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진보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한미 FTA협상 타결로 나라가 들끓고 있다. 한나라당과 조선ㆍ동아ㆍ 중앙 등 보수반동적인 신문들 및 민주당 조순형 등 쪽에서는 한미 FTA협상 타결에 대한 찬양가를 부르며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과 지도력을 높이 추켜세우고 있는가 하면, 소위 진보적인 시민단체나 농민단체 등에서는 한미FTA협약을 망국적인 협약으로 비판하면서 노무현대통령 퇴진운동까지 불사하겠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 많은 우리 노동자들은 어리둥절할지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대통령은 소위 “진보논쟁”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보논쟁은 최장집 교수에 의한 노무현정권의 평가를 시발로 해서 일어났다. 그것은 노무현정권의 위기가 바로 진보진영의 위기라는 인식에서, 노무현정권이 어떻게 위기를 맞게 되었는가를 둘러싼 논쟁과, 다음 대통령선거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라는 논쟁으로 발전되었는데, 이런 진보논쟁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유연한 진보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자기와 다른 견해를 지닌 진보론자들을 소위 비판 아닌 비난하고 나섰다.

유연한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했던 노무현대통령은 왜 거대금융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실현이라 할 수 있는 한미FTA협상을 고집하였는가? 그는 한미FTA협상을 소위 “개방”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한미FTA협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개방반대론자, 그의 말에 의하면 “교조적 진보”론자, 심지어는 노무현정권 사람의 한 사람인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의 말에 의하면, “관념적 좌파” “강단좌파”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는 “나도 진보적 지식인이”다고 한다

여기서 내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한미FTA협정이 아니다. 요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진보논쟁”이라는 것이 어떤 계급적 입장에서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는가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새로운 것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직 그럴 여유와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사고하는 나는 그 진보논쟁자들과는 사유방식 및 행동방식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그 “진보논쟁”이라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에게 사고의 재료를 주어 당장 닥쳐올 대선국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유하는 데에 조금의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최장집교수의 노무현정권에 대한 비판과 그 계급적 한계.


먼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역임했던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참여정권에 대해 포문을 연다. 그는 논문 「사회적 시민권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노무현 정부의 경우는 노동-복지정책이라고 부를만한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급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며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업적은 너무나 빈곤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비판은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출범 당시에는 가장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소위 진보세력의 지지만이 아니라 노동세력의 지지까지 받았던 노무현 정부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사회적 소외계층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도 실패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장집교수는 이런 실패의 집약적인 표현으로서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의 심화, 대중생활의 파괴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양극화의 심화”라는 기준을 가지고 노무현 참여정권의 실패를 거론할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실제로 노무현대통령도 인정하다시피 “참여정부 동안에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맞”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가 경제적인 면에서 노무현정권의 실패의 현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의 심화, 대중생활의 파괴 등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계급적으로는 중ㆍ소자본가나 소부르주아지의 몰락을 한탄하는 그런 입장에서 노무현 참여정권을 바라보는 것이고, 또한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의 심화, 대중생활의 파괴 등을 마치 정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그런 주관주의적 입장에 서있음을 보여준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의 심화, 대중생활의 파괴 등은 자본주의가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중ㆍ소자본가나 소부르주아가 대자본가 및 거대재벌의 수탈로 인해서 끊임없이 몰락해갈 수밖에 없음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현상이고 국가권력의 정책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그런 자연사적인 과정이다.

물론 정책을 통해서 중ㆍ소자본가나 소부르주아의 그러한 몰락을 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노무현 참여정권은 정권초기부터 거대독점자본과 미제국주의에 굴종하면서부터 신자유주의적 시장원리주의를 근간으로 해서 정책을 펼쳐왔으므로 그들의 몰락을 완화할 뜻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노무현대통령이 양극화의 심화와 관련해서 “저도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아주 정치적인 발언이고 수사적이다. 오히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노무현 참여정권에 와서 가일층 심화되어가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빈곤화나 민중의 빈곤화, 신자유주의에 의한 노동의 유연성에 따른 고용의 불안, 실업, 그리고 해고 및 조기퇴직에 다른 소상인의 양산과 몰락 등등이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는 이런 점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양극화 문제로 해소해버려서인가?

최장집 교수는 참여정부의 특징으로서는 국가와 재벌과 경제관료의 결합을 들고 있다. 그는 “민주정부의 성장정책이 다시금 국가-재벌 동맹을 불러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즉 “노무현 정부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정책의 틀을 발전시킨 것도 아니었고 '2만불 성장시대'라는 정책목표의 선택과 아울러 집권엘리트-경제관료-삼성그룹 간의 결합이 만들어지면서 개혁적 정책의 공간은 크게 축소되었다”, “그것은 정서적 급진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스타일과 실제 내용에서 보수적인 경제정책의 기묘한 결합이 아닐 수 없다”고 최장집교수는 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표방한 것과 관련해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참여의 의미는 마치 정부가 아무개 계층, 아무개 집단에 혜택을 주는 정책을 만들려 하니 아이디어를 제출하라고 하는 식”이라며 “전문가들이나 시민단체들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정책 산출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참여라는 이름의 관료 기술적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국가와 재벌과 경제 관료의 결합으로 인해서 최장집 교수는 “민주정부들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극단적인 시장 중심적 발전방향으로만 가속화되었다”면서 “집권 초기에는 노동포섭적, 사회복지적 정책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면서 개혁적 요소를 포함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장과 효율성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보수적 요소의 강화로 전환하는 퇴행의 궤적을 그렸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정책전환은 경제관료 및 기술관료들의 영향력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그것은 민주정부와 경제관료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최장집교수의 말에 의하면 “한국의 민주정부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 시민권의 부여를 중심으로 하는 복지국가적 성격을 갖지 않으며 실질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에 있어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는) 민주정부들이 박정희 정부 시기 권위주의적 복지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최장집 교수의 이런 비판이 어떤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최장집교수는 노무현정권의 정치적 과제와 관련해서 노무현 정권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있는가?

원래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 점을 보기위해서는 노무현 정권이 어떤 세력의 지원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원래 도시소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의 지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표방하고 있던 민주노동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그 당의 권영길대통령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지지하였다. 어떤 열망으로 노동자들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는가? 노동자들은 노무현 정권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가일층 발전시켜 이 땅에서 국가보안법 같은 것을 폐지하고 혁명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일할 수 있는 권리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또한 대외적으로는 민족 자주권을 수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정권은 이런 노동자들의 요구를 저버렸지만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정권이 노동자들의 이런 열망을 어떻게 저버리고 있는가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소위 '사회적 시민권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YSㆍDJㆍ노무현 정부 등 ‘민주정부들’의 사회경제정책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이들의 직무유기를 지적하고, “한국의 민주정부는 지난날 권위주의 하에서의 생산체제와 발전패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기반과 잠재적 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안 하고 있다”고 자유주의 입장에서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자유주의임을 보여주는 것은 “사회발전의 성과물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공존을 위한 사회적 윤리를 창출하는 공동체 위에 시장과 경제를 올려놓아야 한다”는 표현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실제 최장집교수는 자유주의 논리로 그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정책을 표방하는 노무현참여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정권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노동의 위기와 동일시해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노동의 쇠락은 민주정부의 무능력 내지는 실패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는 민주화 이후 등장한 민주정부들이 대안적 모델을 갖지 못하고 과거 권위주의적 성장정책을 되풀이함으로써 민주주의는 물론 노동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정부들은 현실적 삶의 세계와 밀접한 사회경제적 이슈들을 정책 혹은 정치의 중심사안으로 끌어오지 못했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러면서 최장집 교수는 한국노동운동의 위기와 관련해 “노동의 위기는 민주정부들의 문제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고 전제한 뒤 “'운동에 의한 민주화' 과정은 민주화운동세력들이 권위주의정부를 해체하는 데는 강력했으나 민주정부를 유능하게 운영하는 문제에서는 별반 기여를 못했다”, “노동운동 역시 정치적 억압과 투쟁했을 때는 강력했으나 민주화 이후 조건에서는 의외로 분열상과 무력함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그는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은 현실에 적용 가능한 이념과 원리를 갖지 못하며, 따라서 그로부터 도출되고 현실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못해왔다”며 “급진성과 전투성은 반대를 위해서는 필요한 무기이고 전략이지만 무엇인가를 스스로 성취하는 데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최 장집 교수는 “노동운동과 중산층과의 관계는 노동운동이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중심적 변수”라며 “급진적 레토릭은 새로운 환경 하에서 일반노동자들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서도, 그리고 중산층과 광범한 연대를 만드는 데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최장집 교수의 이러한 발언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첫째 노무현 정권에 의해서 더 한층 야기된 민주정부의 위기를 노동의 위기로 볼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건 노무현 정부건 간에 그들은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마술에 사로잡혀 모두 반노동자적 정책을 펼쳐왔다. 소위 민주정부의 발전과정과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은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오히려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조합운동이나 소위 그 정당이라는 집단이 자기의 운동역량을 제도정치권 속에 편입시키려고 하면서 전혀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정치투쟁을 가열차게 벌이지 못한 데에 있지 않을까? 둘째로 최장집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은 현실에 적용 가능한 이념과 원리를 갖지 못하며, 따라서 그로부터 도출되고 현실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못해왔다”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오늘날 노동자계급에게 해방사상과 그 해방의 길을 열어주는 이론이 없다고 보는가?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각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인 연합체”를 건설해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그런 이념과 사상을 지니고 있다. 이 사상과 이념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있는가?

최장집 교수는 조희연교수의 용어법에 따르면 제도정치중심주의 사고에서 노무현 참여정부를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성과 사상성의 문제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정부 등의 민주정부가 했어야 할 일로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 자체를 잘 제도화하고 실천할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방법을 통하여 그것이 서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집합적 힘을 조직하는 데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사회경제적으로는 “마찬가지로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성장 그 자체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성장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는 공동체적 결속을 다져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런데 민주정부는 이런 일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권위주의 정부보다 더 성장중심적이고, 그럼으로써 재벌중심과 노동배제적인 정책들”을 펼침으로써 “민주화 이후 시장 지상주의 가치가 군림하게 됐고, 성장과 시장주의 중심에 재벌과 국가의 동맹이 위치한다”고 강조하고, 최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재벌이 중심이 되고 하위파트너로서 국가의 정책이 그(재벌)에 봉사하는 내용이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최장집 교수가 그 놀라운 박식함과 냉철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정부에 의한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 민주정부의 무능력’에서 찾고 있는 점이다.

최장집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는 바로 민주정부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이 문제의 근원은 정부의 노동정책, 사회정책, 경제정책에 있으며 민주정부가 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무능과 잘못된 정책의 산물”이다.

논쟁은 노무현대통령이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한다」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전개되고 이 글의 서두에서 자기들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저는 요즈음 소설을 읽거나 TV드라마를 보면서, 아내에게 ‘작가는 참 좋겠다’. 이런 푸념을 곧잘 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비판이나 논쟁을 보면서도 역시 ‘학자들은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학자는 말하는 사람이고, 집권한 정치인은 실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논리구조의 제약은 있겠지만,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현실의 중요한 변수를 외면할 수도 있고 자유로이 온갖 가정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는 사람은 상황의 제약을 단 하나도 도외시 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가정을 동원할 수도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장기적인 전략으로, 또는 의제화ㆍ담론화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당장의 가능성이 낮은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각오해야 합니다.


서강대 손호철교수는 노무현대통령의 이 글을 놓고서 “학문, 특히 비판적 학문의 역할이 그런 것이지, ‘이론대로 현실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론을 버리라’거나 ‘학자들은 좋겠다’고 비아냥거릴 문제는 아닙니다.”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노무현 정권을 둘러싼 현실적 제약, 현실이 있다. 그 현실적 제약, 현실은 무엇인가? 물론 노무현 정권을 둘러싼 현실을 따진다는 것은 이 정권의 실정을 합리화해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노무현정권을 둘러싼 현실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것은 곧 왜 그들이 그런 ‘성장중심적이고, 그럼으로써 재벌중심과 노동배제적인 정책들’,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을 펼치면서 노동자들과 소부르주아들의 열망을 저버리게 되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현시점 혹은 현실은 정세라는 개념으로 분석될 수 있는데 정세라는 것은 특정한 시점에서의 국제적 혹은 국내적인 중첩적인 계급적 힘 관계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람시는 국제적 정세 및 힘 관계를 여건으로 해서 국내적 정치정세를 분석함에 있어 세 개의 레벨을 구별할 수 있다고 쓰고 있는데, 그 첫째 레벨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객관적ㆍ계급적 힘 관계이고 특정 계급사회의 계급ㆍ계층구조가 그대로 객관적 힘 관계를 구성한다. 제2의 레벨은 경제적ㆍ동업조합적인 차원에서의 계급들 및 계층들 간의 힘 관계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급들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전국적ㆍ지역적ㆍ직능적으로 조직해가는 정도와 그들 조직들 간의 힘 관계를 의미한다. 셋째 레벨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힘 관계이며, 여기에는 계급들의 정당 등의 정치조직들 간의 힘 관계와 국가기구내부에서의 힘 관계가 포함된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정세분석에는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서 미국과의 힘 관계가 규정적인 것으로 포함되고 게다가 남북분단체계라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소위 진보논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현실의 사회정치적 운동의 기본방향을 좌우하는 계급들 간의 힘 관계나 노무현정권을 둘러싼 현실, 특히 미국과 한국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노무현정권의 초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노무현정권의 정치적 역량을 무력화시키는 그런 사건을 목격한다. 그것이 바로 김대중대통령 시절 관련 남북관계청문회이다. 노무현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 현충원을 방문하고 그 다음에 미8군의 서열을 받는다. 그리고 미국으로 날아가 미국 부시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LA에서 “한국이 공산화되었으면 나와 나의 가족 모두 아오지탄광에서 다 죽었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반공주의 충성맹세를 한다. 사실 우리는 한국정치의 기본방향을 좌우하는 힘 관계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미국이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에 막강한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최장집교수의 비판에는 미국과 한국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빠져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객관적인 정세가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인간이 만들어 간다.

한쪽에는 미국과 그 소위 장학생들이 있었지만 또 한 쪽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고 탄핵국면에서도 자기를 구출해주었던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민중들의 힘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노무현대통령은 미국에 굴복하여 미국과 영국이 주도가 되어 자행하고 있는 침략전쟁의 동맹자가 되어 군대를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으로 파견하고 만다. 대중이 미영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을 반대했던 운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대중운동에 기초해서 자기 정책을 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 있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굴종해버린다. 이런 힘 있는 것으로의 굴종이 소부르주아지의 속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어떠한가? 한국경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그 체계 면에서는 지역 자체 속에서 원활한 재생산 구조를 지니지 못하고 대일ㆍ 대미 무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짜여져 있는 그런 체계이다. 이런 체계 속에서 가장 노예적으로 착취당하는 계급은 노동자계급이고, 그로 인해서 노동자 대중의 빈곤화는 가일층 심화되어가고 있으며, 또한 이런 체계 속에서 가장 잔인하게 수탈당하고 있는 세력은 소부르주아, 중ㆍ소자본가집단 및 농민이며 이런 수탈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몰락해가서 노동자군을 이루어가고 있다. 노무현정권은 미제국주의자와 대재벌기업에 굴종함으로써 착취에 의한 노동자대중의 빈곤화와 수탈에 의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방치해버리고 있다. 여기에다 경쟁력 향상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자들의 새로운 약탈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정책을 이 땅에 강요하면서 노동자대중의 빈곤화와 사회계급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노무현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던 노동자대중들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 대중들도 식의주뿐만 아니라 교육비, 의료비 등을 충당하기도 벅차다.

그러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저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일부 정치언론이 말하는 그런 좌파도 아닙니다. 저는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지만, 무슨 사상과 교리의 틀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개방도, 노동의 유연성도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 효용성의 문제입니다.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하는 방향으로 가는 시대의 대세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거역하지 못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무슨주의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천과 언어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개방, 이것은 일반적으로 외국과의 관계에서 문호개방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미제국주의의 거대 독점자본가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하는 시장원리주의와 작은 정부에 근간한 시장개방을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담 스미스가 말했던 시민적인 “공감”이라는 사회적 윤리를 전제로 하는 그런 시장원리는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또한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것은 노동시장에서의 시장원리주의의 적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모두 “현실적 효용성의 문제”라고 하는데 그 “현실적 효용성의 문제”라는 것이 누구의 입장에 선 현실적 효용성인가도 따져보아야 한다. 시장원리주의는 “시장은 경쟁을 통해서 자원배분을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극히 우수한 구조이”므로 경제사회의 운영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진보라는 개념과 그 이념


소위 “진보논쟁”에 노무현대통령이 참가함으로써 진보라는 개념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다. 그에 의하면,


저는 이제 우리 진보가 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의 진보진영은 진작부터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참여정부의 노선은 이런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유연한 진보’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교조적 진보’에 대응하는 개념이라 생각하고 붙인 이름입니다.


유연한 진보와 교조적 진보 ! 이에 대해서 손호철 교수가 [노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서한] “진보진영은 틀렸는가”라는 글에서 즉각 반박하고 나선다.


대통령께서는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 진보진영을 “교조적 진보”라고 역비판하면서 자신을 “유연한 진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진보진영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물론 진보가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그동안 추진해온 여러 정책을 볼 때, 유연한지는 몰라도 ‘진보’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정치세력이 진보이고, 참여정부의 노선은 진보도, 한나라당식의 ‘냉전적 보수’도 아닌 ‘중도개혁’, ‘자유주의적 개혁’, ‘개혁적 보수’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요. 참고적으로, 측근이신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도 정권초기 참여정부를 좌파라고 비판하는 세력에 대해 참여정부는 유럽식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중도우파정권이라고 반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대통령께서 자신을 “유연한 중도” 내지 “유연한 개혁”세력이라고 규정하실 일이지 왜 진보라는 명칭을 고집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와 반동, 개혁, 혁명, 좌파와 우파 등의 개념들이 원래 의미가 왜곡된 채로 아주 정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개혁이면 일단 진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아주 반동적이고 침략적인 신자유주의적 원리에 입각한 개혁도 진보에 속한다. 물론 그의 언어적 논법에 따르면 한나라당이 하는 개혁도 진보에 속한다.

그래서 손호철교수는 오늘날 진보라는 용어의 사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진보”에 대해서는 크게 네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첫째, 변화에 찬성하면 진보, 반대하면 보수로 보는 것입니다. 소련 붕괴 당시 공산당을 보수파로 부른 것이 그 예로 이 같은 용법은 변화의 내용과 이념을 보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언론이 많이 쓰는 것으로, 진보-보수를 정도 차이의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노무현 정부는 한나라당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니 진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솔리니가 히틀러보다 진보적이라고 진보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주요 정당들이 절대적인 이념기준으로 볼 경우 보수양당제라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시장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진보-보수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 용법입니다. 이 경우 대통령과 범여권의 자유주의세력은 보수이고 사민주의, 사회주의 등이 진보입니다. 마지막으로, 해체주의적 방식으로 젠더문제에서는 박근혜가 권영길보다 더 진보라고 보는 식으로 젠더, 환경 등 분야별로 진보, 보수를 해체해서 보는 것입니다.

이 같은 네 가지 용법 중 삼번을 중심으로 하면서 사번을 결합시킨 용법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손호철교수는 진보에 대한 용어법을 소개하고 있는 데에 머물고 있으나 상지대 정대화 교수는 더욱 강력한 어조로 “진보진영에서 노무현 정부를 진보정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며 '노무현 정부=진보정부'라는 등식은 우익보수에서 비판하려고 만든 잣대일 뿐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최소한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는 포함되어야 진보라고 말했다. 즉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다. 정대화 교수는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폐해를 근본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진보적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측면에서 기득권 문제에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단체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도 한국적 진보의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정대화 교수가 제시한 진보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노무현 정권은 위 네가지 조건 중의 하나라도 해당하는가? 첫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앞에서 많이 언급했다. 둘째 조건과 관련해서 한번 살펴보자.

노무현대통령은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을 등에 업고 특권을 누리는 국가기관은 지금 없습니다. 권력이 합리화되고 정경유착이 끊어졌습니다. 정치와 권력뿐만 아니라 시장과 사회의 투명성이 높아졌습니다. 공정한 경쟁의 규칙이 확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도 해소되었습니다.

언론권력은 여전히 막강하지만 권언유착의 근절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됐습니다. 언론의 행태도, 언론을 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끝나면 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부 언론권력도 참여정부에서는 한 발도 물러설 수 없을 것이나,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행태를 계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하다가는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여정부 동안에는 ‘앞으로 계속 그래서는 곤란하다’는 학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불만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어떻든 이것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민주주의 발전에서 이런 것들이 공적이라면 공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이 요구했던 민주주의는 이런 것만이 아니다. 혁명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작업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형법을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개정하는 것이고 헌법에 국민소환권과 주민소환권을 보장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민중의 요구를 저버렸고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들의 행동권을 불법화하여 탄압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대화교수가 제시한 “한국적 진보의 빼놓을 수 없는 조건”에는 하나의 중대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미제국주의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 한 복판에 미군이 있고 대통령은 당선되어 미8군의 사열을 받는 현실에 있다. 그리고 미국에 날아가서 반공주의 선서를 하고 미국의 대통령을 소위 ‘알현’한다. 미국은 한국정치에 막강한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권력을 직접적이든 아니면 소위 미국장학생을 통해서 행사한다. 역사는 미국이 국내정치에서 민중과 독재자와의 투쟁에서 그리고 남북관계 문제에서 어떻게 행동하여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용산 미군기지가 서울을 떠나는 것, 앞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이 단독으로 행사하게 되는 것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서 그는 용산 미군기지가 서울을 떠나는 것만도 “진보진영의 오랜 숙원”인 것같이 왜곡하고 있는데, “진보진영의 오랜 숙원”은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나라로 가라는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되어도 미군이 이 땅에 있는 한, 미제국주의는 이 땅의 정치현실에서 막강한 권력으로 남아 있게 되고 그들은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자기 나라의 거대독점자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계속 봉사하게 되므로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도 별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진보에 대한 정대화 교수의 개념에는 다음 두 가지 점도 결여되어 있다. 첫째, 오늘날에 있어 누가, 어떤 계급이 사회 진보에 이해관계를 갖고 그 추진력으로 되는가라는 진보의 주체적 문제이고, 둘째는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진보는 어떤 내용을 담지해야 하는가라는 대안적 사유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모두가 진보일 수는 없다. 소부르주아지들도 사회 양극화의 심화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협동사회의 건설의 기본 조건으로 되는 사적 소유의 폐지에서 보면, 그들이 극히 반동적으로 됨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본가들도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 있다. 그들을 우리는 진보세력이라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진보의 주체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는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고 대공업을 통해서 집단주의적이고 직접적 민주의식을 배우고 단결을 몸에 익혀온 노동자계급이 아닌가? 따라서 진보의 대안적 사유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폐지가 그 발전의 조건이 되는 협동사회의 건설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소부르주아지는 노동자계급과의 동맹 속에서만 진보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을 보자. 노무현정권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도움을 받아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등장했지만 얼마 안가 “유연한 진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극히 반동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너무나 자리에 연연한다.

최근 노무현 정권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정대화교수의 진보라는 조건에 반대하여 진보개념이라는 궤변을 들어놓는다.


좌파와 진보는 분명히 다르다.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고,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한다. 좌파는 계급의식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진보는 개인주의에 뿌리를 둔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순전히 내 개인의 생각일 뿐이므로 진보에 대한 정의가 사회적 합의를 이룰 때까지 보다 활발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더 구체적으로는 올 대선에서 정책경쟁을 통해 좌파와 진보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리라 믿는다


또 다른 곳에서 조기숙교수는 진보세력이 자유주의적 진보세력과 좌파적 진보세력으로 분열되어 진보세력의 위기가 왔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반대하여 “개인주의에 뿌리를 둔 공동체주의”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아담스미스의 시민적 공감을 전제로 한 시장원리에 바탕을 둔 자유경쟁의 자본주의 사회로 되돌리려고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도 진보에 속한다.



최장집-손호철-조희연의 논쟁


논쟁은 조희현교수가 최장집교수에 대한 비판 및 손호철교수에 대한 비판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이때부터 논쟁의 초점은 2007년 대선국면으로 넘어가는데, 거기에는 노무현 참여정부의 실패를 분석함에 있어 최장집교수의 제도정치중심주의적 분석방법과 조희연의 사회중심주의적 사유방식이 대립하게 되고 또한 한나라당의 집권에 대한 입장을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먼저 소위 진보론자들이 벌이고 있는 노무현 참여정부의 실패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살핌에 있어 우리는 진보론자들이 노무현 참여정부가 실패했다고 하는데 무엇을 실패라고 보고 있고 그 실패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를 잘 살펴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진보논쟁자들의 계급적 입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참여정부의 실패를 정치적인 면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 자체를 잘 제도화하고 실천할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방법을 통하여 그것이 서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집합적 힘을 조직하는 데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데, 참여정부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고 있다. 조희연교수는 최장집교수의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정상화라고 하는 문제의식이 존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조희연씨의 말에 의하면 제도정치 중심주의적 사유에 서서 거리의 정치를 거부한다. 그는 “사회의 광범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고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 구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라고 보고 “또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려면 사회적 갈등들이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어야”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노동자대중에 의한 거리의 정치를 거부면서 “급진성과 전투성은 반대를 위해서는 필요한 무기이고 전략이지만 무엇인가를 스스로 성취하는 데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 “급진적 레토릭은 새로운 환경 하에서 일반노동자들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서도, 그리고 중산층과 광범한 연대를 만드는 데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최장집교수는 1977년 스페인 민주화 시기의 '몽클로아협약'을 예로 들며 “서민-소외계층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을 '적극적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실질적 민주화을 진전시키는” 사회적 협약을 제안한다. 사회적 협약의 핵심의제로 “재벌기업의 오너십 보호와 노동자의 사회적 시민권 획득”이 거론되고 “대타협을 통한 사회적 협약은 권위주의적-가부장적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구조를 민주적인 부르주아 우위와 사민주의적 헤게모니 양자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장집 교수의 논의는 당연히 한나라당에 의한 정권교체도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으로 된다.

조희연교수는 최장집 교수의 논의를 분석하고는 “참여정부의 진정한 실패의 원인 3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서 참여정부 주체세력들은 실패했다.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는가.

첫째의 실패요인과 관련하여, 나는 참여정부 집권세력들은 ‘자기정체성의 정치’에 대해서만 집착했지 ‘헤게모니의 정치’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진보 일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의 실패 요인과 관련하여, 보수적 저항을 뛰어넘어 ‘진보적 민중주의’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의 실패요인에 대하여, 나는 진보적 민중주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보다 급진적으로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다. 나아가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구현하는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안출(案出)하고 실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참여정부의 주체들의 문제만이 아니며 최교수와 우리 자신, 민주진보세력 일반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 지구적인 거시적 제약을 돌파하는 사회적 힘 혹은 비(非)제도정치적 힘을 형성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또한 조희연교수는 참여정부의 실패와 진보진영 일반의 위기요인을 분석함에 있어 “많은 경우 국가에 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복합분석을 방해한다”고 지적하면서 “노무현 정부로 상징되는 지배 블럭의 내적 균열과 복합성”에 관한 분석을 사상하지 않기 위해서 국가를 “일종의 무균열적인 혹은 일괴암적(一塊巖的, monolithic)인 실체”로 사고하지 말고 “국가기구들 간의 균열, 국가요원들의 이질성,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힘, 정부와 당, 사법부와 행정부, 경제부서와 사회부서의 균열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분석에 기초해서 조희연교수는 최장집교수가 분석하듯이 현단계 위기의 문제가 운동정치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단지 사회중심주의적 사유방식에 서서 한국사회 진보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여전히 운동정치의 강화를 통한 사회의 급진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조희연교수는 “대안실험의 사회적 힘”의 형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최장집교수와는 달리 “이러한 힘의 형성은, 제도정치로 수렴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운동정치의 강화’를 통해서, 대중들이 중도자유주의적 정치, 즉 참여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실망과 절망이 보수적으로 회귀되지 않고 급진적 열망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 ……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비제도정치적인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진보적 민중주의의 구현을 위해서는“‘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창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다음의 인식 즉 “국가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면적인 국가계획 경제 형태의 대안이 붕괴한 이후 거시적인 대안 부재 상태에 놓여 있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조희연교수는 최장집교수류의 “제도정치 중심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서, ‘정치와 사회의 관계’ ‘사회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의 위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회의 급진화가 나타날 때만이 보수세력의 비타협성이 견제되고―보수세력과 중도 자유주의세력의 비적대적 공존을 기본으로 하는―제도정치의 정상화가 가능하게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변혁이라는 이념은 사라져 버렸다.

손호철 교수에 대한 조희연교수의 비판은 그가 “한나라당 집권의 긍정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하는 점이고 또한 그가 “민중들이 ‘정치의식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와 한나라당의 사회적 양극화를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하는 점이다. 조희연교수는 손호철교수가 “아예 한나라당 집권이 대중의 좌절과 고통을 증폭시킴으로써 진보세력의 성장의 호조건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손호철교수는 조희연교수가 자기를 외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손호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히려 민중들이 양극화가 단순히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라고 느낄 뿐 이들의 신자유주의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민중들은 양극화에 분노하면서도 그 대안으로 민주노동당과 같은 반신자유주의세력이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똑같은 신자유주의세력인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민중운동진영은 단순히 한나라당 집권 저지에 나설 것이 아니라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해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만들어 사회적 양극화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범여권의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를 포기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포기한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민중들이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를 겪으면서 문제가 단순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있음을 깨달아 반신자유주의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 민중들이 신자유주의를 “더 극단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글을 맺으면서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이고 게다가 미제국주의에 의해서 경제적ㆍ정치적ㆍ외교적으로 지배받고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이 빠져 있고, 게다가 미국과 한국 간의 힘 관계가 빠져 있는 그런 진보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이 시대의 진보의 주체이어야 할 노동자계급이 배제된 논쟁을 우리는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양극화의 문제로 정권의 성패를 판단하려고 한다. 논쟁은 교수들 간의 논쟁으로 되어가고 있다.

조희연교수는 자기는 사회중심주의의 관점에 서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중심주의는 조희연교수가 최장집교수의 제도정치중심주의의 관점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용어인 듯하다. 이런 사회중심주의의 관점에는 계급운동이라는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을 기본계급으로 나누어진 계급적인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진보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투쟁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노무현참여정권이 들어선 것도 노동자계급의 도움을 받아서이지 않는가? 그리고 노동자계급만이 제국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이자 지배양식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의 철저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원래 이제 논쟁은 중도자유주의자들의 집권의 문제로 가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내어 협동사회를 건설 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소위 계급운동중심주의적 관점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 심상정의원이 최근 글에서 발표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이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최장집교수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한미FTA가 타결되자 민주노총은 촛불시위를 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된 정치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총파업으로 한미FTA반대투쟁에 나서야 했다

이런 데에는 진짜 진보적 활동가들의 책임이 있다.



소위 “진보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성칠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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