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전후 민간인학살의 이해, 그 두번째

(지난번의 총론에 이어 그 두 번째로, 학살 이후와 진상규명 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전쟁기의 학살은 학살 당시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학살 사실 자체를 은폐ㆍ왜곡함으로써, 남은 유족들에게 연좌제와 멸시, 가난 등의 천형을 지움으로써, 진상규명 요구를 압살함으로써, 피해자와 유족들을 세 번, 네 번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귀결이 오늘의 한국사회다. 이번 호에서는 전쟁 당시의 학살이 어떻게 끊임없이 반복, 확대재생산돼 왔는지를 중심으로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한다.)



4. 학살의 은폐, 왜곡


학살은 한 바탕 피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땅에 선 대한민국과 그 후견인인 미국, 그리고 학살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묻은 벌건 피를 하루 빨리 씻어내야만 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땅에서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고 지도자로 행세하자면 학살자라는 멍에를 벗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일차적으로 취한 방법은 학살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축소되었으며, 그조차도 전투나 학살과는 무관한 병사, 객사 따위로 처리되고, 다수는 그저 실종자나 행방불명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으로도 문제를 덮을 수 없는 사람들에겐 학살이 아닌 그럴듯한 명분을 씌워 사실을 호도했다. 이제 오갈 수 없는 장벽이 된 휴전선이 그런 은폐를 도와주었다. 어쩌면 북에 생존해 있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납북’된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들이 그런 모호한 통계를 뒷받침해주었다.

나아가 모든 피학살자들은 ‘악질 빨갱이’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외려 민족의 원수인 공산당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착한 인민들’로 탈바꿈되었다. 자기네가 죽인 사람들을 함께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원수나 선한 희생양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행동이 합리화되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열살 박이 아이도 댕기머리 소녀도 모두 ‘악질 빨갱이’가 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거꾸로 ‘불순한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다. 많은 피학살자들이 죽어 마땅한 인종으로 둔갑했고, 그 ‘인간 송충이’들을 잡아 처치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었다. ‘선한 희생양’들은 국가가 나서서 그 원을 풀어주어야 마땅할 텐데,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이면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손도 대지 못한 채 긴 세월을 침묵으로 버텨왔다.

학살자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비호하에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빨갱이 사냥’은 영웅적인 행위였고, 그 일을 서슴없이 행한 사람은 ‘애국자’였다.


멀쩡한 기록, 멀쩡한 호적이 없다

심지어는 학살을 자행한 국군 부대를 공비로, 우익단체원들을 변장한 인민군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살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인민군이나 공비라는 터무니없는 등식이 모든 공식 기록과 교육 자료에 버젓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사람을 죽인 것은 인민군이요 빨치산이요 지방 빨갱이였다. 자신들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선량한 사람이거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악당들을 물리친 ‘정의의 사도’였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간간이 확인되는 피학살자들은 정말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악질 빨갱이’였다.

호적이 둔갑된 사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전쟁 전 공비 토벌의 와중에서 일어난 문경 석달리 학살이다. 1949년 12월 문경 산북면 석달리에서는 어린이와 노인이 다수 포함된 남자 43명, 여자 43명의 86명이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국군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현지 부대를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보고했다. 당시 산북면 면서기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피학살자들의 호적에 공비에게 죽었다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증언한다.

널리 알려진 거창 신원면 학살사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1951년 2월 당시 진주에 주둔해 있던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신원면 주민 약 1천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한 뒤 경찰과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719명 전원을 박산골짜기에서 집단사살한 뒤 시체를 불태웠다. 그중 태반이 14세 이하의 어린이거나 60세 이상의 노인이었다. 군은 이 학살을 은폐하려고 외부와의 왕래를 일체 차단하고 생존자들에게 발설하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워낙 명백한지라 사단본부에서는 “학살된 주민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으나,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면서 “희생자 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역시 유명한 함평학살의 경우에도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인 다음 ‘공비’를 토벌한 것으로 보고했고, 나주 세지면과 다도면, 담양 대덕면, 장성 황룡면 등 수많은 지역에서 똑같은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진실을 알 권리조차도 유린하다

동토를 헤집고 존재를 드러내려는 사실은 밟아 으깨버렸다. 학살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호하는 사실은 대서특필하고 그에 반대되거나 그럴 우려가 있는 사실들은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없어버렸다. 은폐와 조작에 용감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였다. 피학살자들의 목숨에 이어 유족들의 알 권리까지도 유린당했던 것이다. 가장 큰 은폐, 왜곡은 진실규명운동의 무자비한 탄압으로서, 이는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다.

4.19 직후 영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으나, 1년 뒤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았다. 많은 유족과 사회운동가들이 투옥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전쟁기의 학살과 무관하지 않은 쿠데타 세력은 아예 학살의 흔적조차 없애버리고자 했다. 곳곳에서 위령비를 박살내고 무덤을 파헤쳐서는 유골을 내다버렸다. 사실은 물론 역사마저도 깨끗이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5.16 직후 남제주의 백조일손 묘역에서, 거창 신원면 묘역에서, 경남 진영의 피학살자 묘역에서, 그밖의 수많은 곳에서 위령비가 파손되고 공동묘역이 파헤쳐지고, 희생자 명단과 많은 증거문서들이 압수돼갔다. 하수인은 4.19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 경찰들이었고, 명령자는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다. 참고로, 5.16 쿠데타의 핵심 주역인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은 6.25 당시 육군 정보국장과 그 요원들이었다. 유족회에서 자체 조사한 자료, 4.19 직후 국회와 정부에서 조사한 자료는 거꾸로 연좌제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외면과 망각의 합의’

학살의 은폐와 왜곡은 불행히도 가해집단만의 소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살 만한 위치를 선점한 온갖 인간들이 그에 가세했고, 이 땅의 민초들도 살기 급급하여, 혹은 살기 위하여, 혹은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침묵으로 그에 동조했다. 심지어는 피학살자의 가족도, 친족도, 이웃들도 자신의 삶을 위해 그에 함께 했고, 이 땅의 양심들도,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이 땅의 사회운동가들도 ‘현안이 시급하므로, 어려운 문제라서, 먼 일이라라서’ 운운하며 진실 밝히기에 나서지 않았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야만의 사회에서 그 고통스런 기억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가며 재구성되었다. 악의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들이 버젓이 교과서에 등재되며 자라는 세대들의 정신마저도 옭아맸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었고, 한국전쟁기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병든 사회의 제일 금기가 되었으며, 언론도 학자들도 심지어는 사회운동가들까지도 이 문제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학살은 없던 일이 되었고, 사라진 100만의 고귀한 생명은 기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부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학살이었다.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인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진실을 찾아 밝힐 힘을 잃고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5. 학살 이후 - 학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백년 이어진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전쟁 전이든 중이든 후든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 중 다수가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폭력 불감증, 상호 불신, 극도의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민주주의 냉소, 진보에 대한 회의, 극우반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 폐해들, 극성을 부리는 국가폭력과 권위주의 등등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일제 40년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긴 대학살극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개처럼 떼거리로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 후진국,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에게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가까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FTA 체결 반대집회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 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들고 일어난 유족들, 무참하게 짓밟히다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수 유족들은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고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했지만,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앞장선 유족들은 오히려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전면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은 유족들에겐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고 만 것이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

학살 이후 유족들의 반백 년 삶은 실로 형언하기 힘들다. 애비 없는 설움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지독한 가난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거미줄처럼 따라다니던 연좌제의 꼬리표는 그나마 힘겨운 삶을 더욱 옥죄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질시를 피해 고향을 등졌다.

왜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자, 유골이라도 찾아 제사라도 떳떳이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번번이 압살, 배반당했고, 많은 유족들은 억울하게 죽은 부모형제와 자신의 삶까지도 부정하면서 자신을 거짓 포장하며 살 길을 꾀했다. 살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길도 택했고, 가해자 집단과 어울리며 신분 세탁을 꾀하기도 했다. 대물림을 하지 않으려 자식들에게 사실을 함구하니 가해자 집안과 피해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꾸지 않으려면 그 사실 자체를 잊어야 했다. 도리질치고 떨어내어 덮고 잊어야만 살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래도 대다수 유족들에게 거의 공통으로 나타나는 피해 양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좌제

연좌제는 당사자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거의 모든 유족들에게 공통의 덫이었다. 육사나 공사, 경찰대학 등의 채용시험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진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대다수의 유족들은 아예 공직은 물론 버젓한 직장에조차 지원할 꿈도 꾸지 못했다. 심지어는 ‘신원보증서 떼기가 겁이 나서’ 직장생활을 접었다는 사람도 있고, 여권 신청 때마다 신원조회에 걸려 유학이나 해외취업, 해외이주를 못한 사례도 셀 수 없이 많으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살 자체와 마찬가지로 연좌제의 피해 역시 당사자의 앞길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당사자와 가족 전체의 응어리가 되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덧낸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병, 멸시, 가정파탄

학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병으로 지독하게 고생하거나 결국 죽음을 맞은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빨갱이 자식’ 또는 ‘호로 자식’이라는 멸시와 손가락질은 대다수 유족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가정파탄의 사례도 각양각색인데, 가장 극악한 경우로 가해자가 남편을 죽이고 그 부인을 첩으로 삼아 함께 산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자와 아이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의 피해는 남자들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남편 잃고 손가락질받으며 삯바느질이나 식모살이로, 또 여자의 몸으로 남정네들의 일 모두 감당해가며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의지의 한국 여성들, 창졸간에 부모를 모두 잃고 느닷없이 ‘가장’이 되어 동생들 보살펴가며 그 험난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맏딸들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빨갱이 집안이라고 결혼 석달 만에 소박을 맞고 쫓겨난 뒤 평생을 외롭게 산 경우도 있고, 젖먹이 아이들 떼어놓고 개가한 여인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또한 완강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지붕도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에 내동댕이쳐진 꼴이었으며,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돼버린 아이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남겨진 아이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버지를 잃고 남겨진 아이들에게 홀로 된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에 의지하는 것 또한 편할 리 있겠는가?


가난, 원망, 출향, 자기부정

대다수 유족들에게 지독한 가난이야 평생을 따라 다니는 동반자였으니,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유족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는 하늘의 별이었다. 좀 심한 경우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고아원에 들어갔다가 넝마주이를 시작으로 60가지 이상의 직업을 전전한 사람도 있고, 부모 잃고 어린나이에 거지가 되어 이집 저집 밥 얻어먹으러 다니다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이렇듯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많은 유족들은 가난까지 대물림할 수는 없다면서 이 악물고 살아 웬만하면 자식들 대학교육은 다 시키는 ‘의지의 한국인상’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모두 ‘인간승리’요 ‘감동 드라마’다. 이들에게 ‘아버지, 왜 날 낳으셨소’ 하는 애틋한 원망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물론, 드물지만 올곧은 삶을 살다가 비명횡사한 부모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을 이야기하자면 실로 끝이 없다. 고향을 등진 사람들, 특히 고국을 등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자신을 부정하고 재포장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깊은 한은 가슴속에 켜켜이 묻어두고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짓들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유족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들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그 답을 준비할 때다. 아직까지도 대다수 유족들이 평생 자신을 짓눌러온 피해의식이나 좌절감, 자포자기, 냉소, 방관의 틀에 갇혀 있는 지금, 그 끔찍한 학살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진실 은폐를 사실상 용인해온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하며 거듭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여기서 진실규명에 앞장선 유족들이 이구동성으로 “과거사법이 통과되었을 때가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출발점이 만들어질 수 있다.



6. 진상규명, 그 멀고도 험한 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은 학살 당시부터 일어났다. 1951년 2월 거창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주민 719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그해 3월,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학살을 폭로했다. 이에 국방장관 신성모는 사실을 부인하고 통비분자 187명이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나 내무, 법무장관이 사실을 부분 시인하면서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지 시찰에 나섰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간 국회와 정부(내무, 법무, 국방) 합동조사단은 가해 군인들의 집요한 방해를 받던 중 당시 경남지역 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이 신성모 국방과 모의하여 짜낸 무장공비 위장 습격 계략에 말려 그만 철수하고 만다. 이후 가해 군인들의 위장 매복 사실이 드러나면서 책임자들이 실형을 언도받지만 곧 유야무야되고 사건 책임자들은 오히려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다.

1950년 7,8월에 보도연맹원 등 335명이 학살당한 경남 진영에서도 학살 직후 유족 등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학살을 주도한 진영지서장 김병희 등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한 목사의 죽음에 미국 선교단체와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미국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한 것이 주요한 배경이었다. 그 결과 김병희 외 3인에게 사형이 구형됐으나 김병희만 사형이 선고 집행됐고, 나머지는 10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한 달도 안 돼서 풀려났다. 이 역시 위의 김종원 등의 협잡으로 사건이 유야무야된 경우인데, 진영 사건은 당시 광범하게 자행됐던 수많은 학살 중에서 사건 책임자가 사형에 처해진 유일무이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해결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100만 민간인학살은 비명에 죽어간 자는 있으되 죽인 자도, 책임지는 이도 없고, 나아가 사실 자체도 없던 일이 되는 수순을 밟아갔다. 그래도 1950년대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기는 했으나 반공과 북진통일을 게거품 물고 떠드는 정권의 기세에 눌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4.19 직후의 전국유족회와 4대 국회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전국의 유족들이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학살자 처단 등을 요구하며 유족회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경남의 거창, 동래, 진영, 마산, 창원, 김해, 금창, 밀양, 함양, 충무, 경북의 대구, 경주, 경산, 문경 등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고, 1960년 6월 16일에는 경북을 포괄하는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8월 28일에는 '경남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10월 20일에는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 회의실에서 전국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 명이 모여 '전국유족회'를 창립했다. 유족회는 유골을 발굴하여 합동묘역을 조성하고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대통령, 국무총리 등 정부 각 기관과 국회 등에 청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노력이 시작되면서 1960년 4대 국회는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때에도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던 거창의 유족들이 4.19 직후 학살 당시 가해자에게 협력했던 박영보 전 신원면장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며 항의하는 등, 유족들의 진상조사 요구가 높아지고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1960년 5월 23일 제4대 국회 제19차 본회의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남반, 경북반, 전남반을 편성하여 조사에 착수했다. 특위는 1960년 5월 31일부터 11일 동안 현장을 조사한 후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는 경남의 거창, 거제, 함양, 동래, 산청, 울산, 충무, 구포, 마산, 산청 등지에서 3,085명, 경북의 대구시 일대, 대구 형무소, 문경 등지에서 2,200명, 전남 함평군에서 524명, 전북 순창군에서 1,028명, 제주에서 1,878명 등 총 8,715명의 양민이 학살됐고, 10,041호의 가옥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마저도 전체 피해의 일부만을 조사한 것에 불과해 피해 신고가 증가일로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4대 국회는 내무, 법무, 국방의 3부 장관을 위원회에 출석시켜 신중하게 토의한 결과, 이를 행정부에 이관하여 장시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한 실정을 조사토록 결의했다. 국회 특위의 조사가 지극히 부분적이었다는 것은 조사 시도가 3개뿐이고 조사 기간이 11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 그리고 4.3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제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제주도(피학살자 3만여 명 추정)를 비교해볼 때 당시 피학살자의 극히 일부(약 1/20)밖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할 수 있다.


5.16 쿠데타 세력의 부관참시

새롭게 출범한 장면 정부에서 미흡하나마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진행하려던 계획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운 5.16 쿠데타 정권은 극우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을 만들어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을 체포,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은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하여 북을 이롭게 하고 좌익용공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유족회 간부들에게 사형, 무기 등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이들에게 '특수반국가행위' 죄를 적용하여 사형 1명(전국유족회 회장 이원식, 나중에 감형), 징역 15년 3명 등 수십 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게다가 유족들을 검거하면서 유골발굴일지와 유골 수집철, 피학살자 조사명부, 유족회원 가입명단, 학살자 고발장, 유골 상자 등 학살 진상규명에 결정적 단서가 될 관련 기록물들을 남김없이 압수, 폐기하여(5.16 군사정부 포고령 제18호) 이후의 학살 진상조사를 원천 봉쇄했다. 또 피학살자들의 합동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사르거나 바다에 내다버리고 비석을 뽑아 부수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다. 이로써 민간인학살은 다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 사항이 되었고, 1987년까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26년의 세월은 길었다. 진상규명운동 탄압과 뒤이은 연좌제의 굴레 하에서 유족 1세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살기 위해 사건들을 잊어야만 했으며, 고통과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2세들한테까지 사실을 함구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에 학살 사실은 하나 둘 묻혀져 없던 일이 되어갔다. 극악무도한 군사독재하에서 사실을 아는 학자, 언론인 등의 지식인, 양심적 종교인, 사회운동가들까지도 반인륜 범죄인 학살 사실에 침묵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크고 작은 인권유린이 난무하는 반인권국가의 표본이 되었다.


지역별 유족회와 사회단체, 연구자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든 비어져 나와 그 존재를 알리는 법.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유족들이 드디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4.3과 거창을 필두로 곳곳에서 유족들이 학살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사회단체와 언론인, 연구자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말까지, 제주, 거창, 산청, 함평, 고양, 문경, 노근리, 여수 등 전국적으로 30개 정도의 지역별, 사건별 유족회나 대책위가 결성되어 활동을 펼치기에 이른다. 각지의 유족회는 지역에서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국회와 지방의회, 청와대 등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청원과 진정을 수없이 내왔다. 또 흩어진 유족들을 찾고 학살지를 추적하는 등 학살의 증거들을 모아왔다. 그리고 2000년 9월에는 각 지역 유족회가 뜻을 합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유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민간인학살 문제의 통합 해결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양심적인 학자와 언론인, 사회단체,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반백년 이상의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유족들에게는 삶 자체가 투쟁이었고, 이제 연로해진 유족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것은 사회의 직무유기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역 차원에서도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단체들이 생겨나, 지역 내 사건의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면서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고 유족회와 함께 위령제를 거행하는 등의 행사를 치르고 있다. 학살 지역에 근거를 둔 이들 단체는 자기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을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평화운동 차원에서 접근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 또는 전국 단체들과 함께 공동 활동도 펼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이들 단체가 모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사회단체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들 사회단체는 전국적으로 30여 개 단체가 각 지역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고양, 여수, 순천, 충북, 홍성, 인천 등 지역 차원에서 단체들을 규합하여 대책위를 구성, 활동하는 곳도 있다. 이들은 유족들과 함께 지역 사건에 대해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학살실태보고서나 자료집을 발간하고 학살실태 토론회나 증언대회를 열면서 대국민 홍보에 힘써 왔다. 또 국회와 지방의회, 청와대 등에 진정, 청원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군의회나 도의회에서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보고서’를 내게 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자체로부터 위령사업 및 실태조사 예산을 지원받는 곳도 계속 늘고 있다. 또한 전국 단체들 중에도 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한편, 연구자와 문인, 언론들도 진상규명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제주 4.3을 중심으로 사건 조사 및 보도에 참여하는 연구자와 언론들이 생겨났고, 학살사건과 관련자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제주4.3연구소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는 각각 4.3사건과 여순사건에 관한 여러 권의 실태보고서를 펴냈고, 개인 연구자들도 자료조사, 구술조사 내용을 정리한 논문이나 기고문, 단행본 집필로 진상규명작업에 합류했으며, 2000년을 전후해서는 민간인학살을 주제로 다루는 학술대회도 열리기 시작했다. 언론 중에서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창간된 <월간 말>, 제주의 <제민일보>와 <제주 MBC>, <시사저널> <MBC PD수첩> 등이 학살 보도를 선도했다. 각종 역사연구회와 사회연구소, 세미나팀, 조사모임에 속해 있던 연구자들, 그밖에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학살 조사에 참여하거나 관심을 보인 연구자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2004년에는 제노사이드연구회를 결성하여 답사, 심포지엄 등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1999-2000년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었다. 1996년에 제정된 거창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거창양민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위령사업이 착수되고 있었고, 4.3특별법의 제정과 함께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으며, AP 통신에 노근리 사건이 대서특필된 후 한미합동조사반이 구성되어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에는 개별 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특별법 청원이 봇물을 이루었고, 전국 곳곳에 묻혀져 있던 사건들이 그 존재를 알리며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별 사건을 다루는 특별법과 조사위원회를 계속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통합 해결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태동했고, 그 귀결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이하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였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는 2000년 9월 7일 전국유족협의회와 민간인학살관련 전국사회단체, 그리고 관련 연구자와 언론인, 종교인, 일반시민들이 모여 결성했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는 발족 이래 지역단체, 유족들과 함께 전국의 학살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모아 전국 학살지도 및 학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으며, 영상 홍보물, 교육선전 책자를 제작하여 대국민 교육홍보 활동을 펼쳐왔다. 2005년에는 그간의 실태조사 결과를 집대성하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와 <민간인학살 인권피해실태보고서> 등을 펴냈다. 또한 민간인학살 문제를 사회의 주요 의제로 만들기 위해 ‘전쟁과 인권 심포지엄’,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 전국합동위령제 등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유족회 결성 지원과 소식지 발간, 지역별 위령제 지원 등의 사업을 통해 전국의 유족회와 대책위 활동을 측면 지원해왔다.

그리고 국가가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에 책임 있게 나설 것을 촉구하며 전국의 유족들과 함께 장기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법안 토론회와 공청회를 지속적으로 여는 등, 민간인학살 전국통합특별법 제정사업을 줄기차게 전개해왔다. 그 결과,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제정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2005년 5월 독재정권하 의문사건 등의 진실규명까지 포함한 통합과거사법의 제정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지방의회와 중앙정부

1987년 이후 국가기관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먼저 발을 뗀 곳은 아무래도 학살 문제가 일찍부터 제기된 지역의 지방의회였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주민들의 아픔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다가 의회에 진출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인 진상조사라도 착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도 전체 차원에서 진행된 제주도 외에, 시도 단위에서는 전라북도에 이어 경상북도 의회에서 신고접수 후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를 실시했고, 경기도에서 고양금정굴 사건을 조사하여 각각 보고서를 펴냈다. 시군의회 단위에서는 전남 함평군과 화순군, 담양군, 나주시, 전북 익산시, 경남 산청군과 거창군, 경북 경산시와 예천군, 충북 괴산군 등에서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학살실태를 조사한 후 보고서나 백서를 펴냈다. 지방의회에서 사건을 확인한 뒤 일부 지자체의 경우 지역 위령제나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일부 지방의회에서는 국회와 정부에 입법과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건의서나 청원서를 채택, 전달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전혀 조치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각지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요구가 활발해지면서 국회와 정부에 특별법 제정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과 진정이 쇄도했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이를 회피하던 정부와 국회도 그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먼저 1996년에 거창사건명예회복법이 제정되었고, 이어서 1999년 말에는 4.3진상규명명예회복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족들과 지역사회의 끈질긴 요구에 화답한 것이긴 하나, 다른 사건들은 외면한 채 아쉽게도 두 법안만 통과된 데에는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1999년 노근리 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된 뒤에는 한미 합동조사반을 구성, 진상조사에 착수하여 2001년 노근리사건 보고서를 펴냈고, 이어 2004년에는 노근리사건피해자심사명예회복법을 제정하여 후속 조치에 착수했다. 법안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4.3법을 제외한 두 법은 명예회복에 치중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4.3법에 따라 구성된 4.3위원회에서는 진상조사 후 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불법적 사용에 대해 공식 사과까지 했지만, 조사기구의 권한의 미약함, 관계집단의 집요한 문제제기 등으로 말미암아 학살 책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등 진상규명이 미흡했다는 평가다.


과거사기본법 제정과 진실화해위원회 출범

문제는 위의 세 가지 사건의 수십 배 규모에 달하는 전쟁전후의 다종다양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이었다. 2000년 이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전국통합특별법의 제정을 계속 미뤄오던 국회와 정부는 2005년 5월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을 제정했다. 2004년부터 물꼬를 튼 포괄적 과거청산 움직임에 따라 일제하, 한국전쟁기, 독재정권하의 모든 과거사를 통합 해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으나, 결국 일제하의 친일,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법은 각각 별도로 제정되고, 전쟁기의 민간인집단학살과 독재정권 하의 각종 의문사 의혹사건에다 독립운동 해외동포사까지 아울러 다루는 법이 통합과거사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법제정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법의 취지가 상당 부분 왜곡됐고, 군의문사 사건들은 제외돼 별도의 법으로 만들어졌다.

어쨌든 이로써 지난 반백년 이상 너무도 당연한 국가의 책무, 진실을 밝혀야 할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고 오히려 압살해오던 대한민국이 과거의 과오를 씻고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주춧돌은 놓아졌다. 법에 따라 만들어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넘어야 할 장벽은 많다. 우선 진실규명에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방해하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고,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위원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지위와 역할을 확보해야 하고, 국가기관들에 진실규명과 위원회의 중요성을 알려 자료 협력과 행정 지원, 예산 지원 등의 뒷받침을 최대한 받아내야 하고, 미국 등 관련국가의 자료 협력 등 진실규명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하고, 위원회에 부과된 다양한 과거사 문제들의 본질과 경중을 헤아려 슬기롭게 다루어야 하며, 후대에 부끄럽지 않을 진실규명에 필요한 권한과 인력과 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고, 진실규명 이후의 위령사업, 명예회복, 화해, 배상 또는 보상, 처벌, 역사기록, 기념사업 등을 슬기롭게 준비해야 하는 등, 첩첩산중이다.

그중 민간인학살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사건의 특성상 특정 지역, 특정 시기의 사건만 따로 떼어 진실규명을 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원천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편제와 인력, 권한, 예산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진실 자체에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일차적으로는 위원회의 임무이고, 나아가서는 인권평화세상을 바라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임무이기도 하다.

한반도를 일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 반백 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수백만 유족들의 염원과 유족회, 관련 사회단체들의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그동안 까맣게 묻혀 있던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대학살의 진실을 얼마만큼이나 밝혀내고 그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성찰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다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특별기고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이해, 그 두번째



이무열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