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한 하청노동자의 죽음과 시(詩)(06년 11월호)

조성웅 ⎟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위원장, 노동자 시인


지난 10월27일 고 손창현 동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성ENG 총무를 찾아갔다. 그의 손에는 정말 마지막으로 의지하고픈 희망처럼 요추 염좌 완치 소견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추간판 탈출증, 허리디스크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통장에는 10여만 원의 잔고가 남아 있었다. 복직하려면 완치되었다는 담당의사의 각서를 받아오라고 했던 한성ENG 총무는 일언지하에 복직을 거부했다.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받은 130만 시간 무재해 포상은 한 하청노동자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근골격계 질환을 퇴행성으로 몰아 산재불승인을 남발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정책은 한 하청노동자의 목숨쯤이야 하찮은 것이었다.
한성ENG 총무 새끼한테 욕 한 마디 못하고 무기력하게 돌아서야 했던 그 심정, 뭐라고 표현할까? 다리는 맥이 풀려 후들거리고 손아귀의 힘줄은 분노로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붉은 단풍잎을 닮아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두 딸을 부산 처갓집으로 보내면서, 돌이 되지 않은 둘째 딸과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 딸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그는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던가? 사랑하는 아내의 따뜻한 체온을 어떻게 포기했단 말인가? 불 꺼진 차가운 방에서 또한 어떻게 목의 동맥을 끊을 수 있었단 말인가? 비수를 살인자들의 목젖에 갖다 되지 못하고 아무도 관심두지 않은 차가운 불 꺼진 방, 현대중공업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산재은폐,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불승인의 외딴 방에서 고 손창현 동지는 자결했다.


최근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이제는 심장의 통증조차 무감각해진 것 같다. 류기혁 열사를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내고 난 이후, 하중근 열사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보낸 이후 속이 텅 비어 버렸다. 또 한 명의 동지가 죽어가는데, 온 몸으로 아파하지 못하고, 온 몸으로 분노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을 온통 걸어 투쟁하지도 못하고 사무적으로 변해가는 건조한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곧 새로운 삶인데, 난 지금 병중이다. 간은 탱탱 부어버렸고 위는 허벌창났다. 피조차 탁해 이곳저곳이 뻣뻣하다. 생각해보니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난 이후 내가 제일 많이 있었던 곳 중의 하나가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이었다. 박일수 열사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떠나보낸 곳도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이었고, “하청들 다 죽어가는데 위원장이란 놈이 뭐 하고 있느냐”고 내 멱살을 잡고 통곡하는 한 하청노동자를 말없이 부여잡고 함께 운 곳도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이었다.
난 지난 몇 년간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었고 충분히 친숙해 있었다. 김주익 열사처럼 조합원 동지들에게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아낌없이 내 목숨을 주자는 생각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난 투쟁을 조직하고 투쟁을 확대시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병중이란 말인가? 한 젊은 하청노동자의 죽음으로서의 항거를 아파할 기력조차 쇠잔한 병중이란 말인가? 이건 너무 잔인하다. 과연 詩는 우리 모두를 떠났는가?


만약 고 손창현 동지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았다면,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詩는 곧 새로운 삶이다. 이 땅의 노동자가 詩를 쓰는 첫 날이 또 다른 혁명의 시작이다. 詩는 우리 삶 속에 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詩는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사유이다. 詩는 당연한 것, 고정된 것, 습관적인 삶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시작하고 당연한 것, 고정된 것, 습관적인 삶에 대한 비판을 성장시킨다. 詩는 좀 더 창조적인 삶을 사유하고 표현하고 소통하고 인간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에 균열을 내며 이 열려진 틈으로 인간적인 빛이 쏟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인간적인 빛 속에서 또 다시 세계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창조적인 몸짓의 율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詩는 새로운 삶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삶을 풍부하게 살아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난 1년, 詩 이전에 새로운 삶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국가와 혁명의 문제를 연구하고 학습하면서 지난 비정규직 투쟁의 한 시기를 되돌아보았다. 절박하고 진실했으나 정치적으로는 허약했던 지난 한 시기와의 단절, 그것이 두 번째 시집인 [물으면서 전진한다]이다. 하지만 살아 있음의 존엄함, 인간적인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창조적 사유와 몸짓들은 하나의 틀로 닫혀 질 수 없는, 가능성으로 열려진 공동체적 삶이다.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적 삶을 정치적으로 강화하는 것, 미래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힘찬 몸짓을 나는 신뢰한다.

아프지만, 정말 아프지만 자결을 통한 항거, 인간적인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몸짓 속에서 난 ‘詩’를 발견한다. 자본과의 적대적 투쟁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활력, 생동하는 삶의 연대망으로서의 노동해방을 꿈꾼다. 난 지금 병중이지만 오히려 삶이 오는 방향으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내 詩가 먼저 몸이 달아 그쪽으로 달려가고 싶다. 고 손창현 동지의 환한 웃음을 보고 싶다. ‘이 따위가 시라면 나라도 쓰겠다’ 이 땅의 노동자들이 詩를 쓰는 첫 날, 그 혁명의 첫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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