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투쟁 500여일로 돌입하고 있는 금강화섬 투쟁사업장 방문기

장기투쟁 승리를 지원하기 위한 재정적 연대 투쟁을 조직하자!

[편집자 주 : 금강화섬 노동자들의 폐업투쟁의 생생한 경과와 내용 그리고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정세와 노동 7월호에 실렸다.

금강화섬사업장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2004년 3월 금강화섬자본은 자본주의의 과잉생산과 경기침체로 폐업에 돌입하였으며, 이에 금강화섬노동자들은 3승계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500여일의 투쟁을 시작했다. 2004년 3월 이후 금강화섬 노동자들은 금강화섬 민성기 자본에 대한 투쟁, 다음에는 폐업노동자들의 생존권 해결을 요구하는 대정부투쟁, 그리고 현재 경한인더스트리 자본이 인수한 뒤로는 고용승계를 거부한 경한자본과의 3승계를 둘러싼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한자본은 금강화섬을 인수하기 위해 급조된 유령회사로서, 시세차익만을 노리고 분리매각을 주장하고 있는 투기적 자본이다. 물론 이 경한자본의 배후에는 더 커다란 자본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어쨌든 360억원을 꼴아 박은 자본이 조만간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올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다. 특히 7월 22일 금강화섬 문화제 침탈 이후 사법처리 운운하며 재침탈의 가능성 그리고 용역깡패를 동원한 침탈 가능성이 높아졌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름휴가 기간동안 적들의 침탈 가능성에 대비해서 전노투차원에서 공장사수투쟁에 연대하기 위해서 내려갔다.]



자본의 치부 수단인 사유재산 점거와 생존권 사수투쟁


전노투 차량으로 서울을 지나 이미 어둑한 남구미 IC를 통과하자마자 우리의 목적지 구미 3공단에 위치한 금강화섬에 도착했다. 1달 반 쯤 전 금강화섬에 왔었기 때문에 금강화섬 정문에 붙은 투쟁 플랑카드 그리고 쌓여진 바리케이트가 낯설지는 않았다. 정문 앞에서 규찰을 서고 있던 금강화섬동지가 연대하러 온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잠겨진 철제 정문위로 철제골조물이 뒤엉켜 쌓여져 있었고, 좁은 쪽문의 통로도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며, 한명이 지나기도 좁은 복잡한 미로였다. 그리고 입구에는 “자본과 투쟁하는 동지들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통로를 통과해 들어오면 안쪽 중앙에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의 커다란 공간이 있고, 우측에 연대하러 온 동지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관리동 건물이 있고 좌측에는 커다란 체육관 같은 창고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정면 쪽은 건물이 없어 적의 침탈에 대비해서 정문과 마찬가지로 철재 바리케이트가 처져 있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화공약품으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과 건물사이 틈마다 그리고 정문 앞에도 화공약품 바리케이드가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공장을 사이에 두고 자본과 노동자계급이 대결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자본의 치부수단으로서의 소유권 행사와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공장 사수투쟁이 부딪치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돈벌이를 위해 사유재산권을 내세우며 생존권을 위협하자, 금강화섬노동자들은 아예 소유권의 행사를 부정해버리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절어 있는 자들에게는 기겁할 사유재산권에 대한 부정,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인 삶을 위한 투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존권 사수투쟁이다. 금강화섬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계급의 이해와 노동자계급의 이해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금강화섬동지들은 이 폐업투쟁에서 자본의 사유재산 논리에 굴하지 않고 모범적이고 계급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자본가들의 소유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금강화섬 폐업투쟁은 자본가들의 착취에 맞서는 투쟁과 생존권을 스스로 쟁취하겠다는 노동자의 정당한 투쟁의 요구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가 결코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생산수단인 공장을 점거하고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공장을 결코 내어줄 수 없다는 각오로 투쟁하고 있다.”1)


그런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긴 소방호수가 중앙광장을 가로질러 관리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자본과 정부 측에서 단전과 단수를 했기 때문에 이웃한 한국합섬공장으로부터 급수를 받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그 소방호수는 자본의 고립화시도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연대의 줄을 상징하고 있었다.



연대 투쟁과 규율 속에 지켜온 500여일의 투쟁


바리케이트만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의 침탈에 대비해서 주야24시간 규찰대가 운영되고 있었다. 연대하러 온 동지들도 함께 규찰을 서기로 했고, 내 근무는 새벽 2-4시까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지난번 내려갔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집회와 저녁 마무리 집회를 통해 투쟁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도 11시부터 하루를 마무리하는 야간집회가 시작되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므로 야간집회는 상황실 앞에서가 아니라 관리동 맞은 편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규찰대를 제외한 전 조합원이 소대별로 집결하였다. 집회는 구호 “강고한 연대투쟁으로 폐업투쟁 승리하자!~ 비정규직 철폐 투쟁! 밟아 죽여, 개새끼들! 투쟁!” 이라는 노골적 구호로부터 시작하여, 묵상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후에, 매 번 마다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동지들의 발언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첫날은 서울에서 내려온 우리들 중심으로 간략한 연대의 발언을 수행하였다. 연대 발언 중에 금강화섬노동자들을 투쟁의 현장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는 말들이 있었다. 그랬다. 집회에 그렇게 많이 참여하지 않은 나도 경찰청 고용직 공무원 투쟁현장에서 붉은 티셔츠를 입은 금강화섬동지들을 볼 수 있었다. 금강화섬노동자들은 장애인 이동권 연대, 이주노동자, 철도매점, 한원CC, 경찰청고용직 공무원, 정오교통, 새마을여승무원, 하이텍코리아, 방지거병원, 울산 플랜트투쟁, 하이닉스 매그나칩 등등에서 힘든 투쟁을 전개하는 동지들과 함께한 연대 투쟁을 진행해왔었다. 금강화섬동지들은 연대투쟁을 통해서 단사의 투쟁을 넘어선 계급적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자신들의 투쟁을 강고히 다지는 동시에 또 다른 연대의 기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집회를 주도한 선봉대장이 ‘사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점거농성중이지만 불가피하게 외부로 나갔다 올 동지들은 일일이 사유서를 작성하고 나가고, 그 사유서는 이렇게 매일 저녁 동료들 앞에서 공개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주고 강제해주고 있었다. 금강화섬 동지들의 점거 투쟁은 강력한 규율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집회가 끝나고 12시 가까이 되서 나는 식당옆 휴게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금강화섬동지들과 7월 22일 침탈사건 그리고 코오롱 정투위(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 동지들이 해고자 신분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코오롱 공장은 인근에 있었고, 코오롱 노동자들과 금강화섬노동자들은 동종 업계 노동자들로서 자본의 구조조정에 맞서 연대투쟁을 전개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된 이취임식 집회에도 금강화섬노동자 전원이 연대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화 중에 어느새 금강화섬노동자들의 투쟁이 500여일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에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기록적인 517일간의 투쟁이 생계의 고통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금강화섬노동자들이 지켜온 500여 일간의 ‘위대한 투쟁’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앞에 있던 금강화섬 동지의 눈빛에는 고통과 인내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현재 부족한 투쟁기금은 인접한 한국합섬노동자들이 일인당 3천 원씩 결의를 하여 제공하고 있는 매달 240만원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경한 자본과 당국에 의한 단전 단수에 대해 전기와 물을 제공받고 있었다. 단수가 처음 진행되었을 때 금강화섬 앞쪽에 있는 공원까지 걸어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곤 했었다고 말했다. 한국합섬노동자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점거 투쟁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이루어졌을까? 한국합섬 노동자들이 이렇게 지원하는 것은 그들도 1996년 파업투쟁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업투쟁의 기억은 오래간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학교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한국합섬 노동자들의 재정적 연대만으로는 투쟁기금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생계의 고통은 고스란히 금강화섬노동자들과 그 가족이 온몸으로 부딪쳐 나아가고 있었다.



생계의 곤란과 금강화섬에 미안함을 남겨두고 떠난 동지들


이런 얘기를 뒤로 하고 어느새 2시가 가까워져 규찰을 서기위해 이동해야만 했다. 근무지는 후문쪽이었는데, 후문은 건물과 바리케이드를 가로 질러 한참을 우회해서 한국합섬 공장과 맞닿은 쪽으로 가야만 했다. 금강화섬공장의 멈춰진 장치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생산시설이 자본가들의 수익과 이윤논리로 인해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한 자본가 몇 놈 때문에 200여 금강화섬노동자들의 살기 위한 노동이 멈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다수의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한줌 자본가들의 수중에 생산설비의 소유권과 그 운영자금이 독점되어 있는 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의 현장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했다. 후문에 도착하니 캄캄한 수위실 안에서 앞서 나갔던 금강화섬동지들과 전노투 동지들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나도 금강화섬동지와 많은 얘기를 하려고 했었으나 어둠 속에서 모기들이 수없이 온몸을 공격하는 바람에 대화는 뚝뚝 끊겼다. 기억에 남는 얘기는 주변에 땅값이 많이 올랐고 경한 자본이 땅을 팔면 그럭저럭 이윤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경한자본이 투기 자본일까 아니면, 배후에 엘지 혹은 삼성 등의 거대자본이 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바리케이트가 처져있는 후문으로 다가왔다. 길을 지나가는 단순한 취객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갑자기 후문 철문을 넘어 바리케이트를 넘기 시작했다.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빈틈을 비집고 용이하게 넘는 모습 그리고 같이 규찰을 서던 금강화섬동지들이 불을 비추며 그 노동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봐서 금강화섬노동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금강화섬동지에 따르면 그 남자는 금강화섬을 떠난 노동자였다. 그는 만취가 되어 맨발로 후문 앞을 지나 후문 바로 옆에 있는 기숙사로 통하는 잠겨진 문을 넘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넘지 못하고 풀이 자란 덤불위에 쓰러져 버렸다.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동지가 금강화섬을 떠난 후에도 취중에 자신이 일하던 곳을 잊지 못해 돌아왔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실직의 고통 그리고 투쟁을 뒤로하고 먼저 떠나온 것에 대한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그를 만취상태에서 이곳으로 불러들였을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집회를 알리는 방송 및 투쟁가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침집회는 비가 왔기 때문에 실내에서 이루어졌다.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발언들이 천장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커다란 울림 속으로 계속 사라져 들어갔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는 비가 개였고 족구게임으로 점거투쟁의 일상 속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나는 시원한 바람도 불고 갠 날씨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 상황실에 들어갔었다. 나이 지긋한 사복차림의 방문객이 있었다. 얘길 옆에서 들어 보니 금강화섬에서 함께 일했던 노동자였으며, 폐업과 함께 중국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의 임금으로는 한국 가족에게 돈을 보내지 않는다면 최상류급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생활이 음식도 맞지 않아 얼굴에 붉은 부기가 남아있으며, 중국현지에서의 계약조건이 한국에서 얘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그리고 국내에서 자리를 알아보아야겠다는 그의 또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삶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에 갈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대화 내내 그 중년노동자의 얼굴에서는 의식적으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는 어색함과, 당당하게 투쟁을 지켜내고 있는 금강화섬노동자들 앞에선 자신에 대한 초라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 노동자가 떠난 뒤에 들은 얘기지만 그는 노조위원장 출신이었다. 그리고 금강화섬을 떠난 또 다른 노동자를 만난 것은 그 다음날 새벽이었다. 내 규찰 시간은 새벽 4-6시까지 였는데, 이날 근무지는 정문이었고, 비가 오지 않아 모기는 없었다. 이날 근무 중에도 금강화섬동지와 장기투쟁을 사수하기 위해 생계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날이 밝아왔고 파란 여름 하늘이 군데군데 먹구름 속에 더 빛나보였고, 새벽 공기는 공단지역임에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규찰을 서고 있는 정문 도로 건너편에 트럭 한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장화를 신은 한 사람이 정문으로 다가와 함께 규찰을 서던 동지와 어제 만난 것 같은 어투로 인사를 했다. 사실이었다. 그 노동자는 금강화섬을 그만두고, 매일 아침 돼지운반을 하고 있었으며, 매일 아침 6시 전후에 정문에 들러 얘기를 나누고 가곤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 이외에도 택배를 하는 금강화섬 동지가 들르기도 했다.

자본가의 폐업에 맞서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생계문제로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떠나간 동지들의 마음은 이렇게 금강화섬사업장과 금강화섬노동자들의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자체가 자신과 그 가족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며, 불리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본과의 투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계급에게 파업대항권을 부여한다는 노무현정권의 반노동자적 속물적 발상과 친자본 정책에 다시 한번 역겨움이 끌어올라 왔다. 



장기투쟁을 이끌어 온 금강화섬동지들에 대한 재정적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전날 저녁 9시부터 금강화섬동지들과 소대별로 간담회가 있었다. 간담회 주제는 ‘금강화섬 폐업투쟁 무엇을 남길 것인가’였다. 우리 조에서는 먼저 소대장이 고용보장 쟁취가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뛰어나다고 느낀 점은 업종이 바뀌어도 고용승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경한 자본이 구체적 계획을 제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2억4천만 원으로 현혹하는 술수에 말려들지 말고 고용승계 입장을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랬다. 그런데 너무 원칙적이고 훌륭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다른 말들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현재 투쟁에서 어려운 점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쑥 투쟁에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당연히 장기투쟁으로 인한 생계 곤란의 문제가 나왔다. 이에 한 동지가 이 자리는 생계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주어진 주제에 대해 얘기하자고 하면서, 폐업투쟁이후에는 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투쟁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연결시켜 사고하고 있었으며, 연대라는 계급적 관점을 체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동지가 생계문제를 아예 논외로 하자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지켜온 투쟁과 투쟁정신이 행여 흐트러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방어적 행동인 듯했다. 또 다른 동지는 마지막에는 동지애가 남을 것이라며 단호히 말했다. 이에 대해 나는 승리한 투쟁의 모범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장기 투쟁사업장이 승리할 수 있는 연대적 투쟁기금을 마련한 모범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제 어느덧 500일인데, 앞으로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하며, 승리하기 위해서는 생계문제를 포함한 재정문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나의 주장에 금강화섬동지들은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방안이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 생계문제 혹은 재정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부담인 듯했다. 그리고 생계투쟁을 하는 것은 투쟁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나는 금강화섬이 투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양말 판매를 하면서 동시에 선전활동도 병행하기로 한 계획을 언급하면서, 재정확보도 투쟁의 일환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재정확보투쟁을 통해서 선전하고 다른 동지들에게도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고 했다. 그러자 금강화섬동지 중 한 분이 자신의 생존권사수투쟁을 하는데, 어떻게 다른 노동자들에게 재정지원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며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사의 투쟁기금을 투쟁하는 노동자 본인들이 모두 확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동자들은 투쟁에 연대한다는 차원에서 투쟁기금도 서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금강화섬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시작한 투쟁이 이제 500여일을 넘어섰다는 것은 이제 어느덧 금강화섬투쟁이 그 자체로서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사에 한 획을 긋는 장기투쟁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시기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한 투쟁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금강화섬투쟁이 승리하도록 재정적 연대를 하는 것은 바로 한국 노동자계급 전체의 의무이며 요청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한통계약직노동자들이 투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채권판매를 했던 사실을 예로 들며, 장기투쟁사업장 연대적 투쟁기금의 모범을 마련하자고 재차 말했다. 한국합섬 800명의 노동자들이 3000원을 결의해서 240만원을 마련하고 있는 것처럼, 예컨대 화섬사업장인 금호타이어 4000조합원이 그렇게 결의를 해낸다면 …그리고 민주노총 총연맹차원에서 그런 결의를 해내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금강화섬사업장으로 와서 연대 투쟁을 할 수 없지만, 물질적으로라도 연대하고자 하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도 계좌를 만들어 송금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재정확보투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금강화섬동지들은 좋은 얘기인데 가능하겠냐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투쟁동력을 고갈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키는 재정확보투쟁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협조주의 민주노총의 노조관료를 넘어 연대 투쟁으로 나아가자


금강화섬 동지들의 연대 투쟁은 그 다음날 코오롱 노동조합 이취임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함께 내려갔던 전노투 동지들도 그 집회에 참여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것으로 했다. 그런데 코오롱 정투위 집행부의 이취임식은 코오롱 사내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코오롱사측은 선거가 모두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관위원장을 매수하여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잠적시킨 후에,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공장 내 현장활동을 막아서고 이취임식조차 공장 밖에서 하도록 했던 것이다. 금강화섬동지들은 이런 식으로 밀리기 시작하는 코오롱 정투위 집행부의 미래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 코오롱 정투위 집행부의 전술이 투쟁과 돌파로 바뀌기를 바라면서 그 집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서울에서 협조주의자인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백강욱 화섬연맹 위원장이 온다는 말에 이미 이취임식이 결국 조합원과 격리된 채로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됐다는 판단을 내려졌다.

실제로 집회는 뙤약볕아래 연대하러 온 동지들만이 참여한 채로 정문 밖에서 진행되었다. 이수호 위원장은 ‘기업의 목표는 고용’이어야 한다는 망상을 늘어놓았고, 백강욱 화섬연맹은 코오롱 자본이 ‘양아치’ 자본이기 때문이라며 자본의 본성 자체가 노동자계급을 비열하게 압박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발언들을 했다. 이취임식과 격리된 채 공장안에서 작업 중인 조합원들은 이취임식도 자본에 굴복하여 정문 밖에서 하고 있는 노조집행부의 무기력함에 실망과 그들만의 잔치를 하고 있는 집행부에 대해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었다. 민주노총 관료 협조주의자들이 투쟁을 가로막고 그런 협조주의자들에 의존하는 코오롱 정투위 집행부에 대한 금강화섬동지들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음을 느끼며 뙤약볕보다 더 뜨거운 열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런 협조주의적인 민주노총과 화섬연맹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금강화섬 투쟁 사업장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당장에는 얼마나 가망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과 연맹 특히 화섬연맹조직에서 조직적으로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현장 활동가들은 선전선동을 통해서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전국의 의식 있는 노동자와 계급적 활동가들은 우선적으로 그들이 속해 있는 조직들로 하여금 이들 관료집단이 방기하고 있는 재정적 연대를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금강화섬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의 불을 지켜내고 더욱 크게 타오르게 하기 위한 연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2박3일간의 연대 일정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금강휴게소에 들렀다. 어제 내린 폭우로 강둑을 압도하며 굽이치는 금강의 흙탕물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물이 모여 큰 힘을 이루는 금강의 모습은 500여 일 동안 가열찬 연대 투쟁을 벌여왔던 금강화섬노동자들의 투쟁의 의지를 닮았다. 이제 우리가 그런 금강화섬노동자들의 투쟁에 하나 둘씩 연대해야 한다. 한국 노동자계급이 협조주의자들의 방해를 뚫고 연대를 해 낸다면 투쟁은 바로 저 금강 같은 거대한 힘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에게 연대의 의지를 보내자! ≪노사과연≫


금강화섬노동조합 계좌번호

■대구은행 183-13-016151  예금주 : 김 정 화

■상황실장 전화번호 : 011-505-3270



투쟁 500여일로 돌입하고 있는 금강화섬 투쟁사업장 방문기

-장기투쟁 승리를 지원하기 위한 재정적 연대 투쟁을 조직하자!



김두한 ꠐ 연구위원장 ꠐ





1) 차헌호, 「금강화섬폐업투쟁」, ꡔ정세와 노동ꡕ, 2005.7. pp.67-68.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4호 (200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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