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에서의 자유의 문제

맑스의 [자본론]에는 그 연구의 지도지침이 되었던 사적 유물론의 기본사상은 물론 그밖에도 많은 철학사상이 풍부하게 함축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테마로서 경제와 결부되어 있는 자유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학문적 관심을 크게 두고 있는 것은 변증법의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본고에서는 자유에 대해서 약간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이 자유의 문제는 경제학이나 노동운동 분야에서는 이미 자주 논의되고 있는 테마이다.

본고를 쓰면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자본론]의 변치 않는 생명력이다. 맑스는 그 제1판 서문에서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히는 것이 이 저서의 최종목적이다」라고 썼다. 그렇지만 오늘날 독점자본이 야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고찰함에 있어, 이 저서가 중요한 기본적 의의를 여전히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새삼 통감하게 된다.



1. 비인간적인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및

   핵무기․군사동맹으로부터의 해방


본고를 집필하기 시작하려고 했던 1997년 8월21일 아침, NHK TV 「안녕하세요!  일본」[이라는 프로](역자 삽입)에서 교량공사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여름의 찌는 듯한 날씨―무려 섭씨 60도의 고온에서―땀이 넘쳐 흐르면서 일하고 있는 현장을 방영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 같은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고 터무니없는 착취를 제멋대로 자행하고 있는 대자본․대기업이 노동자들을 대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태도에 대해서 격렬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은 현대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여전히 대대적으로 존속하고 자행되고 있는 강제노동의 모습인데,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 같은 강제노동은 모두 TV 방영을 대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뿐더러 도시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어디서나 우리들이 목도할 수 있는 것들이다. 기온이 40도 가까운 뜨거운 여름, 도심 한 복판에서 바깥쪽의 거의 모두 유리로 막혀있는 현대적인 고층건물에서 노동자들이 높은 곳에 매달려서 다리가 흔들 흔들거리는 발판 위에 서서 창유리를 청소하고 있다. 여름 땡볕의 무더위,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빛을 온몸에 뒤집어쓰고서 무풍상태의, 지상 몇 십 미터의 공간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고서 우리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찔어찔하다는 등 불평하는 것은 이런 고역에 비하면 천벌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같은 현대건축을 굳이 설계하여 만들고 있는 데에 대한, 게다가 그러한 건축이 하나의 유행이 되기조차 하는 데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에 끓어올라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건축물을 건조하면 몇 만, 몇 십만의 노동자들이 이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날마다 귀중한 생명력을 소진해 가게 되는 일은 불 보듯 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곳이 대기업이고 그들의 「논리」이다. (아주 최근에 고층건물의 유리창 청소를 위한 로봇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맑스는 [자본론]제1권제8장 「노동일」에서 자본(오늘날에는 특히 대자본 ․대기업)은 “살아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흡혈귀와 같이 활기를 찾고, 게다가 그것을 더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더욱더 활기 넘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에서 기술한 노동의 현장은 오늘날에도 이 말이 그대로 맞음을 보여주지 않은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생각은 여러 가지로 교차된다. 핵무기 제조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역, 더 넓게는 핵물질을 매일 다루는 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고역은 어떠한가? 건강한 육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는 두려움은 정말 리얼하지 않은가?  일본에서, 그리고 세계각지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매일 그런 위험에 몸을 맡겨왔고 또 실제 치명적인 손상을 받아왔지 않은가?

국제노동기구(ILO1))는 [세계노동보고](1992년판)에서 오늘날 세계의 각지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노예제․노예노동(slavery)의 경악할 만한 실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그 머리말에서부터 “노예제(노예노동)는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20세기 말에는 많은 사람들은 노예제가 근절되었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93년에조차 수백만의 사람들이 거의 또는 완전히 제로(zero)의 보수로 가슴이 터질듯한 그런 비참한 조건에서 강제적으로 노동시켜지고 있다.”라고 쓰고 있고, 서두에서 노예제(노예노동)은 그 고대적인 형태로조차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예를 들면 노동자를 채무노예로 빠뜨린다든지 여성이나 어린이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일을 시킨다든지 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자행되고 있음이 언급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근대적인 형태로도 자행되고 있다. 은폐되어있는 경우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충격적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고대적인 형태로는 남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예를 들면 파키스탄, 타이, 브라질, 수단 등등, 실로 많은 지역에서의 혹독한 실태를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고, 또한 근대적 형태로서는 노동현장에서의 여러 가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고도의 스트레스, 또 일본의 “과로사” 상황 등에 대해서도2) 보고가 되고 있다.

자본제의 생성기 이래의  임노동자들에 대한 노예노동에 대해서  맑스는 이미 [자본론]제1권의 “제24장 소위 본원적 축적 제6절 산업자본가의 생성”에서 “은폐된 노예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면공업은 영국에서는  아동의 노예노동을 도입하였으나 그것은 동시에 미국에서는 종래에 대체로 가부장적이었던 노예경영을 상업적 착취제도로 전환시키기 위한 자극도 주었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의 임노동자라는 은폐된 노예제도는 신세계에서의 “노골적인” 노예제를 필요로 하였다.


계속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영원한 자연법칙”에 길을 열어주고 노동자와 노동조건사이의 분리과정을 완성하며 한 쪽 끝에서는 사회적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을 자본으로 전화시키고 다른 쪽 끝에서는 인민대중을 임노동자로, 근대사의 이 예술작품인 자유로운〔 살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서 팔 수 있으나 그 외에 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자유로운”……필자〕“노동빈민”으로 전화시키는 데에는 “이와 같은 수고를 필요로 하였다”. 만약 화폐가 오지메([공공신용에 대해서]의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볼에 핏자국을 묻히고서 비로서 이 세상에 나온다”라고 한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자본론] 제1권 pp. 955-956).


맑스가 여기에서 지적하였던 임노동에서의 "은폐된 노예제"는 분명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서 노동자들의 권리도 차차 인정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그 후의 발전에 의해서 당연히 없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국적 기업화를 추진하여 온 독점자본주의(그리고 제국주의)가 점점 더 큰 힘을 떨치고 그들의 지배력을 광폭하게 넓혀가고 있는 현대 세계의 각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존속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을, 곳에 따라서는 임신 중의 여성들을 또 티 없는 어린이들조차 가혹한 노예노동의 멍에를 채워 고통스럽게 일을 시키고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임금 컷트(cut)나 해고의 두려움을 가지고 평소 위협하면서 지금 다름 아닌 일본에서도 “규제완화”를 성원하는 목소리로 규제가 완화되어 자유가 된다 등 하면서 대기업은 오로지 자기 이윤, 자기 자유를 위해서 노동자, 아니 더욱이 근로하는 광범위한 국민대중(중소기업가를 포함하여)의 생존의 자유를 그 예리하게 연마된 발톱으로 점점 더 침해해가고 있다.

그런데 주지한 바와 같이 자유에는 “…으로의 자유”라는 의미와 함께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가 있다 (물론 역사적 시기에 따라서 각각은 구체적 내용을 지닌다). “…으로부터의 자유”는 바로 해방, 비인간적인 상태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을 의미한다3). 노동자의, 넓게는 근로인민이 당면해있는 여러 가지 가혹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의 실현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투쟁의 초점이다.

원래 인간성의 해방을 구하는 정신은 불멸하다. 21세기를 바로 눈앞에서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해보면 일체의 흉폭한 무기․탐욕․비정한 강자들에 의한 기만․간섭․착취․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가 있다. 여기에는 핵무기와 군사동맹의 절박한 위협으로부터의 해방(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이 당연히 포함된다. 아니 포함된다라기 보다도 반대로 이것이야말로 전 지구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가장 긴급한,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대기업, 다국적기업에 대한 민주적 규제를 통한 지구환경의 보전, 인간과 다른 생물사이의 공존(생명의 존중을 위해서)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그런 까닭에 다가올 21세기야말로 핵무기와 군사동맹이 없는 세계, 그리고 일체의 비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해방, 즉 “인간적 자유”의 광범위한 적극적인 실현, 더욱이 지구상의 생명의 보전․존중을 향해서 크게 전진하는 세기가 되어야 한다.

맑스는 젊은 시절(1845년 봄)에 썼던 유명한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제11항에서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일이다”라고 썼다. 이 테제는 오늘날 무언가 새롭게 살아 들리지 않는가? 그것은 이런저런 해석, 더군다나 언어의 조작 등이 아니라 방금 기술하였듯이 그토록 많은 지극히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그와 관련된 사정을 확실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현실을 실천적으로 변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2. 자본의 무제한적인 잉여노동 획득을 위한 충동과,

   노동자들로부터의 자유의 박탈


앞 절의 주에서 정부․재계가 최근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을 점점 더 강화해가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제는 이 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정부․재계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에 대해서 츠지오카 세이진(辻岡靖仁)씨는 「오늘날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의 의의」라는 최근의 논문([노동운동] 1997년8월호)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90년대 후반의 노동시간파괴공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1일 8시간노동제라는 1노동일에 대한 이제까지의 역사적 도달점으로서의 법정최저기준(국제적으로는 1919년 ILO제 1호 조약, 일본에서는 1947년의 노동기준법 제32조)을 파괴하고 장시간노동․심야노동을 노동자들에게 강제하는 정부․재계의 노동시간 정책을 말한다.


이런 공격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이론적 기초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은 [자본론]제1권의 잉여가치설에 입각한 「노동일」이라는 장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맑스에 의하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계, 말하자면 노동자가 그의 노동력의 보전가치를 생산하는 시간과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의 합계가 1노동일이 된다. 그런데 자본은 그의 불변부분인 생산수단에 의해서 될 수 있는 한 보다 큰 잉여노동을 흡수하려고 하는 생래적 충동을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 노동자는 하루 24시간 일할 수 없으며, 수면 및 그 밖의 휴식은 물론 식사․목욕․탈의 등 육체적 욕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를 위한 시간을 노동자들은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노동자들은 더욱이 “정신적 및 사회적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간을 필요하며 그 욕구들의 범위와 숫자는 일반적 문화수준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노동일의 연장에 대한 육체적 및 정신적․사회적인 이런 두 가지 제한은 대단히 탄력성이 풍부한 것이며 변동의 여지가 대단히 크기에, 자본의 갈망은 이런 것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맑스는 “자본은 잉여가치를 구하는 그 무제한적인 맹목적 충동, 그 야수적 갈망 속에서 노동일의 사회정신적인 최대한도만이 아니라 그것의 순수 육체적인 최대한도도 돌파해간다”라고 말한다. 이런 대폭적인 돌파에 의해서 자본은 비인간적인 비참한 노예노동을 노동자에게 강제하게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생산은 노동력 그 자체의 너무나 빠른 소모와 사멸을 생산하기”에 이른다고 맑스는 쓰고 있다. 말하자면 자본은 갖은 수단으로 노동자들로부터 생존의 자유를, 그리고 드디어는 살아야 한다는 이런 최소한의 자유도 박탈한다.

그런 까닭에 자본의 이런 무법적인 충동을 억제하는 표준노동일의 제정이야말로 노동자계급에게는 사활이 걸린 급무였고 맑스는 “표준노동일의 창조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다소 숨어 진행되어온 내란의 산물이다”고 쓰고 있다. 그는 1866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대회에 기고하였던 문서 속에서 “노동일의 법정한계로서 8시간을 제안”하였고, 이런 요구는 “노동자계급, 즉 각 국민 중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또 이런 노동자계급의 정신적 발달을 성취하고 사회적 왕래(Verkehr)나 사회적․정치적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술했듯이 일본에서는 노동기본법에 의해서 1일8시간이라는 현 단계에서의 최저기준이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재계는 대자본․대기업의 입장에서 변형노동시간제, 재량노동제, 야근을 포함한 교대근무제의 확대, 여자보호규정의 철폐 등 노동시간의 탄력성을 위한 “지혜”를 발휘하여 노동자 자신들이 최저기준을 붕괴시키는 것을 강행하려고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생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오늘날의 투쟁은 이같이 기본적으로 [자본론]을 이론적 기초로 삼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자본론]은 낡은 것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흔연한 빛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3. 자유시간이 노동자에게 갖는 중요한 의의


「노동일」이라는 장에서 맑스는  자유시간이 노동자들에게 갖는 중요한 의의를 제기하고 있다.

자유시간이란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적․사회적 활동을 위해서 사용되는 시간”을 말하며 또 보다 상세하게는 “인간적 교양을 위한, 정신적 발달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사회적 왕래(Verkehr)를 위한, 육체적․정신적 생명력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시간」으로도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문화적 생활시간”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시간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님을 맑스는 [자본론]에서 역설하고 있다.

문화(당연히 스포츠도 포함)․학예의 성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해당사회에서 생활상의 시간적 여유라는 조건이 생겨야 한다. 이런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불리는 저서 속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시간적 여유(여가)를 갖는다, 그러한 생활시간을 갖는다(gr. scholazein=to have leisure or spare time)” 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 소비되지 않아도 되는 여분의 시간이 날마다 생활 속에서 얻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여분의 시간, 말하자면 한가로운 시간은 그리스어로 스콜레(schole)라 불려지고 이것으로부터 영어의 스쿨(school)이라는 말이 유래했음은 명백하다. …여가란 단순히 놀면서 보내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하여간 오늘날 사회적 문화적으로 여유 있는 시간은 단순히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만인의 것, 게다가 만인이 전 생애에 걸쳐서 계속 향유하는 것이어야 한다. 독점자본주의 아래에서 대기업의 억압에 항의하여 충분한 자유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쟁취해내고 그것을 유의미하게 사용함을 통해서 각자가 맑스의 [경제학․철학초고](1844년)에서도 말해지듯이 인간으로서, 자연존재(Naturwesen)이면서 이런 것과 통일적으로 결합되어 자각적․정신적․사회적 존재(fur sich selbst seiendes)이고 한사람 한사람이 “전체적(total)인 인간”임을 보여주는 길이 더욱 분명하게 열리게 된다. 방금 전 “인간다운 생활”이라고 말했는데, 만인이 바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본질에 따라서) 충분히 살아가야 할 길이 점점 더 열리게 된다. 자유시간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자기실현을 위한 충실한 시간으로 된다.

우리는 [자본론]의 「노동일」등에 의거하여 필요노동시간, 잉여노동시간으로부터 자유시간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애초의 시점에 서서, 말하자면 모든 인간, 따라서 노동자들은 본래 한사람 한사람이 일개의 “전체적인 인격”이며 그 같은 전체적인 인격이 생활 속에서 무언가 외적으로 강제적으로 분단됨이 없이, 타자에 의해서 억압․착취당함이 없이 다면적인 활동을 벌여야 할 그런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기업이 지배적인 힘을 광폭하게 휘두르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서 우리는 이것에게 민주주적인 규제를 가하고 민주적인 루울을 수호하는 것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회복하고 이것을 점점 더 확대해가야 한다. 이런 것을 통해서 생존의 자유는 물론 시민적 정치적 자유, 더 나아가 ―미제국주의와 거기에 종속해 있는 일본정부의 억압에 대항하는―민족 자유의 확립을 위한 투쟁이 더 크게 전진하고 발본적인 전개를 성취해간다.





4. “인간적 자유”의 전면적인 개화를 위해서


맑스는  [자본론]제1권 제24장 제7절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자본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아래에서 개화했던 이 생산양식의 질곡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게 되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의 외피는 분쇄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弔鐘)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고 있다.

또 [공산당선언]은 다음과 같은 사상을 기술하고 있다.


계급과 계급대립 위에 선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신해서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게 되는 하나의 결합사회가 등장한다.4)


그런데 맑스는 [자본론]제3권 제48장 「삼위일체의 정식」에서 인간사회가 장래에 실현해야할 이념으로서 진정한 “자유의 왕국”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으로의 자유”가 수없이 많이 있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유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노동일을 논하면서도 그 기초 위에 만인에게서의 “인간적 자유”의 전면적인 개화를 인류의 미래에 힘있게 전망하고 있다. 그 곳을 세 개의 절로 나누어 고찰 할 수 있다.

(1) 실제 자유의 왕국은 궁핍이나 외적인 합목적성에 의해 강요되어 노동하게 되는 일이 없어지게 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하게도 본래의 물질적 생산 영역의 저 편에 있다」

그 다음 (2)에서는 저 편에 이르기 전의 이 편, “필연성5)의 나라”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미개인들은 자신의 욕구들을 충족하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며 재생산하기 위해서 자연과 격투해야 하는데, 사정은 문명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니 애초 어떤 사회형태에서도, 대개 가능한 어떠한 생산양식 아래에서도 자연과의 격투는 피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인간의 욕구들과 이를 충족하기 위한 생산력이 확대되어 감으로써 이런 자연필연성의 나라는 차츰 확대해 간다.

맑스에 의하면, 하지만 이런 영역, 즉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물질적 생산의 영역에서는 자유는 아직 다음과 같은 점에 있음에 그치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맹목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과 자연사이의 질료변환에 의해서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이 질료변환을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 관리 아래에 둔다는 것, 즉 힘의 최소한의 소비에 의해서 자신들의 인간성에 가장 어울리는, 가장 적합한 조건들 아래에서 이런 질료변환을 주도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이것은 아직 여전히 필연성의 왕국이다」.

(3) 맑스는 새삼스럽게 이 “필연성의 나라”의 저 편에 있는 진정한 “자유의 왕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나라의 저편에서 자기목적으로서의 인간적 힘의 발전이,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의 기초로서의 저 필연성의 나라를 기초로 해서만 개화될 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이 근본조건이다.


어떠한 생산양식 아래에 있어도 “필연성의 나라”는 존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그것 위에서 자유의 왕국은 개화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힘의 발전, 그것의 충실한 발전이 자기목적으로 존중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힘들(개성, 소질, 육체적․정신적 힘들 등)이 자유롭게 그 본성에 따라서 발전할 수 있다.

결국에는 이 “자유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한 근본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일, 즉 1일 노동시간의 단축이다고 맑스는 단언한다.

이 “자유의 왕국”이 실현되는 것은 어쩌면 「고타강령비판」(1875년)에서 말했던 “개인이 분업(노동의 분할)에 노예적으로 종속하는 일이 없게 되고, 그와 동시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없어지게 된 후, 노동이 단순히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가 제1의 생명욕구가 된 후, 개인들의 전면적 발달에 수반해서 그들의 생산력도 증대하고 협동적인 부의 모든 원천이 점차 풍부하게 넘쳐흐르게 된 후”가 될 것이다고 생각된다. 맑스가 인류 앞에 내걸었던 이념은 이같이 매우 고차원적인 것이다.《노사과연》


[자본론]에서의 자유의 문제*6)


이와사끼 치카츠구|오오사카경제법과대학 객원교수

번역: 김성칠(회원)



1)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과학종합사전](新日本出版社, 일본)에 따르면, 「1917년의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과 그것의 국제적인 영향을 받아 1919년 베르사유강화조약에 의거하여 국제연맹의 한 기관으로 설립되었고 제2차세계대전후, 국제연합의 성립과 함께 46년말 국제연합 경제사회이사회의 전문기관이 되었다. 이런 ILO의 제1호 의제가 되었던 것은 8시간노동법조약이었는데, 이것은 소비에트 정권이 1917년11월11일 [노동일에 관한 포고]를 내어 러시아전체에 8시간노동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나 혁명운동이 유럽으로 파급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제안, 채택되었던 것이다」.


2) 잡지 [노동운동](新日本出版社, 일본) 1997년 8월호, 특집 「붕괴되는 노동시간규제―고발과 투쟁―」에서도 “인간 취급 못하다 노예 이하다”등등 현장노동자들의 분노의 목소리를 게재하면서 비인간적인 가혹한 노동의 실태, 증대하는 “과로사”의 실정, 정부․재계가 추진하는 노동시간의 규제완화․장시간 과밀노동용인․비인간적인 노동(노예노동)의 더욱 확대, 강행을 구체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3) 그밖에 “자유”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시민적 자유, 민족의 자유, 또 선택의 자유 등을 포함한 내적 자유, 더구나 소위 필연성의 통찰로서의 자유 등, “자유”개념의 이 같은 풍부한 내용, 그 함축의 폭 넓음을 그 여러 측면의 구별과 연관, 말하자면 여러 계기들의 통일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야가 넓고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들은 본고의 과제가 아니다.


4) 이 곳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공동사회를 꿈꾸었던 독일의 시인 횔덜린(J.C.F Holderlin)의 다음 시구가 생각난다. 「모두는 각인을 위해서 각인은 만인을 위해서」([히페리온 ]1797․1799년). 이 시구 또한 얼마나 멋지지 않는가?


5) 여기에 나오는 “필연성”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참고가 되리라고 믿는 내 견해를 기술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맑스의 사상을 포이에르바흐의 용어로 이해해서는 안되지만 「철학개혁을 위한 잠정적 명제」에서 포이에르바흐가 “궁핍한(notleidend) 존재만이 필연적인(notwendig) 존재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상기된다. 필연적(notwendig)이란 원래 Not(필요, 궁핍)+wendig(vgl., werden=umdrehen)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필연성은 자유란 필연성의 통찰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필연성과는 직접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 출처: [경제](新日本出版社, 일본)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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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사키 치카츠구 (오오사카경제법과대학 객원교수)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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