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FTA와 자유무역

현대 FTA와 자유무역

"노사과연이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가하다니, 의외다." 지난 3월이든가, 4월이든가, 한미 FTA 반대단체들의 회의에 연구소를 대표하여 참가하고 온 회원이, 거기에 참가한 다른 단체의 대표 한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보고' 겸 웃으며 전한 말이다.

절로 씁쓰레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얘기한 사람의 눈에 비친 우리 연구소의 상(像)이, 그의 주관적 관점과 상관없이, 과히 싫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찌그러진 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미 FTA'라는 당면 문제의 본질과 성격을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의 눈에 비친 '노사과연'의 상은 필시, 계급문제만 중시할 뿐,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백안시하는 단체일 것이며, 어쩌면 나아가서는, 맑스주의적 원칙에 충실하려는 것을 넘어서 '교조주의적'이기까지 한 단체일지도 모른다.

그가 당면의 한미 FTA의 본질과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가 이를 '민족주의적' 혹은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경우, 즉, "한미 FTA는 '국익'에 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식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경우 ― 이 경우, 우리 연구소가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에게는 의외일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그가 성실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 노사과연에도 역시 '애국적인 측면'이 있었구나" 하고 제멋대로 재단하는 대신에, "혹시 이 한미 FTA라는 문제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 노사과연이 그 반대에 참여할 만한 어떤 다른 측면, 다른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에, (여러 정황으로 봐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은 안 들지만,) 그가 문제를, 애국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익 증대, 따라서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자․인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경우 ― 이 경우에도 그가 의외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노사과연을 "맑스주의적 원칙에 충실하려고 하긴 하나, '교조주의적'"이라고, 즉 맑스의 진의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연구소 내부의 일부 회원에 의해서, 물론 다른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맑스 자신은, 그리고 물론 엥겔스도,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 따라서 비맑스주의적, 혹은 반맑스주의적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그것이다.

문제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따라서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비판을 가한 바 있다.1) 따라서 그러한 애국주의적, 혹은 (소)부르주아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왈가왈부하는 데에 대해서 무언가 발언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지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일부의 문제의식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대한 맑스(주의)의 태도

  ― 맑스의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을 중심으로


맑스주의의 창시자들, 그러니까 맑스와 엥겔스가 기본적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여러 기회, 여러 문건에서 그러한 태도를 표명하였지만, 우리는 특히, 1848년 1월 9일에 맑스가 '부뤼쎌 민주주의협회'에서 행한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이하, "연설"]에서 맑스의 그러한 태도를 선명히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혹시) 비맑스주의적, 혹은 반맑스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바로 주로 이 연설을 근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가 이렇게 논란의 여지없이 자유무역에 대해서,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찬성의 뜻을 표명하고"2) 있기 때문에, 현하 한미 FTA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맑스주의적 관점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명했다"는 엥겔스의 서술은, 그 발언 자체만을 떼어내어 자칫 잘못 들으면,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절대적인 지지를 표했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맑스의 연설도, 엥겔스의 해설도 잘못 이해하고, 오해하는 것일 뿐이다.

맑스의 "연설"을 고찰하기 전에 우선 엥겔스의 이 문장부터 고찰해보자. 그 문장을 생략 없이 인용하자면, 이렇다.


일정한 사정 하에서는, 즉 당시의 독일에서는 보호관세가 산업자본가들에게 여전히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무역이 결코 노동자계급의 모든 고통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 또한 반대로 이들 고통 자체를 증대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도, 그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좀 더 애매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맑스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는 엥겔스의 말이, 맑스가, (오늘날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혹시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를 철회, 혹은 유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 이 자체만으로는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맑스의 "연설" 그 자체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런데, 만일 독자가, 맑스가 문제의 "연설"에서 보호무역제도나 보호관세제도에 대한 비판을 세세히 전개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또는 혹시 더구나 맑스가 자유무역을 그 자체로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실 맑스의 "연설"은 자유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 특히 "자유무역이라는 천년왕국에서는 [노동자들의 ― 인용자] 빵의 크기가 2배로 될 것"3)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에 대한 비판에 가장 많은 시간, 혹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가 이렇게 자유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에 "연설"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것은, 당시 자유무역의 전도사였던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들의 대부분이, 자유무역을 통해서 수입이 자유화되고 그리하여 값싼 곡물이 수입되게 되면, 빵값이 싸져서 그만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한다는 식의 허위의 선전을 해댔기 때문이다. 영국 자유무역론자들의 그러한 허위선전은 물론 자유무역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맑스가 논박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자유무역제 하에서는 빵을 비롯한 식료품이나 기타 다른 상품의 가격이 내려갈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화폐액으로 더 많은 상품, 즉 생활수단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맑스는, "의문의 여지없이, ... 모든 상품의 가격이 내려간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유무역의 필연적 귀결이며, 그리하여 나는 1프랑으로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물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4)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 맑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예컨대 노동자 생활수단의 가격 하락은 필연적으로 임금을 하락시킨다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 혹은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물가의 하락은 소비를 증대시킬 것이며 이는 생산을 증대시켜 다시 임금을 상승시킬 것, 운운하는 주장에 대해서이다.

아무튼 자유무역 찬양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얼마나 신랄한가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명백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상황에서 자유무역이란 무엇인가? 자본의 자유입니다. 아직 자본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약간의 국민적 장벽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자본의 활동을 완전히 해방한 것이 될 뿐입니다. 자본에 대한 임노동의 관계를 존속시켜두는 한, 설령 상품의 교환이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수행된다 하더라도,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자본을 보다 유리하게 사용하면 산업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간의 대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무역론자들의 자만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적으로 그 반대입니다. 결과는, 이 두 계급의 대립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

노동자는, 자유로워진 자본도, 결코 관세장벽에 의해서 시달리는 자본에 못지않게, 자신을 노예로 삼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의 자유인가? ... 그것은 자본이 누리는, 노동자를 압살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라는 관념은 자유경쟁에 근거한 상태의 산물일 뿐인데, 어떻게 해서 여러분은 이 자유라는 관념에 의해서 자유경쟁을 승인하려 합니까?

... 전세계적으로 형성되는 착취를 보편적인 우애(allgemeine Brüderlichkeit)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는 것은 단지 부르주아지의 품속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관념입니다. 자유경쟁이 한 나라의 내부에서 불러일으키는 모든 파괴적 현상은 세계시장에서는 더욱 거대한 규모로 재현됩니다.5)


그런데, 이렇게 자유무역, 혹은 그 찬양론자들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맑스는, 앞에서 본 것처럼,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맑스 자신의 발언을 들어보자.


여러분, 우리가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가 보호관세제도를 변호하려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입헌주의와 투쟁한다고 해서, 절대주의의 편인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보호관세제도는 단지, 한 나라 내에 대공업을 육성하는, 즉 그것을 세계시장에 의존시키는 수단일 뿐이며, 세계시장에 의존하게 되자 마자 이미 많건 적건 자유무역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보호관세제도는 한 나라 내부에서 자유경쟁을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컨대 독일에서와 같이,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의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 나라들에서는 그들은 보호관세를 획득하기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 보호관세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며,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들의 힘을 결집하고 국가 자체의 내부에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Aber im allgemeinen) 오늘날, 자유무역제도는 파괴적으로 작용함에 반해서,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입니다. 자유무역제도는 종래의 국민성(Nationalität)을 해체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극한까지 밀어부칩니다. 한 마디로,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6)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Und nur in diesem revolutionären Sinne, meine Herren, stimme ich für den Freihandel.)!!! ― "연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을 염두에 두고, 위의 긴 인용문에서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

우선, "우리가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가 보호관세제도를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는 '보호무역'을 옹호하고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7) 하물며,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일부 한미 FTA를 광적으로 옹호하고 추진하려는 자들이 악의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음으로,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의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 나라들에서는 ... 바로 그 보호관세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이다." ― "일반적으로는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맑스의 경우 이에 반대하는 것이 두말 할 나위없이 당연하겠지만, 보호관세가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는 어떤 특수한 경우에, 맑스는 그 보호관세에 대해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러한 경우 그가 기꺼이 보호관세에 찬성했으리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판단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곡물법(1815-46)을 폐지하기 위해서 자유역론자들과 한패가 되어 지주들과 싸운 영국의 노동자들에 대한 맑스의 언급도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들에게, 자신들이 그들의 기만이나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토지소유자들에 대항하여 자유무역론자들의 편에 섰을 때, 그것은 봉건제도의 최후의 유물을 해체하고, 나아가 더 상대할 적을 단 하나밖에는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8)


"봉건제도의 최후의 유물을 해체하고, 더 상대할 적을 단 하나밖에는 없게 하기 위해서"!

더구나 맑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노동자들은 계산에 착각을 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주들이, 공장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과 협력하여, 노동자들이 30년 동안이나 요구해왔으나 허사였던 10시간[노동]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법은 곡물법이 폐지된 직후 통과되었다.9)


이러한 논의를 보면, 맑스가 보호관세제도에 무조건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무조건 찬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자유무역 그것이 "종래의 국민성을 해체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경우에만, "한 마디로, ...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자유무역을 찬성했던 것이다.10) 그리고 그가 보호관세제도를 "일반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당시 그것이 "일반적으로 보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당연히, 만일 어떤 경우에, 즉 예컨대, 보호관세(제도) 그것이,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며, "부르주아들의 힘을 결집하고 국가 자체의 내부에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한 수단"인 경우,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발전시키고, 그리하여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맑스는 자유무역을 찬성했는데,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느냐" 하는 식의 문제제기는, 우선 그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인 현재 그 한미 FTA라는 것이 과연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정당한 문제제기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Und nur in diesem revolutionären Sinne, meine Herren, stimme ich für den Freihandel.)!!! ― 이 마지막 결론적 발언이야말로 이 경우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 FTA의 반동성과 반대투쟁의 혁명성


그러면 과연 한미 FTA는, 혹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특히 미국 주도의 FTA, 즉 '자유무역협정'은 그 자체로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것을 반대할 필요가 없거나, 반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찬성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FTA, 즉 '자유무역협정'은 그 자체로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가" 하는 식으로, 즉 "그 자체로서"라는 말을 삽입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 방식 자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이유는, 현재 FTA 그것은 '대체로 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그 자체에 예정된 목적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것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인민을 혁명적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다시 그것이 "대체로 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반대투쟁 내부에는 다분히 반동적 성격의 반대투쟁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문제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따라서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비판을 가한 바 있다"고 썼지만, 실제로 예컨대, "한미 FTA는 공화국 주권을 미 제국에 실질적으로 할양 양도하고자 하는 주권 반환 협정의 성격"(최형익 교수)11) 운운하는 식의 '반대투쟁', 즉 한미 FTA에 대한 그러한 애국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과 반대, 반대투쟁은 극히 반동적이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해체해야 할 "국민성"(Nationalität)을 해체하기는커녕, 애국주의적으로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동은, 그것이 아무리 [조선일보] 같은 극우를 분노하게 만들더라도, 사실은 그들과 국가주의․애국주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그만큼 노동자들을 오도하는 극히 해악스러운 것이다.12)

다시 우리의 본래의 문제로 돌아오면, 나는 우선, 맑스가 19세기 중엽에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을 본떠서, "자유무역이라고 하는 기만적인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 즉 FTA는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라 그 반대물, 즉 대표적으로 이른바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나 의약품 등의 특허권 강화․연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기생적인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자유무역'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보호무역' 장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FTA란 WTO 체제 내에서의 상품 및 자본시장의 독점과 배제 전략에 다름 아니고, 이는 당연히 전반적인 과잉생산․과잉축적에 의해서 자극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블록(bloc) 경제이다."13)

사실 신자유주의의 '자유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자유무역협정의 '자유무역' 또한 기만적이고 "희극적"인 것인데, 그것은 이미 1880년대에 엥겔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오래 전에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기"14) 때문이다. '자유무역'이 '자유무역'으로서 진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1930년대의 파괴적인 블록 경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반성으로서 제국주의 열강은 제2차 대전 후에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GATT를 창설했다. 하지만, 주요 가맹국의 산업이 제2차 대전을 통해서 철저히 파괴된 결과 각 "국가 내에 대공업을 육성"15)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비예외'보다 훨씬 더 많은 '예외'를 두어 고율의 보호관세 등, 보호무역제도를 용인해오다가, 막상 그 대공업들이 건설되자 '우루과이라운드'를 거쳐 GATT는 소멸되었다. 그리고 '자유무역'으로서는 기만적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보다 강화한 WTO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력과 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의 격화된 모순 때문에 더 이상 19세기적인 자유무역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FTA는, 지난 1930년대의 블록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전반적․만성적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전반적 위기를 해소시키거나 경감시킬 어떤 조건이나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폐지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 따라서 그 위기를 격화시킬 뿐이다."16)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회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에 대한 노동자․인민의 투쟁이 전제될 때에야 성립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한미 FTA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사회혁명을 촉진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미 FTA의 이 측면, 즉 그것이 그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사회혁명을 촉진시킨다고 하는 측면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특히 두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에 반대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맑스는 자유무역에 찬성했고, 그 때문에 자유무역 협정으로서의 한미 FTA 반대투쟁은 오류"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지금 제국주의에, 신자유주의에, 독점자본의 횡포․억압의 강화에 반대하여 일어나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농민에게 투쟁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당연히 반혁명적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오히려 진부할 정도의 얘기지만, 노동자․인민은 투쟁을 통해서 혁명적으로 된다.

둘째로는, 그 반대투쟁을 노동자계급적 노선에 입각하여 올바로 전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투쟁을 벌이되 그 투쟁이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것일 경우에는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반동적인 민중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를 백안시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투쟁의 경우 그것이,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관점과 노선에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노선에서 수행되어야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것처럼, 민족문제 또한 그에 대한 인식과 투쟁이 그렇게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노선에서 수행될 때에만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다. (참고로,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다.) <노사과연>



현대 FTA와 자유무역



채만수 | 소장



1) 채만수, "한미 FTA,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정세와 노동] 제12호, 2006년 4월, pp. 16-21) 참조.


2) F. 엥겔스, "보호관세와 자유무역" [칼 맑스 저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1848)의 미국 판 서문 (1888)], MEW, Bd. 21, S. 382.


3) K. 맑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298. (김수행 역, 제1권 I [상](제2개역판), p. 377.)


4) K. 맑스,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 MEW, Bd. 4, S. 450.


5) 같은 글, SS. 455-56.


6) 같은 글, SS. 457-58.


7) 이 점에서 현하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인사나 단체들 가운데, '애국주의' 혹은 자본의 '경쟁주의'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표현이야 어떻든, 사실상 보호관세를 요구하는, 상당수의 단체 및 인사들과 우리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8) 같은 글, S. 449.


9) 같은 곳.


10) 따라서,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명했다"는 엥겔스의 서술도 당연히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1) 이진석 기자, "FTA저지운동본부 ‘反美보고서’ 파문"([조선일보], 2006년 7월 31일)에서 재인용.


12) 그가 재작년에 "탄핵 무효! 탄핵 반대!"의 깃발을 들고 나선 것도 사실은 그의 이러한 불치의 국가주의․애국주의 체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3) 채만수, 같은 글, p. 20.


14) F. 엥겔스, "[자본론] 제1권 영문 판 서문"(1886), CAPITAL, Vol. I, Progress Publishers, 1977, p. 17. (MEW, Bd. 23, S. 39.)


15) K. 맑스, "연설", S. 457. "보호무역제도는 제조업자를 제조하고, 독립노동자를 수탈하고, 국민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자본화하고, 고풍스러운 생산양식으로부터 근대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강제적으로 단축하기 위한 인공적 수단이었다."(MEW, Bd. 23, SS. 784-85.)


16) 채만수,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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