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 12월 이 달의 노래] 바위처럼

민중가수 최 도 은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니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나 그 투쟁을 지켜보며 맘 졸이는 노동자의 가족이 있습니다. 농성을 하고 있는 가족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반드시 이기길 바라며 촛불을 들고 집회에 나와 농성 노동자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가대위’의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지난 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 시간 울산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현장에서도 농성노동자 ‘가대위’의 노래가 된 ‘바위처럼’을 이 달의 노래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바위처럼’은 노래패 <희망의노래 꽃다지>에서 활동하던 유인혁씨가 92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유인혁씨는 연세대 사회사업학과 85학번으로 1학년 때 연세대 중앙 노래패인 ‘울림터’에 잠시 기웃 거리기만한 범생면서 조직 활동을 해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너무 힘이 들어서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사회사업학과노래패를 만들어 과노래패 활동을 하쉬었는데, 뜻하지 않게 학교 후배 이한열이 교문앞 집회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고 목숨을 잃는 비통한 소식을 접해 학교로 돌아 온 후 장례식 당일 문익환 목사님의 추도사를 들으며 다시 학생회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노래패 예울림>으로 이전을 하여 수많은 노동가요를 만들어 보급하던 대표적 노동가요 작곡가 유인혁은 현재 <노리단-자동차 바퀴의 휠이나, 음료수 페트병, 하수구용 파이프, 나무조각 등 온갖 폐품으로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연주하는 재활용 퍼포먼스그룹>에서 문화예술인들이 좋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길 바라는 사회적 기업의 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인혁씨가 ‘바위처럼’을 발표 했던 <꽃다지>는 우리나라 민중가요계를 대표하는 노래패입니다. <꽃다지>는 80년대 후반 서울구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던 <노동자노래단>과 연세대 중앙노래패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노래패 예울림>이 노래판굿 ‘꽃다지’등을 통해 함께 활동한 경험을 모아 92년 통합 해 만든 단체입니다.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 ‘사람이 태어나’ ‘바위처럼’ ‘세상을 바꾸자’등의 많은 노래가 ‘꽃다지’를 통해서 나왔고 오늘까지도 쉼 없이 그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1992년 늦가을 통합 6개월여 만인 <꽃다지>는 92년 겨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선싸움을 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꽃다지>의 입장이 “백선본(민중 후보 백기완)이냐? 범민주단일 후보(김대중)냐?”라는 실천 방향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새로이 만들어지고 많은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노래를 전하겠다는 조직이 만들어지자마자 둘로 갈라질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선거는 끝이 났고 모든 게 피폐해진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노래패의 결속력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유인혁씨는 <꽃다지>의 당시 대표인 조민하씨와 종로에 있는 헐리우드 극장 앞에서 술 한 잔 을 하면서 이후 어떻게 대처 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토로 하는 속에서 노래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고 작곡가의 기질은 하늘에서 내려 준다고 해야 하는 거 같습니다. 노래패 내부의 심각한 갈등은 우리운동진영 전체의 갈등이라고 판단한 유인혁씨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내용은 무겁고 진지하지만, 모두가 함께 웃고 떠들면서 보듬어 갈수 있는 형식을 취하자고 생각하며 “훅~”하고 한 번에 만든 노래가 ‘바위처럼’이라고 전합니다. 92년 당시 최고의 민중가요 희트곡이었던 ‘민들레처럼’ 같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는 상징적 이미지로 ‘바위처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지요. ‘바위처럼’을 만든 이후 이 노래가 바로 불려 진 것은 아닙니다.93년에 <희망의 노래 꽃다지2- 비합법 음반>를 만들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 방식으로 음반을 만들었는데, A면(앞면)과 B면(뒷면) 노래 선곡과 러닝타임 시간을 똑 같이 맞춰서 음반을 제작하는 게 제작자들의 고민 중의 하나였습니다. 테이프를 완성해야 하는데 딱 3분이 비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3분을 채우려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유인혁씨는 당시 대표인 조민하씨에게 “형!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라고 부탁 해 급하게 편곡을 하고 노래를 다듬어 김태언, 장희경의 목소리를 타고 ‘바위처럼’을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러닝타임 3분이 비는 바람에 음악노트에서 잠자고 있던 노래가 살아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바위처럼’은 기존의 전통적 노동가요의 형식인 ‘투쟁가요풍’도 아니고 ‘서정가요풍’도 아니어서 노래가 발표 된 이후 집회현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94년부터 대학 사회에서 새내기 신입생 환영 행사 등에서 반응이 올라오던 이 노래는 ‘전교조’ ‘병노련’ 등의 업종별 현장의 특성에 맞게 불리다가 96년 12월 26일 이후 폭발적으로 집회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로 자리하게 됩니다.
1996년 크리스마스 휴일을 보내고 이른 아침 출근을 위해 기상을 하던 노동자들은 아침 TV뉴스를 통해 국회에서 벌어진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과정을 보고 경악을 하게 됩니다. 12월 26일 새벽 6시 비상 소집된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국회 본 회의 장에서 7분 동안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노동법과 안기부법안을 날치기 처리하였습니다.
정리해고제를 법적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서울의 기아자동차 조합원들을 시작으로 명동성당 들머리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진행하는 한국 노동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말까지 30여 일 간 3,206개 노조에서 359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한 ‘96∼97총파업투쟁’은 정말 엄청난 파급력을 떨치며 이 땅 노동자들의 분노를 표출했고, 그 힘은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그러나 1997년 1월 18일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 총파업으로 위력을 발휘했던 ‘96~97총파업’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들의 ‘유연한 전술’이라는 이름아래 진행된 ‘수요파업’으로 전환 된 이후 투쟁의 열기는 가라앉았고, 결국 1997년 3월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 과정이 통과되어 오늘날 우리사회에 노동유연화를 전면화 시킨 안타까움을 지닌 투쟁으로 남게 됩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96년 겨울 ‘바위처럼’은 영하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모여들었던 노동자들의 언 몸을 녹이는 희망가였습니다. 4~50대 남성 노동자들까지 ‘바위처럼’을 부르는 시간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노래율동을 하며 추위에 언 몸을 풀면서 노동자의 기를 세우는 대표적 노동자의 노래였습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한노보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