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국가는 소멸하는가


“국제 카르텔은 자본의 국제화의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 가운데 하나이며, 자본주의 아래서의 여러 국민들 사이의 평화를 기대할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카우츠키)


“최후에는 금융자본이 결부된 여러 가지 비밀협정의 국제적인 얽힘의 증대, 이런 것들은 민족적인 금융자본의 상호투쟁 대신에 국제적으로 결부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 공동착취를 추구하고, 새로운 초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현재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이 구축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아닌가의 검토를 나에게 독촉하고 있다.”(카우츠키)


“제국은 오로지 보편적 공화국으로서, 무한하고 포괄적인 건축물에 구축된 역능과 대항 역능의 네트워크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제국적 팽창은 제국주의와도, 정복, 약탈, 인종 청소, 식민화 그리고 노예 제도를 위해 고안된 그러한 국가 기구들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평화 관념이 제국의 발전 및 팽창의 기저에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전쟁에 의해 그 본성이 규정되는 사회에, 즉 초월적 주권만이 부과할 수 있는 평화라는 초월적인 평화 관념에 극적으로 대립되는 내적인 평화 관념이다.”(네그리․ 하트)


“제국주의 전쟁,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 그리고 반제국주의 전쟁의 역사는 끝났다. 그러한 역사의 종말은 평화의 지배를 가져왔다.”(네그리․ 하트)


자율주의, 오늘날의 무정부주의적 카우츠키주의


카우츠키주의의 초제국주의와 네그리․ 하트의 제국론은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다른 정치적 색깔로 등장했다. 카우츠키는 맑스 주의, 엥겔스의 정통적인 정치적 후계자로 자타가 공인을 하며 독일공산당과 심지어 초기 레닌주의의 형성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자본의 국제화를 통해 형성된 국제 카르텔이 자본주의 국가 간의 협력과 상호연계를 통해 국제적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초제국주의론을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는 고도로 발달한 산업자본주의의 산물로 농업지대를 지배하거나 병합하려는 산업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카우츠키의 주장대로라면 제국주의는 국가 독점자본주의 모순이 곪아 터질 대로 터져서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파멸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제국주의 정책이 아닌 다른 정책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카우츠키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저급한 정의는 결국 1차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하자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는 반동적인 기회주의로 전락하도록 했다. 카우츠키가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미치고 독일 공산당이 주도하던 제2인터내셔널은 조국방위라는 애국주의적 명분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완전히 파산했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은 국민국가를 넘어서 초국적 자본에 의한 국제화가 진행됨으로써 개별국민 국가는 영향력을 상실하거나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국가가 약화되면서 제국주의 국가 간의 갈등도 자연히 소멸되기 때문에 이제는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과 약탈, 폭력의 시대가 아닌 평화의 시대, 제국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주장한다. 네그리․ 하트의 제국론은 혁명과 당을 거부하고 모든 국가권력을 악이라고 보는 무정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가 정치적으로 애국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면 네그리․ 하트의 제국론은 정반대로 범세계주의적이다.

이렇게 초제국주의와 제국론은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색깔을 띠고 등장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몰이해, 제국주의 모순을 은폐하고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체제론자들도 제국론과 마찬가지로 초국적 자본의 등장으로 국민국가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거대 초국적기업과 국제금융기관 앞에서 국민국가는 왜소해 보인다.”(이수훈, ‘세계화, 지역화와 (국민)국가의 위상’)


세계체제론은 자본의 세계화로 인해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자국의 국가를 타도하고 일국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전략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본다. 대신에 다양한 형태의 시민운동으로 반자본운동을 전개하고 민주적 대안질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체제론자들의 주장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개량주의이다. 세계체제론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정하고 개량주의적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려 하는 반면에 자본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도 국가의 역할 축소를 주장한다.


“국민국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세계체제론은 자본의 발전과정을 역사체계 속에서 진행되는 자본을 중심축으로 삼아 자본의 국제화 경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국가를 분석단위로 삼는 것을 주요 논의에서 제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역할이 축소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또 다른 논의로서, 신자유주의론은 국제화 현상을 세계경제의 통합도가 높아져 국가역할이 축소되고 있거나 소멸로 이행하는 현상에 주목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이른바 ‘국경없는 경제’라는 단어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최문환, ‘자본의 국제화와 국가의 역할변화에 대한 연구’)


자본의 국제화와 국가를 둘러싸고 카우츠키주의, 네그리주의, 세계체제론, 신자유주의자들은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직 측면에서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활동을 하면서 당을 긍정하였으나 러시아 혁명 과정과 혁명 이후 볼셰비키와 평의회의 결합을 당독재라고 비난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했다. 볼셰비키가 주도한 러시아 혁명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카우츠키주의는 자율주의자들의 문제의식과 역사적 뿌리를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카우츠키는 사회민주당을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분쇄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변형시키는 주체로 사고했는데 반해 자율주의는 당 자체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다.

네그리․ 하트의 자율주의는 당과 지도로부터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평의회공산주의자와 맥을 같이한다. 평의회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평의회(소비에트)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당의 일방적인 지도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한다. 평의회공산주의는 로자의 자발성 테제의 한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당에 대해 전면적 거부, 부분적 거부를 하고 있다.


“조직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계급 전체에 의해 수행될 자발적 투쟁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반란,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당과 노조와 같은 모든 낡은 조직 형식들에 대한 반란을 동반한 것이며 이를 대신하여 보다 적합한 새로운 조직 형식이 생겨날 것이라고 본다.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조직 형식은 이미 역사 속에 구체적 실존을 드러낸 노동자평의회인데 이것은 혁명적 시기에는 투쟁과 파괴의 단위로, 그 이후의 시기에는 경제적(생산의 관리) ․ 정치적(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의 행사자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되었다.”(이원영, [오늘날의 계급 구성과 ‘자율성’ 개념의 발전], 『이탈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1』)


네그리는 이탈리아 자율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고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그리는 당은 계급을 분열시키고, 국가권력 장악 전략은 권력과 국가에 대한 선망과 존경을 하게 함으로써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축시킨다고 주장한다. 네그리는 유럽연합이 국민국가 간 갈등을 초월하는 제국의 강력한 증거라고 하면서 유럽연합을 찬양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제국으로 계급을 다중(대중)으로 제국주의 모순의 격화라는 자본주의 현실을 평화라는 관념으로 바꿔치기 한다. 자본의 국제화를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전지구적 권력 관계에서의 단절이나 전환”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이고 중요한 지속선들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여러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갈등이나 경쟁이었던 것이, 그들 모두를 과잉 결정하고, 그들을 통합적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그리고 그들을 결정적으로 탈식민지적이고 탈제국주의적인 하나의 공통적인 권리 관념하에서 다루는 단일한 권력이라는 이념에 의해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제국])


네그리의 제국론은 고대 로마제국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즉, 제국에는 평화가 있으며, 제국에는 모든 인민을 위한 정의의 보증이 있다. 제국 개념은 단 한 사람의 지휘자가 지휘하는 전지구적 음악회로, 즉 사회평화를 유지하고 자신의 윤리적인 진리를 만들어 내는 단일한 권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단일한 권력에게는, 필요할 때마다, 국경에서는 야만인들에 대항하여, 내부적으로는 반란인들에 대항하여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무력이 주어진다.”(같은 책)


마치 ‘절대이념, 이성의 형상 및 현실태’라는 헤겔의 국가에 대한 관념을 보는 듯하다. 다만 근대국가에 대한 헤겔의 찬양이 제국에 대한 찬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네그리는 조세, 노예 노동력 과 진귀한 생산품 확보 등의 목적을 위해 영토를 병합한 고대의 제국과 자본수출, 상품판매시장 확보, 원료, 저임금의 노동력 확보를 원하는 독점자본주의의 이해를 대변하는 현대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을 분석하지 않고 암시적 문장, 시적언어와 경구적 표현으로 대신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제국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의 최초의 매우 정교화된 실례를 제공한 것은 아마도 걸프전이었을 것이다. 정당한 전쟁 개념의 부활은 단지 제국 등장의 하나의 징후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도발적이고 강력한 징후인가!”(같은 책)


“제국은 힘[무력] 자체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권리와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다.”(같은 책)


네그리는 걸프전 같은 제국주의 전쟁을 옹호하면서도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네그리의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제국에 의한, 평화의 관리자에 의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물론 네그리가 제국을 찬양하는 이유는 단순하지가 않다.


“제국이 즉자적으로 좋다고 말하는 것이 제국이 대자적으로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국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종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자신이 파괴한 권력관계들보다는 많은 점에서 더욱 잔인한 착취에 기초한 자신의 권력관계들을 구축한다.”(같은 책)


“이 모든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국의 건설은 제국에 선행했던 권력 구조에 대한 모든 향수를 없애기 위한, 그리고 전지구적 자본에 반대하여 국민 국가를 소생시키려는 것과 같은 낡은 배치로 돌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정치전략을 거부하기 위한 전진의 발걸음이라고 주장한다. 맑스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이전에 있었던 사회 형태와 생산 양식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제국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네그리 같은 무정부주의자에게 모든 권력과 이 권력의 기반인 국가는 악이다. 제국은 국가를 약화시키고 소멸시키기 때문에 네그리는 제국의 시대가 더욱 잔인한 착취에 기초할지라도 역사발전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러한 주장을 맑스로부터 빌려왔다고 주장한다. 네그리는 맑스의 변증법적 사고와 방법론, 실천을 왜곡한다.

맑스는 자본의 독점에 바탕을 둔 생산의 사회화와 국제화가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인 물질적 토대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정치혁명, 사회혁명을 통해 자본의 착취의 도구인 국가를 타도하고 사적전유라는 자본주의 모순을 제거한다면 생산의 사회화는 사회주의 생산과 계획을 하는 물질적 기초가 되고 국제화는 일국의 혁명을 국제혁명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해방의 물적토대를 인류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절대 다수 인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혐오했다.

자율주의자들은 맑스의 방법론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제국 자체를 긍정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건설은 피식민지 국가에서의 자본주의의 근대화와 발전을 가져오기 때문에 찬양한다. 자율주의자의 제국에 대한 찬양은 이와 유사하다.

우리의 적은 명백히 자본주의 체제와 그것을 사수하는 최후의 보루인 국가권력이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파괴하고 사적소유를 몰수하고 사회적 소유로 변혁해야 한다. 그런데 네그리는 일국의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국지적이라고 비난한다. 프랑스에서의 1995년 공공부문 파업, 공장점거 투쟁, 한국의 96년 노동법개정투쟁을 해롭다고 까지 말한다.

 

“국지적 저항 전략은 적을 잘못 확인하고 그래서 적을 감춘다. … 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제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국지적인 것을 방어한다는 이러한 전략은 제국 안에 현존하는 현실적인 대안들과 해방을 향한 잠재력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부정하기 때문에 해롭다. 우리는 단호하게 하나의 외부를, 우리의 정치학을 위한 순수성을 상상하는 하나의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같은 책)


네그리는 ‘전지구적 대중권력’ 창출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무너뜨리고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는 전지구적 대중권력이라는 추상으로 현실의 권력을 무시하고 회피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적을 흐리고 적을 가상의 것으로 돌리는 것으로 적을 돕는 이적행위를 한다. 세계화의 문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본의 국제화는 국민국가를 소멸하는 전진의 발걸음이기 때문에 세계화에 대한 찬사를 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제국이라는 관념으로 현실의 제국주의 억압과 착취를 은폐하고 공황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눈 감는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가상의 제국을 신성시하면서 이상주의적, 공상적 환상을 부여한다. 제국론은 제국이라는 관념의 안식처를 만들어서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맑스주의적 언사, 모호한 정치적 수사로 자신들의 기회주의를 은폐한다. 이런 점에서 자율주의자들은 명백히 반동적이다.

특히 걸프전을 “전지구적 권리의 이름으로 미국을 국제적 정의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고 찬양하는 점에서 자율주의자들의 반동성은 극에 달한다. 네그리는 세계경찰, 민주주의와 정의의 확산, 세계평화의 수호자라며 미제국주의가 제국주의적 폭력과 억압, 학살을 감추기 위해서 사용하는 정치적 수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미국 제국주의가 이라크에서 수행하는 전쟁은 괴뢰정부를 통한 민주주의의 파괴, 포로 성학대, 강간, 고문, 대량학살, 인간성 파괴, 피와 억압으로 점철된 유혈적 테러독재다. 제국주의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해서 이러한 명백한 유혈폭력과 테러독재가 사라지는가? 국민국가가 사라지는 제국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폭력을 수행하는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네그리는 베트남, 캄보디아, 남아프리카, 레바논 등에서의 제국주의에 의한 대량학살을 제국주의 시대의 지나간 산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제국의 시대에는 “자, 그러한 근대성이 종결된다면, 그리고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많은 전쟁에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기여한 근대 국민 국가가 세계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잘 떨쳐버린 것이다.”라고 한다.

미국 제국주의의 후원과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민학살, 이라크에서의 전쟁과 대량학살, 민주주의 파괴, 이라크 괴뢰정부는 근대성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제국의 관념으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여기에 어떻게 저항하는가?

도주, 탈출, 유목주의 등 추상적인 네그리적 신조어를 남발하면서 제국에 대항하자고 한다. 자율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회피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객관적 사물, 현실을 가상으로 돌려서 회피하는 관념론이다.

다중이 어떻게 세계 대중권력을 만들어내는가? 더욱 초집중화 되고 강력한 군대와 경찰, 관료를 거느린 금융자본 권력에 대항해 인터넷상의 소통으로 모인 다중의 자율적인 네트워크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자율주의는 도주와 탈주를 제국에 맞서는 주요한 투쟁의 수단으로 보면서 국경을 넘는 이주노동을 유목민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자본의 국제화에 비해 노동력의 이동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제한된다. 국가는 강제추방 정책으로 국내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를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조직화를 가로막는다. 도주와 탈주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에 대항한 조직화와 집단적 투쟁, 국제주의적 단결만이 자본주의 국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맞설 수 있다.

네그리에게 제국에 대항하는 주체는 다중(대중)이다. 네그리는 “산업노동자계급은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특권적 지위와 패권적 지위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산업노동자계급을 대신하여 비물질적 노동력이 점점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맑스 는 생산적 노동자가 잉여가치를 직접적으로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맑스 는 산업노동자계급만으로 노동계급을 한정하지 않았다. 산업노동자계급이 직접적으로 가치를 생산한다면 유통, 판매, 서비스 등 비생산적 노동자들도 자본의 회전을 빠르게 해서 자본축적을 돕는다고 했다. 국가는 사적 자본의 원활한 축적을 위해 보조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때문에 공공부문에도 노동자가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산업노동자계급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산업노동자 계급은 생산적 산업이 축소되고, 자본의 합리화로 인한 구조조정으로 인해 고용인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산업노동자 계급의 비중은 크다. 미국의 금융, 서비스 산업의 발전은 전세계적인 분업구도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굴뚝산업에서의 생산 없이 금융시장, 주식시장 등 가공의 가치가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의 주장은 현대자본주의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현대자본주의에서 인구 구성상 산업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의 비중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남한에서도 교사, 과학기술직, 전공의, 공무원, 특수고용노동자, 정보통신 노동자 등 노동자의 영역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네그리는 어떤 노동은 임금을 받고 어떤 노동은 받지 않고, 공장 벽에 한정되고 사회적 지형을 가로지르는 등의 차이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동질적이지 않고 분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단일한 계급으로 조직화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는 노동조건, 노동의 성격의 동질성 때문이 아니다. 계급은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이다. 물론 현실의 노동자는 자본의 분할전략 때문에 분열되지만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가진다. 자본에 저항하는 투쟁과 학습을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객관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여 점점 더 단일한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노동자 계급의 당은 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일부로서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끌어 올리고 투쟁의 전망과 방향을 제시한다.

노동자계급이 얼마나 많은 힘을 보유하고 있고, 생산에서 얼마나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는 역설적으로 생산을 멈추었을 때 강력하게 드러난다. 노동자 계급이 파업을 하면 자본이 소유한 생산수단은 한낮 고철 덩어리로 전락하고 자본은 이윤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생산과 분리된 개인, 계급으로 단결하지 않은 해체된 개인의 느슨한 집합체인 다중으로는 자본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 



자본은 여전히 국가를 좋아한다!


“제국주의는 실제로 자본에게는 구속복을 만들어 준다―혹은 더욱 정확하게는, 어떤 지점에서 제국주의적 실천들이 창조한 경계선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자본주의 세계 시장의 완전한 실현을 가로막는다. 자본은 결국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내부와 외부 사이의 장애물들을 파괴해야 한다.”(같은 책)


네그리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국민국가의 시대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서 무너뜨려야할 국민국가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국에서의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투쟁의 시대는 갔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국지적인 좌파전략으로 제국의 시대에는 완전히 반동적이라고 주장한다.

공산당 선언에서의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는 말은 전세계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을 호소하는 말이지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다.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해도 형태상으로는,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처음에는 일국적이다. 각각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맨 먼저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와 끝장을 봐야 한다.”(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노동자는 자본주의 국가에 따라 일국적으로 소속돼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속한 국가 내에서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맑스는 “부르주아지는 공업의 발 밑에서 그 국민적 기반을 빼내가 버렸다”면서 자본이 국제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 시장, 인구를 하나로 집중시키고, 소유를 소수의 수중에 집중시킨다는 명백히 모순돼 보이는 주장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이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결과는 정치적 중앙집권이었다. 서로 다른 이해 관계들, 법률들, 정부들, 관세들 등을 갖고 있으며 거의 연계만 있던 독립적 지방들이 하나의 국민,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률, 하나의 전국적 계급 이해, 하나의 관세 구역으로 한데 모였다.”(같은 책)


위에서 묘사한 것이 국가다. 자본은 국가단위로 집중되면서도 국가의 제한된 영토, 시장의 범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것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인 상업무역의 시대, 대공업이 확립된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 걸쳐 일관되게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현상이다. 자본에게 여전히 운동의 중심은 국가다. 자본이 국가를 넘나든다는 것은 그 중심에 국가가 있다는 말이지 국가를 초월한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는 자국 자본의 경쟁력이 없을 때에는 보호무역과 산업, 금융정책으로 자본을 성장시킨다. 그러나 국가는 자국 자본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순간 자유무역을 통해 자본의 시장을 확대한다. 최근 다양한 자유무역 협상, 블록화는 국가가 나서서 추진한다. 국가와 자본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따라 움직인다. 자율주의자들이 국가의 소멸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로 얘기하는 유럽통합에 있어서도 여전히 국가가 그 중심에 서 있다. 독일은 유럽통합의 기관차이다. 유럽통합은 시장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지만 국가 간 이해관계가 다르고, 국가 간 발전수준이 균등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면 국가 간 갈등과 대립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자본에게 국경은 거추장스러운 장벽이자 동시에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자본은 일국을 중심으로 운동하면서 일국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모순적이다. 이것은 자본운동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현실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일국에서의 노동자 혁명이 세계혁명으로 발전했을 때 비로소 변증법적으로 해결 가능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일국의 노동자 국가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는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협력, 상호우애와 연대성에 바탕을 두고 상호발전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면 제국론의 논리적 토대가 무너진다. 비록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지만 ‘린다 위스’는 구체적 수치를 가지고 여전히 국가의 역할이 중요함을 증명하고 있다. 린다 위스는 오늘날 세계화 현상을 인정하면서도 그 수치가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해외직접 투자의 비중도 제조업 같은 생산자본의 투자에 비해 비생산적 자산이나 투기적 모험사업(골프장, 부동산, 호텔, 백화점)에 투자되는 비중이 높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경우에도 해외 직접투자의 거의 3분의 2(61.3%)를 비제조업에 투입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의 세계화가 아니라 금융투기의 세계화라고 한다.

제조업에 대한 투자에 있어서도 해외의 기존 자산에 대한 인수합병 비중이 절대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1990년까지 미국에서 외국인 투자의 14%만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했다.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 보다는 투기화, 금융의 세계화에 가깝다고 한다. (이번 한미FTA협상의 주요 의제가 금융서비스 부분이고 미국이 이 부분의 개방에 적극적인 것을 볼 때 금융자본도 국적을 가지고 있고, 금융자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산업자본은 은행자본과 긴밀하게 연결된 금융자본이기 때문에 생산자본은 국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금융투기는 국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고 절대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린다 위스는 “대부분의 경우에 총 국내투자는 전체 해외직접 투자-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모두-를 90% 이상 초과한다.”고 주장한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수출액은 GDP의 12% 이하를 차지한다. 이것은 주요 선진경제들에 있어서 생산의 약 90%는 여전히 국내시장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산의 국가적 기반은 변함없이 확고한 것 같다.”(린다 위스, [국가몰락의 신화])


물론 이러한 수치는 남한, 대만, 싱가포르 등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국가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2004년 기준으로 남한은 명목GDP에서 수출의 비중이 37.3%나 된다. 대만은 57.3%이고 싱가포르는 168.2%에 달한다. 이러한 수치를 고려한다 해도 세계화로 인해 국가가 소멸하고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


“본국이나 해외에서 유지되는 자산의 몫, 소유권, 경영, 고용, 그리고 연구개발과 같은 사실상의 모든 중요한 기준에서, 모국 본부의 중요성은 여전히 불가피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여전히 그들의 가장 중요한 부가가치 활동을 본국에 집중하며, 그리하여 국민적 생활수준에 대한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발견이다. 한 추론에 따르면, 본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부가가치는 70-75%의 범위 내에 있다. 전체적으로 이 연구들은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은 본국 본부를 유지하면서 국제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적’ 기업들이라고 결론 내린다.”(같은 책)

GM은 미국의 초국적 기업이고 도요타는 일본의 초국적 기업이다. 이것은 형용모순이 아니다. 린다 위스는 비용감소가 생산의 세계화의 원인이라면 1991년 현재 해외직접투자 스톡의 81%가 고임금(그리고 비교적 높은 조세) 국가들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수치는 1962년 이래 증가를 나타낸다. 생산수단 즉 불변자본에 대한 비중이 높고 노동력 비중이 낮아지기 때문에 제3세계로의 자본진출을 통한 노동력 비용 절감의 장점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간 교역의 비중은 지금에도 높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규제완화는 국가개입의 축소가 아니라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의 변화에 불과하다. 자본은 자본운동과 관련한 모든 규제는 철폐할 것을 요구하지만 노동력 정책, 노동착취를 높이는 데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본은 위기에 빠졌을 때는 어김없이 국가를 찾는다.

남한의 자본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안보전략(해외국가로부터 안보, 국가내부의 안정적 계급질서 확립), 노동전략, 글로벌 스탠다드 정립(세계적 표준 수준의 노동의 유연성 확립), 해외시장 개척 등 총체적 국가전략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국가에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남한 자본가 국가는 자본의 요구에 맞춰 비정규직 법안 개악, 로드맵, 한미 FTA 등 자본을 위한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국가의 주요한 정책은 노동력 정책이다. 남한 자본은 최근 국가에 저출산, 고령화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저출산의 문제는 노동력의 절대적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저출산 우려의 한 편에는 청년실업이 공존하고 있다. 국가는 상대적 과잉인구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마르지 않는 저수지처럼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자본의 필요에 따라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취업자를 압박하여 임금과 복지를 낮추고 단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국가의 이주노동자 정책도 노동력 정책의 일환이다.

남한 국가는 고령화 정책을 통하여 연금지급을 절약하고 임금피크제를 통해 임금을 줄이려고 한다. 이러한 저출산, 고령화 대책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의 핵심 의제로 올라갈 만큼 국가의 주요한 노동력 정책 중 하나다. 자본가 국가는 노동자 투쟁에 대해서 공권력의 폭력을 동원하여 자본의 노동자 착취와 억압을 돕는다. 자본주의 국가는 금융정책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각종 개발정책, 산업정책을 취한다. 뿐만 아니라 교육정책을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자본은 최근 교과서에 시장이념을 싣도록 요구하기조차 한다.

자율주의자의 주장과 다르게 자본은 여전히 국가를 좋아하고 필요로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자본이 신자유주의, 케인즈주의로 나뉘어 국가의 역할변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도 도대체 자본과 국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풀란차스는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그 위에 상부구조인 국가가 위치한다는 맑스  국가론이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하여 국가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풀란차스는 국가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지만 자본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경제주의 또는 경제환원론이라는 풀란차스의 비판은 맑스  국가론에 대한 왜곡에서 기인한다. 상대적 자율성과 외관상 소외는 다르다. 국가가 취하는 자본으로부터의 일정 정도의 독립성은 자본의 이해에 반하는 자율성이 아니다.

맑스 의 토대 상부구조론에서도 국가는 경제적 토대(생산관계)를 반영하는 상부구조지만 이 상부구조가 외관상 자본 위에 서서 반작용하는 상호관계를 중시한다. 물론 그러한 상호관계에서 지배적인 결정요소는 역시 경제적 토대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와 자본은 더욱 더 유착하는 국가 독점자본주의다. 보통선거제라는 형식을 통해 국민이 지배자를 선출하지만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독점자본이다. 국가는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일한 계급의 권력이다. 하지만 국가는 때로는 전체 자본의 이해를 위해 개별 자본 위에 서서 개별자본과 대립하기도 하고 자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국가는 사회(맑스주의에 있어서 사회는 물질적 생산, 물질적 생산을 둘러싼 경제관계의 총체를 의미한다.)로부터 나왔지만 사회로부터 외관상 자신을 소외시킨다. 국가가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을 들면 국가에 대한 피착취 계급의 끊임없는 반란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는 위협에 빠지기 때문에 외관상 중립적인, 보편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권력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국가는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지만 자본 그 자체는 아니다. 물론 경제적 위기가 깊어지고 계급 간의 충돌이 극심해지면 다급한 국가는 자신의 폭력적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피착취 계급을 억압한다. 맑스 는 “사람들이 서로 멱살을 잡게 되면” 국가는 “정신으로서가 아니라 총검으로써 간섭하게 된다”고 했다.

국가나 법이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지만 외관상 자본으로부터 소외돼 있기 때문에 공적 권력, 사회적 이익의 대변,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라는 이데올로기와 대중적 환상이 일정 정도 가능하다. 형식상으로는 자본과 분리된 소외형태 덕분에 국가는 독점자본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권력임을 자처하면서 국가에 대한 환상을 조장하고 국가에 대한 저항을 가로막는다.

“국가란 계급들 사이의 힘관계가 드러나는 물적응결”이라는 풀란차스의 상대적 자율성론은 개량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만일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그대로 두고 자본의 힘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힘이 상대적으로 성장한다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도록 국가를 활용할 수 있다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계급이 국가를 장악하는가에 따라서 국가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으로 밀리반드의 국가론을 도구주의 국가론이라고 정당하게 비판했던 풀란차스가 역설적으로 같은 입장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 개량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자본의 이해에 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반란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위협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위해서 취하는 조치이다.

풀란차스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명제에 집착하면서 상부구조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려 했기 때문에 자본축적의 모순과 국가의 문제라는 근본적 문제를 회피한다. 홀로웨이와 피치오토는 ‘유물론적 국가론에 관하여’에서 풀란차스가 “정치 연구를 축적의 모순 즉 자본주의 착취관계의 분석으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변화의 주요 근원―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의해 촉진되는 자본축적의 모순의 발전―을 간과한다는 것이다.”라고 정당한 비판을 한다.

이러한 신맑스 주의자들에 의한 국가론 논쟁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론과 실천에서 국가에 대한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자율주의는 강력한 힘으로 살아 움직이는 자본주의 국가가 약화되고 소멸된다고 봄으로써 국가에 대한 저항을 가로막는다. 국가권력을 반대하는 자율주의의 무정부주의는 역설적으로 현 자본주의 국가의 강화에 복무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세등등한 국가권력과의 일전을 회피함으로써 자율성의 토대를 축소시키고 있다. 자율주의는 제 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자율주의자들은 미필적 고의의 범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노사과연>



특집 : 혁명―20세기, 그리고 21세기


국가는 소멸하는가?

―자율주의 비판



백철현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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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제국 , 자율주의 , 네그리 ,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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