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의 '사회적 대타협'

'일자리 확대'를 내건 재벌 지원정책


'집권'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얼마 전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이라는 것을 들고 나온 적이 있다. 공식적으로 그가 그것을 철회한 적이 없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아직도 살아 있는 주장이라서 항간에서는 요즘도 간혹 설왕설래를 하기도 하지만, 주지하는 것처럼, 실질적으로는 권부 청와대(노무현) 측의 강한 거부와 퇴짜로 징치고 막도 올리기 전에 자리를 거둬야 했던 불발의 소극(笑劇)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그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간단히라도 그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의의를 짚어볼 필요가 있는 소극이다.

우선, 김근태 의장과 그 세력이 제시한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의 주요 내용이란, 좀 거칠게 요약하자면,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인상의 요구나 파업의 자제를,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재벌을 위시한 대자본에게는 규제완화와 지원을 조건으로 투자의 확대를 요구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김근태 의장 본인이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심히 불균형한, 사실상 노골적으로 재벌 편향적인 정책이고, 항간의 설왕설래도 바로 이 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항간의 논의에서 별반 거론되지 않은 것이지만, 그가 제시하는 그러한 정책방향, 즉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은 과연 일자리를 증대시키는 효과는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일자리 확대'를 내세운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은 노무현 대통령의 작년과 재작년의 연두기자회견을 생각나게 한다. 이태 연속 그 기자회견의 화두가 "일자리 만들기", 혹은 "일자리 창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그러한 정책의지(?)는 조금도 일자리를 증대시키지 않았고, 실업 및 그 은폐된 표현으로서의 비정규직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또 바로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김근태 의장이 일자리의 확대를 핑계로 재벌 편향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을 들고 나오는 조건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노무현 대통령의 일자리 창출 정책은 왜 일자리 창출이라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는가?

첫째로는 물론, '일자리 창출'이라는 것이, 겉으로 정치적 수사로서야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것처럼 제시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정책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사적기업 영역이야 상대적으로 간접적으로밖에는 그 정책의지가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지배․관리하는 공공산업 영역, 공기업의 경우, 재정 확보 등의 어려움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정부가 맘만 먹으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파견근무 등 여러 형태의 비뚤어진 고용관행을 고칠 수 있고, 나아가 노동시간 등을 축소하여 고용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수익경영 원칙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파행적 고용형태와 비정규직의 확대를 선도하고 있다. 비근하게 철도공사 KTX 여성 승무원들의 아직도 계속 중인 장기간의 처절한 투쟁도,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투쟁도 모두 다 공기업의 그러한 비정규직, 파행적 고용형태 선호의 결과이다.

둘째로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으로 제시된 것들이 실제로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정책이긴커녕 거꾸로 일자리를 없애고 축소시키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제시하는 바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방안이라는 것도 그 내용과 효과에서 사실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일자리를 없애고 축소하는 것들이었다. 경쟁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생산성의 강화․증대'가 제시된 주요 방안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에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생산성이란 투입 노동량에 대한 생산물의 양적 관계여서 시장의 대폭적인 확대나 노동일(하루 노동시간)의 단축을 전제하지 않는 한 생산성의 증대가 고용의 축소로 귀결된다는 것, 그리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현상으로 되어 있는 실업과 빈곤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이유, 즉 과학기술혁명의 비약적 전개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증대,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도의 노동생산성을 갖춘, 과학기술혁명의 성과의 자본주의적 이용의 결과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러한 노동생산성의 증대를 통해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니, 이는 노무현 정권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기만적인 구두선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는, 국가의 정책이 사실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연막으로 노동자들의 시야․판단을 흐리면서 재벌을 위시한 독점자본에 대한 국가의 지원 확대를 강화하려는 술책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김근태 의장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 역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보다 더 노골적으로 재벌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권력투쟁


그러면,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근태 의장은 왜 그렇게 재벌 등의 대자본을 지원하는 데 열심인가?

이는 동시에 권력은,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을 구속했다가는 풀어주는 식으로, 왜 재벌 등에게 심심찮게 완력을 행사하기도 하는가와 동일한 문제이고, 청와대(노무현)가 왜 김근태 의장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을 강하게 거부했는가와도 동일한 문제이다. 그리고 왜 쿠데타 등 정치적 격변이 있은 후나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사회정의'니, '부정부패 일소'니, '사정'이니 하는 소동들이 벌어지는데 바로 그렇게 단죄했던 동일한 세력이 나중에는 동일하게 단죄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것과도 같은 문제이다.

그건, 다름 아니라, 바로 정치자금의 문제이다. 물론 합법적 '후원금'을 잠망경으로 하는 거액의 지하 정치자금의 문제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부르주아 정치는 금권정치이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 거액의 정치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정치가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고, 권력의 유지에는 거액의 정치자금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권력은 재벌을 상대로 지원과 압박, 즉 시쳇말로 채찍과 당근의 정책을 구사하는 것이고, 권력의 소유자가 바뀐 후에는 구세력으로의 정치자금의 흐름을 '사회정의'니, '부정부패 일소'니, '사정' 혹은 '숙정'이니 하는 소동으로 차단하면서 그것을 자신들 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청와대가 김근태 씨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을 거부․차단하고 나선 것도 바로 같은 이유 때문이다. 김근태 씨 주도의 흐름이 정치적 세를 형성하고, 그리하여 청와대가 소위 '레임덕', 그러니까 임기 말의 바지저고리만의 권력으로 전락하여 정치자금이 김근태 씨 쪽으로 과도하게 흘러가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 그 이유․동기인 것이다. 김근태 씨 쪽이 예의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것을 들고 나온 것도 바로 그렇게 정치자금의 흐름을 노린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말하자면, 이번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 소동은 아직 그 손아귀에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청와대(노무현 세력)와 차기에 그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김근태 씨 (세력) 간의 권력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인데, 현 청와대의 주인이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지만, 글쎄? 김근태 씨에게 그 자리를 차지할 행운(?)이 올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국가와 노동자계급


그런데 정치자금을 둘러싼 저들 내부의 권력투쟁이야 기본적으로 저들이 문제일 것이지만, 부르주아 정치가 그러한 금권정치라는 사실은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것이 재벌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든, 경찰이나 검찰, 법원 등의 사법기구를 통한 위협을 통해서든 거대한 정치자금이 정치가들에게 흘러간다는 것은 물론 자본에 의해서 착취된 잉여가치, 잉여노동의 그 만큼이 그들 정치가에게 흘러간다는 것, 즉 그들 정치가들이 잉여가치의 분배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컨대 이번에 김근태 씨가 제시한 것처럼, 그들 재벌(자본)에 대한 재정․금융상의 지원을 대가로 정치자금을 주고받을 때, 그것이 직접적으로 대가성의 것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하다. 그런데, 때로는 은근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권력적 위협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정치자금은 어떤가? 전혀 대가성이 없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 역시 절대적으로 대가성이 있는 거래이다. 다름 아니라, 재벌 혹은 자본이 어떤 경위에서든 정치가들에게 정치자금을 건네는 것은 바로 권력, 즉 국가가 그들의 착취를, 그들의 착취체제를 보장하는 대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 권력, 부르주아 정치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 김근태 씨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뉴딜' 추진은 이른바 개혁적인 정치세력, 혹은 운동권 출신의 부르주아 정치세력 역시 어떤 '수구․보수' 정치세력에 못지않게 재벌 등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세력이며, 어떤 세력 못지않게 그들 독점자본과 정치자금의 거래에 열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정치세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노사과연>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의 '사회적 대타협'



안재호 |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