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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입법만능주의와 경제주의의 문제

방송통신융합논의의 심화를 위하여


김평호 / 단국대학교 방송영상학부 교수 :: pykim@dankook.ac.kr

각종의 뉴미디어들이 앞다투어 도입되면서 이제는 ‘방송 통신 융합’(방통융합)이라는 제법 어려운 말도 우리 사회에서 매우 흔한 것이 되었다. 방통융합 관련 일간지 기사를 언론재단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해보면 그 이전 연도들에서는 100여건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보이지만, 2002년에는 212건으로 2001년보다 3배 정도, 2003년은 2002년의 약 2.5배, 2004년은 2003년의 3배 정도로 출현빈도가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 방송위원회,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등의 방송통신 담당 부처와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과 청와대 등이 ‘방송통신구조개편을 위한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방통융합 관련 법과 정부조직, 기구들의 개편논의가 이곳저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열리고 있다.

논의되고 있고 논의해야할 과제들이 많지만 지난 9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방통융합 관련 논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속화되어가는 방송통신 융합환경에 맞추어 어떻게 정부의 정책--진흥, 지원 및 각종 규제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기구와 법률, 즉 법제를 통합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방송통신 융합이 현실화되면서 방송통신 법제의 통합 요구는 이론의 측면에서나 현실의 측면에서 합리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또 기구조직 통합의 방식, 통합의 시기, 통합의 영역, 통합의 이념과 방송통신 규제의 원칙, 통합기구의 법률적 위상과 성격, 방송통신 법률체계의 통합/분리 등등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여러 가지로 논의가 나뉘어지지만 법제의 통합이라는 원칙에는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져있음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방통융합 환경의 조성=방통융합 법제로의 개편’이라는 등식 자체에 큰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법제통합의 이유와 근거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전제가 되면서 그 내용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융합에 따른 법제의 개편이 일종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대한 정책기술적 차원의 논의가 봇물을 이루면서 정작 논의의 출발점에 대한 조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는 논쟁을 위한 논쟁을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방통융합 법제로의 개편을 반대하는 논리를 펴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법제개편의 근거와 이유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봄으로써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지점은 없는지, 더 깊은 사고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는 융합법제로의 개편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적절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논자에 따라 약간의 내용차이는 드러나지만 ‘왜 방통융합 법제로의 개편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제시되는 근거와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미디어 법제’에 초점을 둔 입장이고 두 번째는 ‘미디어 산업’에 초점을 둔 입장으로, 방통융합 환경에서 전자가 주로 방송통신 관련 정책과 행정의 일관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방송통신 관련 산업의 성장과 발전을 보다 강조하는 입장이다.

미디어 법제론의 시각에서 방통법제의 통합이 필요한 이유는 현행 법제의 비현실성, 비효율성, 부처간 할거주의의 폐해 등이 제시되고 있으며 미디어 산업론의 시각에서는 현행 법제하에서는 융합환경으로 조성되고 있는 경제적 산업적 기회의 상실우려, 국가경쟁력의 저해, 정책원칙이나 이념, 부처간의 혼선으로 인한 불가예측성 등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입장의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서로 맞물려 있는 것으로 이 둘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가라기보다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논리적, 현실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에는 기술중심론에 입각한 ‘입법만능주의’와 ‘경제주의’라는 두 가지의 근본적 문제가 놓여있다. 방통법제는 빠르게 변화발전하는 정보기술에 비해 더딘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인 요소를 가지게 된다. 또 해외 주요국가의 법제개편이 나름대로의 역사적 경험과 정치문화, 행정적 전통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법제가 굳이 이들에 비해 후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물론 현행 법제에 업무영역의 중첩과 공백, 중복규제, 부처간의 갈등과 같은 정책의 비효율성을 강제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방통융합 환경변화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우리의 고질적인 관료적 행정문화가 오히려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방송통신 관련 산업은 지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폭발적인 비율로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해온 분야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이런 점에서 현행 법제가 관련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거나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거나, 관련 정책의 불가예측성이 문제라는 주장은 논리적인 개연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현실과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방송통신 산업의 관점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외형적인 성장에 치중하면서 정작 원천기술의 개발과 확보는 그에 따르지 못하는 기술정책의 심각한 불균형 상황이다. 예를 들면 방통융합형 매체로 우리나라에서 세계최초로 상용화하고 있다는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분야에서도 정작 방송장비, 단말기, 칩 시장 등은 외국업체에 거의 장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 나아가 지난 2004년 우리나라가 해외에 지불한 로열티는 2003년보다 18%이상 증가했으며 그 이유는 반도체 휴대폰 등 첨단 정보기술 산업분야에서 해외의 지적재산권을 활용하는 빈도가 커지면서 전체 로열티 지급액의 37%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방통법제의 개편은 행정문화의 개선과 사회발전이라는 목표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면 앞서 지적했듯이 법제개편 방안의 모색과 함께 핵심적 과제로 우리가 고민해야할 것은 고질적인 관료문화와 정보기술 정책의 기본틀에 대한 심각한 반성적 성찰과 개선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방통법제의 융합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며 바로 이 점을 입법만능주의와 경제주의적 논의는 놓치고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방통융합 법제로의 개편은 일종의 하드웨어 장치를 마련하는 것일 뿐이다. 모든 매체의 도입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방통융합에 따른 법제 개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는 하드웨어를 충실하게 채우고 견고하게 이끌 수 있는 ‘지혜’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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