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대중의 의식과 급진화

「과연 고대생은 친자본적인가?」(『다함께』58호)에 대한 비판

2005년 5월 창간호

들어가며


『다함께』58호에 「과연 고대생은 친자본적인가?」(이하 「과연 고대생은…」)라는 글이 실렸다. 글에서는 ꡔ정세와 노동ꡕ 제2호에 실린 「이건희의 名博 학위 수여 반대 시위」(이하 「이건희…」)에 대해, “대학과 국가, 언론 등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에는 동의”하나, “시위를 둘러싼 많은 이들의 반응을 두고, 전반적으로 친자본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정확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오늘날 사람들의 의식 상태가 전반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며, “이것은 온전한 그림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모습”은 “경제 위기가 부른 사회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를 부르고 ... 첨예한 사회 모순들이 여러 투쟁들을 불러오고, 이런 과정이 사람들의 급진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진보적’ 강령을 내세운 민주노동당”이 “창당한 지 5년 만에 의회 진출한 데다가 당원 수는 이미 6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을 들고 있으며, 따라서 “이건희 시위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은 오히려 이러한 양극화와 급진화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논지는 타당한 것인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글의 필자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글의 요지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며,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또한 그렇게 보인다.



1. 인용된 ‘통계’에 대하여


통계는 대개 여러 가지 오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통계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연 고대생은…」에서 상당 부분을 통계에 근거하여, "이런 점들을 근거로 볼 때, 비록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전반적으로' 친자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통계에 대해 약간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ꡔ고대신문ꡕ의 설문 조사에 대한 「과연 고대생은…」의 인용을 보자.


“전문가까지 동원된 <고대신문> 설문조사에서도 54퍼센트의 학생들이 탄핵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시위에 대한 동의 여부에서는 30퍼센트가 시위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특히 문과대의 경우, 50퍼센트가 넘게 시위에 대한 지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는 ꡔ고대 신문ꡕ의 설문 조사에 대해 위와 같이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ꡔ고대 신문ꡕ의 설문 조사 보도 내용은 이러하다.


“먼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라는 질문에 47%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동의한다’가 31%, ‘잘 모르겠다’가 22%로 뒤를 이었다. 시위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61%의 학생들이 ‘폭력적이다’라고 답했고, ‘폭력적이지 않았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12%에 그쳤다.... ‘다함께와 총학생회가 사과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답변자 중 59%가 ‘사과해야 한다’고 답했다. 총학생회장단 탄핵발의에 대해서는 54%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동의한다’는 의견은 27%로 나타났다. 이어 임시전학대회에서 탄핵발의안이 기각된 것에 대해 47%의 학생이 ‘동의한다’고 응답했으나 ‘동의하지 않는다’도 30%에 달했다. 전체적으로 학생들은 시위 학생들의 행동에 폭력성은 인정하면서 다함께 및 총학생회의 사과를 요구하지만 총학생회 탄핵에는 반대하는 양상을 보였다.”


“단과대학 중에서는 문과대와 사범대 학생들이 5․2사태에 대해 우호적이며 공과대와 경영대 학생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드러났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문과대 학생의 52%가 ‘동의한다’, 28%가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응답했다. 이에 비해 공과대 학생들은 26%가 ‘동의한다’, 59%가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응답해 정확히 반대로 나타났다. 또 5․2사태에 대한 사과 여부에 대해 문과대 학생 44%가 ‘사과해야 한다’, 39%가 ‘사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응답했으나 반대로 공과대는 78%가 ‘사과해야 한다’, 9%가 ‘사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응답해 문과대 학생과 공과대 학생의 입장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1)


ꡔ고대 신문ꡕ의 설문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30퍼센트가 시위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분명하게 밝혔”지만, 47%의 학생들 또한 분명하게 시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학생들의 시위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61%이고,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하는 이들은 59%였다. 총학생회 탄핵에 대해서는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54%로 더 많기는 하나, 탄핵 발의안이 기각된 것에 대해 반대한 이들의 비율은 30%로, 시위에 분명하게 찬성한 이들의 비율과 비슷했다. 또한 “50% 넘는 비율이 시위를 지지한 문과대”가 있는 반면, 59%가 시위에 반대하는 공과대도 있었다. 더욱이 시위에 대해 54%의 지지를 보인 문과대 역시 44%가 '사과해야 한다'고 하였고, 공과대에서는 78%가 '사과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설문 조사만으로 본다면, “시위는 폭력적이었고, 또한 시위 학생들은 사과를 해야 하나, 탄핵은 좀 지나친 면이 있다” ― 이 정도가 설문에 대한 평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에는 “4만 명이나 참가한 한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설문조사”에 대한 인용을 보자.


“4만 명이나 참가한 한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는 40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 고대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만 명이나 참가한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설문 조사”는 2005년 5월 4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미디어 다음’의 ‘이건희 회장 고려대 학위수여식 시위, 어떻게 생각하세요?’로서, 이 설문의 결과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다’가 15,640명으로 37.6%, ‘지나친 행동이다’가 25,087명으로 60.3%, ‘판단유보’가 864명으로 2.1%”로 집계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37.6%의 사람들이 시위를 지지한 반면, 지나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60.3%였다.

이상 「과연 고대생은…」에서 인용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시위에 대한 지지도가 30% 초반에서 후반 정도가 되는 듯하다.2) 이를 두고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는 "비록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전반적으로' 친자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즉, 60%의 사람들은 시위에 대해 반대하나, 30%-40%의 사람들은 시위를 지지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총학생회 탄핵과 같은 상황은 50% 이상의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무슨 “대중이 전반적으로 친자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는 것인가 하는 주장이다.3)

그는 거의 전적으로 통계에 의존해서 현상을 분석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일하게 통계에 의존해서 이야기해보자. 이런 설문 조사는 어떠한가? “지하철 노조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화물연대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LG-칼텍스 정유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병원노조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시아나 조종사 노조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십니까?, 지지하십니까?”라고 말이다.4) 이미 지나간 사안들에 대해 국민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대중들이 자신의 기반에 따라 동요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소부르주아 대중들의 동요가 주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그의 말처럼 “이런 점들을 근거로 볼 때, ... 친자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의 “이런 점들의 근거”는 대중이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는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럼 내가 ‘포섭된 대중’을 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2. 다시 ‘포섭된 대중’에 대하여


먼저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가 “대학과 국가, 언론 등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대중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니, 다시 한번 ‘포섭된 대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명하는 가운데,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는 그가 비판하는 글의 요지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또한 말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야기한 것들이 “대중들이 전반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희…」에서 ‘포섭된 대중’과 관련하여, 내가 말한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현재의 지배적 사상은 부르주아지의 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다시 사회적 물적 토대를 공고히 하는데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한 사상 역시 존재한다. 이것은 낡은 사상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이며, 이 사상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발전에 대한 요구를 올바르게 반영할 수 없다. 이것이 이데올로기 투쟁이 중요한 이유이며, 우리가 이데올로기 투쟁을 시작하는 이유이다. 이상이 내가 말한 요지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물질적 생산을 전유한 계급의 사상이었다. 물질적 생산을 전유한 계급은 정신적 생산까지 전유하였다. 왜냐하면 사상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닌, 오로지 사회의 물적 관계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상이 자본주의적 사상임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의 대중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본주의적 사상에 젖어 있으며, 또 그 사상을 재생산하고 있다. 한 개인으로 보면,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대부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 또한 그 생산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대부분의 집단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학교 선생은 그가 투철한 자본주의의 전도사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사상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방송국의 PD, 작가, 아나운서 등이, 신문사의 기자들이 특별히 투철한 자본주의의 파수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사상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런 저런 예술가까지 그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상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은 다시 토대를 공고히 한다. 이것이 ‘포섭된 대중’들의 실체이다.5)

이처럼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주의적 사상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화(體化)되어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언론을 통해, 이런 저런 대부분의 것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재생산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한, 그리고 그 관계를 뒤엎어버릴, 새로운 사상으로의 의식적인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즉, 스스로의 의식적인 자각이 없고서야 재생산의 굴레를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는 “급진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는가?



3. 이른바 ‘양극화’, ‘급진화’의 문제


먼저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는 “오늘날 경제 위기가 부른 사회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를 부르고”, “첨예한 사회 모순들이 여러 투쟁들을 불러오고, 이런 과정이 사람들의 급진화를 부추기고 있다”라며, “일례”로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례로 ‘진보적’ 강령을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창당한 지 5년 만에 의회 진출한 데다가 당원 수는 이미 6만 명을 넘어섰다. 열린우리당의 사이비 개혁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의 일부가 우경화되어 한나라당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일부는 민주노동당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급진화의 일례”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대중의 의식적인 자각을 표현한 것인가? 독일사회민주당의 예를 들어보자. 독일사회민주당의 당원 수는 한 세기 전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1차대전 시기, ‘조국 방위’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각국의 노동자들에게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 또 대전의 후반기와 종전 후, 독일의 공산당과 혁명을 잔인하게 짓밟은 것은 누구였는가? 현재 영국의 노동당을 위시한 유럽의 집권 좌파 정당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노동자-민중을 탄압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데,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과 6만 당원으로 “급진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가 말하는 “사회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 부르고 있다”는 것은 대중의 “급진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부르주아 의회 공간에서의 사회민주주의 당의 성장’이 “급진화의 일례”라고 하나, ‘부르주아 의회 공간과 사회민주주의 당의 성장’을 백만 번 조합해도 그곳에서는 대중의 “급진화”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한계와 실패를 통해 경험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들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지, 사회민주주의 당, 즉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급진화”의 예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급진화”의 예는 최근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같은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각하고 전투적으로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섭된 대중’이라는 명제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혁명적인 사상에 의지하지 않을 때, 자각한 그들 역시 언제나 동요할 것이기 때문이다.6)

모범적인 투쟁으로 72일간의 파업투쟁을 사수한 울산플랜트 노조를 보자.

그들은 스스로 자각하고, 조직하고, 싸웠다. 그들의 투쟁이 얼마나 흔들림 없고, 모범적이었는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5월 27일 그들은 기만적인 합의안에 환호하였으며, 6월 1일 86.4%라는 지지로 그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지금은 합의안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가를 모두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대중은 자신의 경제적 토대를 통해 스스로 자각한다. 하지만 또한 동요한다. 그러한 자각과 동요를 통해, 즉 실패와 성공을 통해 대중이 스스로 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안 된다. 경제적인 자각을 정치적 자각으로 비약시키기 위해서는, 경제 투쟁을 정치 투쟁으로 비약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의식이 물적 토대 모순과 지양을 올바르게 반영한 혁명적 사상이며,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적인 노력의 집합체는 궁극적으로 당이어야 할 것이다.7) 물론 그러한 당, 다시 말하면 혁명적 정당과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가 “급진화”라고 언급하고 있는 민주노동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도 분명하다.



4. 『다함께』58호의 또 다른 글


ꡔ다함께ꡕ 58호에는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사기당한 패배자들인가?」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71일간의 영웅적 투쟁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고, “협상 자체를 거부하던 건설 자본가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었”으며, “협상 내용을 보면 아쉬운 점은 많”지만, 투쟁을 통해 “4월 국회에서 노무현이 함부로 비정규직 개악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만들었고, ... 6월 국회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다리 구실을 했고”, 또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에 있다고 하며”, “요구안을 보더라도 노동자들은 불법하도급 규제, 노조 인정 등 의미있는 양보를 얻어 냈다”고 하며, “일부 급진 좌파들”의 “종파적 태도로는 역동적인 노동자 투쟁에 올바로 개입하거나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도 없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협상 자체를 거부하던 건설 자본가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소위 이러저런 이들의 중재자들을 통해 합의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영웅적 투쟁”을 갉아먹은 것이 아닌가? “협상 내용의 아쉬운 점은 많지”만, “4월 국회에서의 개악안 통과를 막고, 6월 국회를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고? 「과연 고대생은…」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성장을 급진화’라고 이야기하더니, 여기서는 ‘6월 국회’ 운운이다.8) 이는 민주노동당을 통한 ‘다함께’의 기생전술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울산플랜트 투쟁에 대한 ‘다함께’의 평가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에 해(害)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류의 지점을 명확하게 인식․지적하고, 정확한 방향을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다함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다함께’의 평가는 대중들을 의식적으로 고양시키기는커녕, 대중들을 지금의 단계에 안주하게 혹은 더욱 후퇴시키는, 꽁무니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말로는 뭐라고 온갖 혁명적 문구를 떠들어대지만, 결국 그들은 좌익기회주의와 우익기회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나가며


엥겔스는 한 세기도 더 전에(1892년), “독일에서 노동자 운동은 예측할 수 있는 시일 내의 승리를 앞두고 있다”9)고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정확했는가? 왜 승리는 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물론 더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할 문제이나, 올바른 사상을 가진 혁명적 정당의 부재와 그 동일선상에서의 이데올로기적 혼란, 그리고 발달한 부르주아 선전기관들의 영향 등은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일 것이다. 지금은 혼란의 시기이다. 그러한 혼란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의 성장을 급진화의 일례”라고 한다거나, “이건희 시위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은 양극화와 급진화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라는 식의 말들로 현실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역사적인 진보를 향한, 대중들의 혼란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하고, “이건희 반대시위” 역시 그 자체로 양극화와 급진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식의 혼란은 ‘다함께’ 내에도 전반적인 것으로 보인다.10) 운동에 쓸모 있는 것을 주지는 못할 망정, 해만 끼친다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지금은 혼란을 극복할 올바른 사상이 필요한 것이지, 발목이나 잡는 엉터리 사상이 필요한 때가 아니다. ≪노사과연≫




대중의 의식과 급진화

―「과연 고대생은 친자본적인가?」(『다함께』58호)에 대한 비판



김해인 | 회원 |



1) “[특별설문] 학생 잘못 인정하지만 탄핵 동의 안 해 “폭력적이다” 61%, “탄핵 동의 안 한다” 54%”, ꡔ고대신문ꡕ, 2005. 6. 6.


2) ‘오마이뉴스’의 설문 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편향이 충분히 예견될 수 있기에 고려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 설문조사 결과 5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탄핵안 발의는 '과도한 대응'”이라는 것도, 고려대 설문에서도 ‘탄핵은 다소 과하지 않느냐’는 정서가 이미 나타났기에 생략한다.


3) 하지만 이상의 설문 조사만 보더라도,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는 ꡔ고대 신문ꡕ의 설문 조사에서 시위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61%이고,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하는 이들이 59%였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그의 논지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마음은 없다. 이런 설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만 「과연 고대생은…」의 필자가 상당 부분을 통계에 의존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물론 이러한 물음에 대한 결과만으로 대중의 의식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이건희 회장 고려대 학위수여식 시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대중의 계급적 기반에 맞닿아 있는 질문들이다.


5) 물론 목적의식적으로 이러한 사상에 복무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6) “노동계급은 자연발생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끌린다고 자주 말한다. 사회주의 이론이 노동계급이 비참한 이유를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더 심오하고 더 정확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이 말은 완전히 올바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렇게 쉽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 이론 자체가 자생성에 굴복하지 않고, 자생성을 그 자신에 종속시킬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ꡔ라보체예 델로ꡕ가 잊어버리거나 왜곡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노동계급은 자연발생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그리고 계속해서 다양하게 부활하고 있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는 훨씬 더 큰 정도로 그 자신을 노동계급에게 자연발생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밑줄은 인용자)”(V. I. 레닌, ꡔ무엇을 할 것인가?ꡕ, ꡔ레닌 저작집 1ꡕ, 전진, 1988, p. 201.)


7) 다음을 참조하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 권력의 장악(강조는 인용자)”(K. 맑스, F. 엥겔스, ꡔ공산주의당 선언ꡕ, ꡔ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1ꡕ, 박종철출판사, 1992, p. 413.)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유산계급의 집단적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유산 계급에 의해 설립된 낡은 모든 당들과 대립되는 특별한 정당으로 자기 자신을 구성할 때에만 계급으로 행동할 수 있다.(강조는 인용자)”(K. 맑스, F. 엥겔스, 「1892년 9월 2일에서 7일까지의 헤이그 일반 대회의 결의안」, ꡔ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4ꡕ, 박종철출판사, 1995, p. 157.)


8) 물론 의회의 전술적 활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저들의 주장은 의회를 전술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대중의 투쟁을 의회에 매어두자는 것인가?


9) F. 엥겔스, ꡔ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ꡕ, ꡔ마르크스 겔스 선집 5ꡕ, 박종철출판사, 1994, p. 432.


10) ꡔ다함께ꡕ의 편집자인 최일붕, 김하영은 ꡔ진보평론ꡕ 22호에 발표한 「좌파 혁신과 연대에 제기될 몇 가지 문제」에서 ‘민주노동당’을 “개량주의 정당”,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편집자로 있는 신문에 실린 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은 어떤 모습인가? 또 이러한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들 활동가(회원)들의 입장들은 어떠한가?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4호 (200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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