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몰계급적 담론과 그 반동성

I


주지하는 것처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더불어 인류사회가 계급적으로 분열된 이래 인류의 역사는 착취하는 자 집단과 착취당하는 자 집단 간의 투쟁, 즉 계급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그리고 인류사가 이렇게 계급투쟁의 역사임이 19세기에 역사․사회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래 보수적․반동적 이데올로그들, 그러한 지식인들의 주요 임무의 하나는,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는 것, 즉 역사와 사회 문제를 논하되, 마치 계급적 착취와 억압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전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을 위시한 피착취․피억압자들의 관심과 정치․사회의식을 오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반동적 지식인들이 그것을 부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사회문제를 그렇게 몰계급적 언어로 논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반동적 지식인들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 및 '진보적 언론들'은 역사와 사회의 문제를 바로 그렇게 몰계급적으로 논하면서도 이마에는 커다랗게 '진보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행세하는 유별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나는 저들의 그러한 재주에 참으로 경탄한다.

되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경우 1980년대까지, 그러니까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으로 이어지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임이 유난히 강조되던 시대는 바로 폭력적 사상통제가 노골적으로 난무하던 시대였다. 이때는 역사․사회과학의 필수도구인 특정 언어조차 상실된 시대였다. 그리하여 경찰 정보과나 중앙정보부․안기부 등에서는, 예컨대, "니들이 좋아하는 '민중'이란 말이 무슨 말이냐?", "바로 '인민대중'을 줄인 말 아니냐?", "그러니까 이 새끼야, 니들은 빨갱이 아니냐?" 운운하면서 고문․닦달질을 하는 것이 결코 드문 풍경이 아니었다. '계급'이라는 말은 물론, 군대 내의 지위․서열을 가리키는 경우의 용법 이외에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계급적 담론을 금지함으로써 계급적 착취와 억압 자체를 은폐․부정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진보적이고자 하는 일부 지식인들은 몸부림쳤다. 그리고 일부는 '계층'이라는 말을 빌어서라도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성격상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고, 정명(正名)하지 않은 개념으로 그 착취와 억압을 정확하게 분석․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에게 있어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1987년 이후 '민주화되었다'라는 통념에 걸맞게, 사상통제가 과거와 같이 노골적으로는 가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당당히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근하게는 얼마 전 전교조 부산지부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보듯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위세를 증명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폭력적 사상통제는 아직도 물론 면면히 살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같이 특정 언어를 금지하면서 노골적으로 사상통제를 가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경우, 방금 말한 것처럼 절대적으로는 아니지만, 본인이 하기 나름에 따라서는 상당히 폭넓은 사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역사․사회문제와 대결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인민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들 대부분에게는 과거 파쇼 지배 하에서의 그것에 못지않은 사상통제가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된 교활한 형태로, 그리고 어쩌면 보다 효과적인 형태로! 다름 아니라,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언론들'의 몰계급적 담론, 몰계급적 '비판'을 통해서!



II

구태여 시간을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최근 며칠 동안 '진보적 언론들'이 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몇몇 발언을 보자.


II-1. '한겨레' 및 '진보적 지식인들'의 '상생'


우선, [한겨레](2006. 9. 30.)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9월 29일 "통일문화재단 10돌을 맞아 29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평화와 상생의 밤’ 기념식과 후원행사"를 가졌고 "이날 기념식엔 각계 인사들이 영상을 통해서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한겨레' 혹은 '한겨레문화재단'도, 그 기념식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각계 인사들'이라는 사람들도, 모두 우리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진보적 단체',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인사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벌이는 행사, 그들이 보낸 메시지라는 것들이 하나 같이 "... 상생..."이다. 이날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진 '학술회의'라는 것도 "한반도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학술회의"다. 역시 '상생'! 그리고 이 '학술회의'에는 극우적 인사들과 '진보적' 인사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함께 발제하고 토론하였는데, [한겨레]의 평가는 이렇다.


남북관계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진영의 대립과 반목을 의미하는 '남남 갈등'은 이제 낯선 용어가 아니다. 남남 갈등의 거울을 통해 남북 갈등이 더욱 증폭되고, 이것이 다시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땔감으로 작용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29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한반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의 오후 주제는 '남남 갈등의 해결을 위한 상호이해와 협력 그리고 사회통합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남북 갈등을 주제로 한 오전 회의와 마찬가지로 주최 쪽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각각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발제자로 정하고, 토론자들 역시 진보-보수로 양분했다. 그럼에도 첨예한 대립보다는 대안 모색의 관점에서 '중도적 노선'과 '시민 참여'라는 공통의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것은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첨예한 대립보다는 대안 모색의 관점에서 ‘중도적 노선’과 ‘시민 참여’라는 공통의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것은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야말로 '상생'의 모범을 보여준 셈인데, 이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언필칭 '학술회의'였고, 그 '성과'였단다!

그 명성도 드높은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토론자로 참가하여 발언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느 누구도 "남북 간의 갈등도, 소위 남남갈등도 그 본질은 착취와 억압의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대립이며, 따라서 착취와 억압 즉 계급관계의 지양 없이는 그 대립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뜻의 발언은 한 마디도 없었던 것 같다. 보도를 통해서 보는 한은 그렇다.

기묘하게도 이렇게 그 이마에 '상생'과 '진보'를 나란히 써 붙이고 행세하는 우리 사회 '진보적 지식인들'! 명색이 사회과학을 한다는 자들인데, 대립과 갈등의 원인과 본질을 사회과학적으로, 계급이라는 문제로 규명하는 대신에 "상호 이해와 협력 그리고 사회통합" 따위를 운운하면서 '상생'이라는 어릿광대춤을 추고 있는 꼴이라니! 참으로 구역질 날 만큼 고결한 인품과 심오한 사상의 소유자들이다!


II-2. 공허하기 그지없는 '윤리'․'민주주의'․'전술' 타령


'진보적'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도 행여 뒤질세라 '진보적 지식인들'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예컨대, 9월 29일의 [프레시안]은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싸우자"며 전의를 다지고 있는 한 지식인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인하대 교수․국문학)"의 이야기인데, "그렇게 하라고 탄핵 철회를 외친 게 아닌데…"라는 중간제목 하에 쓰여 있는 부분을,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자


김명인에게 '배반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노무현'과 그 언저리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왕년의 '진보'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여러 모로 안타깝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적어도 2003년까지는 대통령 노무현의 수많은 실망스러운 언행에도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지킴이'였다. 2004년부터 그 기대는 뿌리째 흔들렸다.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김명인은 몇 가지 역사 속 장면을 떠올렸다. "1979년 12월 12일 밤 가로막힌 한강대교에서의 망연함, 1980년 5월 17일 오후 캠퍼스에서 "계엄군이 온다"는 비명소리의 기억, 며칠 뒤 광주학살 소식을 접하고 전율하던 기억…."

그 같은 기억 속에 대통령 탄핵을 '반란'으로 규정하며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자는 응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김명인은 불과 두 달 뒤 정무에 복귀하자마자 파병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미국의 대통령과 약속하는 대통령 노무현을 목격했다. "파병 약속 재확인이나 하라고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촛불 들고 탄핵 철회를 외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는 그렇게 애정을 접었다.

"윤리적 기대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강자의 논리에 밀려 그 윤리를 포기할 때, 그의 정치적 생명은 벌써 반 이상 소멸된 것이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은 윤리적 추진력을 상실한 이율배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정치논리이고 볼썽사나운 권력게임이며 이전투구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력도 부족하고 연줄도 없고 구체적인 인적 토대도 없고 게다가 돈도 없는 대통령에게서 기대할 것은 강한 윤리의식과 비전과 불굴의 의지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강대국 미국의 힘과 회유에 밀려 최초의 윤리의식을 내팽개쳤을 때, 이미 그는 리더십을 지탱할 토대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남은 것은 불행한 '노빠들'의 헛된 미망뿐. 가진 것이라고는 대통령 개인의 생존전략으로 전락한 맹목적 책략과 뚝심뿐. 그 상태에서 지금 그가 진보·수구 양 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예견된 결과이다."


2004년의 이른바 '탄핵정국'에서 그토록 미친 듯이 '탄핵 반대', '탄핵 무효'를 외쳐댔던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인사들', '맑스주의 정치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좌파 활동가들' 대부분이, 한 마디 자기비판은커녕, 자신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늘날 시치미를 떼며, 딴소리․딴짓을 하고 있다. 그들에 비하면, 비록 자기비판이나 반성이 아닌 푸념 혹은 회한의 토로일망정 김명인 교수는 훨씬 솔직하고 진지하며, 따라서 그 만큼 건강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성은 대체로 거기까지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외쳐대는 목소리의 높이에 비하면, 문제 그것에 대한 그의 사회과학적 인식의 수준은 너무나도 낮고, 그만큼 노동자․민중에게 미치는 사상적 악영향, (어폐가 있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사상통제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이 전하는, 혹은 [프레시안]이 윤색한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김명인은 2005년을 "민주화와 정권교체가 곧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한 해"로 규정한다. 한 쪽에서 대통령이 '대연정 제안'을 하는 동안 부동산 문제, 농업 문제, 황우석 사태 등 도무지 제대로 돼 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명인은 지금 우리가 이룩했다고 믿었던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이지 결코 민중의 생존권이나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민주화 정권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서민들의 생존권적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더 큰 문제다.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면 "기왕에 이룩해 왔던 정치적·제도적 민주화라든가 과거청산조차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존립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더 이상의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반면 빈자들은 "밥만 먹여 준다면 그까짓 민주주의 따위는 포기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명인은 말한다. "이 '무늬만 민주정권'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민주화에 대한 환상도 말끔히 버리고 내년부터는 진정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지난 3월 13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그 싸움의 하나가 바로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민주정부'가 밥 먹여준다는 '환상' 버려라").


이 기사에 의하면, 김명인 교수는, 혹은 이 기사의 작성자는, 그들이 "서민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노동자․민중이 오늘날 왜 빈곤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인은 지금 우리가 이룩했다고 믿었던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이지 결코 민중의 생존권이나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민주화 정권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서민들의 생존권적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얼마나 순진"한가를 보여줄 뿐인 커다란 착각이며, '진짜 이유'를 깨달을 가능성조차 봉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기사에 나타나 있는 발언에 의해서 판단하자면, "서민들의 생존권적 민주주의를 외면"하면서 이라크 파병이나 하고, '대연정 제안'이나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진두지휘"하고 있는,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노무현 정권의 계급적 기반이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는 그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3월 [프레시안]과의 한 인터뷰에서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발언까지한다.


전략만 있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전술이 있어야 하는데 노무현 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당장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나 최근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 세제 문제가 나왔을 때 이 정부가 대응했던 모습을 보면 그런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볼 때 노무현 정권은, 조․중․동 등의 파쇼언론이나 파쇼적 인물들이 규정하는 것과 같은 '좌파 정권'은 아닐지 몰라도, '진보 진영'의 일부로서 그 '전략'만은 정당하며, 이라크 파병 등은 '전술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 "노무현 정부 ... 자신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는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인 것이다.

그의 머리, 그의 사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계급적 관점에 기초한 과학적 개념, 과학적 사고 대신에, "배반"이라든가, "윤리의식"이라든가, "비전과 불굴의 의지"라든가, "강자의 논리에 밀린 윤리의 포기", 나아가 "형식적 민주주의"나 "실질적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나 "생존권적 민주주의" 같은 공허한 상투어들뿐이다. 국가의 계급적 본질과 기능은 무엇이며, 노무현 정권은 어떻게 해서 독점자본의 정치적 대표자인가 하는 등에 대해서는 겨자씨만한 관심도, 의식도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국회로 국회로 청맹과니처럼 달려가는 옛 친구들, 옛 좌파들, 옛 혁명가들"에 대한 배신감이나 분노, 그리고 자신이 "'노무현 지킴이'였다"는 사실에 대한 후회와 회한은 있을지언정, 2004년 3월까지도 자신을 '노무현 지킴이'이게끔 한 정치적 인식과 판단상의 결함은 왜 발생했는가 하는 데에 대한 성찰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그가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것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균형을 잃고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문제의 기사에 의하면, 언뜻 듣기에 그럴싸하게 그는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하는 인간이 (…) 자본의 일부로, 비용으로 간주되는 나라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저 '인적 자원'으로 계산되는 나라는, 돈보다 성공보다 경쟁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먼저 가르치지 않는 나라는 결코 '민주국가'가 아니다. 한 사람을 위해 만 사람이 고민하고, 만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헌신하는 사회가 오지 않으면 다시 한번 단언컨대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하는 인간"이니 "자본"이니 하는 발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계급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김명인 교수는 누구보다도 어휘 하나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문학평론가인데, 그러한 그가 예컨대 "노동하는 인간이 자본의 일부로, 비용으로 간주되는"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인간은 자본의 일부요 자본의 비용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간주" 운운할 때, 그는 그것을, 즉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위 발언은 명백히 계급의 폐지․지양을 염두에 두거나 지향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 기반한 '자본-임노동'이라는 계급관계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채, 말하자면, 단지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인간다운 대접'을 할 것을 요구하는 설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3월의 예의 인터뷰에서 김명인 교수는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근 상황은 민주화와 정권교체가 곧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갈수록 서민들은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제야 진보적 지식인들도 사태의 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방금 앞에서 김명인 교수가 정치권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옛 친구들, 옛 좌파들, 옛 혁명가들"을 가리켜서 '청맹과니' 운운하는 것을 본 바 있다. 하지만, 2006년 3월의 시점에서 그가 "이제야 진보적 지식인들도 사태의 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때, 그 자신이야말로 청맹과니이자 귀머거리였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야 어떻든, 나에게 흥미가 있는 것은 그가 "이제야 진보적 지식인들도 사태의 진실을 파악하기 시작"하도록 했다는 저 유명한 '진보적 지식인' "최장집 교수"와 그 "역할"이다. 이는 바로 그가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결정적으로 확인"하면서 '환상'을 깨고 마침내 파악했다는 '진실'이 또 다른 환상인 것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III-3. 몰계급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거두


때마침 9월 29일과 10월 2일의 [프레시안]은 (그리고, 30일자의 [오마이뉴스]도) "최장집 교수(정치학)[와 조희연 교수(사회학)]의 저 '진보적 담론'을 전해주고 있다. [프레시안]이 창간 5주년을 기념하여 주최한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위상과 향후 과제"라는 쎄미나 석상에서의 발언이었다는데, 우선 [오마이뉴스]는 두 교수가 언죽번죽 주고받는 얘기를 이렇게 중계하고 있다.


조희연: "우선, 노무현 정부와 386 사회세력이 위기의 원인이다. 하지만 위기는 훨씬 복합적이다. ... 분단체제가 규정하는 어떤 제약성도 있지 않나. 그 부분을 전부 노무현 정부의 개혁성 부재로 돌리는 것 아닌가."

최장집: "환경적인 제약 요소보다 민주주의를 실제로 움직이는 행위자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할 수 있는 범위와 능력의 문제를 강조하고 싶다. 왜 제대로 못하느냐?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개혁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가령 분단 체제라는 것이 우리의 제약이라고 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여러 제약들이 있지 않나. 우리가 정도가 심하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의 괴리가 크다. / 노무현 정부는 매일 같이 안 된다고 하면서 '조중동' 책임으로 돌린다. 나는 이게 매우 싫다. 문제의 책임을 조중동에 돌리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사실 조중동이 강하지도 않다. 조중동은 안 좋은 민주주의의의 결과일 뿐, 독립변수로서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얼마나 강한데, 정부의 정책적 방법을 통해 비합리적인 논조가 주는 역할은 축소될 수 있다."


조희연: "민주정부의 무능력도 문제지만 보수세력, 보수언론에 의회와 정부가 포위된 형국 [아닌가]."

최장집: "한국사회는 미국보다 다이나믹하고 매우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치가 안 되는 게 제일 문제다. 정당체제가 한국사회의 삶을 대변하지 못한다. 미국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캠페인을 보수적으로 하고, 대통령이 됐을 때는 진보적으로 통치한다. 그런데 한국은 거꾸로다. 진보적으로 캠페인하고 보수적으로 통치한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정당이나 국회, 정부를 차지하고 나면 달라진다. 19세기말-20세기초, 이탈리아의 '변형주의' 모델로 설명된다. 기존의 헤게모니 틀에 들어가면 그 틀에 따라서 사람들의 행태가 변형된다." ... "앞선 민주정부들은 여소야대 상황과 씨름하느라 정책을 만드는데 제약이 많았다. 그런데 노 정부는 4대 개혁법안조차 처리하지 못했다. 좋은 조건임에도 왜 못하느냐. 조중동이나 사회의 보수화에 돌릴 문제가 아니다. 그 요소를 모두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공간을 엄청 열어뒀는데, 힘과 제도적으로 부여된 것들을 활용하지 않았다. (4대 법안 처리 당시) 의회가 뭔가를 하려해도 대통령이 중간에 엉뚱한 소리를 해서 힘이 다 풀어진 거 아닌가." ... "노무현 정부에게 모든 책임을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자원을 운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공간과 능력에 대한 불만이 있다. 민주정부를 만들어 놓고도 경제장관 하나 갖지 못하고, 기존 관료에서 나왔다. 상당히 허무하다. 민주화 세력 내에서 '지적 리더십'이 나와야 하고, 정치적 리더십과 결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적리더십을 시민사회에서 형성하고 공론의 장을 확대하려는 조 교수의 방식에는 비관적이다. 교육 제도와 교육 내용을 바꾸는 건 정부의 몫이다. 민주정부에서 왜 그런 교육부장관이 안나오나. 옛날과 달라진 게 없다."


"미국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캠페인을 보수적으로 하고, 대통령이 됐을 때는 진보적으로 통치한다. 그런데 한국은 거꾸로다. 진보적으로 캠페인하고 보수적으로 통치한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정당이나 국회, 정부를 차지하고 나면 달라진다." ― 과연 명성 높은 '진보적 지식인' 다운 분석과 진단이다. 계급적 관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그런 '진보적 분석과 진단' 말이다! (그런데, '보수적으로 캠패인하고 진보적으로 통치하는'(?!) 미국의 '정치인들은 국회, 정부를 차지하고 나면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요, 교수님?)

그런데 이 날 발언의 백미는 역시 '진보적 정치학 교수'다운 "결국 문제는 정당,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진단과 주장이었던 것 같다. "1987년 바로 그 때 정당으로 전화(轉化)했어야"라는 중간제목 하에 [프레시안]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우선 "'87년 체제'를 추동해낸 운동세력이 정당으로 전화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의 중층적 문제점들의 주요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짚으면서 기존 정당에 투신한 운동 엘리트들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배신하고 기존의 틀에 너무 쉽게 녹아든 '변형주의'의 늪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한미FTA 추진 등을 변형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꼽으며 "결국 민주화의 대의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지 못한 것"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의 진단은 "민주화 운동이 도덕주의적, 반(反)정치적 운동에 경도돼 대중의 정치혐오를 확대시켰고, 이런 반정치적 경향은 결국 이른바 민주화 정권들 내부에서 기술합리주의와 정서적 급진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는 노무현 정부는 물론 이른바 민주화운동 출신의 정치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개혁', '도덕적 정치'라는 슬로건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조희연 교수가 "한국사회는 오히려 너무 정당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좀 더 근본적인 시민사회, 시민운동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데에 비해서 그는 "직접적 민주주의의 의미와 가치는 인정하지만 민주주의는 정당이라는 경로를 우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도 보도되고 있는데, 그러면 그가 말하는 정당이란 어떤 것인가?

물론,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최장집, '87년 이후 운동권이 정당, 정치그룹으로 발전하지 못해'"라는 중간제목 하의 [오마이뉴스]의 다음과 같은 보도가 답을 준다.


지역당 구조가 여전한 정당 체제, 정치인들의 변형, 리더십의 부재 등에 대한 최 교수의 문제의식은 "87년 이후 운동권이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에 닿아 있다. 최 교수는 "운동세력이 독자 정당을 형성하거나 최소한 그룹을 형성해 기성 정치권에 들어가 리더십을 만들고 공통의 정책방향이나 이념을 구체화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열린우리당에 당장 운동의 지도부였던 386 의원들이 있지 않냐"며, "그런데 이들이 지금 뭘 하는지 책임을 묻고 싶다, 더 빨리 기성 질서에 적응하고 엘리트로 되어버렸다"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운동세력이 독자 정당을 형성하거나 최소한 그룹을 형성해 기성 정치권에 들어가 리더십을 만들고 공통의 정책방향이나 이념을 구체화했어야 했다"는 주옥같은 말씀!

정당의 계급성 따위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단지 보다 크고 힘 있는, 그러나 물론 몰계급적이고 그리하여 사실은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패거리를 조직했어야 한다는, 참으로 '진보적 정치학 교수'의 가르침이다. 그리하여 [프레시안]은 이렇게 쓰고 있다. ― "'권력화된 386' 혹은 '운동권 정치인'에 대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비판은 통렬했다."(!)

그러나 이른바 '권력화된 386', 혹은 '운동권 정치인'에 대한 그의 발언은 몰계급적일 뿐 아니라 사실은 앞에 한 소리와 뒤에 한 소리가 전혀 다른 혼란 그 자체이다. 10월 2일자 [프레시안]의 "강연과 토론의 전문"에서 이와 관련한 그의 발언을 보자.

우선 그는 '진보적 정치학 교수'라는 명성에 걸맞게 3류의 사회과목 훈장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이렇게 떠든다.


민중들의 삶의 문제를 정책으로 조직하고 정당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비전을 만드는 작업이 중요하다. ... 선거 이전에 전망을 갖고 있는 중심 세력들이 정치세력화하고 한국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정책 방향을 갖고 선거에 나와 경쟁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무엇을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가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한 비전을 갖고 정당이 만들어지고 투표로 선택받는 과정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정책 (방향)'이니 '비전'이니 '대안'이니 하는 공허한 발언도, '선거'니 "표로 선택받는 과정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느니 하는 구제불능의 기존 씨스템 집착증도 그렇다 치자. 아무튼 그는, 한편에서 이렇게 '정책'과 '비전',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고 그리하여 "표로 선택받는 과정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할 주체로서 '운동세력'을 주목했고, 아직도 주목․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것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발전이 지지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87년 이후 운동세력이 정당 조직으로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당체제가 공간적으로 많은 사회적 이슈를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공략하고 개발하고 조직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열려 있다. 여기에 왜 손을 안 대는지에 대해 의문스럽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운동세력'이 결코 그러한 '민주주의의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세력이라는 자신의 판단을 다음과 같이 장황하고도 명확하게 말했었다.


...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추동했던 중심적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생각했던 민주주의의 경향이나 태도는 어떤 것인가.

모든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 사이, 양극적인 것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운동을 할 때 운동의 중심에 섰던 집단의 특징은 해방된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이를 달성하기 위한 도덕적 열정과 혁명적 이상주의, 낭만주의, 공동체적 집단주의 등에 충만해 있어 이를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가치로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집단주의적 이념과 민주주의가 결합함으로써 나타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운동이 수반하는 경향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총체적 해결에 대한 충동,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집단주의적 정향, 정치에 대한 도덕적 접근, 운동이 목표로 했던 대상에 대한 적대 의식, 공동체 전체의 대의나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특수이익이나 부분이익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 등이다.

  이런 태도와 정조가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공간을 여는 것'이란 인식을 저해하고 있다. 다원주의, 부분 이익들이 서로 갈등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는 참여하고 실천하고 갈등과 타협에서 나오는 정치적 경향에 대해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또한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는 반 정치적인 경향을 갖게 됐다. 정치를 도덕적으로 접근하려는 특성이 강화되고 이것이 정치와 정당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하는 동시에 시민운동의 효능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경향을 낳았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적 이념을 생각할 때 자유주의의 근본이념은 정치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운동권의 태도나 정향 역시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정조를 수반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정치의 부재, 축소 등으로 인해 관료주의, 엘리트주의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이들 '운동세력'의 사회적 출신성분이랄까 성장의 배경도 결코 그러한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그의 그날의 수많은 발언 중에 이 발언만이 그나마 유일하게 '계급․계층적 관점'의 냄새나마 나고 있다.)


운동권 세대란 기성세력에 편입되는 연령적 단위로도 정의될 수도 있다. 세대라는 말 자체가 '중산층적 현상'이다. 운동의 중심이 된 대학생들은 이미 좋은 대학을 다니고 엘리트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쉽게 엘리트 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권력지향이 강했던 점도 더 빨리 기성질서에 편입되고 엘리트화하는 경향을 부추겼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정부 안에 들어가 있는 386 운동 세력들이 민주화 운동 당시 기대됐던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한 것도 기성 질서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중적 운동이 빨리 소멸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중심 세력이 오히려 헤게모니에 아주 유능하게 편입된 것이다.


이렇게 앞뒤도 맞지 않는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주고받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대서특필하여 선전해대는 것이 이 사회, 이 시대의 일그러진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언론'의 모습이다. 그의 이런 분열증적 헛소리는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분열증적 넋두리로 천연덕스럽게 되풀이 된다.


운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점했던 젊은 리더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공동의 이해 관계를 모아서 느슨한 연대라도 해서 정당을 만들었으면 구 질서 내의 정당을 대체할 수 있는 정당이 될 수 있지 않았겠나? 아니면 기존 정당에 그룹을 지어 들어가 이념을 구체화 시키든가. 그런데 지금 열린우리당 같은 곳에 그룹을 지어 들어가 있지만 이 사람들이 너무 자기 정체성을 버리고, 과거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운동을 했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존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 개별적으로 보면 중간보스 정도까지는 올라가긴 하는데 결합된 힘으로 통일을 못하기 때문에 별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화된 386이라고 표현했지만, 우리당 안에도 당장 운동의 중심이었던 386들이 있는데 뭘 하고 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보다 더 빨리 현상유지적 질서에 적응하고 기성질서에 순응하는 엘리트가 돼버리면 보는 사람들이 허무해진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그의 발언도 역시 마찬가지로 흥미롭다. 우선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력의 정책적 특징은 구 권위주의로부터 연속성을 갖고 내려온다는 것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정착됐고 또 FTA를 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현상은 민주화 운동이 전개될 때의 열망과 목표했던 경제 체제와는 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그가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정착됐고" 운운할 때 그는 그것을 "민주화 운동이 전개될 때의 열망과 목표했던 경제 체제와는 괴리가 있(는)" "구 권위주의로부터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즉 부정적이고 타기해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록 그가 김대중 정권 초반에, 그러니까 그의 표현을 빌면, "IMF 이후" 대통령의 정책자문위원장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정착"되는 데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고백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데 동시에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차이를 갖는 정당의 조직이 중요하다. 대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대안을 갖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어떤 대안을 만드느냐가 문제다. 이는 두 가지 수준에서 봐야 할 것 같다. 현실로서의 신자유주의가 한 측면이고 신자유주의라는 독트린이 가져오는 어떤 사회적 가치관이나 정향들에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또 한 측면이다.

새로운 대안은 신자유주의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라는 가치를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 수준이 아니다. 현실을 반대해버리면 경제를 운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현실을 수용하면서 그 부정적 효과를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이냐의 문제다. 이런 문제들이 (대안 마련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현실을 반대해버리면 경제를 운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현실을 수용하(라)"는 주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본모습이고, 그의 임무이다! 물론 '진보적 지식인'의 거두답게 '노동문제'도 빠뜨리지 않았다. 다음이 그에 대한 그의 발언이다.


우리나라의 노동문제가 중심적 대안을 담당할 만큼 전체적인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든다. 현재 노동의 문제나 계층 문제는 과거 노동자계급으로 대표되던 계급적인 관점에서 대안을 내놓아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편성을 갖는 중산층을 아우르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나 사민주의의 넓은 대안 속에서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대안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명색이 사회과학자, 그것도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눈에 '중산층'은 분해되고 몰락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존재이다. 그렇다.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 내지 '사민주의', 즉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좌파 그것이 그의 정체이며, 이 사회, 이 시대 '진보적 지식인들'의 정체인 것이다.

아무튼, "사회학자이고 NGO대학원장"인 대담자 조희연 교수의 '참으로 근본적인 기획', "한국사회는 오히려 너무 정당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좀 더 근본적인 시민사회, 시민운동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맞서 "민주주의는 정당이라는 경로를 우회할 수 없다"는 주장을 개진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 이 두 사람의 "대담의 마무리는 대안 담론의 창출과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으로 모아졌다"고 한다. 드디어 이론적․학문적 상생에 성공?!

한편 조희연 교수는 스스로 "최 선생을 오랫동안 학문적 선배로 모셨고 70—80% 정도는 생각이 비슷하다"고 자처하고 있는데, 나머지 20—30%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예의 "좀 더 근본적인 시민사회, 시민운동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의 얘기도 잠깐 들어보자면, 이렇게 보도되고 있다.


조희연 교수는 "지속 가능한 대안적 사회경제 정책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 세계화 시대,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국민들을 먹고살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민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정부를 강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물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나 그에 기초한 계급관계의 폐절․지양에는 아무런 관심, 문제의식도 두지 않은 채, 즉 그것들을 온존시킨 채의 얘기다.

보도에 의하면, 최 교수는 이른바 '386 정치인'들의 오늘날의 행태를 개탄하면서, "'저런 이들이 운동을 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비판' 혹은 개탄을 패러디하여 "저런 이들이 사회과학자인가" 하고 묻는다면?

아무리 고결한 인품이라도 역시 발끈들 하시겠지?



III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과거 파쇼 지배 하에서는 국가기관에 의해서 지식인들에 대한 사상통제가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요즘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상통제가 '민주화'된 형태로, 그리하여 교활하고 어쩌면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듭 말하지만, 몰계급적 담론, 그리하여 사실은 독점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면서 그들의 지배의 영속화를 꾀하는 반동적 담론을, 기껏해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관점의 정치공학일 뿐인 담론을 '진보적 담론'이라는 허울로 치장하여 강매함으로써 그렇게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상통제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담론 속에 '노동(자)'와 '자본(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특히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 답게 최장집 교수의 여러 담론에는 그것이 화려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변혁을 통해서 그 역사적인 착취․대립․지배관계를 지양해야 할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 착취와 지배, 대립에 눈 감고, 혹은 그것을 약간은 완화시켜서 서로 상생해야 할 존재로 등장한다. 저 '진보적인' 최장집 교수의 표현을 빌면, "진보적 자유주의나 사민주의의 넓은 대안 속에서 ... 포괄"해야 할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반동적인 관점과 담론이 '진보'의 이름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민중은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사상적 영향․통제 하에서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저들의 그러한 반동성을 널리 폭로하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을 그들의 사상적 영향력 하에서 해방시키는 것, 이것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주요 임무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하는 마음에서 말하자면, 혹 누군가 "당신은 왜 저들의 사상과 주장이 풍부히 담긴 저들의 저서 대신 언론의 발언을 들어 시비를 거느냐"고 묻고 나올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중들에게는 그들의 언론을 통한 발언, 언론에 소개되는 발언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그 두터운 '저서'에 장시간 코를 박고 있을 만큼 나의 비위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저서'의 내용에 반하는 주장을 언론에 하지 않았을 것이며, 언론 또한 그들의 '저서'의 내용에 반하는 것을 그들의 발언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사과연>



정세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몰계급적 담론과 그 반동성



채만수 |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