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 5월-칼럼] 여성의 눈으로 본 '가족'과 '가정의 달'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가족? ‘창살 없는 감옥’ 또는 ‘이중노동’

                                                                      붉은몫소리 designfemi@jinbo.net   이황현아






사랑 12

 

 두 개의 달걀을 위한 그랜드 듀엣


                                         김승희


먼저 접시를 부수고

찻잔도 내던지고

냄비를 우그러뜨리고

밥통, 그 아까운 전기 밥통을 날려 던진다

칼을 던져

화장대 거울을 문갑을 장롱을

찍은 다음

유리창을 깨고

안방의 벽, 벽 네 벽을 두 팔로

흔들어 급기야 쓰러뜨리고 만다

천장이 무너지고

옥상이 내려앉는다

아슬아슬 걸린 지붕 사이로




지혈 붕대를 가슴에 감은 하늘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머리칼을 휘어잡으며

모가지를 누른다

심장이 헉헉 거칠게 펌프질을 해대고

백롬담이 다시 발화하고

후지 산이 흰 김을 내뿜고

베스비우스도 폼베이도

아득히 역사를 거슬러

활화산 활동을 기어이

다시 시작한다

아이들을 착착 접어 자궁 속에 넣는다

이제 지구에 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다 살해해 버렸다

만족스럽게 다 없앤 다음

뜨거운 용암 속에 허우적허우적

끌려들어 가면서

화산재가 펄펄 날려

흰 머리 눈썹으로 급속 쪼그라 늙은

서로의 얼굴을 아주 처음인 듯

물끄러미 서로 바라본다

여보

여보

인류와 문명의 잔혹한 잔해 위에 남은

최후의

아니 최초의

온몸에 금빛 용암을 칠하고 나타난

여와 남

그런 나날의 결혼과

나날의 재혼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가족? ‘창살 없는 감옥’ 또는 ‘이중노동’

 

여성의 시각에서 가정의 달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화두가 어렵다. 여성의 시각이란 뭐고, 가정의 달은 또 뭐란 말인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왠지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다. 정말 그런가? 여성의 눈에는 차별이 보이고 불평등이 보이고 배제가 보인다. 여성들이 억압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가족은 남성들이 이야기하듯 안식처가 될 수 없다. 남성들이 안식처라고 느끼는 그러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 여성들의 노력은 한도 끝도 없다. 많은 이들이 삶의 안식처라고 말하는 가족을 여성들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불렀고 ‘이중노동’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전자라고 말한 이를 전업주부라 생각할 수 있겠고, 후자라고 말한 이를 일하는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창살 없는 감옥이 암시하는 바를 나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가정이 어떤 연유로든 여성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있지만 벗어날 수 없는 장소임을 암시한다. 일하는 여성, 즉 여성노동자들은 밖에서 남성과 똑같이 일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대개 혼자 일을 도맡아 한다. 남성들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쉬겠다고 TV를 틀어놓고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여성들은 개수대에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부터 먼저 눈에 들어와 하는 수 없이 집안 이곳저곳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을 해나간다.

 

 

이렇게 평일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은 맞벌이 여성인 경우 2시간 38분이고 가족 보살피기까지 42분을 합하면 총 3시간 20분을 가사노동과 육아 등 돌봄노동에 소요한다(통계청, 2009년 생활시간조사 결과 참조). 그나마 이것이 5년 전과 비교해 8분이나 줄어든 시간이라니, 웃어야할지? 그렇다면 남성의 시간 구성은 어떨까? 맞벌이 부부의 남성인 경우 24분을 가사노동에 13분을 가족 보살피기에 할애해 총 37분을 쓰고 있다. 이 시간은 5년 전과 비교해 5분 늘었다.

이 역시 웃을 일일까? 하지만 비맞벌이 부부의 남성과 비교해보면 웃을 일이 아니라는 점을 금세 알 수 있다. 이들 남성은 19분을 가사노동에 20분을 가족 보살피기에 쓰고 있어 총 39분이다. 맞벌이 부부의 남성이 비맞벌이 부부의 남성에 비해 겨우 2분 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하고 있다니! 역시 놀랄 만한 결과다. 여성들이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을 하건 안 하건 남성들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시간에는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므로. 이 사회가 유지되게끔 해주는 노동인 재생산노동에서 남성의 기여도는 매우 낮다. 근대이래 여성들은 여성의 장소로 굳어져간 집에서 ‘모성성’과 ‘가정성’을 강화시켜왔으며, 그 결과 사회는 안정화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여성의 소외는 더욱 커졌다.


‘부부의 날’ 제정은 ‘가정의 달’ 강화책

가정의 달 5월. 누구나 다 아는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다. 그런데 5월 21일 하면, 좀 뻘쭘하다. 무슨 날이지? 아는 사람만 아는 날. 올해로 6회째를 맞는 법정기념일이다. 그래도 뭐지, 할 것이다. 정답은 부부의 날이다. 부부 두 사람(2)이 하나(1)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뜻에서 비롯됐다. 이 날의 제정에는 예상하듯 종교계의 힘이 컸다. 미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는 이날을 우리도 만들어서 ‘위기의 가족’을 구출하자는 가상한(?) 뜻이 숨어있다. 끝 간 데 모르고 하락하는 출산율, 수직 상승하는 이혼율에, 세계 1위라는 자살률, 그리고 하숙집으로 전락한 우리의 가정을 지키자는 취지. 잘 알겠다. 그렇다고 부부의 날까지 만들어 그렇잖아도 머리 복잡한 5월을 더 심난하게 만들건 없잖나. 출산율, 이혼율, 자살률, 나아가 초고속 고령화까지. 이 사회가 해결할 문제를 왜 각 가정에 부담지우냔 말이다. 여성가장가구주가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를 차지하고, 한부모가정과 조손가정, 무엇보다 혼자 사는 1인가구가 전체의 20%로 급속히 증가하는 마당에 부부의 날이라니?    

 

‘부부의 날 위원회’가 부부대화법 캠페인을 벌이고, 가족의 구성원들을 돌보고 아끼느라 수고하는 상대 배우자를 이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히 생각해보자는 것으로 이미 파탄 난 가정을 되살릴 수는 없다.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이 부부들 각각 개인의 인성이 참을성이 없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려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질 않는가. 여전히 높은 한국의 이혼율이 어떤 사회구조적 원인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지를 봐야한다. 가부장제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또 시댁과의 관계 속에서 일상적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모성신화를 바탕으로 한 상상을 초월할 수준으로 기대되는 ‘엄마의 역할’이란 게 있다. 가정과 일이라는 이중부담 속에 처해진 일하는 여성의 불안정한 위치와 신자유주의체제 아래 명목뿐이던 가족임금조차 달성되지 않는 가운데 남성가장의 실직으로 더욱 더 어려워지는 가족의 생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문제로 어느 집이나 가사와 육아 문제는 공통적이다. 집에 아픈 사람이나 나이 드신 어른이 있다면 부가되는 돌봄노동이 있다. 그런데 이런 가사와 양육과 관련된 일들은 대개의 경우 여성의 일로 간주된다. 가정은 사회적 ‘성별노동분업’이 시작되는 곳이니까. 일을 하는 여성의 경우 남편과 똑같이 바깥일을 하면서도 집에 들어와서는 평균 2시간 이상 가사노동을 더 하게 되니 여성들의 불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업주부, 즉 가사노동자의 경우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노동강도란 엄청난 것이어서 집안일이란 게 왜 끝이 없다고 하잖나. 이들이 겪는 소외는 일하는 여성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외에 시댁과의 갈등, 배우자간 성적 갈등, 해체되는 사회복지 부분의 가족으로의 전가도 심각한 문제다.

 

남성육아휴직제도는 최근 ‘가족친화적’ 기업경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하지만, 2006년 기아자동차 생산직 노동자들 가운데 육아휴직을 신청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고, 그는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 수모를 겪어야했다고 했다. 2005년 합계출산율이 1.08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저출산-고령화대책은 국가의 사활을 건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50% 전후로 해서 관리하면서 경기를 감안, 여성노동력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사회서비스일자리확충정책’의 경우 여성의 사회서비스일자리는 보통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고용의 질만 떨어뜨릴 뿐이다. 이들에게 개악된 무기계약까지 적용된다면 영원한 비정규직이 되는 것이다. 국가는 여성의 염원이기도 한 가사, 간병, 산모, 보육, 방과후학교에 이르기까지 재생산노동-사회서비스를 철저히 시장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여성들 사이에 불평등과 갈등이 더욱 조장될 수밖에 없다.

 

부부의 날을 제정해 가정의 달을 강화하고 사회구조적 문제를 가족애로 환원하려는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족중심주의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포다. 가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자며 보수주의자들이 활용하는 것이 ‘가족중심주의’라면, 이 사회에서 누구나 (이성애)가족을 이루며 자본주의 재생산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가족이 잘 굴러가면 결국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는 셈. 한국에서 높은 청년실업률이 프랑스의 CPE투쟁처럼 터져 나오지 않는 것도 어쩌면 뭐든지 품어주는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서울 1945>와 영화 <우아한 세계>와 같은 작품 속에서 절절하게 그려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은 어떤가? 혼자서 라면 끓여 먹다 떨어져 있는 가족비디오 받아보고 열 받아 라면 그릇 뒤집어 엎어버리면서도 또다시 가족 생각에 눈물 훔치며 방바닥에 흩어진 라면 가닥 치우는 송강호라니!

 

부부의 날이 가진 문제는 남성+여성으로 구성되는 형태의 가족을 이상적인 가족으로 그리고 있는 것의 문제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들을 들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모성이데올로기, 가족이데올로기, 순결이데올로기, 이성애중심주의 등이다. ‘이성애중심주의’는 ‘정상가족담론’을 만들어냈고 이를 위배하는 것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있다. 흔히 결혼적령기를 말하는데, 이 시기를 넘었다 싶으면 주변에서 노처녀-노총각 소릴 듣는다. 개인이나 시민보다도 가족은 훨씬 큰 공감을 사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공익광고에 널리 활용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갖는 가족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지배적인 가족모델이 언제나 그랬던 것도 아니며, 모든 문화에 다 통용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의 모델은 19세기 부르주아 가족의 특정 유형을 반영하는 것이고, 특히 건강가족과 같은 발상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려는 지배자들의 잘못된 이분법이다. 2004년 정부에서는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른바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본격적으로 유포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족을 단위로 제정된 최초의 기본법이라 할 이 법에서 국가는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못 박았다. 그런데 이 법을 단순히 가족에 대한 사회적 위기감의 산물로만 파악해서는 한계가 있다. 보건복지부가 우려했던 바가 저출산보다는 이혼으로 유기되는 아동보호에 대한 재정적 부담이었다는 연구논문이 시사 하는 바가 있다. 더구나 정부는 다양한 가족 유형의 출현(1인가구 16%, 부부가구 15%, 한부모가구 10%, 여성가구주 22% 수준의 다양한 가족형태)을 가족의 변화로 보지 않고, 가족의 위기로 보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루는 기존 가족형태가 붕괴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출산과 이혼 증가를 국가 개입적 가족정책으로 해결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잘못됐다. 개인의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는 결코 국가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할 가족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이런 날들을 국가가 기념일로 정하는 이유는 결국 5월을 가정의 달로 만드는 것에 있다. 여전히 가족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존재한다. 여기서 가족에 의해 파생된 자연주의와 신비화를 피하는 용어로서 가족을 ‘가족-가구체계’(the family-household system)로 보는 바렛의 접근이 유효한데, 우리가 통상 가족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물질적 제도로서의 가구와 가족이데올로기의 복합체라는 것이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생산될 뿐 아니라 물질적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관계가 성립되고 있다. 가족-가구체계는 젠더 차이와 성적 억압이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인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각기 다른 임노동과 계급구조에 종사하게 하는 물적 관계다.

 

TV만 켜만 나오는 삼성‘가족’, 남성들이 즐겨 찾는 ‘가정식’ 백반, 이동통신사들은 ‘가족무제한’ 결합상품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렇다고 가족해체투쟁을 할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가족은 지금 이 시간에도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게른스하임이『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라고 했을 때, 다시 가족이 온다고 했다. 가족의 정서적 친밀감이라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족은 넘을 수 없는 벽인 셈이다. 하지만 대안적 가족형태의 실험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고, 가족 밖에서 친밀함이나 상호 깊은 우애와 협동을 공유하는 이들도 있다. 가족은 항상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점과 가족 안에서 남녀관계의 변혁이 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양손에 쥐고 간다면 우리도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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