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관세인가, 자유무역제도인가

[자료] Schutzzoll oder Freihandels-System

번역: 채만수



[역자 주: 이 글은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Schutzzoll oder Freihandels-System”(MEW, Bd. 4, SS. 58-61)을 번역한 것이다.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자유무역은 진보적”이라는 명제에만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비맑스주의적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참고로, 각주들은 [맑스-엥겔스 저작집]MEW)의 편집자의 것이다.]




돈과 신용이 없어 프로이쎈의 국왕이 2월 3일의 칙령1)을 공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부터 지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독일의 절대왕정, '온정주의적 지배'(väterliche Regierung)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종래의 '기독교-게르만적' 경제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어떤 위압적인 칙령으로도, 이미 영원히 망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와 더불어 독일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날들이 개시되었다. 그 칙령 자체는, 비록 많은 포츠담적인 연무(煙霧)로 뒤덮여 있지만, 시민계급의 힘을 인정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연무의 커다란 부분도 이미 연합의회가 내뿜는 가녀린 호흡에 의해서 흩어졌고, 곧 모든 기독교-게르만적 환영(幻影)과 유령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의 지배가 시작되자, 독일 내지 관세동맹2)의 모든 통상정책을, 독일의 군주들이나 그들의 대신(大臣) 그리고 오만하면서도 통상과 산업의 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식견이 제한되어 있고 무지한 관료들의 수중으로부터 빼앗아 그 문제에 필수적인 통찰력뿐 아니라 가장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수중에 맡기고 그들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자는 요구도 최일선에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보호관세 내지 차별관세인가 자유무역인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시민계급의 결정에 귀속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를린의 연합의회가 정부에 보여준 것은,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얼마 전의 관세협상에서는 쉬판다우 지배체제(Spandauer Regierungssystem)3)에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보호하며 장려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상당히 명확하고 신랄한 말들로 명백해졌다. 신성동맹의 빌헬름[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과 대신들의 이마에, 국민의 복지에 최대의 무지의 낙인, 혹은 극형에 합당한 배신의 낙인을 찍는 데에는 크라카우 사건(Krakauer Angelegenheit)4)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더 많은 일들이 논의되어 폐하와 각하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국왕도 대신들도 ―죽은 듯이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도 도저히 자신의 능력이나 통찰력에 흡족해 할 수만은 없었다.

시민계급 자체 내에도 게다가 산업 및 통상과 관련하여 두개의 다른 견해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보호관세 내지 차별관세 지지파가 월등하게 가장 유력하고, 가장 다수이며, 가장 지배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시민계급도 사실상, 만일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서 그 산업과 통상을 보호하고 장려하지 않으면,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없고, 강화할 수 없으며, 무제한한 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의 산업에 대한 보호가 없다면 시민계급은 10년 내에 으깨지고 짓밟혀버릴 것이다. 어쩌면 보호조차도 그에게 많이는 그리고 오래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민계급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소중한 군주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들에게 묶어준 기저귀 속에서 너무나 고요하게 놓여 있었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조용히 '손장단을 치며' 보내는 동안에, 그리고 반쯤은 어리석고 반쯤은 교활한 온정주의적 교사나 훈육주임으로부터 벗어날 만큼의 힘을 한번도 갖지 못한 동안에 모든 면에서 추월당하고 앞지름 당했으며, 자신의 최상의 지위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이제 상황이 일변했다. 독일의 군주들은 앞으로는 단지 시민계급의 하인, 부르주아지의 i 위의 점[부속품이라는 뜻]에 불과할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위해서는 아직 시간과 기회가 있다고 하는 한에서 독일의 군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독일의 산업과 독일의 통상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계급이 독일의 군주들에게 요구하고 있고 또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시민계급은 또한 관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계급과 나란히,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참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노동하는 무산계급―이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이 계급은 보호제도의 도입에 의해서 무엇을 획득하는가? 그것에 의해서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영양과 의복이 보다 나아지며, 주거가 보다 위생적이 되고, 휴식과 교양을 위한 시간이 다소 증가하며, 아이들을 보다 합리적이고 주의 깊게 교육할 수 있는 다소의 수단을 남길 수가 있는가?

보호제도를 옹호하는 부르주아지의 신사들은 노동계급의 복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말에 따라서 판단하자면, 산업의 보호와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진실로 낙원과 같은 생활이 시작될 것이며, 뿐만 아니라 독일은 그것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우유와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자유무역론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들의 제도를 이용해야만 비로소 무산자들은 "프랑스의 신(神)처럼", 즉 극히 즐겁고 유쾌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두 집단에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대체로 믿는 아둔한 사람들도 물론 상당히 있다. 그 가운데 영리한 사람들은 이들 모두가 공허한 속임수며, 전적으로 대중을 기만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산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지금 가령 보호관세제도가 실행되든, 자유무역제도가 실행되든, 혹은 양자의 혼합제도가 실행되든, 노동자는 바로 그를 가장 빠듯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이상의 임금을 받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영리한 부르주아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노동자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경우처럼 계속해서 온전한 노동기계이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무산자에게는 보호무역론자가 결정권을 쥐든, 자유무역론자가 결정권을 쥐든, 외관상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귀족제도라는 중세적 잔재와 "신의 은총"에 의한 현대의 독충[국왕을 가리킴]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내적인 본질을 맑고 순수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 대외적인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노동계급도 또한 부르주아지가 완전한 지배를 달성하도록 조력하는 데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강조는 역자)

오직 하나의 계급―부르주아지―만이 착취․억압계급으로서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궁핍과 빈곤의 책임이 때로는 어떤 신분에 때로는 다른 신분에, 혹은 단지 절대왕정 및 그 관료에게만 귀속되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최후의 결정적인 투쟁, 유산자와 무산자 간의 투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불필요한 장벽이나 어지러운 부속물들이 전장에서 치워진다. 적대적인 양쪽 군대의 진지가 명료하고 일목요연해지는 것이다.

시민계급의 지배와 더불어 노동자도 또한, 여러 상황에 강제되어, 한없이 중요한 진보를 달성하게 된다. 즉, 그들은 더 이상 개개인으로서, 기껏해야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으로서 현상(現狀)에 반대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독자적인 이해관계와 원칙을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의 최후의 가장 악질적인 불구대천의 원수―부르주아지―를 공동의 계획에 따라서 일치단결하여 공격한다.

이 투쟁의 결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귀족제와 절대왕정이 중간계급에 의해서 최후의 일격을 당한 것처럼,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 앞에서 쓰러질 것이고, 쓰러지지 않을 수 없다.

부르주아지와 함께 사적소유도 전복되며, 노동계급의 승리는 모든 계급적․신분적 지배를 영구히 끝낸다. <노사과연>




보호관세인가, 자유무역제도인가



F. 엥겔스


1)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쎈 연합의회의 소집에 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1847년 2월 3일자 칙령이다. 프로이쎈 연합의회란 당시 존재하던 8개 주의회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국왕의 재량에 따라 소집되게 되어 있었고, 귀족원과 3신분원의 양원(兩院)으로 나뉘어 있었다. 귀족원은 70명의 상급귀족대표로 구성되어 있고, 3신분원은 237명의 기사대표, 182명의 도시대표 및 124명의 농촌대표를 포함하고 있었다. 연합의회의 권한은 평화시 새로운 공채의 동의와 새로운 세금이나 증세의 동의에 한정되어 있었다. 법률안에 관해서는 자문을 받을 뿐이었고, 또 국왕에 대한 청원 제출의 권리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1847년 4월 11일에 열린 연합의회는 1847년 6월 26일에는 이미 다시 해산되었는데, 이유는 그 다수가 정부가 제안한 모든 재정안을 거부했고 새로운 국채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2) 관세동맹(프로이쎈-독일 관세동맹) ― 프로이쎈 지도 하의, 내국관세의 폐지와 국경관세의 공동 규제를 위한 독일연방 각국의 경제동맹. 그것은 1834년 1월 1일에 프로이쎈과 기타 독일연방의 가맹 각국에 의해서 결성되었고, 점차 오스트리아와 자유한자동맹도시들(뤼벡, 함부르크, 브레멘), 북독일의 몇몇 소국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 국가들을 포괄했다.


3) 쉬판다우 지배체제 ― 엥겔스는 반동적인 프로이쎈 국가체제의 상징으로서 ― 프로이쎈의 병영훈련의 중심이고 '국사범'을 가두는 감옥인 ― 베를린 근교의 쉬판다우(Spandau) 요새 이름을 이용하고 있다.


4) 크라카우 사건 ― 1846년 크라카우(Krakau) 봉기를 진압한 후 프로이쎈 정부가 오스트리아에 의한 크라카우의 병합에 동의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동의한 결과 무엇보다도 크라카우는 오스트리아 관세영역에 편입되었고, 프로이쎈의 상품에 높은 관세가 부과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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