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금강화섬 동지들의 투쟁돌파, 그러나 퇴색한 성과

화섬연맹위원장이 경한자본(이상연 사장)과 직권조인함으로써 금강화섬 투쟁은 565일로 마침표를 찍었다. 타결내용은 손배소 가압류 철회, 고소고발 철회 그리고 5억 5천만 원, 그러니까 1인당 대략 1천만 원 꼴로 떨어지는 액수로 타결을 보았다. 금강화섬동지들의 565일간의 투쟁에 비한다면 비할 수 없으리 만치 미약한 승리였다. 내가 만난 금강동지들은 고통스러웠던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던 투쟁이 마무리 지워진 데 대해서 홀가분해 하면서도 미약한 합의안에 아쉬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연대투쟁으로 이끌어 왔던 565일간의 장기투쟁과 그들이 합의해준 미약한 타결안 사이의 커다란 괴리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금강동지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고립되어 어렵게 투쟁하는 동지들과 연대하며 강화시켜온 모범적인 투쟁이었으며, 또한 마지막까지도 투쟁으로 돌파했던 계급적 투쟁이었다. 그리하여 금강투쟁은 폐업사업장을 포함한 생존권 사수투쟁은 어떻게 강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을 창출했으며, 비타협적 투쟁의 전형을 창출했다. 바로 이런 금강동지들의 강고한 투쟁으로 인해, 화섬연맹위원장의 직권조인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미약하나마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투쟁으로 강화되어 왔던 계급적 생존권 사수투쟁


금강화섬노동자들은 교섭주의를 배경으로 한 노동운동 상층부의 투쟁회피 분위기가 팽배한 속에서 5월에 구미에 있는 자신들의 금강화섬공장 점거투쟁에 돌입했었다. 이 후 금강화섬동지들은 화섬연맹이나 민주노총 차원의 변변한 지원 없이 단사차원의 외로운 투쟁을 강고하게 전개해왔다. 금강동지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오히려 장애인 이 동권 연대, 이주노동자, 철도매점, 한원CC, 경찰청고용직 공무원, 정오교통, 새마을여승무원, 하이테크코리아, 방지거병원, 울산 플랜트투쟁, 하이닉스 매그나칩, 전노투 여름 현장활동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연대 투쟁을 진행해왔었다. 이처럼 금강화섬동지들은 수많은 투쟁사업장에 직접 결합하면서 스스로 연대를 만들어가며 투쟁의 의지를 키워나가고 연대대오를 확대하며 장기투쟁을 사수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경한정밀 이상연사장은 자본가계급의 우월한 위치를 활용하며 노동자들의 폐업투쟁을 생계압박을 통해서 고사시키려 해왔으며, 노동운동진영 상층부의 투쟁회피분위기를 틈타 오히려 1인당 19억 3천만 원이라는 손배가압류 공세를 취했다. 1인당 19억 원의 손배소! 자본은 경제적 법적 우위로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투쟁을 압살하려 했던 것이다.



경한정밀 자본에 대한 직접 점거투쟁


금강화섬동지들은 이런 경한자본의 도발에 다시금 강력한 투쟁으로 화답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창원에 있는 경한자본에 대한 점거투쟁에 돌입하기로 하였다. 경제적 곤란과 적들의 공세에 오히려 금강화섬동지들은 결사투쟁의 의지로 경한자본을 점거하기로 한 공세적 결정이었다. 금강동지들은 이 공장점거를 위한 투쟁을 자신들이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간 투쟁으로 연대하며 다져왔던 조직과 단체에 후방지원을 요청하며 연대 전술을 결합시켰다.

공장점거는 12시에 예정되어 있었고, 연대대오는 그에 맞춰서 사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점거 정보가 미리 샜는지, 9월 27일 당일 집회예정보다 훨씬 이른 8시 경찰이 경한정밀 정문에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27명의 금강동지들은 지체 없이 경한 정밀로 진입하여 일부는 옥상을 점거하고 일부는 사무실 점거에 돌입하였다. 10시쯤 이상연 사장은 백문기 지회장과 단독으로 교섭할 것을 요구했다. 즉, 독대를 요청했으나 당연히 금강동지들은 이런 타협술책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11시경 경한정밀 이상연은 일단 점거를 풀고서 교섭할 것을 경찰을 통해서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금강동지들은 당연히 경찰 병력을 먼저 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술수에 지나지 않았음은 곧바로 대화를 철회하는 것에서 확인되었다. 12시 쯤 지회장에게 연락하여 10분 내로 점거한 노조원을 안 빼면 진압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경찰병력 투입과 함께 30분간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금강동지들은 불상사를 우려해서 격렬한 저항은 하지 않았고 스크럼을 짜고 저항했다. 진입하지 않고 밖에서 사수엄호투쟁을 하고 있던 13인의 동지들은 연행되는 동지들을 막기 위해 닭장차 앞을 가로막고 차 밑으로 들어가면서 연행에 항의했다. 그런데 예정보다 일찍 점거에 들어갔기 때문에 연대대오는 뒤늦게 도착했고, 전노투를 포함한 연대대오도 연행을 막을 수 없었다. 27명의 금강동지들이 연행된 후, 15시에 연대대오와 남아있던 13인의 금강화섬동지들은 연행에 항의하고 경한정밀 진입시도를 했다. 이런 투쟁이 진행되던 중 18시에 지회장과 부지회장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다.



돌발사태와 기회주의자의 개입


연행되었던 동지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감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경찰에 불려가 본 적도 없던 선량한 노동자들, 그리고 장기간 투쟁으로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 연행은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이런 사태를 파악한 일부 원칙적인 지도부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연행되어 돌아온 동지들과 함께 경한자본 타격 투쟁을 배치하였다. 경한정밀 유리창을 박살내고 사장실을 뒤엎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변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이후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조건이 되었다. 그 날 저녁 서울에서 내려온 연대대오들은 당시 기아화성비정규직 지회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대부분 상경했다. 그리고 28일 10시 문화제를 KCC, 금강, 코오롱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수행했다. 집회 후에 상황실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대경본부장 김진년과 화섬연맹 위원장도 참여하였다. 금강동지들은 다시금 경한자본에게 교섭을 취하기로 하였고 교섭자리에 나올 것을 경한자본에게 촉구하였다. 그런데 경한자본 이상연사장은 금강동지들과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경찰을 통해서 해왔다. 이상연은 사장실을 뒤엎은 금강동지들과는 자존심이 상해서 대화를 할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화거부가 한 두 번이었던 것도 아니고 따라서 투쟁으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시도 노력을 거부할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상황실회의에서는 화섬연맹위원장과 대구 경북 지역본부 김진년이 당사자 간 즉 경한 정밀사장과 금강동지들과 대화를 주선한다는 차원에서 경한자본 이상연 사장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을 결정했다. 단지 대화 중재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기회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섬연맹위원장의 상황실회의 결정 위반과 무책임한 행동


화섬연맹위원장과 대경본부장이 가지고 나온 것은 이상연의 최후통첩식의 교섭안이었다. 즉, ‘9월 30일과 10월 4일 양일을 통해 교섭을 마무리 지으며, 이를 위해 모든 집회를 마감하고 대오는 창원을 떠나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투쟁을 접고 협상을 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렇지 않으면 대화를 완전히 파기한다는 협박을 담은 제안이었다. 이런 최후통첩 안을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런 권한도 위임받지 않은, 단지 당사자 간 대화 중재만을 하기로 했던 상황실회의의 결정을 명백히 위반한 월권행위였다. 제대로 된 지도부라면 자본측의 그런 협박에 대해서 오히려 강력한 투쟁으로 돌파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지속적인 집회 및 타격투쟁을 통해서 자본을 압박해야 했을 것이다. 배강욱은 그런 협박성 최후통첩식 안을 가지고 나올 자격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상연의 협박을 배강욱 화섬연맹위원장이 자신의 입으로 확인하여 보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투쟁회피를 노리던 화섬연맹위원장은 금강동지들이 일시적으로 위축된 기회를 포착하여 투쟁회피적 교섭안을 받아왔던 것이다.



내부격론


이런 상황에서 화섬연맹위원장의 위협성 제안은 상황실회의를 이루고 있는 지도부 의견을 첨예하게 양분시키고 결론을 짓지 못하게 만들었다. 565일간의 투쟁을 거치면서 상황실회의를 이끄는 지도부가 그간 얼마나 많은 고뇌와 갈등을 가져왔을지 그리고 국면 국면마다의 투쟁방향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내부격론을 벌여왔을지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 내부 격론이 벌어졌다. 8명의 상황실회의에서 그 안을 받을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에 대해 백문기 지회장을 포함한 협상안을 받자는 쪽과 상황실장을 포함한 투쟁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쪽으로 갈렸다. 상황실 내에서는 통일된 의견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조합원 전체회의로 이 안건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체회의에서도 의견은 통일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전체회의에서 격론으로 양분되자 백문기 지회장은 결정권한을 지회장에게 달라고 요구하였다. 반면에 투쟁을 주장하던 쪽은 앞서 말한 대로 급격히 조합원들의 정서상태가 가라앉자 버린 터였으므로 달리 대안이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백문기 지회장의 요구가 받아들여졌고, 지회장은 그 자리에서 화섬연맹위원장이 가져온 이상연의 제안을 수용하고, 집회를 중단하고 29일 오전 중에 투쟁대오를 창원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집회대오를 뒤로 물린다고 해서 560여일의 투쟁을 전개해 왔던 금강동지들의 투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본에 대해 취했던 압박공세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되는 순간이었다.


  

화섬연맹위원장의 직권조인


9월 30일 백문기지회장 대구경북본부장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3인이 교섭에 들어갔다. 첫째 날은 차이만을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경한자본은 사장실을 엎은 것에 대해 형사책임 운운하며 협박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경한자본은 자신이 내밀었던 최후통첩을 금강동지들이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기고만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0월 4일도 마찬가지로 3인이 참여하였다. 화섬연맹위원장이 직권조인로 앞서 언급했던 지극히 미약한 안에 싸인했다. 그리고 화섬연맹위원장은 자신이 싸인한 직권중재안을 조합원 대중들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마지막 협상안이다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 그는 무엇보다도 직권중재를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고, 최소한 싸인을 하기 전에 금강동지들에게 그 협상안의 수용여부를 물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또 다른 협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 안이 부결되면 화섬연맹 차원에서는 손을 떼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기회주의자는 금강동지들의 투쟁의지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지를 시험하고 그들의 동요를 증폭시켰던 것이다. 그 직권조인에 대해 표결에 들어갔고 사고자를 제외한 38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4, 반대 13 기권 1이었다.



금강화섬 투쟁이 남긴 것


금강화섬동지들이 화섬연맹위원장에 의한 기회주의적 직권중재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승리나마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금강화섬동지들이 보여준 공세적인 투쟁 그리고 연대를 창출해 온 금강동지들의 각고의 계급적 투쟁의 결과였다. 금강동지들의 투쟁은 이수호 집행부에 의해 더욱더 극심해졌던 투쟁 회피적 분위기 아래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투쟁들에 연대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금강화섬동지들은 565일간의 장기투쟁의 마지막 고비에서 조차 공세적 투쟁으로 정리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할 기반을 창출하기도 한 생존권 사수투쟁의 모범과 전형을 창출했다. 계급적 연대투쟁을 조직하라! 자본에 대한 공세적 투쟁을 전개하고 투쟁으로 돌파하라!

그러나 금강투쟁은 과제 또한 남겨두었다. 배강욱 화섬연맹위원장의 직권조인과 그것이 초래한 폐해는 다시금 조합원 대중을 기만하는 노조관료의 월권 문제를 제기하였다. 조합원들에 대한 우선적인 설명과 설득 없는 잠정합의안 형식의 직권조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계급대중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오히려 조합원의 이해에 반하는 것을 통과시키는 수법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동시에 상급단체와 단위노조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였는바, 교섭권 위임의 허구성을 완전히 폭로하는 사례였다. 교섭권을 위임받더라도 그것은 교섭권 위임일 뿐이지 결정권한이 아니므로 잠정합의가 아니라 교섭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단위노조 조합원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나 화섬연맹위원장은 교섭권한 조차 위임받지 않고서 직권조인이라는 횡포를 저지름으로써, 실제 교섭권 위임을 통한 단위 노조 노동자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화섬의 투쟁은, 어떤 주요한 결정도 조합원 대중의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주성과 민주성의 원칙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기회주의적 노조관료 지도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계급대중의 투쟁 의지를 시험대에 올려놓음으로써 지도부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조합원들의 동요를 의도적으로 증폭시켜 친자본 협조주의적인 합의를 강요한다. 따라서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기회주의자의 개입을 막아내고 강고한 지도력을 장악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합원 대중의 계급적 의사가 자주적으로 관철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민주노총과 지역연맹 그리고 업종연맹 등의 노조관료들이 지속적으로 단사 투쟁을 말살하는 현실은 협조주의적 산별노조가 초래할 위험성에 대한 깊은 우려를 갖게 한다.《노사과연》



현장 

금강화섬동지들의 투쟁돌파

그러나 직권조인으로 퇴색한 투쟁성과



김두한 | 연구위원장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6호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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