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 12월 이러쿵 저러쿵] 희망

희 망 


                                                   한노보연 선전위원  최 종 배

 

 

언제부터인가 출근하는 것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없고, 안다고 할 수도 없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른 봄부터 서울 대방동 신사옥 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출근길에 보게 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같은 금속노조, 같은 지역에서 1천5백 일이 넘게 투쟁이 이어져 온 동안 단 한 번도 연대하지 않은 부끄러운 양심이 찔린 것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연대하지 못 했다.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함께 하는 동지도 없이 혼자서 가면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나서야 문화제 구경을 갔다. 연대라기 보다는 구경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싶어졌다. 선전물과 플래카드에서 그간의 투쟁경과를 좀 더 알게 되었고, 동시에 사측의 가식과 온갖 책동을 현장에서 목도(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하면서 자본이 이윤을 두고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인식할 수 있었다.

한 번 두 번 연대횟수가 더해지면서 기륭이라는 자본만이 아니라, 자본의 본질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노동자의 힘에 따라 그것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감춰지거나 포장되기도 할 뿐이라는 걸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도중에 그만 두는 일이 생기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의 연대가 1년 정도 지속되었다.
처음 연대했던 날, 그 썰렁함에 놀랐다. 대오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아니 왜 이리 사람이 없어?’

비정규 투쟁의 상징이라는 투쟁에 채 20명도 되지 않는 인원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20명이 기륭분회 조합원과 문화공연 동지들, 헌신적으로 기륭투쟁에 결합하는 동지들, 투쟁사업장의 연대대오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정당이나 학생동지들이 결합해 제법 훈훈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도 50명이 넘지 않았다. 사측의 도발과 이를 비호하는 경찰의 수작은 연대대오의 규모에 따라 달라졌다. 심지어 문화제 행사로 발생되는 소음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항의와 훈계조차 다르게 나타났다.

이를 지켜보며 느끼는 분노는 서울지역에 있다는 그 많은 노동조합, 내로라 하는 그 많은 간부와 활동가들의 무심함과 외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기륭의 동지들은 겉으로 섭섭함을 결코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 묵언이 그리고 노동을 천시하는 자본과 권력이 벼랑 끝까지 내모는 극단적인 사업장에서 온갖 폭력과 모욕에 시달리면서도 투쟁을 이어가는 것은 연대와 지지의 절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동자의 연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활동을 돌아보고 미래를 깊이 사색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장이 아니면 보고, 듣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소통과 이해가 있다. 그 자극은 새로운 힘을 샘솟게 한다. 일상을 떠나 여행을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 점검과 새로운 힘은 현장과 사업에 반영된다.

87년 대투쟁으로 노동자의 위력을 경험한 자본과 권력이 하나씩 올가미를 슬며시 걸어올 때 노동운동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IMF를 초래한 정권 이후 들어선 자유주의 정권들은 신자유주의 페달을 마구 밟아대며 노동자의 단결을 파괴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을 만연하게 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했다.
고용의 위협은 생존의 위협이고, 해고는 살인이지만 비정규직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잡담이나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 과로로 인해 잔업을 못 해도 해고, 관리자에게 밉보여도 해고. 해고라는 일상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경영위기가 아니라 기존 사업의 확장이나 새로운 사업을 위해서도 언제나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되었다. 경영상의 이유다.
정규직은 다를 것이라고 자위하지만, 과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결코 ‘다름’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임단협 때마다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5년7월 기륭전자 파견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자 기륭자본은 파견직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했다. 그로부터 1895일 동안 기륭의 투쟁대오는 수 많은 한계를 극복하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끈질기게 버텨냈다. 55일의 점거투쟁이 있었고, 조합원들의 몇 번에 걸친 단식이 있었고, 2008년 거의 타결까지 갔다 사측의 배신으로 무산된 교섭이 있었다.
기륭 사측은 법원의 불법파견 판정과 함께 벌금 몇 백 만원을 내고 모든 책임이 끝났다고 발뺌하며 거침 없이 전체 생산라인을 도급으로 전환했다. 기륭분회의 투쟁은 임금차별 개선과 고용안정이라는 노동조건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측의 일방적인 대량해고에 직면하면서 비정규직과 파견노동 철폐투쟁이 되었다.

 

기륭전자가 위치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지역의 머뭇거리던 자본들은  기륭자본의 행태를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역 생산직 노동자의 대다수가 직접고용이 아닌 파견직 비정규 고용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본가들이 마음대로 노동시장을 휘저어대는 불법이 만연한 상황에서 기륭분회는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 한다. 세계대공황의 파도가 식민지 조선을 휩쓸며 노동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던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라고 외치며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서 투쟁한 것과도 같다.

끈질기게 싸우면 타결될 수 있다는 결의에도 불구하고 투쟁은 힘겹게 진행됐다. 사회적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자본은 교섭조차 거부했다. 94일이라는 단식도 있었다. 투쟁하는 노동자라고 해서 단식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인가!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며 떠나는 조합원들을 붙잡지 못한 깊은 상처를 감싸 안고 투쟁을 계속한 힘은 노동의 과정에서, 또 투쟁의 과정에서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해 온 동지들을 떠날 수 없어서 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한 가족과도 같은 동료들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믿고 의지하고 상의하고 위로해 주는 동료들은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관계의 거의 전부였다.

"희망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미래가 과거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도 기륭동지들의 눈은 승리를 보고 있었으리라.
안 해 본 것이 없는 투쟁이 1895일 이어졌고, 기륭자본은 합의서 2장을 썼다. 기륭동지들과 가족들의 삶과 영혼을 틀어쥐고 숨통을 끊으려 하던 바로 그 손으로 종이 두 장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삶과 영혼의 파괴에 대한 기륭자본의 사과는 물론 없었다. 이 땅 노동자의 위력이 기륭자본에게 충분히 펼쳐지지 못해서...

언제부터인가 ‘현장동력’을 이야기한다. 결정적인 고비에 꼭 등장하는 것이 현장동력이다. 노동운동 진영의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어느 순간 방심하는 틈을 타 자본과 권력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급속히 유포시켰다. 노동자 대중이 지도부의 결단을 가장 바라는 순간에 지도부는 결단을 주저하고 미뤘다. 노동조합 간부들의 몸에 지방이 쌓여가는 만큼 노동자 대중의 믿음은 떨어져 갔다. ‘회사는 절대 믿지 않는다. 노동조합도 생존권을 지켜 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는 노동자 대중은 잔업에, 특근에, 철야로 몸을 혹사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불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선거에서 민주를 내세우는 후보를 지지했다가, 믿음을 배신당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실리’와 ‘합리’를 내세우는 후보를 선택하는 사례들이 늘어만 간다.
미래를 바꾸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려 한다면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배우고, 전파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본다.

 

是故로 學然後에 知不足하고 敎然後에 知困하니라.
이런 까닭으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막힘을 알게 된다.
知不足한 然後에 能自反也요, 知困然後에 能自强也니 故로 敎學相長也니라.
부족함을 안 연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막힘을 안 연후에 스스로 힘쓸 수 있으니,
故로 敎學相長也니라.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이 서로 도와서 학업을 증진시킨다.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에 나오는 글이다. 비정규직 1000만 시대에 비정규직 문제를 두고 결사투쟁을 외치다가도 정작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대충 해결하자. 대안이 없다. 어차피 안 된다."는 태도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타내는 현실에서 새겨볼 글이다.

기륭투쟁 승리보고대회에서 연대해 온 동지에게 민주노총 명예조합원으로 위촉한다는 위원장의 덕담이 있었다. 과연 그 명예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싶다. 80만 대오라는, 투쟁하는 조직이라는 민주노총이 기륭분회를 비롯한 장기투쟁동지들에게, 또 이 땅의 노동자에게 희망이 되고 있는가 묻고 싶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문자는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다. 피지배계급이 배우지 못하게 하려는 금기였다. 배우지 못하게 하고, 알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은 신분제가 없어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알리는 노력에 태만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것도 심하게 말하자면 크게 다를 것 없다. 활동가와 노동조합 간부는 노동자 대중과 투쟁의 역사에 빚진 존재이기도 하다.

현대차 비정규지회의 공장점거투쟁에 손해배상을 거론하며 투쟁의 불길을 잡으려는 거대자본의 치졸함을 보며, 기륭분회의 55일에 걸친 2005년 공장점거농성에 대해 사측이 청구한 5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대법원에 의해 기각된 사례가 구체적으로 노동자 대중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고 또 활용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민주노조운동과 금속노조 그리고 80만 거대조직 민주노총의 태만과 현실안주를 생각했다. 배임 아닌가!

 

4천만 원 이상을 받아가고, 복리후생도 정규직에 못지 않다는 소리를 내뱉는 정부와 자본의 선전의 진위를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과거에 안전판으로 생각하고 비정규직 투입을 용인했던 정규직 노동자들도 정규직 채용이 과거에 비해 3분의 1수준으로 떨어진 지금은 조금씩 생각이 바뀌는 듯하다. 정규직 노동자의 자녀들이라고 젊은 세대가 아닌 것은 아니다. 꿈이 없고 좌절만 있는 노동시장에 진입하기는 마찬가지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미래 또한 불안정하다. 비정규직과 하청업체를 착취하여 막대한 금전을 쌓은 자본이 많아진 기회 속에서 신규사업이나 인수합병을 진행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생기면, 또는 쌍용자동차 매각과정에서처럼 회계조작을 통해서라도 구조조정을 펼칠 대상에 정규직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은 각종 선거에 비정규 노동자 동지들이 참여할 수 있는지, 또 참여율은 어떻게 되는지를 점검해 보고 선거에서 의사를 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일하다 다쳐도 그냥 짤리는 현실에서 산재신청을 못하고 그냥 견디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산재법 개악을 막아낼 동력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현장이 희망이다. 현장사생하듯이 일주일에 한 번, 아니 보름에 한 번이라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자. 일이 과중하면 더욱 그렇게 하자. 지역마다 연대를 조직하여 변혁을 만들어 가자. 현장동력은 투쟁의 회피이유가 아니라, 투쟁의 동력이다. 에베레스트 산도 한 발 한 발 걸어야 오를 수 있다.

 

대규모 집회를 해 보고 싶었지만, 쪽수가 적어 못 했다는 기륭분회의 회고가 있었다.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의 연대가 5백 명씩

만 조직되었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투쟁이 이토록 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봄 같지 않게 눈발이 날리고 몹시 춥던 2001년 3월 말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경찰특공대에 몰려 올라간 옥상에서 느꼈던 절망을 벌써 잊지 않았을 것이다. “밑을 내려다 보니 온통 검정색 헬멧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대대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절망했다.” 비정규직의 투쟁을 그렇게 외롭게 만들었던 한국통신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곧바로 칼질이 이어졌다. 114와 110 업무를 담당하던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분사가 진행되었다. 본사를 점거하고 투쟁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도 남성노동자들의 연대 없이 쓸쓸히 막을 내렸다. 이어서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희망퇴직이 실시되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현장을 떠났다. 똑같은 현장에서 그들은 도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사랑이 두려운 것은 사랑이 깨지는 것보다도 사랑이 변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비정규직, 파견직 철폐투쟁의 상징이었고, 문제해결의 물꼬를 튼 기륭분회의 투쟁은 일단 타결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대규모 집회를 해 보고 싶었지만, 쪽수가 적어 못 했다는 기륭분회의 회고가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길 바란다. 그 비수는 자본과 권력이 쳐 놓은 장막을 찢어버리고 희망을 노동대중에게 드러내는 행동과 실천이다. 저들이 만든 법이라는 무기는 소수를 위한 것이고, 떼거리짓을 통해 만든 것이기에, 다른 것 아닌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으로 깨져야 한다. 떼법이라는 단어, 참 좋은 단어일 수도 있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든 지금, 투쟁하는 동지들을 기억하고 함께 하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연말이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고 희망이 된다는 루쉰의 글처럼 동지들의 사업계획에 연대의 계획이 포함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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