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9월|미디어비틀어보기] 달콤 쌉싸름한 영웅담

드라마 <시티헌터>-


한노보연 선전위원 푸우씨

MB정부 하에서 다양한 수준의 언론통제와 재갈 물리기가 계속되다 보니, 이와 관련된 웬만한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무뎌졌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중가요의 몇몇 가사를 문제삼아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최근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이 불러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바이브의 “술이야”라는 노래가 청소년들에게 술을 권장한다고 19금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은, 군사정권때 갖가지 이유로 금지곡을 만들어냈던, 그 때 그 시절로 회귀한 듯한 착각까지 줍니다. MB정부의 감수성은 정말, 쵝오!!!(오타가 아닙니다.ㅋㅋㅋ)
이런 상황이다 보니 광우병 문제를 보도한 ‘PD수첩’을 둘러싼 논란 이후에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속 시원히 쓰린 속을 긁어 주리라는 기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권력과 지배층에 대해 신랄한 문제제기를 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제작진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런데 최근 한 드라마가 이런 역할을 톡톡히 해내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MBC나 KBS가 아니라 정권의 눈치를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유명한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가 말이죠. ‘시사헌터’, ‘시티고발’ 등 드라마 제목을 패러디한 각종 유행을 만들고, ‘개념드라마’라는 칭송을 얻은 드라마였습니다. 무슨 드라마인지 궁금하시다구요? 바로 ‘시터헌터’입니다.

왜 개념드라마로 불리게 되었을까?
이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드라마 전반의 줄거리나 소재는 소위 ‘막장드라마’라고 불리어 온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청년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 그리고 복수가 주요한 테마이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드라마의 소재란 다 비슷비슷한가 봅니다. ㅋㅋㅋ)

(출처=시티헌터 sbs 홈페이지)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983년 북한의 버마 아웅산 폭파로 희생된 정부 고위 관료들에 대한 복수를 기획하는 5인회, 그리고 그들에 의해 북파되는 한국의 특수부대 요원들. 그들은 북에 잠입하여 북한의 군과 당 고위 간부들을 피살하고 돌아오는 도중, 남북 갈등을 심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남포 앞 바다에서 한국군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물론 주인공 이윤성(이민호 分)을 길러낸 한 명의 특수부대 요원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한국에 돌아옵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친구의 아들을 납치해 캄보디아 트라이앵글에서 게릴라들과 함께 마약과 무기 밀거래를 하면서 주인공을 자신의 아들로 무척이나 강하게 길러냅니다. 마치 살인병기처럼 무지막지하고 혹독하게 그를 훈련시키지요. 그리고 세월이 지나 장성한 아들에게 진실을 말해준다면서, 사실은 너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지배층의 희생양이고, 그들이 현재도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핵심부(현직 대통령,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 국회의원, 대학 이사장, 병원 이사장)에 있다면서 복수를 지시합니다. 이것이 드라마 1회의 내용이자, 전반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도입부인데, 딱 내용만 봐도 무지하게 심각하고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개념드라마라는 찬사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드라마가 개념드라마가 된 것은 별게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부당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직접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현실에서는 감히 어쩌지 못하는 지배층을 ‘시티헌터’라는 주인공이 농락하고 우롱하기 때문이지요. 만약 주인공이 복수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면, 아마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그저 그런 드라마, 무지하게 무게잡는 드라마로 홀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권선징악의 코드를 담고 있는 전형적인 드라마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사고에 대해 대놓고 얘기하고, 끼어들다 못해 현실적으로 ‘해결 불가’라고 느끼거나 오리무중 상태에 있는 문제들을 통쾌하게 해결해버리니, 말 그대로 개념드라마라고 지칭할 만했던 것입니다. 몇 년전부터 인기를 끌었던 영웅담 드라마인 ‘쾌도 홍길동’, ‘일지매’ 등이 권력과 지배층, 현실에 대한 비판을 은유적으로 했다면, 시티헌터는 최근의 이슈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었다는 것이 특히 남다르게 느껴진 게 아닐까 합니다.

뒷맛이 씁쓸한 초콜렛 같은


시티헌터는 사회적 논란과 이슈가 되었던 반값 등록금, 군납비리, 삼성반도체 백혈병, 의료민영화 등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종횡무진 뛰어다녔습니다. 주인공의 복수와 앞서 열거한 각종의 사안을 버무려 놓았으니 스토리가 너무 장황하기도 하고, 그래서 연결고리가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 주인공은 복수와 함께 이 문제들을 차근 차근 해결해 나갑니다.
다만, 전형적인 영웅이야기이니 만큼 ‘해결’ 이후에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문제를 빚어낸 구조와 시스템은 전혀 바뀌지 않고 여전히 단단하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반값등록금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당사자인 대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삭발 시위도 하지만 결국 문제 해결은 시티헌터의 몫이 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고액의 등록금을 재단 전입금으로 활용해 엄청난 부를 쌓아올리고 있는 사학자본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제기 하지만, 결국 주인공이 재단 이사장의 개인금고를 털어 대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걸로 ‘미션 완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작가의 상상력이 조금 더 나아가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인 것 같습니다. ‘시티헌터’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을 텐데, 사건 해결의 몫이 주인공만의 것이라고 탓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뒷맛이 씁쓸한 고급 초콜렛처럼, 아쉬움이 쉽게 가시지는 않습니다.

삼성백혈병을 직접적인 소재로 사용한 용기
복수를 위한 각종의 에피소드를 엮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던 시티헌터는 드라마 중반을 넘어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소재로 다루면서 ‘진짜 개념드라마’라는 찬사를 본격적으로 얻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작가와 제작진의 용기가 드라마의 마무리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응원과 격려가 시청자 게시판을 도배됩니다. 심지어는 ‘이제는 4대강도 소재로 다뤄달라!’는 웃지 못할 요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시티헌터 작가가 드라마 ‘대물’을 집필하다가 정치적 외압으로 초반에 교체되는 일이 알려지면서 더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는 이 드라마에서 한 화학공장에서 발생한 집단 백혈병 발병과 산재인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재연되는데, 섬뜩하고 냉혹한 현실을 ‘시티헌터’는 아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힘겹게 투병 중인 백혈병 환자에게 찾아와 산재 신청 포기를 종용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미끼로 합의금을 제시하는 모습은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이 증언대회에서 한 진술과 다르지 않습니다. 용역깡패를 동원해 산재인정 촉구 집회 참석자들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던 드라마 속 장면은,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던 삼성본관 앞 용역경비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드라마 속 사건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시티헌터가 공장에 잠입해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화학물질을 채취해 증거 확보를 돕고, 회장을 법정에 세웁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감히 이 문제를 드라마 속 소재로 삼고 시원히 비꼬았다는 것,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악행을 다 알고 있고, 이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 같은 이 통쾌함이란!


하지만 현실은... 지난 6월 23일 행정법원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이 업무와 연관이 있다’는 일부 승소 판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재은폐에 혈안이 되어있는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은 대형 로펌을 앞세워 항소에 나섰고, 삼성은 해외의 유명한 청부과학자들을 동원해 ‘문제없다’고 세상에 떠들며 이 문제를 덮는 데만 급급합니다.

대리만족이지만, 희열을 준 것에 감사!
영웅담이 인기를 끄는 것은 현실을 잊기 위한 대중들의 열망, 전복에 대한 상상이 반영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티헌터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시티헌터가 존재하지도 않고, 바랄수도 없다는 것이 살짝 아쉽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잠시나마 통쾌함과 희열을 줬다는 것! 그것으로 달콤했다가 쌉싸름해진 드라마의 뒷맛을 애써 감춰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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