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23]이행의 아포리, 경제학적 문제인가, 정치학적 문제인가

한노정연 2006년 기획 콜로키움

이행의 아포리, 경제학적 문제인가, 정치학적 문제인가
한노정연 2006년 기획콜로키움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박영균


1. 들어가며
- 정치와 경제의 분리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이행의 문제’는 분명 우리에게 하나의 아포리아이다. 이행은 레닌의 말처럼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미답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오직 역사적 시행착오와 오류를 통해서 재창조될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행’이 백지의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가 인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사회체제와 법칙을 가지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 또한 인류의 노동이 만들어 온 역사의 물질적 토대를 벗어나 건설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여전히 물리적 법칙들, 중력의 힘은 작용한다. 그 힘들은 아마도 인류의 노동이 물질적으로 응축된 생산력과 인류가 창조해 온 지적·정신적 가치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구의 역사에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연방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우리가 믿었던 이행의 법칙들, 사회주의 건설의 관점들은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소연방에서의 보수파/개혁파간의 논쟁이 한창이었던 때에도 그랬고, 지금 다시 이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이때에도 사회주의 이행의 문제들은 여전히 ‘경제학적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정치학적 문제들은 전략·전술이나 국가권력의 성격,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정치’적 영역에 머물고 있다. 경제학과 정치학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의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적인 논점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또는 코뮨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경제학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적 문제라는 점이다.

맑스의 『자본』은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 경제학이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물질적 토대와 조건에 관한 책이다. 맑스는 『자본』을 통해 자본의 한계와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학적 저술이 아니라 정치학적 저술이며 현실의 계급투쟁을 해명하는 이론서이다. 가치 법칙은 단순한 경제학적 법칙이 아니라 이미 사회적인 생산관계를 함축하는 관계에 대한 이론이며 계급투쟁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추상화된 개념적, 논리적 저술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이론도, 잉여가치 이론도 양화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것은 단순한 산술적, 회계적 수치로 환원되거나 환산될 수 없는 생산을 둘러싼 적대와 투쟁을 함축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 이론이다.

2. 이행의 핵심 문제, 무엇인가?

첫째,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코뮨으로의 이행을 필연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만을 제시할 뿐이다. 충분조건은 오직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조건’은 이행의 최종 심급, 자본의 한계, 극점을 보여주며 그 한계와 극점을 생산하는 모순의 지점을 보여준다. 맑스는 자본의 동학을 분석하면서 자본의 운동이 인류의 노동을 물질화하는 사회적 노동의 기계화, 또는 인간의 분업과 협업적 생산력을 극대화한다고 보았다. 매뉴팩처와 기계제 대공업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이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힘’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을 자본이 자신의 힘으로 전유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이 자본의 물신화를 만들어낸다. 엥겔스가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간의 모순이라고 명명한 이것은 자본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와 같은 한계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측면에서 인류의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 능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잉축적에 의한 공황과 자본의 자기 파괴. 따라서 맑스는 인류의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전유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보았다. 물질적 조건에 의한 필연적 강제 조건.

둘째, 맑스는 생산의 사회화된 생산력을 ‘자본’의 사적 전유, 또는 생산수단에 기초한 자본의 가치 증식으로의 전환이 정치와 경제의 부조응을 확대하고 계급투쟁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화된 생산력은 엄청난 개인의 경제적 부의 집중과 자본에 의한 전사회적 축적 체제를 만들어 놓는다. 독점은 자본 간의 수탈체제를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법적 측면에서 완성한다. 그러나 독점은 자유경쟁시장체제의 원리 그 자체를 공격하고 파괴한다. 따라서 사회화된 생산력에 대한 사적인 전유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시장’의 원리 안에 머물지 않으며 사회 전체의 물질적 부의 생산과 유통, 분배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정치’적 개입 없이 작동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이와 같은 ‘정치적 개입’, ‘정치적 관리’는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 소유의 축적체계로 변환함으로써 정치와 경제 간의 부조응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와 경제 간의 부조응은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괴리와 부조응, 이데올로기적 균열을 유발하며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정치’의 장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

셋째, 사회화된 생산력을 사적으로 전유하면서 드러나는 자본의 한계와 자본축적의 항상적 위기는 축적 체제의 한계나 위기에 의해서 파국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관철되며 계급투쟁의 향방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문제는 ‘생산의 사회화된 힘’, ‘사회화된 노동’, ‘사회화된 생산력’을 사적으로 전유할 수밖에 없는 생산관계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사회화된 생산력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소유는 말 그대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생산자들 자신에 의해 소유되는 체계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개인적, 경제적, 법적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의 생산과 유통, 분배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자 사회적 전체에 의해 지배하는 ‘정치적 소유’의 문제이다.
이것의 핵심은 생산의 사회화가 특정 개인들의 몫을 산출적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개인들의 독립적인 노동으로 개별적으로 회계 처리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미 특정 개인의 노동 능력, 생산 능력은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 사회적인 힘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화된 생산력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생산자들의 집단적인 의식적 통제에 기초한 소유체계’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의 ‘의식적 통제’는 근대적인 주체가 전제하고 있는 이성에 기초한 과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자들 자신에 의한 집단적 통제’로서 ‘집단 이성’이다. ‘집단 이성’은 상호 주관적이며 상호 소통적으로 형성되는 이성이다. 따라서 ‘의식적 통제’는 사물화된 과학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문가 집단’의 계산적 통제가 아니며 생산자들 자신의 생산지와 생활 근거지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는 자율적 의지와 상호 소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통제이다.

3. 이행의 문제 설정, 무엇이 문제였는가?

과거의 이행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경제학적 관점’ 위에 서 있다. 이런 논의들 중에서 대표적인 혼란은 다음의 세 가지 관점이다. 첫째는 이행기 그 자체의 성격 규정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이행기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 기간이라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체계로 정의되어 왔다. 대과도기론이든 소과도기론이든 간에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행기’가 코뮤니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코뮤니즘은 최종적인 목표 지점이다. 코뮤니즘,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화된 모델! 여기에 PD(서사연)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여형)라는 또 다른 과도기까지 다시 논의는 확장되었다. 물론 이렇게 논의들이 혼란스러워졌던 데에 레닌의 2단계혁명론이나 중-소 논쟁 등의 전거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코뮤니즘’을 현재가 아니라 미래로 본다는 점이며 ‘이상적 모델’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개념이 아니며 순수하게 추상화된 사고가 아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현재의 모순이 함축하고 있는 강제된 필연성, 즉 이행의 물질적 조건에 기초하여 미래를 ‘현재’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없으며 그 목표를 순수하게 이념형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은 상상될 뿐이다. 상상은 현실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운이 될 수 있지만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없으며 오히려 자본의 한계 속에서 이후 사회의 기본적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행기’의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이든 공산주의이든 간에 이념적으로 완성된 다른 사회 체제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과도기의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혼란은 ‘정치혁명 후 사회혁명’ 또는 ‘정치권력을 접수한 이후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한 사회화’라는 단계론적 변혁론이라는 잘못된 사고에 기초해 있다. 여기서 변혁의 주체는 당이다.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노동자계급의 최고도로 의식화된 집단, 또는 이성적으로 조직된 집단, 스탈린의 이성의 화신을 연상케 하는 당에 의한 국가-사회 전체의 집단적 조직화라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국가의 확장과 시민사회의 흡수는 전체주의를 낳는다. 계획화는 이런 전체주의 위에 건설된다.

그러나 이행기의 핵심적 문제는 목표가 있는 ‘이행의 진화’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결정적 단절 지점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원시적 자본 축적이라는 ‘결정적 단절’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처럼 사회주의 또한 결정적 단절의 지점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 단절은 사회 전체의 코뮨적 조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이 그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서 중핵을 차지함으로써 향후 운동을 좌우하듯이 사회주의에서도 그것의 중핵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물어져야 할 것은 ‘코뮨주의’로의 이행에서 핵심적인 물질적 중핵이 무엇인가이다. 맑스는 이것을 고도로 사회화된 노동, 사회화된 생산력의 중핵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독점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이행의 핵심 동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소유’가 아포리아를 낳는다. 핵심적인 생산의 중추, 기간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 메카니즘을 틀어쥘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산의 사회화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문제를 경제적, 법적 소유로 풀어가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사회적 소유’가 특정한 개인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공동체적으로 확립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권력, 즉 국유화를 함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유화가 사회적 소유가 된다는 것은 곧 그 국가 권력이 사회적 권력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문제는 국가권력 그 자체의 실질적 내용과 형식이 ‘사회적 권력’인가이다.

사회적 소유는 국가라는 장치를 통해서 실현되지만 그 장치가 사회적 권력이 되지 못했을 때 사회적 소유는 특정 집단의 소유로 전화한다. 과거 현실사회주의에서의 국유화는 관료적 소유로의 전환을 만들어냈다. 국가장치는 그 장치에 기생하는 관료집단을 생산한다. 따라서 부르주아 국가장치는 그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국가는 사회화된 권력으로 전화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혁명은 곧 사회혁명이 되어야 한다. 두 개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은 자기 스스로 사회 전체의 생산-유통-분배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기의 생산 근거지와 생활 근거지를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코뮨을 정치적 권력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에만 국가 권력은 사회적 권력으로 전화할 수 있으며 생산자 자신에 의한 물질적 토대의 장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곧 생산자들이 경제를 정치로 전화시키며 그들 자신이 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생산단위들을 자율적인 코뮨적 단위들로 재편하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이들의 생산-유통-분배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정치가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권력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코뮨들은 경제를 정치화하는 생산단위이자 생활단위이며 국가는 이런 코뮨들의 자치적 통치권력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계획과 시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이다. 이런 이분법은 계획-이성적 통제-국가권력 또는 당, 시장-무정부성-생산자들의 이기적 경쟁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낳는다. 기존의 소위 ‘정통’ 맑시즘은 계획이 우위에 서서 시장을 통제하고 잠식해 가는 과정으로 설정해 왔다. 게다가 시장은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소부르주아들의 부르주아 생산 장소로 설정되어 왔다. 따라서 정통 맑시즘에서 계획은 언제나 도덕적,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사고되어 왔다. 물론 사회화된 생산 메카니즘에서 계획은 필연적이며 이것이 사회주의에서의 ‘정치’가 지니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계획과 시장 이전에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사회주의=계획=통제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는 생산자들의 자율적인 자치권력이자 생산체제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에서의 계획은 이성과 과학을 확보한 지식인 또는 전문가 집단의 독점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에서의 계획은 생산자들 자신의 자치적 권력이자 그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레닌이 소비에트의 ‘전국적 회계와 통제’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행의 물질적 힘은 정치권력의 폭압적 강제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제는 물질적 힘뿐만 아니라 지적, 윤리적 가치들의 우위를 수반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하에서의 국가권력의 강제력, 물리력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강제력을 경찰과 군대와 같은 무장된 권력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계급투쟁, 또는 프롤레타리아독재=사회주의로의 과도기라는 관념은 이와 같은 사고를 확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의 ‘권력’과 동일한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권력을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권력은 ‘자본’이라는 물질적 힘과 사법기관, 경찰, 군대의 물리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의 권력은 인민들 자신에 의해서 주어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하에서 가장 중요한 물리력은 인민들이 그 스스로 사회화된 생산력에 기초한 권력을 향유하는 진정한 인민 권력, 생산자들의 권력으로 전화시키는 데에서 발생한다.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지켜야 할 자신의 가치로 여기는 곳에서 물리력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기초 단위들을 형성하는 코뮨 그 자체가 권력이어야 한다.

셋째로, 가치론, 특히 노동가치론에 대한 잘못된 적용이다. 노동시간에 따른 몫의 계산과 지불은 노동가치론을 투하된 노동으로 단순히 환원하는 오류를 낳을 뿐이다. 가치는 단순히 투하된 노동시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만 결정된다. 특히 노동이 고도로 사회화된 단계에서 특정한 노동이 산출하는 가치는 단순한 산술적 경제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화된 생산 메카니즘의 자율적 조절과 통제, 상호 소통에 의해서만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물질적 가치나 시간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다.

사회화된 생산 메카니즘에서 전체 생산량과 소비량을 조절하고 집행하는 계획은 단순한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민들의 살아온 사회, 문화적 환경과 역사적 형성에 따라 가지고 되는 특수한 가치들을 가지며 상호 소통된다. 따라서 계획은 경제학적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산자들의 삶의 가치를 반영하는 그들 자신의 집단적 이성, 상호 의사소통에 의해 협의되고 조절되는 과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특정한 노동의 질과 가치들을 평가할 수 있으며 생활적으로 필요한 물품들과 소비량을 측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 간의 이런 이해 갈등과 가치 평가의 상호 대립을 조절하고 자기 통치권력으로 전화시키는 메카니즘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행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문제이자 그것을 체득하는 주체 형성의 문제이다.

4.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이행 문제와 막다른 골목, 그것은 무엇인가?

스탈린주의의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프레오브라젠스키의 농공간의 부등가 교환과 상품-시장 대 계획이라는 사회주의 원시축적론과 중공업 우선 정책,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주의적 확대재생산에 이르기까지 생산력주의는 정통 맑시즘의 사회주의 이행론을 지배했다. 레닌조차 테일러리즘에 환호했으며 때때로 사회주의를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학적 관점에서 평가하곤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보다 더 낳은 생산력과 물질적 풍요로 밀고 나갈 때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는 ‘생산자들의 자율적 권력’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 대해 우월한 경제력으로, 계획을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에 대립하는 보다 발달된 경제 시스템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생산자들의 소외된 노동과 사회화된 노동의 억압적 힘, 즉 자본권력을 다른 권력, 예를 들어 노멘클라투라의 권력으로 바꾸어 놓을 뿐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력의 한 요소, 핵심적 요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노동자는 생산력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단지 생산력의 한 요소로 부수화될 때 노동자의 노동은 자기실현이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노동자의 힘으로 언표되는 또 다른 억압적 권력의 형성이자 작동이다.

스탈린 시기에 생산력 발전은 ‘공산주의적 도덕’에 의해 강제되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이와 같은 인간의 노동력을 사회주의적 생산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은 현실적인 자기 충족, 가치 실현 없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브레즈네프 시절 생산력은 인간의 노동력을 조직화하는 행정적 기술이 되었다. 조직된 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인간 노동력을 사회주의적 생산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등용된 자들이 합리적 테크노크라트들이었다. 이미 소연방에서 사회주의는 자본과 다를 바 없는 인간 노동력의 합리적 조직자이자 가치 증식의 담지자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와 더불어 보수/개혁파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시장-경쟁-이기성→생산력 발전이라는 개혁파의 관점은 이미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었을 뿐이다. 옐친의 등장과 자본주의로의 전화!

그러나 이 모든 전화의 토양은 ‘이행’을 바라보는 ‘정통’ 맑시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보수/개혁파의 논쟁까지를 포함하여 ‘이행’에 대한 관점은 여전히 경제학의 지형 내부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정치학적 지형’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공산당까지를 포함하여 소위 생산력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접근했던 모든 현실사회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그것은 생산의 사회화를 정치화하는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으며 오직 더 나은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생산자들은 그들 스스로 인류사적 노동이 물질적으로 집약시켜 놓은 생산력을 전유하는 길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으며 오히려 그 힘에 의해 지배받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달리 인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결국은 자본주의와 동일한 ‘생산 패러다임’ 안에 함몰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생산자들의 자기 통치와 사회화된 생산의 정치적 전유이다.
5. 마치며
-이행의 정치학적 패러다임을 위하여

이행의 정치학적 패러다임은, 1. 이행의 핵심 문제를 ‘생산자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권력의 사회화’를 이룩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계획을 어떻게 하고 노동의 몫을 어떻게 계산하고 어떤 방식으로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에 놓여 있지 않다. 이 이전에 먼저 전제되어야 할 출발점은 사회화된 생산의 물질적 기제들을 전유하는 국가권력의 메카니즘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있다. 정치혁명은 이미 사회혁명이며 부르주아 국가 장치는 새롭게 구성된 프롤레타리아 국가 장치에 대체되어야 한다.

2.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장악, 탈취함으로써, 또는 접수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이행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을 가지는 새로운 국가 장치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런 국가 장치는 생산자들과 인민들의 자율적인 생산-생활 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이행은 ‘혁명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변혁 전체의 중심적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코뮨’이라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이자 사회주의 권력의 물리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후 ‘전인민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인민권력’으로의 전화, 또는 ‘사회적 권력’으로의 전화를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코뮨’과 코뮨의 직접 민주주의적 국가 장치의 형성은 생산자와 인민들의 실질적 민주주의로서 그 자신의 권력으로 전화는 핵심적인 교두보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두보는 혁명 이후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이전에 이미 조직된 권력으로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혁명과 사회변혁은 두 개의 단계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변혁 과정은 이런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4. 사회주의에서의 물리력이나 생산력은 ‘경제학적 관점’에 의해 조직되거나 형성되지 않는다. 생산자와 인민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 실현으로 전화되지 않은 생산 방식은 노동하는 자의 내적 동력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외적 강제를 필요로 한다. ‘공산주의적 도덕’이나 ‘조직-행정공학’, 그리고 ‘시장’은 이와 같은 외적 강제이다. 따라서 내적 힘을 사회적인 생산의 힘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전화는 물질적 이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자들과 인민들의 내적 생명력을 ‘공동체적인 삶’의 활력으로 바꾸어 내는 총체적인 관계성의 형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경제적인 물질적 이득에 의한 유인 동기의 부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을 포함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녹아들어가는 ‘코뮨’적 삶의 가치 실현 그 자체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5. 주체 형성은 전위와 대중의 이분법이 아니라 대중의 역능성이 자기 삶의 실현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리하여 생산자와 인민들이 자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 공동체적 삶의 실현 주체가 되는 정치-사회-문화적 주체 형성 과정이 되어야 한다. 당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주체 아니라 대중들의 직접 통치와 대중적인 자치 권력을 형성하는 길을 안내하고 대중 속으로 사라지는 정치조직일 뿐이다.

6. 행정공학 또는 이성중심적, 또는 과학지상주의적 견해는 폐기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이행에서 ‘민주주의’가 핵심적인 문제 중에 하나인 것은 ‘생산의 사회화’를 이룩하고 사회 전체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핵심이 산술적이거나 기계적인 회계가 아니라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의견조율, 그리고 상호 이해에 기초한 민주적 합의의 도출이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은 ‘정치’이며 ‘행정공학’과 ‘과학’은 이것에 복무하는 자료 또는 수단에 불과하다.

7. 산술적인 가치의 단순화는 모든 인간을 평균적인 인간으로 규격화하는 것으로, 결국 강제적인 폭압적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치의 다양성과 상호 차이의 이해가 공유되어야 하며 이를 기초로 한 코뮨적 삶의 공동체성이 형성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