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양심수 인권에서 재소자 인권으로




이 글은 8년간에 걸친 청송감호소 재소자 인권유린 소송이 기각되어 2004년 6월 20일 법정구속되고, 또 춘천교도소 인권유린 고발을 이유로 추가로 복역한 윤치고님의 자필 원고와 구술을 옮긴 것입니다. 2007년 3월 3일에 출소하신 윤치고님은 연구소에 세 차례나 직접 찾아오셔서 억울한 사정을 말씀하시고, 이 일을 사회적인 이슈로 만드는 것이 스스로의 한을 푸는 것이라고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경험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라 소박하고 다소 두서가 없을 수 있지만 최대한 윤치고님의 경험을 그대로 살리려 하였습니다. 일부 어법이나 표현은 윤치고님의 동의하에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화려한 수사나 기교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인권이란 무엇인지, 사법권력의 본질은 무엇인지 폭로하고 있습니다. 여러 활동가들을 부끄럽고 숙연하게 만드는 진실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옮긴이: 최상철)




나는 눈을 뜨니 고아원이고 부모 형제 얼굴도 모르고 세상에 태어났고 지금까지도 나의 이름과 나이도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부산 형제 복지원에서 4년 동안 있으면서 7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 되고도1) 원장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구속되어도 무죄로 풀려나오는 것을 보고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부산 장림동에 있는 영화수가 형제복지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나는 형제복지원에서 8살부터 12살까지 살았다. 매질과 강냉이죽만 나오는 식사 등 학대에 견디다 못해서 12살 때 형제복지원을 도망 나왔다.

그 후 국제 고무 공장에 다녔다. 그 당시에 12살이어도 공장에 다닐 수가 있었고, 나는 가정공업에서 운동화 끈 짜는 기술을 배워 기술자로 국제고무 공장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 한 달에 급료를 두 번씩 받았고 공장에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방을 얻어 놓고 있는 지역은 방값이 가장 쌌지만 제일 우범지역인 부산진구 범천4동이었다. 동네에서 절도나 강도 사건만 나면 내게 와서 무조건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고문하여 나에게 덮어씌우고 하였다. 심지어 피해자들이 내 얼굴 보고 아니라고 하는데도 형사들은 맞다고 하면서 구속시키곤 했다. 그 당시에 출신 성분이 고아라고 하면 무조건 죄를 시인하게 했고 징역을 내렸다. 국선변호사들은 있으나 마나고 죄도 없이 전과 3범이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이 나라를 나의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 왔다. 진실과 정의도 없고 약자만 괴롭히는 나라는 나의 조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아라는 하나만으로 죄를 선고하는 재판장들도 문제이고 또한 나는 무지하니까 당하는구나 생각하여 교도소에서 한자 3000자를 배우고 법전을 공부하였다. 지금도 다른 재소자들의 항소이유서나 탄원서도 써서 주고 한다. 한 번은 사형수 주금영의 탄원서를 써서 검사에게 따귀를 맞기도 하였다. 당시 글을 모르는 주금영씨에게 정황을 진술하게 하여 당시 상황을 서술하여 알리바이를 증명하였다. 결국 증인과 법정에서 대질 신문한 끝에 주금영씨는 무죄판결에 이르렀고, 지금도 가장 보람있는 일로 기억한다.

청송감호소에서 인권유린 사건을 최초로 사회에 알리고 그 결과 사회보호법은 폐지되었다. 처음에 사회보호법 관련한 문제는 인권단체나 시민단체에서도 취급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보안법이나 노동운동이나 취급했는데 누가 인기도 없는 흉악범만 있는 청송감호소 문제를 취급하려고 하겠는가. 인권만은 평등한 인권이라고 생각 했는데 귀족 인권만 취급하고 재소자 인권은 취급도 하지 않고 했다. 각 언론사에서 청송감호소 인권유린 사건으로 여러 차례 방송이 나가고 나서야 시민단체에서도 청송감호소 인권유린 사건을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당시 청송감호소는 5.18 이후 군제대자 출신들이 행정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제는 진실이 규명된 삼청교육대 출신 박영두 씨 살해 사건 등 당시 청송감호소는 폭력과 잔인함이 난무하는 수용소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을 일부만 언급하겠다. 88년에 「한겨레 신문��, 「말�� 지 등 언론 매체를 제대로 반입하지 않는 공무원을 고소하였다. 저들은 그 이후 보안과 지하실에서 고소를 취하하라며 자결방지용 투구를 씌운 채로 거꾸로 천장에 매달아 세 시간 동안 마구 때렸다. 다음에는 족쇄를 비롯한 기구에 포박이 되어 징벌방에서 2달 간 수용되었다. 당시엔 손까지 뒤로 묶인 채로 식사를 해서 사람이 아니라 개처럼 밥을 먹고 지내야 했다. 93년 청송감호소에서는 사회보호법 폐지 재소자 김재열 살해사건 진상규명을 내걸며 대규모 단식 투쟁을 다른 16인과 함께 주동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1년 가석방이라는 저들의 회유책에 넘어갔고 결국 거짓증언을 하며 가석방으로 출소였는데, 나만 또 1년간 독방생활을 했다. 10년간의 감옥생활 중 여러 차례 독방생활을 했기에 이미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언론을 통해 사태가 조금씩 알려져 나가고 있었다. 청송감호소 문제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던 것은 구타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0년만인 96년 출소하여 사회적응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청송감호소 인권유린 사건을 폭로하며 8년 동안 법정 투쟁하였다. 그러나 소송은 기각이 되었고 2004년도 법정구속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양심수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그때 양심수라는 것도 ‘귀족’ 인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보안법이나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서 출소하면 국회의원도 되고 노조위원장도 되고 하여 돈도 많이 벌고 하는데 본인은 청송감호소에서 감호자들의 처우 문제를 항의하다가 10년 동안 고문과 구타를 당하여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출소하여도 전과자라는 소리만 듣지 나에게 아무런 득이 없고 피해만 있었다. 보안법이나 노동운동 관련 구속자들과 많이 이야기도 나누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재소자 처분 개선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는 이는 없었다. 이들조차도 출세를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반면에 진실한 재소자 인권운동을 한 나는 한동안 양심수로 지정되지도 않았던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감 후 6개월 간 각 언론사에 투서하고 당시 같이 수감된 양심수들에게 수차례 호소한 후에서야 양심수로 지정될 수 있었다. 춘천교도소에서 재소자 인권유린 사건으로 소장, 보안과장 교도관 4명을 대검찰청에 고소하였더니 인권유린을 당한 내가 오히려 무고로 징역 1년 추가로 살고 나왔다.

내 억울한 사연을 시민 단체에 알리고 인권단체에도 알렸는데도 모른 체하고 아무런 소식도 없고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가 현재 한국 시민단체의 본 모습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하루를 살아도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인민들도 진실하게 따른다. 깡소주 먹고 막걸리 먹고 할 때는 진실하게 투쟁하던 사람이, 양주 먹고 권력 잡아서 돈을 많이 벌고 나서는 하루아침에 변절하는 것을 보니 답답했고 많이 실망했다. 교도소에 있을 때 투철한 투사였던 김근태는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약자를 보지 않고 자신들의 지배 권력만 채우기에 급급하다. 한때 노무현에 대해서도 용감한 변호사라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완전히 권력에 찌들어 있는 모습에 절망하고 있다. 단적으로 군사정권인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양심수 특사가 있었지만,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을 감싸는 비리 정치․경제인들을 사면하였다. 국가란 것이 과연 누구의 편인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인민들을 생각하고 어려운 동지가 있으면 보살펴 주고 항상 진실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정권이 위기에 빠진 것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동지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만 배를 채우고 하니까 정권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항상 진실한 운동가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운동하는 분은 서준식씨 단 한 분밖에 보지 못하였다. 모든 운동가들이 서준식씨처럼 진실하게 활동한다면 변혁과 통일세상이 하루 빨리 올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노사과연>


2007년 3월 11일.



특별기고 

양심수 인권에서 재소자 인권으로



윤치고 | 재소자 인권운동가



1) 윤치고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군 출신 원장이 정부 비호 아래 복지원을 운영하면서 온갖 반인류적 작태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라고는 없었고, 아픈 아이는 때려서 죽게 하고 또 시체를 시립병원에 해부용으로 파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