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드라마에 나타난 불안정 노동자의 현실(06년 11월호)

정지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처장


드라마에서 보이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화라는 것이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좁게 말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 했을 때, 가장 접하기 쉬운 대중매체로는 TV를 꼽을 수 있다. 누구는 ‘만물상자’라고 말하고 누구는 ‘바보상자’라 말하는 TV 속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도 나오지만 다양한 이데올로기도 숨어있다. 때로는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인 모습도 많이 보인다.
특히 뉴스의 왜곡보도나 선정성은 다반사이다. 집회 시위의 장면을 내보내더라도 카메라의 각도, 단어 배열의 순서 등은 이미 아는 바이니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상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작년 한가인과 에릭이 주연하여 큰 호응을 끌었던 ‘신입사원’은 비정규직의 현실을 드라마에 도입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한가인이 해고되고 다시 복직되고 (물론 다시 복직된 것은 파견노동자로 재입사였지만), 복직하는 과정에서 보였던
드라마 [신입사원]의 한 장면
1인시위 등의 모습이 다소 눈에 띄기는 했다.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에게 많은 공감이 되기도 했던 드라마였다.
그렇지만 비정규직이 반 이상이 넘는 현실에서 이처럼 직접적으로 비정규직을 비춰지는 드라마는 보기 드물다. 전문직이거나 특이한 직업이 나오면서 그 개인이 열심히 일해서 일과 사랑에도 성공하는 모습이 천편일률적으로 나올 뿐이다.



드라마에서 노동자 해고는 어떻게 다뤄지나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 ‘환상의 커플’이 있다. 돈 많지만 싸가지 없는 주인공 안나(한예슬)는 뭐든지 ‘바꿔!’ 이 한마디면 안되는 게 없다. 마음에 안 들면 모두 바꿔버린다. 대표적으로 이 드라마 1회에서는, 미국에 있다가 남편이 지은 남해의 리조트로 온 안나는 리조트의 음식이면 음식, 객실 서비스면 서비스 이 모든 게 맘에 안 들자 가차 없이 바꾸라고 한다. 그 말 한마디로 요리사, 룸메이드 등 많은 노동자가 단숨에 해고되어 버린다. 그때 리조트의 실장이 날린 한마디, ‘자꾸 바꾸라고 하면 불안해서 누가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노동자의 불안정한 현실이 노동자를 온전하게 일하지 못하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당연한 이유가 외면되고 만다. 그리고 해고의 절차도 없이 너무도 쉽게 노동자의 밥줄은 날라간다.
그런데 이 드라마만이 아니다. 앞서 얘기한 ‘신입사원’의 미옥(한가인)의 해고사유도 정당하지 않다. ‘신입사원’에서 LK그룹 계약직 근로자 미옥(한가인)은 5년 이상 성실하게 근무했지만 그룹 계열사 사장 딸의 미움을 받아 정당한 이유도 없이 해고된다. 이처럼 해고의 절차도 무척 간단하다. 모든 게 하루아침에 일어난다. ‘내일부터 당장 나오지 마’라는 말이 떨어지면 당장 짐 싸들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걸 시청하는 국민들도 해고는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이구나 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해고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일진대, 드라마에서는 단지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면으로 활용될 뿐이다.
이러한 현실일진데, 그나마도 해고 요건을 완화하여 ‘60일전 통보’에서 ‘30일 전 통보’의 내용으로 바꾼 노사관계 로드맵이 통과되면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은 어떻게 보장될까?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재미있지만 무섭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러한 사업주의 횡포에 다양하게 저항한다. ‘환상의 커플’의 리조트 직원들은 안나(한예슬)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와인에 설사약을 넣기도 하고, ‘신입사원’의 미옥(한가인)은 해고의 부당함에 항의하기 위해 회사 로비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저항도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고 있다.




여성 이주노동자, 그들의 삶은?

이처럼 이제는 드라마에도 비정규직이 많이 나온다. 더불어 많이 나오는 것이 연변처녀의 모습이다. 요새 인기 있는 일일드라마 ‘열아홉 순정’은 그야말로 불안정노동자의 종합판이다. 결혼 때문에 팔려온(?) 연변 처녀 ‘국화’는 운이 안 좋아 결혼하기로 한 한국 남자가 죽으면서 그 집에 눌러 살게 된다. 가진 것도 없고 가족도 없어 고향에 돌아가도 뾰족한 수가 없는 ‘국화’가 선택한 직업은 청소용역 노동자였다.
대기업에 청소용역노동자로 열심히 일하던 ‘국화’는 또 하필이면 그 기업 회장의 아들과 좋아하게 되면서 그나마 청소일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서 하게 되는 일이 세차, 찜질방 알바다. 물론 국화는 캔디처럼 씩씩하다. 그것만으로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하고, 이 착한 연변처녀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드라마는 여전히 부잣집 남자와 연변처녀의 로맨스에만 초점이 맞춰있다.

[열아홉순정]의 연변처녀 구혜선
이와 비슷하게 현실을 드러내는 드라마가 있었다. 사실 연변처녀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국제 매매혼인데, 그중에서도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은 엄청나다. (길가에도 버젓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라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걸려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작년 추석에 특집으로 방영한 드라마 ‘하노이의 신부’는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을 그린 이야기다. 사실 베트남처녀와의 매매혼을 제대로 건드렸다기 보다 살짝 비껴갔는데, 그래서 아쉽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그런 현실을 사랑으로 잘 포장하여 아름답게만 나타낸다. 결국 ‘하노이의 신부’의 티브(김옥빈)는 의사인 한국남자 은우(이동욱)와 재회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열아홉 순정’의 결론이야 회장아들인 실장과 연변처녀인 ‘국화’가 맺어지게 되겠지만, 과연 현실이 그러할까? ‘열아홉 순정’의 국화나 ‘하노이 신부’의 티브와 같은 일은 현실에 없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주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히려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그럼 불안정노동층의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결국 ‘환상의 커플’의 안나는 달리는 요트에서 술에 만취한 상태로 빠져버려 기억 상실증에 걸리고 만다. 기억 상실증에 걸리면서 안나는 몸빼 바지를 입고, 자장면과 막걸리를 먹어가며 차츰 인간다워 진다. 여기서 사람들은 많은 통쾌함을 느낀다. 싸가지 없던 자본가가 서서히 망가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아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흐뭇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현실의 ‘안나’가 아니라 기억 상실증에 걸린 ‘상실’의 모습일 때이다. 그래서 또한 아쉽다. 합당한 이유 없이 노동자들에게 탄압과 감시를 하고 노동통제를 하면서 문자 하나로 해고를 통보하는 현실의 자본가들을 안나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랑과 전쟁’이 아니라 ‘일과 전쟁’ 이라도 만들어 노동문제 법정드라마를 만들어 버릴까도 생각해 보고, 아니면 ‘변호사들’ 같은 드라마처럼 로펌의 변호사들이 기업 문제가 아니라 노동 전문 변호사로서 일하고 고뇌하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이웃 간의 정만을 그려내며 포근한 농촌을 그려내던 종영된 ‘전원일기’나 아직도 방영되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와 같은 농촌 드라마에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고 연변처녀와 결혼하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실을 만들어 내면 어떨까?
그래서 이루어 질 수도 없는 어설픈 희망이 아니라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있게, 불안정노동층이 향유 할 수 있는 문화도 이제는 불안정노동층의 시각으로 만들어 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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