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21] 신나는 운동을 하려면

너부리의 다른 눈으로 보는 세상


소위 ‘진보’진영이 ‘위기’론이라는 유령에 홀린 지는 꽤 되었다. 이 ‘위기’에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요인들과 국면들이 복잡하게 중층결정되어 있겠지만, 변화중인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당위중심적 인식(의 정체)도 문제지점이리라. 돌파구, 기획, 전망을 자기 내부로부터 찾지 못하니 당위만 남는 것이다. 당위가 전부다. 그렇지만 당위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세상은 당위만으로 움직이지도 않거니와 사정은 곧잘 ‘옳은’ 쪽이 아닌 편으로 비스듬하게 전개되곤 한다. 그러는 사이 ‘당위’는 사회정의와 관계된 것이기보다는 은근슬쩍 조직보위의 당위로 전락한다.

20세기의 크고 작은 혁명들과 사회운동들의 역사가 일러주듯, ‘진보’와 ‘사회변혁’을 표방하는 움직임들에는 언제나 거대하고 강력한 방해세력들과 장애요인들이 구조적 상수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구조적 상수들만 쳐다보고 있을수록 진보/변혁 움직임들은 퇴화하고 도태되었다. 집단들 간의 민주주의와 평등을 외치는 사이 집단 내부의 억압과 비민주성이 묵인되곤 하였으며, 집단/세력간 힘들의 위계에 따라 안팎의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폄하되고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역사란 사회의 약자들,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저항을 통해서 제도화된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지금 여기 ‘진보’운동의 위기는 내부 민주주의에 대한 다시금의 성찰과 보다 급진적인 민주주의 실천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다>에 나오는 수많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과 저항들이 시사하듯, 지금 여기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노동하는 (비정규직) 여성들의 관점에서, 가장 비가시화된 소수주체들의 관점에서 다시 급진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집단들 간에서만 주장되고 작동되어선 안 된다. 민주주의가 집단내부에서부터 끊임없이 실천되고 재삼 급진화될 때라야,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변혁시킬 수 있다. 집단 내부에서부터 민주주의의 급진적/근본적radical 실천을 가늠하는 리트머스들 중 하나는 아마도 (비정규직) 여성들과 집단 내부의 소수자/약자들의 목소리가 얼만큼 들리냐일 것이다.

20세기 크고 작은 운동들과 혁명들의 역사가 반복해서 일러주듯, 내부의 민주주의가 실천되지 않는 (진보)집단들의 진보/변혁운동은 결코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가부장제 반대 탈남성주의적 의식과 실천을 담보하지 못한 모든 움직임들은 급진적이지 못하며 변혁/진보(운동)이랄 수 없다. 신나는 운동은 근본적인radical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운동일 것이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에 매우 흥미로운 시어머니와 며느리 여성농부가 나온다. 그녀들이 오랜 동안의 여성농민운동 참여, 그리고 최근 WTO반대 홍콩 원정 시위 참여를 통해서 따로 또 함께 변화되는 과정이 매우 짧은 인터뷰 대사에서 드러난다. 그녀들이 보여주는 ‘운동’과 저항이란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신바람나는 주체들로 변화하는 과정이자, 자신이 뿌리를 둔 물질적 조건들이 세상에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입compass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직접 보시길)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미쳐 가는 대한민국, 불타는 저항의 기록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16인의 독립영화 감독들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따로 또 함께 공동 작업한 16편의 단편 모음 영화이다. 지금 여기 대한남국에서 벌어져 온 일들을 찬찬하면서도 유머와 재치를 섞어서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새만금, 비정규직 여성노동,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 사학비리와 사학법, 황우석사태, 양심적 병역거부, 세계화 반대 (농민) 투쟁, 평택 대추리 대첩, 강원도 도박타운 건설 문제 등.
(주: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온라인 상영 및 다운로드는 http://www.newscham.net/Furnaces/intro.html?【?/a>,
블로그 주소는 http://blog.jinbo.net/crazykorea/ )

2000년 이후 벌어진 이 일들은 ‘우리’가 국익, 대세, 불가피 등의 미명하에, 혹은 저렇게 될까봐 하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때로 적극적으로 외면해 온 문제들이기도 하다. 제작자들이 기획의도에서 말한 대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들의 단면들을 모으고 재조합하여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기록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인 이 작품을 함께 본 친구의 반응: “미쳐가는 대한민국 종합선물 세트로고만.”

국익과 대세: 신자유주의 전지구적 자본의 국가주의적/지역적 이데올로기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서 권력은 스스로를 모두 드러내서는 안 된다. 권력과 지배는 필연적으로 배제할 뿐만 아니라 침묵을 강요한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단편작품들이 드러내듯, 국가, 민족, 국익(‘대한민국’!)은 침묵을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어휘이자 이데올로기이다.
예컨대, 한미FTA, 새만금, 황우석사태, 사학법 개정논란,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단편들이 시사하듯, ‘국익’이야말로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부추기고, 여성, 노동자, 농민, 무명의 시민들이야말로 실제로 ‘국익’에 기여했던 현실적 주체들이라는 점을 은폐한다. 또한, ‘대세’라는 말은 국익 혹은 불가피 운운하는 이데올로기와 절합되면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대세’ 이데올로기는 위로부터, 즉 대한남국 국가권력과, 한국에 본부를 둔 초국가적 자본이 관여하는 폭력, 움직임들에 대한 주의깊은 관찰과 비판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국익과 대세는 한국판 신자유주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편의적인 이데올로기적 우산이며, 이데올로기로서 국익과 대세는 전지구화에 반대하는 언사가 아니다.
초국가적 자본주의와 선진국병 국가주의, 그리고 양극화 속에서 점증하는 심리적 불안의 환상적 결합. 오늘날 자본의 전지구화는 보다 통합된 것을 추구한다. 국익이 전부다. 그 외 모든 것들은 나머지가 된다. 국익이 도처에서 말해지고 그에 관련된 복잡한 특수성들은 상실된다.

성장과 (지역/신기술)개발이 던지는 급진적 질문들

강원도 카지노 타운에 관한 두 편 (13. “원주 화상경마장”과 14편인 “카지노, 몰락하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국익과 대세를 앞세운 성장 및 개발논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 현실은 양극화이다. 두 편의 이야기는 폐광촌에 들어선 도박장들과 부대시설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계획된 화상경마장은 정말 지역 경제를 살리고 지역 사람들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가? 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전라북도 지역경제와 나라 경제 전체(“국토개발”)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고 있는 새만금 사태 역시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소수를 위해서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인데도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는 모순. 황우석 사태를 다시 다룬 8편 “난자, 그를 말하다”로 가면 질문은 보다 급진적이 된다. 국익(“특허권사수”)과 조국(“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과 불치병치료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절차상의 유린과 폭력과 은폐, 조작, 비민주성은 아무 것도 아닌가?
과학과 경제가 밀착된 지점인 의료(연구)산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복잡하고도 교묘한 작동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리라. 불치병치료라는 휴머니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과학은 “정상적인” 건강한 몸에 고통을 가해 특허권 및 유령적인 “치료” 시장과 불법 장기매매 시장, 미래를 담보삼아 현재를 사기치는 착취적 연구노동시장을 “개척”하고, 국익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그 폭력성과 불법성, 비민주성을 은폐한다.

(고통받는) 몸: 저항과 지배의 전쟁터

16인의 감독들이 “미쳐가는 대한민국”을 보는 시각은 몸을 통해서이다. 다양한 정황 속에 놓인 각각의 몸들은 다양한 의미들을 생산하는 네트워크로부터 서로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고통받는 몸의 저항을, 고통 속에서(이지만) 고통을 가로질러 만나는 (저항의) 열정적 인간성을 말하고 표현한다. 사회적으로 차별적으로 강제되는 고통을 정당화하고자 동원되는 ‘참여,’ ‘국익’ ‘조국,’ (딴날당 박근혜가 써먹는 식의) ‘자유민주주의’에 맞서, 이 몸들은 민주주의란 저항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다양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성을 표현함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민주적 강제와 차별에 의한 고통은 저항의 원인이자 동력이다.

지금여기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신자유주의 자본과 지배 역시 고통을 자신의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황우석 사태에 관한 작품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작품인 9. “오, 미친 코리아!”는 고통(받는 몸들)을 팔아 현재의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한다. 현재와 미래의 국가안보, 미래의 국익은 유혹적이며 매력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매우 억압적이고 우리를 따로따로로 고립시킨다.

황우석 사태가 보여주듯, 이제 (의료연구)자본은 고통 중의 고통일 불치병(자) 혹은 장애인들을 팔아서 어마어마한 자금과 착취적 노동을 쏟아 붓는다. 이러는 사이, 이에 편승한 국가, 언론, 대중에게 지금 여기의 장애인들은 이제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미래의 신기술이(“원천기술 있습니다”!) 지금 여기의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미약한) 복지마저 그 근본에서부터 갉아먹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싱싱한 난자 소지자”로 폭력적으로 환원된다.

불타는 저항의 기록: 민주주의를 다시 급진화 하려면

언어/미디어는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들을 명명하고 표현하고 함께 나누는 유일한 수단이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에 나오는 여성들과 사람들의 투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이 투쟁들을 새롭게 다시금 들추어본다. 지금 여기 일어나고 있는 해방/저항 투쟁들의 역사와 현존에 대해서, 주류 매체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더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저항이 오래된 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다시금 새로운 것으로 말해지고 말해져야한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 혹은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들, 미래를 담보잡아 우리를 유혹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기억되지 않게 될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어떤 계기들과 사건들. 이런 것들에 착목하여 이 영화는 민주주의를 다시 급진적으로 문제삼는다. 민주주의란 이런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기억되지 않는 계기들을 (고통스럽게) 다시 방문하여 다시 기록하는 일에서 다시 시작된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승자들에 대한 감정이입에 의해서 씌어지는 역사History 대신 이 영화는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여러 판본의 이야기들stories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계속된다. 끝은 있지만 그 끝은 또다른 출발점일 뿐이다.

많은 비판적 연구들 및 페미니스트 연구들이 증명하듯, 지배는 저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민주주의는 저항으로부터 나온 정치제도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우리가 국정 교과서로 그리고 상식으로 배운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판본의 민주주의를 그 기원으로 한다. 노예-노동자와 여성들을 인간과 시민의 범주에서 제외했던 고대 그리스식 민주주의 기원론이야말로 서구 근현대 중상층 백인 남자들의 전횡적인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각된 이야기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근대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는 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발흥과 더불어서 노예무역에 의존한 민주주의였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기원지라 주장하는 서구는, 실제로 하이티 혁명이라던가 이집트, 알제리, 그리고 아르헨티나, 칠레 등의 남미 나라들에서 벌어진 여성들 및 노동자들의 반식민 투쟁들로부터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배웠다. 예컨대, 반식민주의 독립투쟁을 하면서 하이티인들은 인류 최초로 노예제를 완전 폐지했다. 인류의 가장 수치스러운 제도일 노예제를 폐지한 이 사건은 유럽과 미국의 근대적 인권개념의 은폐된 이면, 즉 노예무역과 노예제을 까발림으로써, 민주주의의 ‘기원지’라는 서구에 충격과 경악을 안겼다. 그렇지만 노예제를 폐지한 하이티 혁명가들은 미국 식민지의 백인, 독립혁명가들에게서 철저히 침묵되었다. 서구의 것이라 일컬어지는 페미니즘 역시 단순히 서구적인 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도 페미니즘도 전지구에 걸쳐서 다양한 지점들에서 일어난 저항투쟁들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소위 ‘민주화 세력’에 의해서 등장한 ‘참여’정부식의 퇴행적 민주주의는 재급진화될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참여’ 정부의 등장은 90년대 이후 대한남국에서 가속화중인 신자유주의적 전지구적 자본의 유혹적인 비민주적 폭력을 외관상 부분적으로 가려주면서 심리적 위안을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정부 등장 이후 4년은, 정당성이 없던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그 ‘정당성’을 자부하고 ‘개혁’을 약속했던 “참여민주” 정부가 얼마나 민주주의적 실천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지를 반복강화해서 보여준 세월이기도 했다.

21세기 제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전지구적 자본이 테러니즘 반대의 명분으로 테러로 가득찬 것일 뿐인 전쟁을 부추기면서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전지구의 민중을 수탈하는 공세를 강화하는 와중에, 특수성을 띠면서도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역들에서 스스로 그 내부로부터 민주주의적 과정과 절차를 짓밟는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불타는 저항의 기록들이 끊임없이 행해져야 하고 이렇게 기록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야 한다. 지배(유지를 위한) 기록과 선별적 유포 및 전승에 대항하는 대항기억의 기록작업들은 보다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세상을 지금 여기서 일구는 투쟁들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마지막이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런 불타는 저항의 기록 작업이란 ‘대가’/대표자와 시다바리들로 이루어진 위계적이고 착취적인 분업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협동노동collaboration이다.
보다 온전한 해방을 향한 저항과 투쟁 그리고 세상과 나 자신을 변혁하는 과정은 바로 집단들 간의 민주주의 뿐 아니라 집단/조직/개인 내부에서의 민주주의 실천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런 공동(의 변혁)작업의 내부로부터, 집단 내부로부터 실천되지 않는다면, 비민주적 관행들 위에서 주창되는 세계변혁이란 또 다른 억압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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