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 5월-지금 지역에서는] 피해자 증언대회와 집단산재신청을 준비하며

반올림

 피해자 증언대회와 집단산재신청을 준비하며

 

                                                                                                                                           2010. 05. 13  반올림

 

1.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원회를 발족했을 때 삼성전자는 “10년 동안 2만 7천 명의 직원 중 6명의 백혈병 환자밖에 나오지 않았다”(경향신문), “암센터를 통해 자료 조사까지 해봤는데 실제 암발생률은 대한민국 평균에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다.”(시사포커스)라고 했습니다. 당시 대책위가 알음알음 소문과 제보를 통해 찾아낸 피해자가 여섯 명이었는데, 삼성은 대책위의 정보력이 암센터만큼의 수준이라고 주장했던 셈입니다.


  2008년 4월이 되자 삼성은 “11년 동안 8명이 백혈병 등에 걸린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그래도 “국내 백혈병 발병률보다 낮은 수치이기 때문에 작업환경과 관계가 없고 산재는 아니다”(경기매일)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희가 수집한 피해 제보의 숫자 또한 공교롭게도 여덟 명이었습니다.


  2008년 10월, 국정감사를 통해 사회의 관심이 모아질 무렵 삼성은 “벤젠을 사용하는 공정이 없으며, 방사선도 사용하지 않는다.”(뉴시스)라고 말했습니다. X선으로 제품을 검사하던 온양공장 노동자 박지연씨가 산재신청을 접수한 지 6개월이나 지났을 때조차 삼성은 방사선 사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3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백혈병 피해 노동자 박지연 씨의 병세가 위중해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뒤 마침내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삼성에서 보낸 직원들은 한 순간도 지연 씨 가족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산재 신청만 하지 않으면 치료비는 물론 낡은 집까지 고쳐주겠다며 회유했다가 2008년 4월 산재 신청을 접수하자 발길을 끊었던 그들이, 여전히 박지연 씨의 백혈병은 직업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들이, 다른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이 투병하다 세상을 떠날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정성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그러나 이런 모습은 박지연 씨와 가족들의 언론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한 밀착 감시에 불과했다는 것을 우리는 그 이후 삼성의 모습에서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수백 명의 추모서명이 줄을 잇고, 고인과 함께 일했던 퇴직 노동자들의 전화와 조문이 이어지자, 박지연 씨의 발인일 4월 2일 새벽, 삼성은 트위터를 통해 박지연 씨를 비롯한 삼성반도체 암 피해노동자들의 증언을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4월 6일에는 용인 기흥 사업장에서 <삼성 나노시티> 선포식을 개최하여 <꿈의 일터>를 만들겠다는 홍보성 기사로 언론을 도배했습니다.


  급기야 4월 15일에는 ‘그동안의 논란을 종식시키겠다’며 기흥공장을 언론에 공개하고, 기자들 앞에서 조수인 메모리담당 사장은 피해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재조사를 시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장에서 십년 간 근무했던 피해자 가족 단 1명의 동행 요구는 끝내 거부한 채, 난생 처음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기자들을 데리고 암 피해 노동자들이 일했던 곳과 전혀 상관없는 최신 공정을 단 30분 동안 둘러보는 것으로 지난 2년 반 동안 이어져온 논란을 종식시키겠다니, 참으로 효율적인 발상입니다. 반올림이 2007년 11월부터 요구해온 지 2년 5개월 만에, 산재보상을 신청했던 7명의 피해자들이 부실한 현장조사로 인해 모두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은 후에야 재조사를 하겠다니, 참으로 신속하고 시기 적절한 대답입니다. 대체 삼성은 언제까지 세상을 기만하려 하는 것입니까.

 

2.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암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1~2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의 조사로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조사해도 직업성 암의 업무 관련성을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뇌종양 환자 한혜경 씨는 납이 함유된 솔더크림을 사용하며 인쇄회로기판을 제조했지만, 그녀가 일했던 LCD공장은 아예 다른 업체로 설비가 팔려나가 공정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TCE를 맨손으로 만지며 반도체칩 마무리 공정에서 일했던 백혈병 환자 김옥이 씨가 기억하는 1990년대의 작업환경은 지금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옆의 도금공정에서 일하던 림프종 환자 송창호 씨의 작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일했던 다른 피해자들도 몇 년 사이에 공정설비가 바뀌었거나, 예전에는 없었던 환기 장치나 개인 보호구 등이 추가되었습니다.

 

                                 ▲ 사진 _ 다산인권센터 ‘오렌지가좋아’님

 

  이런 상황에서 발암물질 노출에 대한 근거는 과거 작업환경에 대한 기록, 유사 업종에 대한 연구 문헌, 그리고 당사자나 동료 노동자들의 진술을 통해 재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과거 작업환경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고 있거나, 기록이 있더라도 발암물질과 관련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으며, 고의로 숨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반도체 산업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구체적인 작업환경에 대한 문헌 정보는 국제적으로도 매우 빈약합니다. 전자산업은 18개월마다 제품의 성능을 2배씩 발전시킨다는 ‘무어의 법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도체 공정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며, 그에 따라 제조 설비는 물론 소위 ‘레시피’라고 부르는 화학물질 사용 양상도 수시로 변화합니다. 한마디로 문서를 통해서는 과거에 발암물질에 노출되었음을 입증할 수도, 노출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산보연과 근로복지공단은 과거 발암물질에 노출되었음을 입증할 수 없다는 해석만을 채택했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당사자와 동료 노동자들의 진술이었지만, 산보연과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진술에 대한 회사의 반박을 더 신뢰했습니다. 작업장에서 납땜 냄새가 하루 종일 진동했고, 고열로 납땜을 마친 회로기판을 검사하느라 얼굴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야 했다는 한혜경 씨와 동료의 진술보다는 국소배기장치가 잘 되어 있어 노출수준이 낮았다는 회사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바쁠 때는 반도체 구조 검사용 X선 발생장치를 끄지 않은 채 설비에 제품을 넣거나 빼고는 했다는 박지연 씨의 진술보다는, 문을 열면 X선 발생이 저절로 멈추므로 절대로 노출이 일어날 수 없다는 회사의 주장을 채택했습니다.


  작업환경 측정은 어떻습니까. 설비와 공정 기술이 변하고 그에 따라 사용 물질이 바뀐 공정, 예전에 없던 환기 장치가 생기고 개인 보호구가 지급된 상태에서 몇 시간 동안 공기 중 농도를 측정한 뒤 ‘허용기준 이하이므로 업무관련성이 낮다’라고 결론내렸습니다. 간헐적인 순간 고농도 노출은 아예 평가조차 되지 않으며, 실제 작업환경과 다르다는 당사자들의 주장은 묵살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노동자들의 경우 이런 문제제기조차 할 여지가 없습니다. 얼마 전 모 신문을 통해 삼성반도체 퇴직 엔지니어는 ‘외부에서 방문할 경우 통상 쓰던 화학물질을 아예 치우기도 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해 피해 당사자 혹은 추천인의 참여를 요구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열람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힘겨운 투쟁을 통해 허락받은 것은 고작 형식적인 입회가 전부였고, 그나마 조사 당시 생존해 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당사자만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회사 편에서 진행되는 작업환경 평가를 통해 발암물질을 찾아낼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유명화씨의 가족(사진_오렌지가좋아) 

 

3. 산재보험의 취지는 일하다 병들거나 다친 노동자들의 치료와 생계를 위해 신속하게 보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찾는다는 이유로 이토록 시간을 끌어야 한다면, 게다가 도저히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방식의 조사를 통해 결국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만다면, 과연 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 신속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암 환자는 몇이나 될까요.


  반올림의 요구에 회사와 정부가 줄곧 ‘증거를 내놔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은 이유는 증거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2년 이상 침묵해오던 삼성전자가 산재 신청자 7명 전원이 불승인 판정을 받은 뒤 갑자기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기흥공장 일부 라인을 언론에 공개하고, 작업환경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하겠다고 공언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투병 중이거나 투병 끝에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한 보상이며, 이들의 고통에 대한 삼성의 진정어린 사과입니다. 그것이 이 사회와 삼성이 이들을 산업쓰레기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유일한 길이며,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5월 13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던 5명의 노동자들이 집단 산재신청을 했다. 산재신청 전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진행된 피해자 증언대회에는 신청자 5명 중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빈혈을 얻어 9년째 투병중인, 유명화(29)씨의 가족이 참석했다. 유명화씨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대학이 아닌 삼성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가난이 죄”라며 딸이 언제 또 응급상태가 될지 몰라 가족과 떨어져 치료비를 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나온 유씨의 동생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을 내 언니의 지난 9년 인생도 가슴 아프지만 언니와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삼성에 대해 “당신의 가족, 이전에 가족이었던 내 언니가 여기,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10명에 5명쯤 병들고 죽게 된다면 그제서야 잘못을 인정할 것이냐”고 삼성을 규탄했다.
5월 13일 발표한 증언대회 및 집단 산재신청 자료집에 따르면 지금까지 삼성 전기와 삼성전자에서 직업병 피해 제보자는 45명이며 암에 걸린 노동자는 40명, 그 중 17명이 사망했다. 나머지 5명은 암은 아니지만 희귀질환에 걸렸거나 어린 자녀가 백혈병에 걸린 상태다. 삼성반도체에서만은 31명의 제보가 있었고 그 중 20명은 혈액암이며 이들 중 9명은 이미 사망했다. 
  정리 : 선전위원  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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