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1월 이달의 노래] 또 다시 앞으로

민중가수 최 도 은

가버린 세월을 탓하지 마라 지나간 청춘일랑 욕하지 마라
아직도 태양은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다
부딪혀 깨어지는 파도와 같이 산산이 부서져서 다시 모여라
어차피 우리는 한배의 운명이니까
자-저 쓰라린 세월도 기름 밥 눈칫밥의 나날도
자 또 다시 일어나 역사의 발맞추어 하나! 둘! 셋!
앞으로 또다시 앞으로 눈덩이 쇳덩이로 앞으로 굴러
끝내는 우리가 건설할 세상을 향해 앞으로
(1992년 김호철 곡)

‘또 다시 앞으로’는 1992년 ‘시작의 노래’ 테이프를 통해 발표되었고 작곡가 김호철님이 만들었습니다. ‘시작의 노래’ 테이프는 전국빈민협의회 문화국에서 만든 노래 테이프입니다. 빈민단체에서 빈민 노래테이프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만큼 빈민들의 조직화가 활발했다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국빈민협의회는 철거민과 노점상 그리고 일용건설노동자들이 연대해 만든 조직입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성화 봉송을 해야 하는데 도시미관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목동, 상계동, 사당동 지역의 판자촌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건설하려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이다, 올림픽이다, 하늘엔 조각구름이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을 서울의 모습을 꿈꿨던 사람들에게 닥친 현실은 너무도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십여 년을 살아 온 정든 집이 성화 봉송 때문에 하루아침에 헐리게 된다는 것은, 세계인을 위한 스포츠 축제 때문에 내가 알거지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허가 판잣집은, 동사무소의 문서상에는 주거지로 인정되어 있지만, 재산권은 보장되지 않는, 옥상 위의 집처럼 수 십 년간 거래되고 소유되어 왔던 것입니다. 아시안게임 때문에, 올림픽 때문에, 판잣집에 살던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살던 집을 빼앗긴 철거민들은 거리로 쫓겨나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한 개인의 철거민은 힘이 없이 쫓겨나야 했지만, 엄청난 규모의 철거가 자행되자 철거에 반대하고 함께 뭉쳐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나타났습니다.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철거민들의 싸움은 계속 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전투경찰을 동원해 철거민들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철거민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목동지역의 철거민들은 경인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싸움을 전개했고, 민정당사와 민주당사 점거, 등교거부 등 수많은 투쟁을 통해 마침내 철거민도 주거권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거권을 지키려는 도시 철거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철거민 조직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철거민들의 조직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86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노점상 단속이 심해졌습니다. 용역 깡패들의 노점 단속에 항의하던 노점상이 목숨을 던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노점상들의 처절한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힘없는 노점상들에게 돌아온 건 노점철거와 86아시안 게임을 진행하는 기간 앞, 뒤로 여러 달 동안 노점을 접어야 하는 궁핍한 삶 뿐이었습니다.
86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88올림픽을 앞두고 노태우 정권의 노점단속 강화 방침이 발표 됩니다. 86아시안게임 당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노점상들이 두 번은 당 할 수 없다며 떨쳐 일어났습니다. 1988년 6월 13일 노점상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의 노점상들이 서울 성균관대학교 교정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의 잠실을 비롯해 종로, 동대문 지역의 노점상들은 한 목소리로 노태우 정권의 노점단속에 맞서 싸웠습니다.

노점상들의 저항은 시민들의 여론을 끌어 모았고, 전국의 노점상들은 마침내 노태우 정권에게 노점단속 유보라는 성과를 얻어내게 되었습니다. 온 몸을 던져 맨몸으로 맞섰던 노점상들은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92년 우리사회의 소수자이고 약자였던 철거민과 노점상이 힘을 모아서 빈민연합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투쟁 속에서 조직이 만들어지고 투쟁 속에서 민중의 노래가 함께한 90년대 초반의 역동적 힘이 노래 ‘또 다시 앞으로’에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노래가 노동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시작의 노래' 테이프가 발표 된 후 2년여가 지난 1994년 여름이었습니다.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국가 경쟁력을 해친다며, 정부 산하 기관인 공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임금 억제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정부의 공기업 임금 3%인상 가이드라인 정책은 공기업 노동자들을 매우 분노케 하였습니다. 임금가이드라인이라는 직격탄을 맞은 서울지하철노동자와 부산지하철노동자들은 1주일만 열차를 멈추면 김영삼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을 박살낼 수 있다며 “열차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라며 투쟁을 조직했습니다. 94년 여름 전국 투쟁의 중심에 선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서울지하철노조, 부산지하철노조, 전국기관사협의회의 3사 공동투쟁협의회)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큰 힘을 발휘했고, 이후 한국통신노조 민주화 등 공기업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전지협 투쟁의 현장에서 매일 연대공연을 진행했는데 우연하게 선곡을 한 것이 '또 다시 앞으로'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폭발적으로 돌아와 노래를 부른 제가 오히려 큰 힘을 받곤 했습니다. 아마도 ‘또 다시 앞으로’가 노동자들에게 폭발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기존의 행진곡 풍 노동가요에 비해서 좀 여유 있고 힘찬 리듬감과 노랫말이 담고 있는 건설적인 내용이 고양된 대중 투쟁 속에서 현장 분위기와 맞아 떨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94년 여름의 투쟁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전국노동자들에게 확산된 ‘또 다시 앞으로’는 이후로도 오랜 동안 노동자 단결의 진군가 역할을 해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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