기로 무장한 계엄군이 도청건물 뒤편을 장악해 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복도로 나오던 윤상원님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서른 한해의 삶을 마감합니다.

주항쟁이 무참히 짓밟히고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1982년 2월 20일 정오 광주 망월동 묘지에선 故윤상원님과 故박기순님(전남대 사범대76학번으로 1977년 전남대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 발표를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자 연행교수 석방을 요구하며 3일간의 시위를 주도하여 강제휴학을 당한 뒤 노동현장에 위장취업을 한, 1세대 학출 활동가로 들불야학에서 노동야학운동을 전개하다 1978년 성탄절 새벽 연탄가스에 의해 운명)의 영혼결혼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원혼이 서린 영혼결혼식을 배경으로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가 만들어졌는데, <넋풀이>에 실린 마지막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 노래는 김종률씨가 작곡을 하였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 선생의 시에서 따온 구절을 각색해 만들어졌습니다. 백기완 선생의 시「묏 비나리」에서 따온 노랫말은 1979년 겨울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신 백 선생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는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의 현장을 남긴 글이었고, 이 노래를 작곡한 이는 전남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률씨인데, 이 사람은 1979년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란 노래로 은상을 탄 재주꾼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작곡자임이 밝혀진 이후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합니다.

광주 운암동에 있던 소설가 황석영씨의 집에서 비밀리에 카세트레코더를 이용해 녹음하여 전국으로 배포 된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를 통해 전두환 군부독재가 폭력과 권력을 이용해 차단하고 숨기려했던 광주민중의 무고한 죽음과 시민을 제물로 권력을 탈취한 전모를, 그리고 불의에 맞서 목숨을 던진 이름 없는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의 항쟁의 기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노둣돌이 되었고 역사가 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늘 이 시간 노동조합의 권리가 폭압에 의해 빼앗기고, 우리가 그간 확보한 노동권이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있지만 우리들이 걷는 이 길이 정의롭기에, 외롭고 어려울지라도 앞서서 싸우다 먼저 가신 오월 영령님들을 생각하며 담대하게 헤쳐 갔으면 하는 맘으로 오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이 달의 노래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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