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고백한다 “자본주의는 이제 폐제되어야 한다!"

그들은 고백한다

독일 총리와 [조선일보] 등의 고백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라" ― 농반의 표현이지만, 그것이 요구하는 바의 의미는 명확하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라 새삼스럽겠지만, 구태여 새기자면 이런 뜻이다. 즉, "표현이 서툴러서든, 정확히 알지 못해서든, 혹은 잘못 생각해서든, 아무튼 어설프게 혹은 엉뚱하게 얘기해도, 듣는 사람이 이를 감안해 그 진의를 올바로 알아들어라!" ― 바로 그런 뜻이다.

5월 27일자 [조선일보]는 "독일총리, 노조 총회서 '이런 노조로는 안된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있다. 정말 개떡 같이 말하고 있지만, 참으로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할 '사설'이다.

'사설'은 이렇게 얘기한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24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노조연맹 총회에서 "새로운 경제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면서 노조가 요구한 시간당 7.5유로(약 9300원)의 최저임금 보장을 거부하고 노조 대표가 기업 이사회에 참여하는 노사공동결정제의 개혁을 촉구했다. ... 메르켈 총리는 "독일은 나날이 강화되는 국제경쟁에 대비해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최고를 위해 경쟁하고 있다. 우리가 누려온 높은 삶의 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가 노조 대표들 면전에서 노조의 요구를 거부하고 노조에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하자 회의장은 충격에 빠졌다고 독일 언론은 전했다.


아무리 사민주의에 병들고 멍든 무기력한 노조라지만, 회의장이 어떻게 충격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누려온 높은 삶의 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기득권을 포기하라!" 다름 아니라, "기득권을 포기하고, 삶의 질이 악화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 이것이 바로 독일 총리가, 즉 독일 자본, 독일자본주의의 정치적 대표가 독일의 노동자들에게, 독일의 인민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요구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아니 객관적 조건과 상황에 비추어 보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것을 여기 한국 자본의 나팔수들도 요구하고 있다. 독일 총리의 그러한 발언을 받아 [조선일보]가, "그래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지켜야 할 소신을 지켜 나가는 메르켈 총리가 더 부럽고 돋보(인다)"며, 노동자․노조에 대해 더욱 강경하고 위압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정부에 주문하면서, 결국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삶의 질의 악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같은 날 [동아일보]도, "노조 개혁 채찍질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라는 '사설'을 싣고,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로 몰고 가는 노조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성토하면서, 그리고 숫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익을 앞세워 노조 개혁을 촉구하는 메르켈 총리가 커 보인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묻건대, 그러면, "기득권을 포기하고, 삶의 질이 악화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라!"는 저들의 이 개떡 같은 주장의 참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는 이제 폐절되어야 한다"는, 부지불식간의 고백이다.

"우리가 누려온 높은 삶의 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기득권을 포기하라." 이 얘기는 결국 막강 독일자본주의조차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독일 인민의 "높은 삶의 질"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으며, 독일 인민의 앞길에는 삶의 질의 악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막강 독일자본주의의 앞길이 그러하니, 그보다 몇 길이나 아래인 한국자본주의의 앞길은 불문가지이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이 그렇게 파쇼적 주문과 요구를 하고 나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회체제가 그 사회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는커녕 더 이상 그 현상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악화만 시킬 때, 그 사회의 인민은 그 사회체제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정이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을 폐절하고, 그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하다못해 최소한 유지시킬 수 있는 체제로 대체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나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아무리 철면피하더라도, 문제를 이렇게 정면에서, 인간의 시각에서, 노동자의 시각에서 제기하고 나서면,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파괴할 뿐인 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그를 위해 인신을 제물로 공양해야 한다고는 어느 누구도 감히 주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누려온 높은 삶의 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저들의 개떡 같은 주장을 "자본주의는 이제 폐절되어야 한다"는, 부지불식간의 고백으로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물신주의적 자본의 시각


그런데도 저들은 직접적, 현실적으로는 "삶이 질이 악화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다름 아니라, 그들은 자본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리인․나팔수로서, 노동자의 시각,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오로지 탐욕스런 자본의 시각, 경쟁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시각, 경쟁의 시각에서는 경쟁에서의 우위를 위해서는 인간의 삶 따위는 하시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것, 아니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이러한 시각, 대량의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자본의 시각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규제완화'니, '구조조정'이니, '노동(시장)의 유연화'니 하는 것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인데, 모두가 다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시켜 자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그것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유는 물론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통해서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예컨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과 같은 신문․방송, 즉 이데올로기 조작기구가 그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러한 '개혁'이 본격화된 것은, 주지하는 것처럼, 김영삼 정부가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이란 것을 들고 나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부터이다. 1987년에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 나오기 이전의 한국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실상 전적으로 무권리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은 '개혁'과 같은 구차한 구호를 동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냥 억압적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1987년의 대투쟁 이후 노태우 정권 시절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면서도 노동자계급의 권익은 일정하게 제도화되어 갔는데, 이렇게 되자 이제 '개혁'이라는 기만적 구호 하에 그것을 잠식․파괴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역할은 김대중 정권 이래, 주지하듯이, 노사정위원회의 몫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노사정위원회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즉,


이 정부가 2003년 9월 '대립적 노사관계'를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로 전환시킨다는 근사한 명분을 내걸고 제시했던 노사 로드맵은 2년 동안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조차 해보지 못한 채 걸려만 있다 정부로 되돌려 보내졌다. 정부는 정부대로 "다음달엔" "다음달엔" 해가며 몇 달째 뭉개고 있는 게 이 나라 실정이다. 그래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지켜야 할 소신을 지켜 나가는 메르켈 총리가 더 부럽고 돋보이는 모양이다.


노동자계급의 처지에서 보면, 노무현 정권의 '개혁' 또한 자본의 어느 대리인 못지않게 노동자들을 빈곤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데, 자본의 전투적 대변자가 보기엔 결코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지켜야 할 소신을 지켜 나가(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끝 갈 데까지 간 자본주의


자본의 이러한 주문은 물론 아무런 물질적 근거 없이 나오는 자의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자본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가 모두를 짓누르고 있는 상황!

그 생산력 발전이, 따라서 그 경쟁이 끝 갈 데까지 가 있는 자본주의의 현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의 어떠한 거인도 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거대한 시장규모 때문에 현대자본주의 대표적, 총아적 산업의 하나로 되어 있는 자동차 산업부문을 보자.

최근 노동운동권에서 발표된 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띈다.


미국의 지엠자동차는 1908년 설립이후 1928년에 포드 자동차를 앞지르면서 세계 자동차 선두기업으로서 부동의 위치를 점해왔다. 75년간 세계 자동차 산업의 정상 기업으로서 지난해만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판매한 기업이다. 그런데 지난해 상반기에는 유수한 국제신용평가회사들로부터 포드와 함께 투자부적격채권으로 신용등급판정을 받았다. 주주자본주의 최고국가에서 저명한 신용평가회사로부터 투자하기 부적격한 기업이라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은 기업에 대한 사형선고와 다름없지 않는가. 지엠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노기연)의 월간 기관지 [민주노동과 대안] 통권83호(2006년 5월)에 실린 "세계화 경쟁에서 밀려나는 미국의 자동차산업"(필자, 심영보 연구원)이란 글의 일절(pp. 96-97)인데, "75년간 세계 자동차 산업의 정상 기업으로서 지난해만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판매한 기업"인 지엠이나 포드, 그리고 "세계 최대 자동차부품업체"(같은 글, p. 101)인 델파이 같은 기업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몰려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지엠이나 포드, 델파이의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는가도 같은 글(pp. 103-106)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물론 애꿎은 예에 불과하지만, "지엠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라든가, "세계화 경쟁에서 밀려나는 미국의 자동차산업"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미국 자동차의 낮은 품질과 고유가로 인해 대형차 수요가 줄어든 것"이라든가, "도요타에 비해 모델 교체시기와 디자인도 떨어진다"든가, "품질개선과 신제품 개발을 위한 ... 연구개발비는 ... 계속 감소해왔다"든가, "투자전략과 경영전략이 미비했다"든가, "핵심산업인 자동차보다는 비핵심인 금융산업에 주력하여 설비과잉과 판매부진을 자초한 것"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바로 끝없는 경쟁을 추구하는 자본의 시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고, 따라서, "노동으로부터 비용과 수익을 짜내는 글로벌 경쟁"(p. 103)을 비판하면서도 다름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경쟁을 주문하는 자본의 시각일 것이다.

지금 지엠이나 포드가 쓰러지느냐, 도요타가 쓰러지느냐는, 그들 자본에게야 아무리 절박한 문제이더라도, 전혀 비본질적인 문제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주의는 이미 그러한 거대 자본조차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에 부딪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끝없는 희생, 끝없는 인신공양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 지 오래고, 그러한 인신공양을 통해서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 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사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자본주의가 그러한 상황에 다다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미 1930년대에 그러한 상황에 다다랐던 것인데, 인류가 그것을 폐제하지 못함으로써 '대표적으로' 제2차 대전이라는 수천만 명의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그 후의 여러 전쟁, 정치적 대학살들이 그와 무관치 않음은 물론이다.

이제 다시 저들은 절규처럼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누려온 높은 삶의 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즉, "자본주의는 이제 폐제되어야 한다!"고.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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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 자본주의 , 위기 , 물신주의 , 삶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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