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과 민주주의 문제

20년 전 전국방방곡곡에서는 “호헌반대” 등을 외치면서 행진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다


20년 전 전국방방곡곡에서는 “호헌반대” 등을 외치면서 행진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다. 학생들은 그 독한 최루탄 가스를 맞으면서도 군사파쇼정권의 경찰들과 싸워 길을 터나갔고 그 뒤에는 작업복차림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넥타이를 맨 노동자들이 뒤따라 “전두환퇴진”, “파쇼정권타도” “호헌반대” “직선제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선진적인 학생들과 어울려 투쟁하였다. 그때의 그 함성은 지금도 우리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다. 이 투쟁의 지도부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것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1987년 6월 항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무난하지 않나 생각된다.


5공화국은 중앙정보부 같은 정보통치기관이 판을 치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던 시기였다. 이 5공화국의 말기쯤인 1987년 1월 14일에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마침 그때는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간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하는 논의가 뜨겁던 때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큰 파문을 몰고 왔다. 그 파장은 추모대회와 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라는 범국민적 기구를 탄생시켰다. 순결한 한 대학생을 고문으로 죽여 놓고서도 발뺌을 하는 그 부도덕성이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위기를 느낀 당시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을 위해 법을 고치는 문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더욱 큰 분노를 느끼면서 불같이 일어났다. 호헌반대 여론이 각계각층으로 번지면서 교수, 교사, 시민단체, 예술인, 연예인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하고 나섰다.

그러던 중에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그 동안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던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다. 6월 10일,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던 그날, 전국에서는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의 함성이 온종일 메아리쳤다. 6월 26일에 있었던 평화대행진의 날에는 전국에서 1백 80여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또한 항의의 표시로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는 일제히 종을 쳐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후보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의 "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6월 민주항쟁은 진정한 민주화 시대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사회 각 부문마다 군사문화 추방과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우리 민족의 최대과제인 민족통일의 물꼬도 조금씩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이 약속했던 6.29선언의 민주화 조치를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실천하지 않았다. 앞으로 들어서는 새 정부들의 개혁조치들은 바로 6월 항쟁을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http://user.chollian.net/~mypc21/6.htm)


6월 항쟁에 대한 더 상세한 전개에 대해서는 정해구, 김혜진, 정상호의『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6월 항쟁을 생각하면, 나는 다음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첫째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노동자ㆍ학생을 비롯한 민중들이 그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를 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6월 항쟁은 혁명이 아니라 단지 항쟁, 그리고 타협으로 끝나고 말았는가? 물론 6월 항쟁에 이어 7ㆍ8ㆍ9월의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투쟁은 6월 항쟁을 더 다그쳐 그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6월 항쟁을 발판으로 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그치고 있었다. 그 다음은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1. 왜  6월 항쟁은 항쟁으로 끝나고 말았는가?


요즈음 6월 항쟁은 혁명으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그 하나는 대표적인 보수 논객이라고 자처하는 소설가 복거일(미래문화포럼 대표)씨의 주장이고, 또 하나는 한겨레신문사 초대편집위원장을 역임했던 성유보 씨의 주장이다.

먼저 복거일 씨의 주장부터 보자.

복거일 씨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6월 항쟁'이라 부르는 것은 성공적 혁명에 대한 폄하”라는 주장을 하면서 2007년 5월 10일에 열린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 3회 주제 발표를 통해 “정부 체계에서 근본적 변화를 이루려는 시도가 직선제 헌법 제정이란 성과로 나타났기 때문에, 1987년 민주화운동을 6월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서 그는 6월 항쟁을 “성공적인 혁명”이라고 보고 있다. 성공했다면 6월 항쟁은 그 항쟁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념에 따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정립시켰을 것이다. 혁명의 기장 기초적인 개념규정에는 낡은 것을 대신해서 새로운 것을 정립함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복거일 씨의 말에 따르면 6월 항쟁은 “직선제 헌법 제정이란 성과”를 가져왔고 그리고 그는 “6월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녔고 체제 전복을 바라지 않았으며, 다만 압제적이고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민주적인 정권으로 바꾸려 한 것" "이 점이 대한민국 이념과 체제에 대해 비우호적인 사람들에겐 오히려 6월 혁명을 낮게 평가할 요소가 되겠지만, 바로 이 때문에 성공적인 혁명이 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그는 6월 항쟁의 기본 이념을 왜곡하기조차 한다. 6월 항쟁의 민중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녔다고 한다. 물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였던 몇몇의 사람들과 그 그룹이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신념의 소유자들이 진정 6월 항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더 연구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그들은 6월 항쟁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항쟁하기보다는 온갖 방법으로 그 항쟁의 발전을 속도조절하고 그 항쟁이 더 앞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런 일을 했으며, 그리고는 그 항쟁의 성과를 자기류로 갈취하여 왔다.

게다가 복거일 씨는 6월 항쟁을 "보기 드물게 성공한 혁명"으로 본다. 그것의 근거로 “폭력 수준이 아주 낮았고, 정치적 불안이 비교적 작았으며 사회적 비용도 적었다”는 점을 들고 있고 “혁명의 중요한 요건은 경제 성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주 속류적 경제사관의 입장에서 6월 항쟁을 보고 있을뿐만 아니라 폭력이 누구에 의해서 먼저 자행되었는가조차도 왜곡하고 있다. 6월 항쟁으로 인해서 현실적으로 민주적 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면서 그는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다만 압제적이고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민주적인 정권으로 바꾸려 한 것”이라고 보고 그것이 성공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전두환 파쇼정권은 6월 항쟁에 의해서 타도되었던 것이 아니라 임기를 다 채우고 물려났고, 그 정권 뒤에 또 다른 파쇼정권이 소위 직접선거라는 제도에 의해서 등장하였고 그 파쇼정권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민중들의 권리는 유린되어 왔으며, 민주주의는 발전되지 못해왔다. 노태우 파쇼정권이 들어선 것은 과연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에 그 원인이 있었을까? 그 분열은 누구에 의해서 조장되었을까? 물론 일차적으로 6월 항쟁의 성과를 무엇인가 자리를 차지하려고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소부르주아적 양 김씨의 진영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이 정권을 잡았더라도 6월 항쟁은 혁명으로 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들의 계급적 제약성 때문이다.

그 다음은 성유보 씨의 주장이다.

성유보 씨는 6월 항쟁을 “민중의 요구가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진 역사”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는 “87년 당시 민중들의 공통적 요구의 핵심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 대통령 직선제”이고 민중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서” 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6월 항쟁을 6월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6월 항쟁은 온 국민이 총단결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민은 1960년 4월 혁명을 통해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크게 진전시킨 바 있다. 그러나 4월 혁명은 그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를 맞아 좌절함으로써 백낙청교수의 주장대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 있었다.

둘째, 87년 당시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실천적 용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당시 전두환 정권은 친위쿠데타 같은 온갖 반격을 획책했으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어떤 세력도 힘으로 한국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망상은 하지 못하고 있다. 87년 6월 항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6.26 시위에는 경찰 추산으로도 전국적으로 4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온 국민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인 시위에서 폭력과 유혈참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셋째, 6월 항쟁 이후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권도 여러번 바뀌었지만 그 어떤 정치세력도 선거결과에 깨끗이 승복해왔다. 앞으로도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거나, 집권 프리미엄을 권력연장의 도구로 악용하려는 어떤 정치세력이 나타난다면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므로 6월 항쟁의 정신은 우리 국민들과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


성유보 씨의 주장 역시 복거일 씨의 주장과 거의 차이를 지니지 못한다. 그 역시 “6월 항쟁은 온 국민이 총단결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역사적 사건이다”라는 점에서 6월 항쟁의 성공을 찾고 있다.

6월 항쟁으로 인해 독재정권이 무너졌는가? 그리고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는가? 그는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것 같다. 물론 박정희 파쇼정권이래로 실시되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선출되었던 대통령간접선거보다는 국민에 의한 대통령직선제가 절차상으로는 더 민주적이기는 하다. 성유보 씨는 “노태우 씨의 일시적 등장은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체제가 바뀌어가는 과정상의 에피소드였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김영삼정권, 김대중정권, 노무현정권은 모두 군 출신이 아닌 민간출신의 대통령이고 “이 대통령 직선제는 흔들림 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라고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항쟁과 혁명의 차이점에 대해서 약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정해구 씨 등은 항쟁을 “특정의 사항에서 대규모 대중이 참여하여 그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규탄하는 한편, 그들의 요구를 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단적 항의시위를 전개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정해구, 김 혜진, 정상호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105쪽) 이와 달리 혁명은 그 주체들이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든 평화적인 방식에 의하든 간에 낡은 것의 폐지와 새로운 것의 정립을 통해서 한 제도 및 체제의 변경을 가져오는 역사적 과정이다. 혁명에는 적어도 새로운 것의 정립, 인류의 더 나은 삶의 조건의 창조라는 요소가 있다. 6월 항쟁은 이를 위한 발판을 다지기는 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어버렸다. 대통령직선제라는 것은 우리 현대사에 있었으나 박정희 유신파쇼정권에 의해서 유린되어버렸다. 이런 유린된 대통령직선제를 민중이 투쟁해서 되찾아 온 것이다. 더더구나 6월 항쟁으로 인해 군사파쇼정권은 결코 타도되지 않았다. 그 정권이 타도되려는 그 순간에 항쟁은 멈추어버렸다. 그 다음에는 5.18광주학살의 주역 중의 한명인 노태우가 정권을 잡고 6월 항쟁의 기본이념을 유린해나갔다.

6월 항쟁에서는 새로운 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민중의 더나은 삶의 조건들이 창조되었다고 볼 수 없다. 기본적으로 복거일 씨나 성유보 씨가 6월 항쟁을 6월 혁명이라고 하자고 한 것은 그들이 6월 항쟁의 기본이념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은 직선제쟁취라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그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다만 직선제 쟁취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민중에게 가장 어필하기 적합한 슬로건이었다.





2.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가?


6월 항쟁의 기본이념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 직선제쟁취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던 소부르주아 정치꾼이나 재야의 명망가들에게는 기본목표였을지 모르나 그 항쟁에 적극 일어섰던 민중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는 민주헌법을 쟁취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했다. 이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6월 항쟁이 있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실현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는 민주헌법이 있는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6월 항쟁이 추구하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대통령 직선제라는 것이었는가?

최근 민주화기념사업회가 정해구, 김 혜진, 정상호 등을 통해서 발간한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6월 항쟁을 혁명으로 보지 않지만 6월 항쟁을 소위 “민주화이행의 성공”이라고 보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위 “한국 민주화 이행의 특정한 패턴”을 “운동과 항쟁→민주적 개방→협약과 선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면서 “반면 전두환정권의 독재 속에서 다시금 강화되었던 민주화운동의 바탕위에서 야기되었던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적 개방을 가능케 만들었고 마침내는 협약과 선거를 거쳐 민주화이행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정해구, 김 혜진, 정상호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101쪽)라고 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6월 항쟁은 성공해서 민주사회가 정착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노무현대통령은 “저는 흔히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불만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어떻든 이것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내용의 면에서의 전면적 발전이 없이는 그 형식적인 측면에서 혹은 그 절차적 측면에서 결코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절차가 그럴듯하고 그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어도 민중의 입장에서의 그 내용의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절차적 민주주의는 바로 독재체제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법치주의, 다수결의 원칙, 민주적 선거제도, 요즈음 전계숙씨가 말하고 있듯이 언론이 권력의 4부로 정립됨으로써 형성되는 4권 분리체제, 이런 것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내용들인데, 이것들이 6월 항쟁으로 우리나라에 실현되고 정착되었다고 해서 6월 항쟁이 “민주화이행의 성공”을 가져왔다느니, 6월 항쟁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느니 말할 수 없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그 내용에서 무엇인가? 우리는 이 민주주의의 기본 내용을 보는 데에 있어 미국독립선언문을 참고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이 약 250년 전에 폭악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영국식민주의자에 대항해서 “신세계”아메리카가 독립하면서 전세계를 향해서 선포하였던 미국독립선언문에 담겨 있다.

미국독립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상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들은 자명한 진리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에 의해서 일정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음을, 그 권리들 중에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믿는다. 또 이 권리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 사이에 정부가 조직되었음을, 이들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함을, 게다가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어도 만약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인민은 언제든지 정부를 변경 내지 폐지하고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하여 또 그 같은 권능의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권리를 가졌음을 믿는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That to secure these rights,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That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s destructive of these ends, 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abolish it, and to institute new Government, laying its foundation on such principles, and organizing its powers in such form, as to them shall seem most likely to effect their Safety and Happiness)

 

이 독립선언의 기초자인 토마스 제퍼슨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한 모든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제일 먼저 생명을 들고 있고 그 다음에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열거하고 있는 점은 중요하다. 실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며 이것 없이는 다른 어떤 권리, 다른 어떤 가치도 무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 뿐인 인생을 향유하고 따라서 살아갈 권리를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독립선언에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에게 살아갈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이 담겨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만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이 말해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살아갈 권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살아갈 권리,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살아갈 권리는 다른 사람의 살아갈 권리를 희생하지 않는 한에서 행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살아갈 권리의 행사가 조정되어야 하는데, 이 같은 조정은 본래 정치가 하는 기능이다. 정치라는 것은 결코 자기 목적이 아니며 모든 인간에게 살아갈 권리, 그 다음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정치가 그 같은 수단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인간과 그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변경되거나 유린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치가 변경되어야 한다.

정치의 변경에 관한 권리는 미국독립선언문에는 “인민은 언제든지 정부를 변경 내지 폐지하고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하여 또 그 같은 권능의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권리”로서 표현되고 있고 이를 우리는 혁명권이라 한다. 인류에게 있어 저항권, 혁명권은 인간의 살아갈 권리를 비롯한 모든 인권을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최후의 권리이다. 저항권과 혁명권을 부정하는 한, 어떤 제도도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고,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혁명권의 승인과 주장이야말로 미국독립선언의 핵심이고 민주주의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저항권과 혁명권을 승인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고 6월 항쟁이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헌법의 기본 내용을 이루는 것이어야 했다. 혁명권은 국민주권의 최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6월 항쟁의 기본정신은 바로 이런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물론 6월 항쟁을 참여했던 민중들은 대부분 아직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인간에게 보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이 되는 그런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아직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해서 이런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그런 정치적 조건들을 마련하고자 했다. 직선제 쟁취는 곧 이런 민주주의를 현현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6월 항쟁은 직선제를 쟁취하고는 멈추어버렸고 이 항쟁의 성과는 소위 제도권의 정치인이라고 하는 소부르주아 정치꾼들에 의해서 갈취당해 버렸다. 그래도 앞서서 투쟁했던 민중들은 진정 자기들을 위하고 자기들에 의해서 자기들을 중심으로 지도하는 그런 정치세력 및 그런 당이 없었기에 그 투쟁의 성과가 갈취당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6월 항쟁은 직선제 쟁취를 목표로 했다고 그 소부르주아 글쟁이와 정치꾼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함을 그 내용의 하나로 포함하고 있다. 이런 민족 자주권에 대해서도 미국독립선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 사건들의 발전과정에서는 한 민족(people)이 그때까지 다른 민족과 맺어오고 있던 정치적 유대를 해체하고, 자연법과 자연의 신의 법에 의해서 부여되는 자립ㆍ평등의 지위를   세계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자리매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 경우 인류의 여론에 대한 당연한 존중에 의해서 그 민족은, 분립을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선언해야 한다. (.When in the Course of human events it becomes necessary for one people to dissolve the political bands which have connected them with another and to assume among the powers of the earth, the separate and equal station to which the Laws of Nature and of Nature's God entitle them, a decent respect to the opinions of mankind requires that they should declare the causes which impel them to the separation)


바로 여기에는 민족의 독립ㆍ평등의 권리가 명문화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은 평등하게 생겨나 살아가고 있다는 것, 각 민족은 살아갈 권리, 행복의 권리, 자유의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실현 속에 민족의 자주권이 포함되는 이유는 인간 권리의 주체가 모든 인간, 즉 모든 개인일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민족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다.



3. 맺으면서


5.18광주민중항쟁에서 미국의 우리나라 정치현실에 대한 개입은 그야말로 은밀했다. 그 은밀함은 광주 학살로 나타났다. 그러나 6월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미국은 아주 공개적으로 그리고 한국 국민의 동반자로서 아주 공개적으로 행세한다. 항쟁이 확산되고 경찰력이 무력화되기 시작하자, 1987년 6월 18일을 전후해서 전두환파쇼정권은 항쟁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비상조치를 통해 군 투입을 고려했다. 19일에는 오전 10시에 국방장관과 각 군 수뇌부, 안기부장을 소집하여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전투태세를 갖춘 군 병력의 배치를 명령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전두환은 군 병력 동원 명령을 중단시켰다. 정해구 등은 “전두환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사태에 적극 개입했다”(「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111쪽) 따라서 미국 개입의 공개성은 곧 직선제 쟁취로 나타났고 항쟁의 멈춤으로 나타났다.

민중의 항쟁을 억압하려고 군 동원까지 고려했던 전두환 파쇼정권이 미국의 개입에 의해서 그 군 동원을 포기하였던 현실을 보고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는 미국이 한국 정치에서 막강한 권력자임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분석함에 있어 미국을 빠뜨리면 그 분석은 극히 추상적이고 일면적이 되어버릴 것이다. 지금도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도, 그는 미8군의 사열을 받고 미국으로 날아가 미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먼저 나름대로의 반공주의 선언을 해야 하고 그리고 미대통령을 만나야 한다. 80년대 이후에 전개되어 왔던 민중의 투쟁사 속에는, 민주주의의 실현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독립하려는 우리 민족의 욕구도 자각적으로 융해되어 있다.

6월 항쟁이 있은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못하고 국가보안법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 그리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인 민중의 혁명권ㆍ저항권은 유린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고도 6월 항쟁이 성공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6월이 되면, 왜 6월 항쟁은 혁명으로 발전되지 못했는가라는 것이 항상 물어진다. 그 혁명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노사과연>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주의 문제



김성칠 ∣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