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의 진보진영에 이주노동운동을 제안한다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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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금돼지해를 맞이하는 한국사회는 국내체류 외국인이 100여만 명에 이르고 있다. 2015년에는 200여만 명이 체류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2005년 5월 국무총리실 산하 ‘외국인정책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열린사회 구현’이라는 새로운 정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취업이 허용된 이후 “이주민1)”과 “다문화” 정책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 100만 시대’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는 ‘다문화사회’에서의 ‘이주민정책’을 마련하고 ‘이민사회’라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현실에 서있다.

50여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법과 제도적으로는 이주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다. 이제 진실로 국경과 민족을 넘어 일하는 노동자는 하나인 것을 결의하고 치열한 실천이 요구되는 역사적인 현실에 와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조합운동 주체들이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자신들의 경쟁자로 보는 부분이 있다. ‘이민사회’라는 미래를 고민하는 한국의 진보적인 노동운동과 정치조직(정당과 단체)들의 실천도 분명하게 보이질 않는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은 우리를 다양한 사상과 주의로 혼동하게 하고 있다. 자본의 분열과 차별화 전략전술에 맞서, 다름(차이)을 넘어, 차별을 넘어 함께 사는 평등세상, 노동해방세상을 만들어가는 노동자계급 사상에 입각한 이주정치운동이 필요하다.



1. 한국의 이주노동자 현황


1) 정부정책의 변화

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동남아를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이 시작되었다. 한국정부의 이주노동자정책이 전무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모두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1991년 11월 정부는 늘어나는 이주노동자문제에 대한 정책으로 일본식 모델을 본 떠 해외투자기업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하고, 1993년 11월 산업연수생제도를 마련하여 외국인력 활용 정책을 채택하다가 이주노동자운동이 거세지자, 2003년 11월에 고용허가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시기

1987~1991.10.

1991.11.~2003.10.

2003.11.~

2007.1.~

특징

정책 부재 시기

산업연수제 시기

고용허가제와 산업연수제 병행 시기

고용허가제 시기

내용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이 미등록노동자로 정착하는 것을 방관

연수생의 저임금, 장시간노동, 노동법 적용과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에서 배제. 미등록노동자 증가

고용허가제 시행, 중소기업중앙회의 반발로 산업연수제 존속

산업연수제전면폐지

고용허가제만 시행

<표1> 외국인력 정책의 단계별 특징

[설동훈 외(2004)를 기본으로 재구성]


2) 이주노동자 현황

87년 12월 6천여 명이었던 이주노동자는 2006년 6월 현재 39만 5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내체류 외국인력 중 48%인 18만 9천여 명이 미등록이주노동자, 6.5%인 25,563명이 전문기술인력이며, 산업연수생은 전체 외국 인력의 8.1%인 31,886명, 해외투자기업 연수생은 1.7%인 6,806명이다. 2002년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전체 외국인력의 79% 였지만, 2003년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며 살인적 강제추방단속이 진행되어 35.3%줄었다가 다시 증가되어서 최근에는 50%를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표2> 미등록 이주노동자 추이 (단위: 천명, %)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6.

2005.5.

2006.6.

전체외국

인력

210

245

158

217

286

330

363

389

420

401

394,

미등록

이주노동자

129

(61.3)

148

(60.3)

99

(63.1)

135

(62.3)

189

(66.2)

255

(77.4)

289

(79.8)

138

(35.3)

166

(39.5)

199

(49.7)

189

(48.0)

[법무부 내부자료 2006.10]



2. 이주노동운동의 현 단계


1) 이주노동자 주체적 투쟁

90년 초 정부는 합법적 외국인력활용 정책으로 일본 모델인 해외투자기업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하여 이주노동자를 처음부터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현지법인 산업연수생 정책 때문에 그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금노동, 저임금(한국에서 일해도 현지법인 연수생은 그 나라 공장임금을 받았다.), 회사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 2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 여권압수, 임금을 회사가 직접송금, 임금체불, 산재보상혜택을 받지 못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싹터 나왔던 불만은 상담소와 시민단체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권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생활상의 요구로 표출되었고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투쟁은 94년 1월 9일부터 27일까지 미등록이주노동자 11명이 경실련 강당에서 산재보상문제 해결요구를 내건 농성으로 시작되었다. 사업주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신분을 악용하여 산재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투쟁으로 산재보상문제 해결요구와 체불임금, 사업주의 구타와 감금노동 등 인권과 노동권 문제를 고발하였다.

경실련 강당농성으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자 피난처(김재호 전도사)를 중심으로 산업연수생제도2) 철폐투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94년 말경에 네팔 산업연수생이 작업장을 탈출하여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산업연수생제도 철폐투쟁을 준비하던 피난처와 민주노총(준) 등과 일부 실천일꾼들은 95년 김영삼 정부의 시무식이 시작되는 95년 1월 9일에 명동성당에서 네팔 산업연수생 12명과 함께 살얼음 같은 추위 속에서 텐트하나치고 농성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감금노동, 임금체불, 구타와 여권압류와 임금 직접수령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쇠사슬을 몸에 걸고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마세요’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열흘간의 투쟁으로 감금노동금지, 구타금지, 여권본인소지, 임금본인수령 등과 농성투쟁 이주노동자 본인의 요구가 있다면 재취업보장 등을 중소기업중앙협회와 합의를 보았다.3)

그 후 종교단체들의 지원 등으로 이주노동자상담소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민주노총(준)이 중심이 되어서 이주노동운동을 고민하는 센터실무자들과 이주노동자공동체대표 등이 대성리 모임을 시작으로 몇 번의 워크샾을 통해서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이하 외노협)’를 조직하고, 삼선동의 민주노총사무실에 들어앉았다.

외노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주노동운동은 한국노동운동과 적극적인 결합을 지향한다는 합의하에 민주노총사무실에 외노협사무실을 만들고, 민주노총과 결합하기 위한 사업들을 시작하였다. 공동문화행사, 민주노총산하 노조들과 이주노동자공동체 자매결연, 이주노동자의 달 제정 등 행사와 사업들을 진행했다. 외노협 집행위원회에 일상적으로 민주노총정책위가 결합하고, 외노협의 집행위원장은 자주 민주노총지도부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이주노동자운동을 민주노총 중심으로 하도록 노력했다.

96년 6월 성남의 외국인노동자의 집(김해성 목사) 앞에서 상담 오는 이주노동자를 강제 단속하는 것을 막으려다 김해성 소장, 양혜우 사무국장이 강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나 외노협은 즉각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구속자석방과 외국인노동자보호법제정’ 요구를 걸고 준비되지 않은 농성투쟁을 40일 넘게 지속하여, 구속자들이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외국인보호법제정을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을 국회노동환경위로부터 받고 해산한다.

그 후 96년도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민주노총의 집행부는 점점 이주노동자운동에 관심이 멀어져 갔다. 방대해진 외노협의 성격도 다양하게 변하면서 ‘이주노동자중심의 평등노조운동’이 외노협의 일부 실무자들에 의해서 시작되면서 이주노동운동도 다양한 성격으로 변화를 가져온다.


<표3> 이주노동자의 농성과 파업

시기

내용

지역

1993. 11

중국동포 임호씨 벌금항의 투신자살

서울

1994.1.9-2.7

경실련강당에서 미등록노동자 11명의 산재피해 보상요구 투쟁

서울

1995.1.9-17

네팔 산업연수생 명동성당 농성

서울

1995

태광실업 베트남 산업연수생 임금인상 요구 투쟁

경남 김해

1996. 6

구속자석방, 외국인노동자보호법제정요구

서울

1996. 6

현지법인 연수생 인도인 4명의 월급 4만원에 대한 기자회견, 농성

안산-천안

1996. 7

중국현지법인 연수생 8명 월급 8만원 및 부당대우 기자회견, 농성

성남

1999. 10

세원전기 필리핀 산업연수생 임금인상 및 작업조건 개선 투쟁

전남 담양

2001. 10

(주)동아타이어공업 중국인 산업연수생 최저임금 투쟁

양산

2001. 11

(주)동진케미칼 국내노동자와 연대파업

안산-시화

2002. 1

(주)아모르가구 미등록노동자 93명 체불임금 청산 파업

경기 포천

2002. 3

(주)산성 파키스탄 산업연수생 휴가보장 및 작업조건 개선 투쟁

안산

2002. 10

(주)잔피엘 현지법인 연수생 부당노동행위 항의 투쟁

안산-가리봉

[ 출처- 박천응 목사 (2003년)에서 재구성 ]


2) 이주노동자운동 분화

현재 이주노동운동의 지원센터와 지원 단체는 전국적으로 약 300여개로 추정된다. 정부의 고용허가제 정책이 도입되면서 이주노동운동의 지원센터와 지원 단체들도 성격들이 분명해지면서 단체 간의 지향점이 일치하지 않아 분화한다.

95년 외노협은 결성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2000년부터 외노협의 활동 내용과 방식에 대해 논쟁과 갈등이 증폭되었고, 외노협 사무국의 상근자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내자, 외노협 전임회장과 현직 부회장 등이 외노협을 탈퇴하면서 이주노동자운동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이주노동운동의 의제도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부터 시작하여 ‘노동권’, ‘시민권’, ‘이주여성의 권리’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주노동운동도 다양한 주체, 노선, 이념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하면서 운동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주노동자 노동권 완전쟁취와 이주ㆍ취업의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본부’, ‘서울 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지부’, ‘서울 경기 인천 이주노조’ 등은 이주노동자들이 주체로서 치열하게 투쟁하여온 역사이자, 380일간의 긴 농성투쟁 속에서 노동계급의식으로 무장된 투사들이 만들어졌다.


<표4> 이주노동자운동의 분화 프레임

단체(연합체)구분

조직 형태

성격, 지향

정부정책에대한 입장

(고용허가제)

핵심사업

활동시기

출신국 공동체

자생적 조직

상호부조

-

상호부조

문예활동

1992-현재

외노협

지원단체

인권

수정, 개선

귀환활동

1995-현재

이주노조

노동조합

노동권

반대

(노동허가제)

미등록전면합법화

2001-현재

이주노동자

인권연대

지원단체

시민권

노동권수용

수정, 개선

시민권확보

다문화

2004-현재

이주여성상담소

지원단체

시민권

이주여성시민권 확보

다문화

2001-현재

[출처: 이선옥(2005), 오경석(2006)].



3. 이주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실천적 제안

―노동조합에 ‘이주위원회’ 구성 추진


민주노총은 지난번 선거 시에 위원장후보들이 이주노동자운동을 적극 지원하여 조직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여수외국인보호소 참사 후 집회에서도 “노동자는 하나다!”“이주노동자운동과 함께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힘찬 결의를 이주노동자들과 국민 앞에서 당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뿐인 ‘연대운동’은 이미 94년도부터 있어왔다. 사람들만 바뀌었지 연대사는 늘 같다. 이렇게 수동적 연대를 해오는 동안 현장에서 많은 한국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를 경쟁 대상으로 보고 자기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로 인해 개인적이거나 조직적으로 이주노동자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예가 발생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의 진보적 계급노동운동을 해온 조합과 조직들이 선언적 연대나 행사 지원적 연대를 넘어서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실천적 연대로서 구체적 사업과 교육으로 조직 강화라는 차원에서 실천해야 한다.


- 이주노동자를 이해하기 위한 조합원 교육

> 이주노동자 이해를 돕는 홍보책자발간.

> 조합(단체회)원 교육프로그램에 이주노동자문제 교육.


- 이주노동자를 교육(조직강화)

>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화

> 이주노동운동실천가 교육과 간부교육

> 산별과 민주노총 대의원 이주노동자 할당제도입


- 이주노동위원회 운영

> 민주노총과 산별 중앙에 이주노동운동 담당상근자 각 1명[상근자로 이주노동위 운영]

> 산별/광역/시 별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이주위원회’구성.

- 실천적 사업을 누가 할 것인가?

> 진보적 활동가들을 이주노동자운동의 중심에서 실천하게 조직한다.



마치면서


1974년 한국정부의 ‘인력송출’이란 정책으로 나는 광부로 독일로 갔다. 천 미터 지하에서 일하면서도 독일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노동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제도적 혜택과 노조활동도 가능했다. 사회 복지적 혜택도 받았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느끼게 했다.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노동자는 하나임을 뜨겁게 배웠다.

차별받지 않고 평등한 세상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독일노동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이주노동운동도 15여 년이 되었다. 금속산별노조는 중앙교섭에서 이주노동자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규약 등에서 조직방안과 할당제 등이 논의되고 있음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대구의 성서공단 등 몇 지역에서 일반노조로 조직하고 ‘이주노동자현장위원회’를 구성하여 하나된 노동자로 실천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제 한국노동운동의 진보적 정파들이 이주노동운동의 고민 속으로 깊이 빠져야 한다.

그리고 조직하라! 진보적 정파 속에 ‘이주위원회’를 구성하라!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로 노동해방세상을 건설하자! <노사과연>



특별기고

한국의 진보진영에 이주노동운동을 제안한다



최정규 | 이주정치연대(준)




1) 이주민- 이주노동자, 이주결혼자, 이들의 2세 등을 말함.


2) 93년 11월 산업연수생제도 실시.


3) 산업연수생에게 산재보험, 의료보험 적용, 최저임금, ․폭행금지 등 근로기준법 8개조항 적용.


덧붙이는 말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 도표는 링크한 파일을 참조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태그

이주노동자 , 산업연수생 , 이주정치연대 , 이민사회 , 다문화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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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님은 최근 아래와 같은 댓글에 대한 해명과 사과가 있어야하겠군요.이같은 사실이 있었다니 유감입니다...
    이주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 스스로 나서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돼는 이유 중 한가지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돕겠다며 거들먹거리던 한국인 동참자 때문이기도하다.
    한데 이주지원단체와 별반 다를바 없는 시스템인데도, 생각하는바가 좀 진일보함을 내세워 진보단체와 함께 둥지를 틀며 이주노동자 주체단체라 하는데가 있으니, 이주노동자방송국이 그 한 사례라 하겠다. 이곳은 지난 겨울 노동넷 워크숍에서 이주노동자 주체화를 한계라느니 하는 망언의 글을 시작해 이주노동자 주체론을 상품화로 전락하는 논평글을 발제해 물의를 일으킨 곳이다.
    또 시스템 또한 그러하니, 지난 덤벌기자의 사례를 통해서 그곳은 이주노동자를 주인이 아닌 직원으로 대한 곳임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 한국인 운영자들은 반성은 커녕 임기응변으로 사실을 무마하려 하고 있고, 버젓이 이주운동에 활계를 치고 있다.
    한편 이주노동자를 특화한게 아니냐며 괴변을 퍼트리는 활동가가 있으니 이주정치연대에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이주노동자방송국에 최근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참 이주운동권에 별 시정잡배가 많히 돌아다니는거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아마 이들에게 오냐오냐하고 웃어 넘기니 그러한거 같다. 이주운동권은 이들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가져야한다.
    그들은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인들이 없으면 않돼하는 기대심리를 잘도 이용하고 있었던것이다.
    내부의 적이 무서운것이다. 그들이 운동권을 교란하고 이상를 갈아먹고 있는 사이 이주운동권 또한 좀 우유부단해졌다.
    이제는 좋은게 좋은가 아니냐는 인맥주의.인정주의를 넘어 정의와 이상을 향해 우리 이주운동권은 전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