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국가 차원의 민간인학살 조사, 그 현황과 과제

한국전쟁기 100만 민간인학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지 만 1년이 됐다. 반백여 년 전 전쟁기에 불법으로, 그것도 대부분 국가 공권력에 의해 부모형제자매를 잃고도 대한민국을 ‘우리 나라’로 여기며 세금 다 내고 국민으로서의 의무 꼬박꼬박 이행하며 살아온 피해 유족들의 분노와 절망감을 생각하고 그 대규모 학살이 우리 한국사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늦은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국가가 이제라도 국가폭력의 최극단 형태인 전쟁기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고’ 법을 만들고 위원회를 만들고 그 해결의 단초를 놓는 조사에 착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편으론 눈물겨운 일이다. 어떤 필요와 이유에서든 국가이성이 가끔은 본질을 넘어서서 중립적, 온정적 행보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정쩡한 법에 어정쩡한 위원회, 어정쩡한 조사팀에 어정쩡한 조사, 그리고 그 귀결은 사건의 또 다른 축소왜곡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축소왜곡된 사실이나마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왕가뭄의 단비일 수 있다. 비록 축소왜곡된 사실이나마 국가가 공인하고 최소한의 후속조치라도 취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일 수 있다. 어차피 반백 년을 포기하고 살아왔는데, 지금까지는 ‘국민’ 취급도 못 받아왔는데... ‘국민’ 대접이라도 받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자. 예서 말 것인가? 얼마나 기다려온 일인데, 어떻게 만든 법이고 어떻게 만든 위원회인데,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갈 수 있을까? 그런 반면에, 안팎의 상황도 썩 좋지 않은데, 욕심 부리다가 쪽박마저 깨는 것은 아닐까? 깨진 쪽박 다시 붙이거나 새로 만드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인데... 하는 물음들이 계속 꼬리를 문다.

상황과 문제를 짚고 과제를 도출하고 상황을 돌파해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바빠도 먼저 지난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1.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철저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 근거법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하 ‘과거사법’)부터가 친일문제 등을 제외한 숱한 과거사안들을 도매금으로 처리하기 위한 법률이었고, 국회의 여야 막판 협상과정에서 이질적인 요소들까지 무원칙하게 덧붙여진 이른바 ‘통합과거사법’이었다. 그 핵심 조사대상은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과 독재정권하의 인권침해 사안들이었지만, 거기에 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까지 얹어졌고, 위원회 구성, 조사 권한 등의 면에서 심각한 우려를 낳을 만큼 변질이 됐으며, 법과 위원회의 명칭에서부터 구체적인 내용 규정도 없고 진실규명 후속조치의 작은 한 부분일 뿐인 ‘화해’가 전면으로 부상하면서 이미 위원회의 난항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쨌든 ‘잡탕 과거사법’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5월 3일 국회를 통과, 5월 31일에 공포되면서 대한민국 법전에 이름을 올렸고 그에 입각하여 위원회 구성 작업이 시작되었다.

정부 주무 부처인 행정자치부에서는 ‘준비기획단’을 만들어 지극히 제한된 상식 이하의 정보만을 갖고서 시행령과 위원회 직제 등을 마련했고, 그에 따라 6개월 후인 2005년 12월 1일 송기인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화해위가 발족했다. ‘참여정부’의 핵심은 위원회 준비 과정에서 끝내 민간 참여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법의 미비점을 보완해야 할 시행령이 오히려 법의 문제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고, 위원회 구성 작업도 마냥 늦어졌다.

그 혼선은 법 규정의 기계적인 해석에 따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위원회 발족 첫날인 12월 1일 진실규명신청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나타났다. 온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시작됐어야 마땅한, 은폐 왜곡된 사건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가 어느 날 갑자기 ‘성가신 민원 처리하듯’ 마지못해 미적지근하게 시작되었다.

위원회 총원 190여 명 중 발족 당시 위원회 근무 인원은 위원장 하나에 상임위원 하나, 정부 부처 파견 공무원 10여 명 뿐이었다. 발족 한달 사이에 정부 각 부처와 지방직 파견 공무원은 50여 명으로 늘었으나, 그들은 위원회의 구성 목적인 과거사 진실규명 전문가들이 아니라 행정관리인력일 뿐이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위원회의 가닥들이 하나둘 잡혀져갔고, 실전 경험이 없는 위원장과 보좌진은 그들에게 의지했다.

한편, 그 한달 사이에 위원회의 주역들인 15명 위원들이 속속 임명되면서 위원회의 기본 골격이 짜여졌다. 위원회에는 독립운동, 집단희생, 인권침해의 세 소위원회가 두어졌고, 위원장(장관급) 외의 세 상임위원(차관급)이 각각 3개 소위의 위원장을 맡았다. 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를 다루는 독립운동소위의 상임은 이영조(한나라당 추천), 전쟁기 민간인학살을 다루는 집단희생소위의 상임은 김동춘(청와대 추천), 독재정권하 의문사, 의혹사건을 다루는 인권침해소위의 상임은 김갑배(열린우리당 추천)였다. 위원회의 주 임무인 조사에 관한 의결권은 각 소위에 대폭 위임되었고, 업무 조정을 위해 상임위원회를 상설화했으며, 전원위원회에서는 조사결과에 관한 최종 의결, 직권조사 결정, 그밖의 중요한 위원회 업무만 다루었다. ‘한 지붕 세 가족’의 기본골격이 짜여진 것이다.

실제 조사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처는 사무처장 밑에 3개 부문의 조사국과 각 조사국 산하에 각각 4개의 팀을 두고 조사를 진행하도록 짜여졌다. 그중 독립운동국(국장 파견직)과 인권침해국(국장 별정직)은 독립된 국인 반면에, 집단희생국은 별정직 국장을 각 부처에 한 명씩밖에 둘 수 없다는 정부조직법상의 제약에 따라 국 산하의 4개 팀을 사무처장 직속으로 두고 집단희생조사기획관(별정직)이 그 업무를 총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크고 작은 조직 개편을 할 때마다 이는 계속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사무처 내의 지원부서로 총괄기획과와 대외협력과, 운영지원과를 두었고, 위원장 직속으로 법무감사팀을 두었다(최근에 와서 역시 위원장 직속으로 조사정책보좌관 직을 신설했다).

그러나, 직제가 갖추어졌다고 일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배치된 파견 공무원들은 행정관리직일 뿐으로 조사요원들이 아니었고, 정책이나 홍보, 대외협력 전문가도 없었다. 위원회가 실질적으로 가동되기까지는 위원회의 핵심 요원들인 별정직 또는 계약직 민간 공무원들이 위원회에 들어와야만 했다. 직원 채용을 마치는 데 위원회 발족 후 무려 6개월이 소요되었고, 그 어간부터야 겨우 정상 업무가 시작되었다.

진실규명의 첫 출발인 진실규명신청의 홍보도 접수 시작 6개월을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드디어 2006년 4월 25일에는 3개 소위별로 각각 3-10개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인 첫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졌다. 마침내 위원회 조사기간 4년 또는 6년의 출발선을 끊은 것이다.

그러나 출발선을 끊었다고 곧 조사가 궤도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신청 사건이 그리 많지 않은 독립운동국은 빼고라도 다른 2개 국은 밀려드는 신청사건을 처리하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인권침해국은 사건들이 개별적이어서 느리게나마 순차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모든 사건들이 종횡으로 얽혀 있어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조사가 필수적인 집단희생국의 경우에는 조사의 기본 편제조차도 짤 수 없는 난항에 부닥쳤다.

마침내 반백 년 이상을 기다려온 민간인학살 피해 유족들이 조사인력 증원과 위원회 확대개편을 소리 높여 외치기에 이르렀고, 위원회는 조직진단 연구용역을 거쳐 2007년 초두에 조사인력 증원 요구안을 정부에 들이밀었다. 그 과정에서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조치 하나가 위원회에서 취해졌는데, 조사국 간 업무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기 민간인학살의 한 유형인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법적으로는 ‘적대세력관련 사건’)을 집단희생국에서 떼내어 민족독립국으로 이관한 것이다. 상호 연관성이 깊은 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과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을 각기 별도의 조사국에서 진행하는 것은 조사효율 면에서나 조사결과 면에서 향후 적지 않은 문제를 낳을 것으로 전망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위원회 발족 약 1년 후, 그리고 최초 조사개시결정 이후 약 8개월 만인 2006년 말 6건의 진실규명사건(모두 인권침해국 소관)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6건은 진실규명신청 기간(1년)인 2006년 11월 말까지 위원회에 접수된 1만여 사건 중 지극히 미미한 부분일 뿐이고 앞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위원회는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안팎의 정세와 전망은 그리 밝지 않은 편이다. 과거사 진실규명을 음해하려는 세력들의 음양의 방해책동은 계속되고 있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어떻게든 완수해보려는 위원회의 의지도 그리 강해 보이지 않으며, 위원회의 활동을 뒷받침해주려는 정부 핵심과 각 부처, 공무원들의 지원 자세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 타협과 안일의 욕망이 그 사이를 뚫고 위원회 안에 넘실거린다.

여러 가지로 우려가 깊어지는 상황이다. 위원회가 권력의 속성상 자신이 행한 범죄행위의 진실규명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국가(이제나마 진실을 밝힐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나선 진실규명 주체로서의 국가의 또 다른 얼굴)의 충실한 도구가 되어 철저한 진실규명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잊어가는 것은 아닌지, 왜곡되고 은폐되었던 사건들을 다시 한번 축소왜곡하여 결과적으로 진실을 다시 한번 호도하고 미봉하는 역사적 죄과(또는 역사적 업적)를 낳게 되지는 않을지...



2. 진실화해위의 존재이유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준거점을 하나 잡아보자. 국가는 으레 그런 법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이야기는 물론 단순해지겠지만, 그것은 너무 방관자적, 평론가적인 태도다. 가능한 선을 뚫고 들어가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고 그것을 새로운 진보의 자양분으로 삼는다는 관점을 견지한 가운데 우선 법 조문과 인권상식에 입각하여 진실화해위의 존재이유를 살펴보며 하나의 준거점을 잡아보자. 어차피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은 법 테두리와 일반국민의 상식 수준을 넘어설 수 없고, 그에 대한 비판과 논박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공염불이 되고 마니까.

진실화해위의 설립 근거법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제1조는 법의 목적을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 목적을 달성할 기구로 진실화해위의 설립을 명시하고 있다. 정치권의 타협의 산물인 법이 대부분 그렇듯이 모호한 수사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뜯어보면 사건조사를 통한 진실규명이 진실화해위의 주 임무임을 알 수 있고 후속 조항들에서도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피하며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고는 있지만, 이미 사실로 상당 부분 확인되었고 입법 취지 등에도 일부 밝혀 있듯이 불법행위의 핵심 주체는 국가 공권력이고, 그밖의 행위자들이 일부 포함된다. 곁가지 치고 핵심만 간추리면, 이 법에 따라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는 지금까지 진실이 왜곡되거나 은폐돼 있던 국가 공권력 피해 사건들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그 일차적 임무로 하는 기구다.

따라서 조사의 핵심 역시 반민주적, 반인권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국가가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명실상부한 ‘국민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진실화해위의 주된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의식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아 한 가지 덧붙이면, 진실화해위의 ‘화해’의 핵심 역시 가해자 개인과 피해자 개인 간의 화해가 아니라 불법행위의 핵심 주체인 국가와 피해자인 국민 간의 화해다.

진실화해위의 두 번째 존재이유는 피해회복이다. 법 1조에서는 ‘과거와의 화해’라는 모호한 말을 쓰고 있지만, 뒤의 조항들에서 진실규명의 후속조치인 화해조치로서 맨 처음 드는 것이 ‘피해 및 명예의 회복’이다. 법 조문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진실규명 후 맨 처음 취할 조치로서 부당하게 입은 피해, 특히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원상회복시켜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지 못할 경우 돈으로 대신 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법칙’이지만, 이 문제는 그 다음 조치들인 가해자 처벌, 재발방지책 등과 함께 아직 국민적 합의가 덜 된 부분이라서 대부분 진실화해위의 영역 밖으로 넘겨져 있다. 어찌 됐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원상회복시켜주려면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며 피해구제 신청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고, 아직도 불안해하거나 위원회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은 찾아내서라도 피해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밖에도 진실화해위의 존재이유로는 법에 막연하게 규정되어 있는 ‘과거와의 화해’와 국민통합, 약간의 후속조치 외에 법에 ‘과거사 재단’의 임무로 규정돼 있는 위령사업과 추가 진상조사 등 각종 후속조치, 그밖에 국제사회의 보편개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각종 조치 등을 열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생략한다. 현재의 진실화해위는 앞의 두 가지 일차적 존재이유에 대해서조차 심각한 의문을 품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서 이질적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구라는 것, 법에 규정된 조사권한도 미약하고 위원회 구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야기되는 여러 한계들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된 것이고 또 바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니 새삼 거론하지 않겠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나마 어떻게 최선을 다하여 최대한의 진실규명을 할 수 있는 조건과 체계를 만들어내고 또 실제로 진실을 철저하게 밝혀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법 제정 자체가 불법행위 주체로서의 국가가 스스로의 범법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인정하면서 진실규명에 나선 첫걸음이었다면,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는 그 담당기구로서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밝혀내 더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국가를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또 그에 걸맞은 행보를 해야 할 텐데, 지금의 진실화해위에 그런 기풍이 흐르는지 의문이다. 심지어는 진실화해위가 불법행위 주체로서의 국가가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자신의 몸 속에다 만들어낸 갱생 치료제임을 망각하고 피해자들을 단순한 민원인쯤으로 여기는 사람, 지금까지도 자신(국가)의 존재와 잘못을 망각하고 자신이 개인 피해자와 개인 가해자 간의 거중 조정자 또는 민원인(피해자)에게 시혜를 베풀어 구제해주는 제3자인 양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로는 안 된다. 국가의 책임에 대한 분명한 자각 없이는 진실규명에 접근도 할 수 없고, 어떻게든 진실규명이 가능한 조건들을 만들어 그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 없이는 진실도 피해구제도 화해도 없다.



3. 왜소한 진실화해위, 더욱 왜소한 민간인학살 조사부문


진실화해위가 안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중 조사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문제는 조사권한과 조사인력, 조사예산의 부족이다. 그중 영장청구권, 청문회 시행권, 자료제공 및 행정협력 강제 등이 포함된 조사권한의 문제는 법개정을 거쳐야 하는 사안인 동시에 법규정 외에 국가 통치 차원의 정치적, 정책적 배려와 지원이 결합돼야 해결되는 사안이다. 문제를 놓아서는 결코 안 되겠지만, 현재의 정치 지형상 이야기해봤자 입만 아플 수 있는 사안이므로 일단 다음 과제로 넘기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위원회를 만든 이상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도록 그 조사 수요에 맞게 사람을 배치하는 문제, 즉 위원회의 조사인력, 특히 민간인학살 조사인력의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위원회 총원 190명이 결코 적은 수는 아니지만, 실제 조사인력만 두고 보면 1만여 건에 달하는 사건 조사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수준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총원은 약 190명(파견직 대 별정 또는 계약직이 약 반반, 상근보조직 약간)인데, 처음엔 조사인력과 지원인력이 각 절반씩이었으나, 조사기구에 웬 지원인력이 이렇게 많으냐는 안팎의 질타를 받고 지원인력 일부가 조사인력으로 전환배치되었다. 조사인력도 약간의 재배치를 거쳐 현재 조사수요가 가장 많은 집단희생국에 45명, 인권침해국에 40명(-), 독립운동국에 25명 정도가 배치돼 있다. 그리고 조사국 내에도 행정인력이 일부 포함돼 있음을 감안하면 실제 조사인력은 그보다도 더 적다.

그러니 조사국들의 사정이 어디라고 좋을 리 없지만, 그중에서도 민간인학살 조사국이 상대적으로 왜소하다는 것은 안팎으로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진실규명 신청건수로 보나 접수된 사건 수로 보나, 민간인학살 조사 수요는 타 국의 수요를 압도한다. 2006년 9월 말 이른바 ‘적대세력 사건’이 독립운동국으로 이관됐음을 감안해도, 전체 신청건수의 약 3/4이 집단희생 사건(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이고 사건 수로 환산하더라도 다른 국들의 3배 이상이다. 물론 사건의 성격에 따라 조사 난이도는 각각 다르지만, 5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하나가 다른 사건 하나보다 난이도가 낮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조사인력 수는 별반 차이가 없다. 심한 불균형이다.

바깥과 비교해보면 더욱 처참해진다. 제주 4.3사건의 약 30배 규모일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조사를 담당할 진실화해위 내 집단희생국의 조사관 수가 이제 막 임무를 마친 제주 4.3위원회(제주도 실무위 포함)의 규모와 비슷하다. 단일 사건인 노근리사건의 경우 AP통신 보도 후 한미 현안이 되면서 2000년을 전후하여 1년여 기간 동안 5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다른 사건들도 노근리사건처럼 조사하려면 조사관 1천 명도 모자란다. 사대주의도 이 정도면 기네스북 감이다.

예산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진실화해위 전체의 2006년도 총예산이 94억원이었는데(2007년 예산은 119억으로 약간 증액됨), 이중 민간인학살 부문만 뽑아보면 20여억 원밖에 안 된다. 그에 반해서 조사가 진행되던 당시 4.3위원회(제주도 실무위 포함)의 연간 예산은 약 100억 원이었다. 진상조사는 없이 피해자심사만 했던 거창명예회복위(거창사건 하나를 다룸)의 경우, 10년 동안 추모공원 예산 190억원을 제외하고도 160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현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진실화해위에서 민간인학살 한 사건을 처리하는 데 몇천만원이나 돌아갈까? 똑같은 죽음인데, 누구 죽음은 100원짜리고 누구 죽음은 100만원짜리인가? 불평등도 이 정도면 숨이 턱 막힌다.

4.3이나 노근리, 거창 사건들에 인력이나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말이 아니다. 그 정도 인력과 예산 들여 조사하고 조치하고도 아직 미진한 점투성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 이번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하는 한국전쟁 전후의 여타 사건들은 과연 조사를 하겠다는 건지 시늉만 내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도 왜소하고 그중에서도 조사대상 사건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왜소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조사국을 가진 진실화해위원회의 앞날이 밝을 수 없는 이유다.

진실화해위에서는 2006년 말의 조직진단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정부 부처들과 증원 문제를 협의하여 2007년 상반기 중으로 조사인력 증원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조사 수요에 합당한 조사인력과 조사예산은 진실규명의 기본 전제다. ‘참여정부’의 진실규명 의지, 과거청산 의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조금 있으면 곧 나올 것 같다.



4. 진실화해위의 민간인학살 조사부문의 지난 1년 활동


본론으로 들어가서, 진실화해위에서 지난 1년 동안 전쟁기 민간인학살 조사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해왔는지 점검해보자. 진실규명을 임무로 하는 민관합동기구 역시 어쩔 수 없는 관료기기구인지라, 정보의 제약이 많아 위원회의 홈페이지와 공식 발표문 및 문건을 기본토대로 하고 약간의 확인과정을 거치며 점검할 수밖에 없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우선, 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 조사의 심의, 의결 등의 기능을 맡은 진실화해위의 집단희생 소위는 상임위원(소위원장)과 4명의 비상임위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005년 12월 구성 후 지난 2007년 2월까지 진실규명신청 사건들의 조사개시결정을 내리는 일을 주로 진행해왔다. 참고로, 진실규명신청은 2006년 11월말에 완료되었고, 법규에 따라 그 3개월 뒤까지 조사개시결정을 내리도록 돼 있었다. 따라서, 실제 조사착수와는 무관하게 조사개시결정은 일단 내려야 하는 법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

진실화해위 사무처의 집단희생 조사국에는 현재 4개 팀이 있다. 원래 분담한 업무는 다음과 같았는데, 2006년 10월부터 유형별 집단조사개시 결정이 내려지면서 약간의 조정과 변동이 있었고, 2007년 상반기 중으로 증원이 이루어지면 7개 팀으로 확대재편될 예정이라고 한다.


- 1팀: 조사총괄, 자료조사, 대형사건 및 적대세력사건 조사1)

- 2팀: 중부권 조사

- 3팀: 영남권 조사

- 4팀: 호남권 조사


집단희생 조사국의 법적 고유 업무인 신청사건조사는 처음엔 2인 1조로 1개 사건을 3-6개월 동안 조사한다는 계획하에 일단 조사에 착수했다.2) 그러나 몇몇 사건을 빼고는 신청인과 몇몇 참고인 조사 후 자료조사나 탐문조사 등에 막혀 대체로 진척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후 2006년 말에 유형별 조사팀들이 조직되면서 상당수의 인원이 조사개시결정을 위한 사전조사와 조사계획서 작성에 투입되었다.

전국의 학살피해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피해실태조사는 2006년에는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시행하지 못하다가 2007년도에 약 5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현재 외주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유해발굴조사는 2006년도에는 준비 부족으로 시행하지 못하다가 2007년도에 들어서야 외주용역으로 유해매장추정지 조사(예산 약 1억원)에 착수했고, 2007년 한해에는 약 10억원의 예산으로 유해매장지 4곳(대전산내, 청원분터골, 경산코발트광산, 구례봉성산)의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자료조사는 처음에는 인력부족으로 팀이 구성되지 않는 바람에 착수를 못하다가 2006년 하반기에야 겨우 3-4명 팀을 꾸려 핵심 기초자료 정리에 착수했다. 그밖에 노근리파일 분석작업, 미군관련자료 수집 등을 외주용역으로 처리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집단희생소위)에서는 지난 2006년 4월 25일 처음으로 사건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조사에 착수했다. 그중 민간인학살 관련 10개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고양파주민간인희생사건(금정굴사건 등)

- 단양곡계굴사건

- 문경석달마을사건

- 경산코발트광산사건

- 함평11사단사건

- 제주섯알오름예비검속사건

- 양평, 가평, 남양주, 포천의 적대세력사건(4곳)


진실화해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결정을 발표한 후 지역별로 각 시군청에서 지역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 등을 상대로 설명회를 갖고서 협력을 당부했다. 이어서 2006년 5월 30일에 2차, 7월 25일에 3차 조사개시결정을 내렸다. 그중 민간인학살 관련 10개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강화지역민간인희생사건

- 청원진천보도연맹사건(오창창고)

- 청도보도연맹사건

- 산청시천삼장사건

- 익산역미군폭격

- 나주동박굴재사건(봉황면)

- 강릉적대세력사건 (이상 2차)

- 구례봉성산여순사건

- 청원분터골보도연맹사건

- 나주11사단사건(세지면 동창교) (이상 3차)


이상의 조사개시결정 사건들 중 일부는 기초조사 후 신청인과 관계자 1차 진술조사를 마친 뒤 자료조사와 탐문조사, 책임자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 일부는 자료조사 등에서 막혀 유형별 통합조사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조사팀들은 조사할 사건은 많고 조사인력은 한정된 상태에서 일단 막히면 1차 조사한 사건은 젖혀두고 새로운 사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들여서 중요한 증언자나 자료 하나를 찾아내 의미있는 성과를 내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자료조사팀이 몹시 취약한 상태에서 이 문제는 더욱 크게 부각된다.

2006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위원회는 11월 말 진실규명신청 접수완료, 2007년 2월 말 조사개시결정 완료 시한에 몰리기 시작했고, 집단희생소위는 접수된 사건들을 일단 유형별로 묶어 통합 조사개시결정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그와 함께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들에 대해서는 신청 여부나 과다와 관계없이 전면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직권조사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에 따라 2006년 10월부터 2007년 2월까지 다음과 같은 사건들에 대해 차례로 통합조사개시결정이 내려졌고, 그 전에 이미 조사개시된 일부 사건들도 사건 유형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 국민보도연맹사건(직권조사)

- 제주예비검속사건

- 여순사건(직권조사)

- 전국형무소재소자희생사건(직권조사)

- 미군관련희생사건 (이상 2006년)

- 부역혐의사건

- 국민방위군사건(직권조사)

- 대구10월사건

- 군경토벌전과정에서의 민간인희생사건 (전남, 전북, 경남, 경북)

- 군경에 의한 민간인희생사건 (중부,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이상 2007년)


이로써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사건 중 2006년 11월 말까지 1년 동안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들에 대한 조사개시결정이 사실상 모두 내려졌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3월 14일 기자회견을 갖고 그 현황을 종합발표했으나, 기초적인 조사일정이나 계획조차도 첨부하지 못했다. 현행 팀과 조사인력으로는 이 광범한 사건들에 대한 기본 조사편제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사국은 2006년 1, 2, 3차에 걸쳐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진 사건들 중 2007년 중으로 조사완료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는 사건들의 조사에 집중하는 한편, 팀을 유형별로 재편하여 유형별 기초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유형별 조사는 2007년 상반기 중으로 조사인력이 증원되고 조사국과 팀이 확대재편된 이후에나 본격화할 전망이다.



5.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민간인학살 조사신청현황


2006년 11월 말까지 진실화해위와 유관 접수처에 접수된 총 진실규명신청 건수는 10,860건이었고, 이중 9,419건이 민간인학살 관련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1명을 대표자로 하여 단체신청한 사건들이 우군에 의한 학살의 경우 48개 사건에 1,531명이 있어, 이를 더할 경우 실제 신청인 수는 약 11,000명이 된다. 이 수치는 지금까지 민간인학살 연구자나 관련단체들이 주장해온 약 100만 명의 약 1%에 지나지 않는다.

1%밖에 신청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한 것으로 분석된다. 1차적으로는 홍보부족이다. 대국민 홍보가 늦어지고 미흡했던 탓에 아직까지도 진실화해위의 존재조차도 모르거나 설령 안다고 해도 위원회에서 전쟁기 민간인학살 조사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이 너무 많다(지금까지도 추가접수 문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이는 법으로 규정된 사안이라서 법을 개정해야만 시행될 수 있다). 둘째로는 50년도 더 지난 일이라서 신청을 할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국민정서상 직계존비속이 아니면 신청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 희생자의 직계가족이 없거나 죽은 경우에는 신청할 사람들이 없다. 셋째로는 직계가족이 있다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신청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보상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의 실익의 불확실성, 향후 정세변화에 따른 불이익 가능성(‘레드 콤플렉스’, 뿌리 깊은 피해의식 또는 자신의 현재 지위에 대한 불안감), 아픈 기억이 덧날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지인이나 친인척이 가해자로 확인될 가능성에 대한 배려, 망각을 강요해온 긴긴 세월, 긁어 부스럼내서 괜히 성가신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등등, 실로 다양하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신청자가 없다고 해서 사건이나 피해자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2006년 9월말에 진실화해위에서 적대세력관련 사건들(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을 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과 분리하여 독립운동국에 넘기는 바람에, 현황발표에서는 그 수치가 나뉘어 발표되었다. 그에 따르면, 9,419건 중 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은 7,791건,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은 1,628건이다. (양측의 학살이 연동된 경우가 많고 조사과정에서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사실들이 뒤집힐 가능성도 다분하므로 통합조사해야 마땅했으나, 조사인력 부족과 조사국 간 불균형 문제를 시정한다는 이유로 그런 조치가 내려졌다. 조사효율 등을 생각하면 이번 위원회 재편과정에서라도 재통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6. 민간인학살사건 조사개시현황과 조사계획수립


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의 진실규명신청 7,791건 중 일부 비해당 사건을 제외한 7,533건에 대해 모두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졌고,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 1,628건의 대부분인 1,485건에 대한 조사개시도 결정되었다.

군경미군우익에 의한 학살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2,576건, 예비검속 학살이 293건, 형무소재소자 학살이 584건, 부역혐의 학살이 427건, 미군관련 학살이 505건, 여순사건이 832건, 군경토벌작전 과정에서의 학살이 1,378건, 국민방위군사건이 16건, 대구10월사건이 5건, 그밖에 정확하게 분류되지 않는 군경에 의한 학살이 917건이다.

이중 국민보도연맹사건, 재소자학살, 여순사건, 국민방위군사건에 대해서는 직권조사결정이 내려졌다. 직권조사 사건의 경우에는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사건 전체에 대한 전면 조사가 보장된다.

다른 유형의 사건들의 경우에는 2006년 4월, 5월, 7월에 걸쳐 이미 조사개시가 결정된 약 20개 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들을 유형별, 지역별로 나누어 통합조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06년 중반에 조사개시한 사건 중 조사 진척속도가 느린 일부 사건도 유형별 조사로 통합된다.

유형별 조사개시결정을 완료했으니, 조사계획을 치밀하게 작성하여 전면 조사에 착수하는 일이 남았다. 그러자면 조사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편제부터 재구축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유의할 점은 진실규명신청 건수 대비 사건의 규모와 조사 난이도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진실규명신청 건수의 주요 결정요인은 기존의 지역별 진상규명운동 정도, 지역유족회 결성 여부, 지방자치체의 태도 등이었다. 즉, 비슷한 규모의 사건의 경우에도 신청건수는 천양지차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소 수백 명 규모의 학살이 한강 이남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유사하게 일어난 보도연맹을 예로 들어보아도 어떤 시군에서는 200명이 넘게 신청을 했는가 하면, 어떤 시군은 단 1명이고, 어떤 시군은 아예 없는 곳도 있다. 유형별 편차는 더욱 심해서 전국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일어난 미군관련 사건이나 인민군 점령 지역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일어난 부역혐의 사건의 경우 사건의 특성상 실제 규모에 비해 신청건수가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신청건수가 적을수록 신청건수 대비 조사 난이도가 크게 높아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국에 걸쳐 일어난, 유형이 잘 분류되지 않는 기타 군경에 의한 학살의 경우, 더 치밀한 조사가 필수적이다.

조사계획수립과 조사편제구축시 이를 잘 감안하지 않으면 몇몇 유형의 경우 곧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신청인이 한두 명인 사건의 경우에는 몇 배, 몇십 배의 가중치를 두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만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조사인력은 부족하고 사건 전모의 파악보다는 신청인 중심 (민원처리) 사고가 팽배한 진실화해위에서 조사는 힘들고 어려운 반면에 실적(처리 건수)은 오르지 않는 그런 사건들에 얼마나 역량을 투여할지 의문이다. 아예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미 인지가 돼 있거나 조사중에 인지되는 수많은 사건들은 또 어찌할지 몹시 우려된다.





7. 각 사건유형별 조사


1) 국민보도연맹사건

2006년 중반에 이미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진 경산코발트광산사건, 청도보도연맹사건, 청원분터골사건이 한강 이남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일어난 모든 보도연맹사건들과 통합되어 종합조사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보도연맹의 경우 특히 종합적인 접근이 필수적이고 또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희생자가 십수만 또는 수십만에 이르는 그 방대한 사건들을 어떻게 조사해 들어가느냐는 것인데, 일단 종합적이고 전면적인 조사에 착수한 뒤 지역별로 하나씩 조사를 완료해가면서 맨 나중에 다시 최종 정리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 것이다. 시군 단위로 학살이 일어난 지역, 면 단위로 학살이 일어난 지역을 구분해야 하고, 신청인이 몇 안 되거나 아예 없는 지역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조사 과정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이 아닌 일반 예비검속 학살을 찾아내 따로 조사 정리하는 것도 꼭 필요하고, 형무소가 있는 지역 보도연맹원의 경우 형무소에서 학살된 경우가 많으니, 재소자 학살과 연계 조사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한강 이남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사건이 일어났고 처형 주체와 양상도 지역별 편차가 크므로 규모가 꽤 큰 팀을 구축 운용해야 할 것이다.


2) 형무소 재소자 학살

전국의 23개 형무소에서 일어난 사건이 위원회에 접수되었는데, 이는 전국의 거의 모든 형무소에서 전쟁 직후 군경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기결수와 미결수의 재소자명부와 재판기록들을 찾는 일이 시급하고 학살 주체와 책임, 명령계통을 밝히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신청이 몇 명 들어오지 않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은 형무소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인근 지역 보도연맹원이나 예비검속인이 함께 학살된 경우, 이를 구분 조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건 하나하나의 규모가 크니, 역시 상당한 규모의 팀이 필요할 것이다.


3) 부역혐의 학살

인민군에게 일시나마 점령된 적이 있는 전국의 모든 시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조사 난이도가 높은 사건 유형 중 하나이니,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80개 시군에서 신청이 접수된 사건 하나하나가 실은 대규모 연쇄 학살의 실마리로서, 이를 파헤쳐 들어갈 경우 대규모의 학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이며, 제대로 조사를 진행할 경우 아마도 가장 많은 피학살자가 확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60명 정도가 신청한 고양금정굴사건도 십수 년 전에는 한 명의 유족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고, 20여 개 사건이 신청된 강화지역 학살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건 하나에 유족도 단 한 명이었다. 한편, 수만 건에 이르는 사실상의 학살인 부역자 재판도 이 유형에서 함께 다루어야 할 것이다. 비중있는 팀을 구축하여 전국을 훑어야 한다.


4) 미군관련 학살

미군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엔군의 공중폭격, 지상작전, 함포사격 등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포괄하는 사건으로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피해자가 한 지역 거주자에 집중된 익산미군폭격, 단양곡계굴 등 몇몇 사건을 빼고는 사건의 성격상 피난민 등이 뒤섞여 있어 피해자 수에 비해 신청건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피해자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고 개별사건 수로도 최소 120여 건에 이르니 신청이 한 명이라도 들어온 지역에 대해서는 심층 조사를 펼쳐야 하고, 미군 측 자료 확보 등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다. 신청건수와 상관없이 영어 등 외국어에 능숙한 상당한 규모의 팀을 구축해야만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5) 군경 토벌작전 관련 학살

전쟁 발발 전후로, 특히 9.15인천상륙작전 후 제2전선이 형성된 지역에서 군경의 빨치산토벌작전 과정 중에 일어난 민간인학살로서, 호남과 영남 지방에 집중돼 있다. 문경석달동, 함평11사단사건, 산청시천삼장, 나주동박굴재, 나주동창교사건 등 일찍 조사개시된 몇몇 사건을 빼고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지역의 4개 권역으로 묶어서 통합조사를 결정했는데, 신청도 많고 사건도 많아 상당한 규모의 팀이 필요할 것이다. 11사단 외 다른 군경 진압부대들에 의한 작전 중 학살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해야만 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다. 작전 자료와 명령계통 등을 통합조사하면서, 국지적 사건들을 하나하나 조사완료해가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6) 제주 예비검속 학살

제주 지역에서는 무차별 다수 가입된 보도연맹원의 학살이 없는 대신 사람들을 선별해서 학살한 예비검속 학살이 6.25 직후 광범하게 펼쳐졌다. 4.3조사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긴 했지만 책임 소재 등이 규명되지 않아 진실화해위에서 재조사를 결정한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학살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토대로 같은 시기에 본토에서 벌어진 대량 예비검속 학살의 단초를 확보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7) 여순사건

역사적 상징성이 큰 사건이니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과 그 진압, 그 진압과정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의 여파와 당시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이 종합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전쟁 발발 직후의 지역 내 예비검속인 또는 보도연맹원 학살, 지역 내 군경토벌전과정에서의 학살, 수복 직후 부역혐의 학살 등과도 여러 모로 얽혀 있으니 이를 분석 종합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여순사건과 직접 관련성이 없거나 적은 지역 내 사건들은 따로 분리 정리해야 할 것이다.


8) 국민방위군사건

위원회에는 16건밖에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으나, 사망자는 5만에서 9만 사이로 추정되는 대규모 사건이다. 1950년 12월 졸지에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희생자들의 유족들과 관련자들은 아마 대부분 이 사건이 진실규명신청 대상이 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미 조사 종결된 사건이라는 일각의 억지 주장에 철퇴를 가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9) 대구 10월사건

1946년 대구 10월항쟁과 그 이후 벌어진 민간인학살을 다루는 사건이다. 신청건수는 5건에 불과하지만,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각종 학살과 좌우익 테러, 토벌전의 본격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사회적 의의가 크고, 이를 잘 밝힐 경우 해방공간과 전쟁기의 학살 메커니즘 파악, 역사 재정립에 커다란 진일보를 이룰 수 있다. 대구경북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에 미친 여파와 영향을 종합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10) 기타 군경에 의한 학살

위의 어떤 유형으로도 잘 묶이지 않거나 확인이 덜 된 사건들을 뭉뚱그려 엮은 것이다. 이야말로 신청건수 하나하나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만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사건들로서, 난이도로 보면 최고로 어려운 사건들이라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건 한 건의 신청이 대규모 학살의 단초일 수도 있다. 일단 중부, 전북, 전남, 경남, 경북(청도는 별도)의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조사개시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신청 하나하나에 대한 면밀한 예비조사를 거쳐 사건의 이름을 붙이고 권역별로 일정한 규모의 팀을 배치해야만 사건의 전모를 밝혀나갈 수 있다.


11)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

독립운동국으로 이관되긴 했지만, 이 역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중요한 한 유형으로서 다른 사건 유형 조사들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조사를 진행해야만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밝힐 수 있다. 사건 하나하나가 보도연맹 학살이나 그뒤의 부역혐의 학살, 기타 군경에 의한 학살과 연동된 경우가 많고, 반백 년 반공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사건의 진실이 왜곡 전승돼온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양측의 학살에 모두 관계한 경우도 있고, 학살자가 둔갑한 경우도 있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반공국가에서 왜 그 사실이 묻혀 있었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밝히는 작업도 중요하다.



8. 조사 지원, 보조, 총괄


1) 자료조사

사건유형별 조사팀 별로 각 유형에 필요한 자료조사를 한다고 해도 종합적인 배경조사와 자료조사는 필수적이다. 전쟁 전후의 시대 상황, 당시의 행정 사법 군사 경찰 체계, 한국군과 유엔군과 인민군의 작전체계, 전쟁 및 전투 상황, 각종 사회단체 및 좌우익 현황, 주민통제 체계, 재판기록 등의 각종 정부기록물 등등은 여러 유형의 사건들에 공통된 것들이 많고,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자료확보에 훨씬 효율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료들과 각 유형별 조사과정에서 확보한 자료, 외주용역으로 처리가공한 모든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모든 사건 조사의 기본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2) 유해발굴

유해발굴은 사건 조사, 조사 후 후속조치, 위령사업, 화해사업 등에 두루 걸쳐 있는 광범위한 영역이다. 진실화해위에서의 유해발굴은 여러 여건상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우선은 사건 조사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사건들의 유해 발굴에 치중하고, 다른 사건들의 유해발굴사업은 국가 차원에서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갖추고 그 참상과 의미와 교훈을 세세토록 반추하며 체계적인 발굴을 추진할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한 뒤에 행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 조사와 직접 연관이 있는 유해매장지만도 부지기수인 상황에서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고, 아울러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중장기 발굴계획과 그 기본체계도 세워가야 한다.


3) 피해실태조사

사건 본조사의 예비조사이자 보완조사 성격을 띤 피해실태조사는 그 당위성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를 확보한 뒤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여 전국에 걸쳐 전면 시행하는 것이 옳다. 2007년도의 시범지역 조사를 성공리에 수행한 뒤 2008년도에는 반드시 전면 시행해야 한다. 외주 용역에 의한 피해실태조사는 위원회 조사인력의 원천적 부족을 보완하는 장치이자 피해의 원상회복이라는 위원회의 기본 임무를 달성하는 데도 필수적인 조사다. 외부의 피해실태조사 결과를 국가가 인정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4) 지방자치체 협력

지방자치체와의 협력은 전쟁기 민간인학살 조사와 그 후속조치 측면에서 매우 긴요하다. 사건 본조사에 대한 각종 지원은 물론이고, 피해실태조사도 지방자치체와의 긴밀한 협력하에 추진할 경우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진실규명 후속조치인 피해의 원상회복, 기념사업과 위령사업, 기록사업 등에서도 지방자치체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5) 조사총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은 개별 사건으로 보면 수천 건,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만도 1천여 건에 이르지만, 크게 분류하면 위와 같은 10여 개 사건유형으로 나눌 수 있고, 더 크게 보면 전쟁기 민간인학살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사건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려면 유형별, 지역별 팀들의 조사 결과를 한데 수렴하여 분석, 정리한 뒤 다시 개별 팀들에 전달하는 과정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주기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사건을 한데 아우르는 종합정리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9. 진실규명 후속조치


현 체제로는 속도가 매우 느리겠지만, 어쨌든 올 상반기부터는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들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이 조금씩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 후속조치들에 대한 준비가 시급하다. 추가 진상조사, 진실규명 기념사업, 국가 차원의 공식 위령제, 체계적인 유해발굴사업, 학살지 보존과 위령사업, 평화공원 조성사업, 각종 문화학술사업, 호적 정리와 각종 기록기념사업 등이 그것이다. 현행 과거사법에서는 이들 후속조치의 대부분을 별도 설립되는 ‘과거사 재단’에서 추진하도록 정해놓고 있는데, 재단 설립은 일단 2008년이나 2009년 이후로 미루어졌다(2007년도 재단설립 준비 예산이 국회에서 삭감되었다).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후속조치가 시급히 필요한 점을 감안하여, 재단 설립을 최대한 앞당겨야 하고 재단 설립 이전에는 위원회의 주도하에 각종 후속조치를 차질없이 수행해가야 한다.

한편, 과거사법과 ‘과거사 재단’ 업무에 규정되지 않은, 재판을 받은 경우의 재심 또는 판결 무효화, 배보상을 포함한 피해의 완전한 원상회복, 책임자 처벌 문제 등도 서서히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진실규명 결과가 빛을 발해 역사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들이다.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참고로, 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나 전쟁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끝까지 추적하여 역사와 사회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최근 추세다.



10. 글을 맺으며


한미FTA, 대선 정국 등으로 안팎의 정세가 요동치는 요즘이다. 어찌 보면 참여정부 최대의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과거청산’ 작업이 까딱하다간 실종돼버릴 수도 있는 정국이다. 글을 정리하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과거 국가 공권력의 잘못을 국가 스스로 밝혀내는 작업이 가진 원천적 한계다. 이른바 ‘혁명 상황’도 아닌데, 이른바 ‘개혁’조차도 빛이 바래다 못해 국민들의 냉소까지 받고 있는 상황인데, 과거 국가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지고 왜곡되고 은폐된 진실을 국가 스스로가 철저하게 밝혀낸다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 아니냐는 생각까지 든다. 기왕에 법으로 정해졌으니 하는 시늉은 내야겠고, 국가기관으로서 취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길은 ‘적정 수준’의 조사와 사건의 축소왜곡을 통한 진실의 또 다른 은폐왜곡밖에 더 있겠느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작은 틈새라도 파고 들어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새로운 토대를 놓는다는 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비록 사정이 그렇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적은 것도 아니다. 기왕에 깔아놓은 판, 최대로 활용하며 최대의 성과를 확보해가야 한다. 그러자면 모든 관계자들이 몇 가지 원칙에 합의하며 뜻을 모아가야 한다. 그 기본 원칙은 사건을 또 다시 축소왜곡 정리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보다는 사건의 실체를 최대한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면서 못하겠는 것은 못하겠다고, 이것이 부족하다고, 이런 것들이 철저한 진실규명에 걸림돌이 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정리해본, 국가 차원의 민간인학살 조사의 몇 가지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첫째, 사건전모 파악의 원칙이다. 모든 압력과 유혹을 뿌리치고 철저한 진실규명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안팎의 압력은 계속되겠지만 소신있게 대처해야 한다. 피해 유족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겠지만, 반백 년도 더 견디며 기다려온 유족들이 아마 미봉적인 조사와 혹시 국가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작은 떡고물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물쩡한 조사로는 피해자 확정 자체도 쉽지 않다. 국가에서 학살의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으려면 우선 국가의 책임 부분이 확실하게 입증돼야 하고 또 이 사람이 그 사건의 피해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직까지도 피해의식에 갇힌 채 국가와 사회를 불신하며 진실규명신청조차도 하지 않는 피해 유족들에게 그래도 우리 사회가 이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까지도 책임을 망각하고서 사건을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가려는 국가의 위정자들과 관계자들에게도 그 책임을 분명하게 입증해보임으로써 이제라도 각성하여 책임을 다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철저한 조사만이 이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

둘째, 피해자 최대 확인의 원칙이다. 바닥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진실화해위의 최소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다. 피해실태조사를 외부용역 또는 위임조사 처리하는 문제는 심도 깊게 검토하여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조사 이후 후속처리와 문제해결 과정에서 국가의 공인 여부는 아주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책임 최대한 규명의 원칙이다. 각급별 책임을 밝히고, 최종적으로는 국가의 책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역사의 생생한 교훈을 통해 국가와 사회가 거듭날 기회를 만든다는 진실규명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기도 하거니와, 사후 처리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넷째, 팀워크의 원칙이다. 개인별, 팀별 성과주의, 실적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개 약진해서는 성과도 낼 수 없다. 민간인학살 조사부문은 거대한 하나의 팀이다. 상호협력은 필수로서, 종횡으로 성과들을 연계시켜가며 총제적인 진실규명에 매진해야 한다. <노사과연>



국가 차원의 민간인학살 조사, 그 현황과 과제



이무열 |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1) 2006년 9월에 적대세력사건(인민군, 좌익에 의한 학살) 조사는 독립운동 조사국으로 이관되었다.


2) 이후 조사개시 결정이 속속 내려지면서 실질적으로는 한 사람이 두 사건도 담당하는 등 최초의 계획이 많이 수정되었고, 2006년 말 유형별 조사팀이 조직되면서 많은 변동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