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과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자계급

채만수 | 소장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와 토론회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단지 20주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운운하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한나라당의 재집권이 움직이기 어려운 사실로 굳어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쩌면 이른바 ‘진보진영’ 혹은 ‘민주개혁세력’으로 하여금 ‘6월 민주항쟁’을 크게 부각시키도록 몰아가고 있을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끔찍했던 억압과 그에 맞선 처절한 투쟁의 기억을 대중에게 상기시키고 다시 각인시킴으로써 그 군부독재의 정치적 상속자인 한나라당의 집권을 저지해 보려는 의도가 내심 작용하고 있을 터이다. 말하자면, “탄핵 반대”, “탄핵 무효”를 외쳐대던 사고․정치정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최근의 빈번한 기념행사나 토론회에서의 담론은 그 대부분이 어디까지나 부르주아적 내지는 소부르주아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아주 ‘진보적’이라고 널리 호가 나 있는 조 모 교수조차 ‘6월 항쟁’을 가리켜, “해방을 하면서[맞으면서] 한국에 헌법이 만들어졌는데, 크게 보면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헌법으로 도입되는 일종의 이식된 민주주의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데)” “독재정권이 이런 민주주의를 부정했고, ... 60년대 초기...에는 국민들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이런 식의 사고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쉽게 버렸던 점도 있(으나)”, “60년대 말 70년대를 거치면서 정말 민주주의를 상실해 본 경험 위에서 민주주의의 귀중함을 느끼고, 어떤 시인도 얘기했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오랜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또 사실 개인적인 희생, 집단적 희생도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다시 쟁취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고 굉장히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대표적 사례인 것 같...다”며, “아무래도 6월 민주항쟁은 한국사회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하나의 대전환적 사건이었(는데)” “6월 항쟁 20년이 또 하나의 전환적 계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고도 발언하고 있다.



1. 6월 항쟁의 배경과 성격


1) 6월 항쟁은 계급투쟁의 한 형태


6월 항쟁은 관행적으로 ‘(반독재) 민주항쟁’으로 불리고 있고, 또 그렇게 규정되고 있다. 물론 그 자체로 틀린 규정은 아니다.

그러나 6월 항쟁을 그렇게만 규정하는 것, 혹은 ‘독재 대 민주’, ‘민주화’의 문제를 그 본질로 보는 것은 부르주아 내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협소하고 관념적인 관점과 사고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6월 항쟁의 의미를 왜소화시켜 그 전면적인 성격을 보지 못하게 한다.

더구나 앞에서 인용한 조 모 교수처럼, “해방을 맞으면서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헌법으로 도입되는 일종의 이식된 민주주의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데, 독재정권이 이런 민주주의를 부정했다”1) 운운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을 은폐․왜곡하는 것이다. 명색이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이러한 천박하고 도착된 역사관에 참으로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제1공화국 헌법에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도입’되었다면, 그것은, 결코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것, 혹은 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인민적(=민중적) 민주주의’의 열망을 부정하고 분쇄․억압하기 위한 장치, 정치적 장식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헌법으로 도입되는 일종의 이식된 민주주의로 출발”했는데 “독재정권이 이런 민주주의를 부정”한 게 결코 아닌 것이다.

협소한 (소)부르주아적 시각을 넘어 6월 항쟁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6월 항쟁의 타도 대상이었던 ‘독재’의 배경과 성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이나 박정희 군사독재로만 소급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일제 지배 하의 상황을 포함하여 한국의 근․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해방공간’은 좌․우 간의 치열한 투쟁의 공간이었다. 일반적으로 ‘좌․우익 간의 투쟁’이라고 말하지만, 일제에 부역하며 성장했고 미 점령군 당국의 지원 하에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아가던 지주․자본가계급과 착취․수탈의 계급사회를 폐제하려는 노동자․농민 사이의 건곤일척의 계급투쟁이 그 실체였다.

이러한 치열한 계급투쟁은 당시 물론 한국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고 사실상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은 각국의 구체적인 상황․조건에 따라서 그에 대처하였다. 예컨대, 서유럽이나 일본처럼 근대적 노동자계급이 거대하게 성장해 있는 곳에서는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지도자들을 정치적으로 제거․고립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저 유명한 마셜플랜을 위시한 여러 경제원조․재건 프로그램을 통한 대중의 회유․포섭을 중심으로, 한국이나 필리핀 같은 곳에서는 주로 현지 정부를 내세운 무단적이고 유혈적인 탄압으로.

사실, 1947년 미군정 하에서부터 시작된 ‘농지개혁’도, 한국전쟁도, 그 이후 이어지는 백색 공포정치도 모두 이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전개형태들이었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독재’라고 말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백색 공포정치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이렇게 계급투쟁의 한 형태로 보는 대신에 단순히 미국적 혹은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부정으로 보는 것은 오로지 현상에 사로잡혀 그 배경과 조건, 본질을 보지 못하는 협소한 (소)부르주아적 시각의 표현이다.

‘해방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대중적 계급투쟁은,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주로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서 일단 적어도 그 중․단기적인 승패의 대세가 결정이 되었지만, 그리고 이를 계기로 노동자․농민의 ‘조직적․전위적’ 계급투쟁이 사실상 궤멸상태에 빠져버렸지만, 그렇다고 그 계급투쟁이 소멸․중단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쏘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발전, 중국 혁명, 휴전선 이북의 또 다른 사회체제의 존재와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착취․수탈체제의 건재는 노동자․민중의 저항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다시 폭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과 배경을 이루고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재생산되고 폭발하고 있었다. 노동자․농민을 위시한 민중의 이러한 도도한 저항과 투쟁에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은 공포와 함께 억압의 필요를 절감했고, 그리하여 그 저항․투쟁을 무단적․파쇼적으로 억압한 것이 바로 ‘독재’로 알려진 백색 공포정치였다.

이승만 정권 이래의 ‘독재’, 백색 공포정치가 이렇게 민중적 저항과 투쟁에 대한 제국주의․독점자본의 무단적․파쇼적 억압이라는 사실은 박정희․김종필 등의 정보장교가 중심이 된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에서도 명확히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4월 혁명을 계기로 분출되던 노동자․민중의 사회혁명적 에너지를 무력으로 차단하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은 물론, 박정희․김종필 등이 ‘정보장교’라는 사실에서도 그 배후에 미 제국주의, 그 정보기관의 공작과 배후조종․지령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조 모 교수가 주장하듯이, “60년대 초기...에는 국민들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이런 식의 사고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쉽게 버렸던” 것이 아니었다. 1963년의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그렇게 평가했다면, 그것은 당시 첫째는 민중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때문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둘째로는 '민주주의를 대표하던'(?) 야당 후보로서의 윤보선 씨가 박정희를 ‘빨갱이’로 매도했기 때문이라는 일부의 시각도 있다는 것을 망각한 발언일 것이다.)

아무튼 6월 항쟁의 대상이 된 ‘독재’가 이렇게 제국주의 독점자본에 의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한 형태였다면, 그에 대항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 그 정점으로서의 6월 항쟁도 역시, 단순한 민주화 투쟁, 혹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한 폭발형태였다.


2) 사회구성의 변화와 계급투쟁, 혹은 ‘독재’와 ‘민주화 운동’


저항과 억압의 구체적 성격과 형태는 물론 시종 여일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그에 따라 사회구성, 즉 계급관계가 변함에 따라서 그 성격도 형태도 변해왔다.

우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전쟁 전부터 조선노동당을 위시한 전위적 혁명운동은 물론,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 자주적 노동자 대중운동에 대해서 극한적인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혁명적 전위분자들은 살해되거나, 투옥되거나, 굴복(전향)하거나, 38선 이북으로 피신했다. 혁명적이고 전투적이었던 전평은 폭력에 의해 분쇄되고, 사실상 정치깡패 중심의 대한노총(현재의 한국노총의 전신)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계기로 혁명적․좌익적 분자들만이 아니라 그 언저리의 사람들까지 학살, 사실상 절멸시켰다.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든, 애초부터 그것과는 천리만리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또한, 1946년 이북에서의 전면적 토지개혁도 있고 하여, 소작농민들의 혁명적 압력에 굴복하여,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위와 소작농민의 결합에 의한 혁명의 폭발을 차단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일부에서 그 불철저성, 기만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농지개혁의 실적에 대한 여러 통계들도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구래의 (반)봉건적 토지소유를 철저히 청산하고 농민적 토지소유, 혹은 분할지 소유 농민층을 창출하는 것이었다.2) 미군정 이래 자본가로의 전신(轉身)에 실패한 지주들은 더 이상 지배세력의 유력한 구성요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주계급은, 특히 전쟁을 계기로 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토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사실상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이 감가해버림으로써, 대부분 몰락했다. 그리고 국가권력과의 야합을 포함하여 시류에 재빨리 영합한 소수만이 지가증권 등을 담보로 특혜적 융자를 받아 일제로부터의 귀속재산을 불하받는 등의 방법을 통해 급속히 새로운 지배계급, 조숙한 독점자본으로서의 재벌로 성장해갔다. 대부분의 지주를 몰락시킨 전쟁과 급성 인플레이션 과정은 물론 이들에게는 급성 재벌화의 과정이었다. 귀속재산 등을 불하받기 위해 특혜적으로 일으켰던 부채가 급속히 휴지나 다름없는 가치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지개혁과 전쟁, 급성 인플레이션 등을 통한 농지분배나 지주계급의 몰락은 착취․수탈체제를 폐제․완화시킨 것도, 안정적 자영농을 창출하고 그리하여 계급투쟁을 소멸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럴 수도 없었다. 주지하는 것처럼, 농지개혁, 혹은 토지개혁을 통한 농민적 분할지 소유, 즉 자영농의 창출은 결코 농민경영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조만간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구래의 봉건적 예속농으로부터 무산의 임금노동자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불안정한 존재이다.

물론 맑스도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여촌야도’라는 말처럼 예컨대 일본에서는 농촌이 자민당의,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박정희의 공화당의 표밭이 되어 왔던 것처럼, 분할지 소유 농민의 다수는 그 사회적 고립과 토지에의 집착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때로는 반혁명적이기도 하다.3)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가혹한 지배”는 “농민의 일부를 ... 비록 표면적이지만 혁명화”하고, “농민의 이해는 더 이상 ... 자본의 이해, 자본과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상충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르주아적 질서의 전복이 그 임무인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동맹자와 지도자를 발견한다.”4)

실로 그랬다. 더구나 제국주의와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한편에서는 지가의 현물상환, 토지수득세와 같은 현물세로 막대한 전쟁비용을 농민들에게 전가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을 인위적으로 가속화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수입, 저곡가 정책을 통해 농민층의 분해를 가속화시켰기 때문에, 가혹한 억압 때문에 비록 표면화되지 못하고 있더라도, 제국주의․독점자본과 노동자계급․농민 간의 계급적 긴장, 즉 잠재적 계급투쟁은 격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휴전선 이북을 포함하여 지구 표면의 3분의 1쯤에는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체제가 존재․발전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억압, 즉 ‘독재’는 도를 더해 갔고, 여러 형태의 저항 역시 발전해 갔다.

그런데 그러한 억압을 뚫고 1960년에는, 1950년대 말에 엄습한 세계적인 과잉생산 공황 하에서 노동자․민중의 생활이 더 없이 피폐해진 와중에 대선을 계기로 부르주아지 분파들 간의 권력투쟁으로 지배질서에 작은 균열이 발생하자, 그 저항은 4월 혁명이 되어 폭발했다. (1960년 3․15 대선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선동적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4월 민주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처럼, 이 4월 혁명은 표면상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혁명의 폭발이 있기까지 도도히 흐르고 있던 저류(底流)는 ‘해방 공간’ 이래의 계급투쟁이었고, 그 때문에 새롭게 형성돼 가던, 그러나 아직 미성숙의 노동자계급운동과 ‘통일운동’의 외피를 쓴 반제국주의 운동이 이 4월 혁명에 잇따라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지배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입장에서는 어떤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든 그 봇물을 틀어막고 억압의 고삐를 다시 죄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반혁명이, 앞에서도 지적한, 박정희․김종필 등을 앞세운 5․16 군사쿠데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반혁명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5․16 군사혁명’이라는 깃발을 휘둘렀다.)

박정희 집권 제1기인 1960년대와 70년대 초는 한국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새로운 단계, 독점단계로의 비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대일청구권 자금’이나 차관, 그리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을 필두로 외국자본의 직접투자에 의한 자본주의적 기업의 창설과 그 자본의 축적이 빠르게 증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저임금 노동자들을 창출하기 위해서 농민층 분해가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만큼 노동자들의 계급투쟁도 빈번해지고 그 긴장도 고조되었는데, 특히 1960년대 말기로 갈수록 그러하였다.

한국 자본주의가 급격히 확대된 이 시기에는 그만큼 무산의 도시 노동자계급도 증대했고, 급격한 농민층 분해, 이농 및 탈농으로 도시인구가 급격히 증대했으며, 특히 이들은 서울 등 대도시 고지대의 판자촌을 대량으로 형성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최하층, 사실상 그 대량의 침전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 극빈층의 생활상, 특히 동절기의 그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비참한 것이었는지는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체제는 오직 억압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 ‘3선 개헌’ 등 박정희의 영구집권이 획책되었고, ‘외국인 투자기업체의 노동쟁의 등에 관한 특례법’이나 ‘국가비상사태’ 선포 등, 파쇼적 억압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로 들어서자마자 새로운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청계천 피복노동자 전태일 씨의 항의 분신,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폭동 등이 터져 나왔다.

정부는 1972년에 마침내 이른바 ‘유신’을 단행했는데,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자본주의의 성숙, 즉 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과 그에 따른 항상적․만성적 위기의 심화, 그리고 저항의 격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민주화 투쟁’과 그에 대한 극악한 파쇼적 탄압은 바로 이러한 경향의 심화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극악한 정치적․사상․이론적 탄압으로 비록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다분히 덧씌워진 채였지만, 민주노조운동과 자주적인 농민운동도 발생․성장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절대다수 계급이 되어, 표면상의 자기인식과 관계없이, 사실상 그 해방을 위한 투쟁을 새롭게 시작하고, 농민 역시 몰락을 강요당하면서 혁명적으로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79년의 부마항쟁이나 1980년의 사북항쟁, 그리고 그 해 5월의 광주항쟁과 대량학살은 물론,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권 후기와 전두환 정권에 걸친 일련의 투쟁, 그리고 나아가 그 이후의 투쟁은 바로 이렇게 위기에 가득 찬 독점자본주의 한국에서의 계급투쟁이었던 것이다.



2. 6월 항쟁의 조직 주체와 그 사상


6월 항쟁의 참여 주체로는 일반적으로 대학생,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중심이 된 재야세력, 김대중․김영삼 씨 등이 이끄는 야당, 그리고 ‘넥타이 부대’가 거론된다. 이는 6월 항쟁의 주요 (사상적) 지향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6월 항쟁을 지배했던 ‘독재 타도’, ‘호헌 철폐’라는 구호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실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경제적 사회구성상의 항쟁의 동력과 그 실제 참여 및 조직 주체 간의, 그리고 그 동력으로서의 노동자․민중의, 그 경제적․사회적 지위․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 역사적 계급의식과 참여․조직 주체가 표명한 정치의식 간에 간극,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간극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고, 지금도 역시 노동자․민중은 사실 이에 의해서 고통당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전적으로 극악한 백색 테러정치와 사회적 이데올로기 조작에 의해서 형성된 허위의식, 허위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대의 노동자 해방운동에 대한 탄압과 전쟁, 대량학살은 그 운동의 조직적․인적 단절만을 가져온 게 아니었다. 그 단절은 전통적인 전위적 해방․혁명운동과 새롭게 ‘자생한’ 그것과의 정치적, 사상․이론적 단절도 수반한 것이었으며, 그 단절을 강제한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거기에는 파쇼언론과 교육, 그리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위력이 무엇보다도 컸다.

처음에는 공포가 역사적․사회적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게 하고,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허위의식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더구나 세대가 바뀌면서, 그 강요된 침묵 속에서 사실, 혹은 그 진상이 잊히고, 언론과 교육이 그 위력을 발휘하면서 허위의 사실이 사회와 사회의식을 지배해 가게 되었다. 부르주아적인, 나아가 극우적인 사회관․역사관이 특히 그것인데, 한국 혹은 우리 사회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근․현대 세계사, 세계사상사 일반이 그러한 관점의 지배 아래 있었다. (사회)계급이라든가, 인민이라는 말들조차 빼앗긴 속에서 사회과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전위적인 해방․혁명운동과의 정치적, 사상․이론적 단절은 사실상 1970년대 초, 특히 ‘유신’을 계기로 완성된다. 극소수 인자들 사이에서는 이때도 아직 맑스나 엥겔스, 레닌, 모택동 등의 고전적 저작의 일부가 은밀히 유통되면서 전위적인 사상․이론이 학생운동 등의 정치적 경향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고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러한 전위적 담론은 이미 거의 한 세대에 걸친 장기간의 강요된 침묵을 통해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유신’과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새로운 정치적 조건이 등장했던 것이다.

‘유신’과 ‘긴급조치’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한국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로의 이행과 그에 따른 위기의 심화에 의한 것이었는데, 특히 이때는 한국 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경제 일반에 전반적 위기가 새롭게 격화되던 시기였다. 아무튼 ‘유신’과 ‘긴급조치’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의 파시즘의 강화된 형태였고, 따라서 운동은 반파시즘 운동으로서의 ‘민주화운동’으로 그 성격을 한정시키며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노동자계급의 성숙으로 노동운동이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이 역시 파시즘의 억압 하에서 그 성격은 ‘민주노조’ 운동으로서 발전해갈 수밖에 없었고, 도시산업선교회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등 ‘진보 기독교’ 쪽이 그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국 ‘유신’과 ‘긴급조치’는 그 강화된 파시즘 때문에, 한편에서는 광범위한 대중으로 하여금 반파시즘 투쟁에 떨쳐나서게 함으로써 운동의 대중적 규모․역량을 폭발적으로 키우는 주요한 계기였지만, 동시에 운동의 정치적 성격, 즉 그 사상․이론을 반파시즘 투쟁으로서의 민주화 투쟁이라는 한계에 가두어 버리는 계기, 그리하여 과거의 전위적 운동과의 단절이 완성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것이다.

1979년 부마항쟁으로부터 폭발하여 박정희의 피살, 12․12 반혁명(신군부의 쿠데타), 5월 항쟁과 학살로 이어지는 상황의 전개는 ‘유신’에 의한 그러한 사상․이론의 단절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항쟁과 억압은 명백히 1979년 2/4분기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경제위기에 의해 규정된 것이었고, 그리하여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은 물론 부마항쟁에서도 세무서가 불에 타는 사건까지 발생하지만, 당시 ‘운동’은 모든 것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는 사고 속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유신’에 의한 반파시즘 운동의 폭발적 성장은 다른 한편에서, 4월 혁명에 단을 발하고 1960년대의 한일협정 반대투쟁과 3선 개헌 반대투쟁을 거치면서 성장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진보적 종교인들’의 ‘재야’ 혹은 ‘재야운동’을 운동의 확고한 한 장(場)으로 성립시켰다. 이 ‘재야운동’이 부르주아 야당과 연합함으로써 ‘운동’은 대중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장악력을 더욱 높일 수 있었는데, 동시에 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 역시 크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운동’, 특히 직접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격돌했던 운동의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성격은 1980년대의 운동의 과학적 사상․이론의 부활과 성숙에도 불구하고 극복되지 못했고, 오늘날에도 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1980년대에 운동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결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1984년의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의 결성과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의 통합 등 조직적으로 새롭게 발전해 갔다. 그리고 특히 운동은 한국사회의 구성과 성격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사회과학을 부활시켰다. 이 사회과학의 부활은 한국에서의 민중운동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서, 광주학살의 충격과 노동자계급의 성숙이 기존에 강제된 지배적 관념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 결과였다.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한국사회의 구성과 성격, 나아가 수행해야 할 혁명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그러한 (잠정적) 결론을 실천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인자들의 현장 ‘투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재야운동’과 부르주아 야당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반파쇼 대중운동의 지도력을 대체하거나 그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오랜 단절 끝의 이러한 사회과학의 부활이 대중적으로까지 그 지평을 넓히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어서 그 논쟁은 주로 일부의 젊은 지식인 및 노동운동에의 투신자들 사이에 한정되어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미 거대해지고 강고해진, 반파쇼 운동의 지도력, 특히 갈수록 그 주요 부분을 장악해 간 부르주아 야당 세력은 과거의 전위적 운동과는 사실상 아무런 인연이 없는, 혹은 심지어 그러한 전위적 운동과 대립적․적대적이기까지 했던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인자들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회과학이 부활되긴 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전위적 운동과는 사실상 철저히 단절된 것이었고, 다분히 파쇼의 사상통제와 대중조작에 의해서 형성된 허위의식이나 비과학적인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에 의해 침윤된 것, 따라서 소부르주아적 혼란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고, 이 또한 ‘재야운동’과 부르주아 야당이 ‘운동’의 정치적 주도력을 유지․강화해갈 수 있는 요인의 하나였다. 게다가, 반파쇼 운동 지도력의 강고한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성격은 그나마의 계급혁명적 인자의 지도부 진입의 사실상의 장벽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고 있었다.

물론 1980년대 중․후반의 운동, 특히 연합전선운동으로서의 ‘민통련’에는 ‘노동위원회’나 ‘농민위원회’ 등이 조직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기독교노동자총연맹, 서울노동운동연합, 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등등의 노동자․민중 조직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컨대 ‘민통련’의 ‘강령’도 “민주적 노동운동을 보장하여 노동자들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권리를 실현한다”(제6항)거나 “농축산․어업을 보호 육성하여 농어민의 권리를 실현한다”(제7항)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자적․민중적 인자들은, 한편에서는 수적 열세를 면치 못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는, 위 ‘강령’의 내용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5) 그 지도부의 이념적 성향 역시 ‘대체로’(어쩌면 ‘서노련’ 등의 일부 인자들을 제외하면) 체제내적이었다.

그리하여 광범하게 벌어지는 반독재 투쟁의 정치적 성과는 ‘재야운동’과 부르주아 야당이 전유하게 되고, 그에 따라 ‘운동’의 이들 (소)부르주의적 지도력은 더욱 강화되면서, 전두환 정부의 ‘4․13 호헌 선언’을 계기로 그것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1987. 5. 27.)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6월 항쟁은 바로 그러한 (소)부르주아적 지도력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근본적으로는 살인적 억압의 예봉이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의 계급적 적으로서의 노동자계급 운동에 겨누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운동의 노동자계급적․민중적 지도력이 성장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성장과 그 정치적 지도력의 미성장이라는 부조화는 6월 항쟁의 전개양태, 그 성격뿐 아니라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 일반의 건강한 발전을 제약하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된다.




3. 6월 항쟁의 직접적 결과와 노동자계급


6월 항쟁의 제1의 직접적 결과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쟁취이다.

그러나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미국식 민주주의의 회복’도, 그렇다고 반봉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취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주적 토지소유의 청산과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 일제로부터의 귀속재산의 노동자 자주관리, 그리고 나아가 통일된 민족국가에서의 인민적 혹은 민중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노동자․농민의 요구를 압살하던 파시즘, 백색 공포정치, 군사파쇼를 극복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그 기초에는 물론, 항쟁 지도부의 사상적 경향의 여하와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성숙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거대화와 그 여러 형태의 계급투쟁이 놓여 있었다.

아무튼, ‘국본’ 혹은 ‘재야’와 부르주아 야당으로 대표되는 6월 항쟁 지도부의 (소)부르주아적 성격 때문에 6월 항쟁은 자신을 대상화하여 자신을 있게 한 원인과 배경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파쇼적 억압에 대한 조건반사적 저항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등 강경 탄압정책을 취하려던 계획을, 필시 보다 장기적 안목으로 정세를 분석하고 있었을 미국의 압력으로, 철회하고, 차기 대통령으로 예정되어 있던 노태우의 입을 빌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자 ‘국본’ 등 지도부는 그것으로 6월 항쟁은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한 것으로 치부, 바로 운동을 접었다. 그리고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정권쟁탈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당연히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 그 민중적 혹은 시민적 저항에 굴복을 하고 나선 지배권력 또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폭압, 혹은 공포의 권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해 나왔다.

이 노동자 대투쟁은, 한편에서는 그 간의 파쇼적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의 진정한 원인․배경을,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6월 항쟁 지도부의 성격과 한계를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6월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계급적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었다.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6월 민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투쟁을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게 하는 극한적인 계급적 억압이 있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6월 항쟁은 그 현상적인 부르주아적 혹은 소부르주아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일환이었고, 민중적 혹은 인민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투쟁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6월 항쟁에 대한 이러한 규정을 혹자는 ‘사후적 해석’이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1985년 6월의 구로동맹 파업이나 86년 9월의 삼척 도계의 경동탄광 노동자들의 투쟁, 그에 대한 운동과의 연대 호소 등은 차치하더라도, 6월 항쟁에 선행한, 예컨대, 1986년 5월 3일의 ‘인천민중항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부르주아 야당인) “신민당 개헌 추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었지만, 검찰의 중간 수사 발표에 의하면, 거기에는 “극렬문제학생, 재야단체원, 일부 불순근로자들이” 참가하여, “민주헌법 쟁취”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구호뿐 아니라, “인천을 해방구로!”, “해방인천 만세!”, “천만노동자 해방투쟁 만세!”, “미일 외세 몰아내고 민중정권 수립하자!”,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제국주의 몰아내자!” 등과 같은 “사회 안정을 해침은 물론 국기마저 위협하는”, “북괴의 상투적인 대남선전, 선동과 현저히 유사한 내용”을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통련’ 지도부는 이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는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민중의 정당한 투쟁을 ‘음모’나 ‘폭거’로 왜곡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비난하고 있지만.6)

다음으로는 “6월 투쟁은 중간층의 참여가 현저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노동대중의 참여가 두드러진다”거나, “독점자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민중과 지배파쇼와의 모순이 폭발되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민중역량이 80년 이후 강화되고” 있어서 “이러한 모순에 근거한 대치선은 첨예한 대결의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이에 따른 미국과 독점자본의 권력재편의 의도가 현시기를 크게 규정하고 있다”는 ‘민통련’의 정세분석(1987년 10월)도 흥미 있는 자료일 것이다. 물론 이 자료는 다른 한편에서 “6월 투쟁은 반독재민주화투쟁, 7․8․9 투쟁은 노동자의 권익투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류”이며, “6․7․8․9 투쟁은 하나의 민주화투쟁”이라고, 부르주아적 관점에서의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말이다.7)

또한, ‘민통련’의 양대 전신의 하나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창립선언문인 “민중민주운동선언”(1984. 6. 29.)도 6월 항쟁이 본질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일환이었고, 민중적 혹은 인민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투쟁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해 줄 것이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으니까.


“... 1천만 농민과 8백만 노동자, 그리고 다수의 빈민들과 구조적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대다수 여성들이 고통과 절망에 처해 있는 이때,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민중의 참된 주인의식 위에서 민주의 대도를 힘차게 달려가는 민중 민주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절박성에 입각하여, 우리들 농민, 노동자, 청년, 자유지식인, 성직자들은 민중 민주운동 협의회를 구성․창립하게 되었다. ...

...

1. 우리는 소수특권층을 위한 독점경제체제를 시정하여 민중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자립적인 민족경제가 실현되도록 노력할 것이다.“8) 운운.





[보론] 김성칠 회원의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주의 문제”에 대하여


1) “항쟁이냐, 혁명이냐”는 불모의 논의다


김성칠 회원은 “6월 항쟁을 생각하면, ...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며, 그 “첫째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노동자ㆍ학생을 비롯한 민중들이 그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를 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6월 항쟁은 혁명이 아니라 단지 항쟁, 그리고 타협으로 끝나고 말았는가”이며, “그 다음은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라고 쓰고 있다.9)

첫 번째의 문제의식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우선 김성칠 회원이 그러한 문제의식과 논의를 통해서, 6월 항쟁의 의의를 “직선제 쟁취”로 한정하면서 심지어 “6월 항쟁의 민중들이‘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녔다고” 그 “기본 이념을 왜곡하기조차” 하는 ‘보수 논객’ 복거일이나, 그 “주장 역시 복거일 씨의 주장과 거의 차이를 지니지 못한” 성유보 씨를 비판하는 것이나, 6월 항쟁이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항쟁과 혁명의 차이점” 운운하면서, 항쟁은 “특정의 사항에서 대규모 대중이 참여하여 그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규탄하는 한편, 그들의 요구를 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단적 항의시위를 전개하는 것(정해구, 김혜진, 정상호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p. 105)”이며, “이와 달리 혁명은 그 주체들이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든 평화적인 방식에 의하든 간에 낡은 것의 폐지와 새로운 것의 정립을 통해서 한 제도 및 체제의 변경을 가져오는 역사적 과정”이며 “혁명에는 적어도 새로운 것의 정립, 인류의 더 나은 삶의 조건의 창조라는 요소가 있다”는 식으로 논하는 것은 불모의 스콜라적인 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성칠 씨가 “6월 항쟁에서는 새로운 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민중의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이 창조되었다고 볼 수 없다”거나, 6월 항쟁에 이은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을 더 다그쳐 그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6월 항쟁을 발판으로 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그치고 있었다”고 선언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불모의 논의 때문일 것이다.

김성칠 회원이 지적하는 것처럼, “6월 항쟁으로 인해 군사파쇼정권은 결코 타도되지 않았...(고) 그 정권이 타도되려는 그 순간에 항쟁은 멈추어버렸(지만)”, 더구나 “그 다음에는 5.18광주학살의 주역 중의 한명인 노태우가 정권을 잡고 6월 항쟁의 기본이념을 유린해나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6월 항쟁에서는 새로운 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민중의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이 창조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할 수는 결코 없다. 노태우 정권이 “6월 항쟁의 기본이념을 유린해나갔지만”, 거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어서 6월 항쟁 이전과 같은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억압, 사실상 관행이나 다름없었던 경찰과 정보기관의 고문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부르주아적이라는 계급적 한계가 있고, 특히 그마저 크게 제한적인 것이었지만, 6월 항쟁의 성과로 아무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것이 정립되었고, 민중의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민중의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이 창조되었다”고 평가하는 데에 대해서 이의를 달고자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건들이 “창조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하고 있는 김성칠 회원 자신이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가리켜서 “6월 항쟁을 발판으로 해서[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6월 항쟁과 그 성과에 한계가 있는 것, 혹은 그러한 한계가 있다고 규정하는 것과 “6월 항쟁에서는 새로운 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민중의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이 창조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규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김성칠 회원이 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김성칠 회원의 글에서 거명된 사람들만을 거명하자면) 복거일이나 성유보, 정해구 등등과 같은 보수적 혹은 진보적 부르주아 논객들의 “항쟁이냐, 혁명이냐” 식의 불모의 논쟁의 포로가 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특히 김 회원이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가리켜서 “이 투쟁은 6월 항쟁을 더 다그쳐 그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6월 항쟁을 발판으로 해서[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그치고 있었다”고 말할 때, 이는 자칫 당시의 대투쟁의 의의를 폄하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김 회원 자신이 강조하는 민주주의 자체도 형해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과 관련,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인용․거론하면서 이 “독립선언에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에게 살아갈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이 담겨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만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이 말해지고 있다”고 쓰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살아갈 권리, 즉 생존권을 추구한 당시의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을 더 다그쳐 그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즉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그치고 있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생존권을 위해 투쟁할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가 여부야말로 김성칠 회원이 “6월 항쟁을 생각하면 ... 고민하곤 한다”는 두 번째 문제, 즉 “6월 항쟁으로 ...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판단하는 주요한 기준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6월 항쟁을 발판으로 해서” 노동자들이 그러한 대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6월 항쟁의 최대의 성과의 하나일 것이다.


2) 18세기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김성칠 회원이 ‘6월 항쟁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최대의 특징, 혹은 최대의 문제점은 그가 그것을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분리해서 추상적으로 논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비역사적인 논의 방식은 그 자체로서 관념적이며, 따라서 결코 6월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도, 그 성격도, 그리고 그 성과도 정당하게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 6월 항쟁을 논함에 있어서의 이러한 방법의 차이와 그에 따른 내용의 차이는 김성칠 회원의 논의를 이 글의 제1절에서 제3절까지의 논의와 비교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특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가 6월 항쟁을 통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가”를 가늠하기 위한 기준으로 “약 250년 전”의 미국독립선언문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의 미국독립선언문은 정치사상사적으로는, 주지하듯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한 표현․결실로서, 봉건적 압제와의 투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문건이다. 그만큼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고 문건이었다.

하지만 그 진보성은 당시의 역사적 맥락․상황과 관련해서이지 결코 초역사적인 것이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그것은 부르주아적 억압과 착취의 경제사회적․역사적 원인을, 비록 소극적으로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주요하게, 은폐하고, 그리하여 그 압제로부터의 해방의 길을 은폐하는 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성칠 회원이 인용하고 있는 데에서만 두 가지를 지적하더라도 이렇다. 우선,


“우리들은 자명한 진리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에 의해서 일정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음을 ...” 운운.


“조물주에 의해서” 운운하는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서술은, 이제는 레토릭 정도로 치부하여, 차치한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결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자명한 진리’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고대광실 부르주아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과 가난에 찌든 노동자 가정이나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결코 평등하게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삶의 여건, 삶의 여정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그 불평등을 은폐하는 역할 이외에 어떤 역할을 하겠는가?

덧붙여 말하자면, 미국의 역사를 보자면, 그 독립선언문을 작성했고, 또 그 내용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싸웠던 이들조차 사실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에 의해서 일정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음을” 결코 믿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자본-임금노동 관계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시 이미 미국에는 노예제가 광범하게 실시되고 있었지만, 저들 중의 누구도 그 노예제의 폐지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투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저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 ‘모든 사람’은 기껏해야 ‘모든 부르주아’일 것이며, 실제로는 그조차 사실에 부합할 수 없다.

다음에는, 


“이 권리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 사이에 정부가 조직되었음을, 이들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함을 ...” 운운.


바로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최대의 반동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인용문에 이어서 아무리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어도 만약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인민은 언제든지 정부를 변경 내지 폐지하고 ...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권리를 가졌음을 믿는다”고 하고 있더라도, 즉 김성칠 회원의 표현을 빌리면 아무리 “혁명권”을 승인․주장하고 있더라도, 정부 곧 국가가 인민의 권리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직되었으며, 그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의 계급성, 즉 국가란 “계급 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이며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반동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부르주아 국가의 헌법을 장식하고 있는 이러한 주장은 어쩌면 18세기 절대주의 시절에 ‘왕권신수설’이 수행했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인민 사이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른바 ‘혁명권’과 관련하여 김성칠 회원은 이렇게 쓰고 있다.


정치의 변경에 관한 권리는 미국독립선언문에는 “인민은 언제든지 정부를 변경 내지 폐지하고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하여 또 그 같은 권능의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권리”로서 표현되고 있고 이를 우리는 혁명권이라 한다. 인류에게 있어 저항권, 혁명권은 인간의 살아갈 권리를 비롯한 모든 인권을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최후의 권리이다. 저항권과 혁명권을 부정하는 한, 어떤 제도도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고,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혁명권의 승인과 주장이야말로 미국독립선언의 핵심이고 민주주의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저항권과 혁명권을 승인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고 6월 항쟁이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헌법의 기본 내용을 이루는 것이어야 했다. 혁명권은 국민주권의 최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6월 항쟁의 기본정신은 바로 이런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6월 항쟁이 있은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못하고 국가보안법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 그리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인 민중의 혁명권ㆍ저항권은 유린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고도 6월 항쟁이 성공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6월이 되면, 왜 6월 항쟁은 혁명으로 발전되지 못했는가라는 것이 항상 물어진다. 그 혁명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말하자면, 김성칠 회원이 6월 항쟁을 ‘성공한 혁명’이라고 평가하지 않은 최대의 근거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혁명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반해서 6월 항쟁의 결과로서의 ‘6공화국’의 헌법은 이를 보장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것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야말로 극히 관념적인 사고 아닌가? 그 ‘헌법’에 무어라고 규정되고 선언되어 있든, 도대체 어떤 국가가 수사(修辭, rhetoric)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민의 정치적 혁명권을 보장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국가란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며 그 권리는 인민의 동의에서 유래한다는, 계몽주의적 혹은 부르주아 입헌주의적 환상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노사과연>


6월 항쟁과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자계급*10)



채만수 | 소장



1) 이러한 발언에서는 분명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나, 같은 것을 가리키지만, “이식된 민주주의”, “이런 민주주의” 등은 어느 것이나 긍정적인 것으로, 그리하여 6월 항쟁 등은 바로 그러한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참고로 말하자면, 제국주의=독점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미국식 민주주의’는, 6월 항쟁이나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의 문제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이미 미합중국 건국 당시의 긍정성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따라서 지금 그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제하면서 “독재정권이 이런 민주주의를 부정” 운운하는 것은 극히 무비판적일뿐 아니라 반동적이다.


2) 물론, 반봉건적 토지소유의 청산이라는 측면 대신에, ‘안정적인 농민적 토지소유’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는 경우, 토지 수급 농민들에게 가해진 기혹한 부담을 고려, 농지개혁의 불철저성, 특히 그 기만성을 논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농민적 분할지 소유라고 하는 그 자체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K.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1852), MEW, Bd. 8, SS. 198 이하 (칼 마르크스 [허교진 역], ��프랑스혁명사 3부작��, 소나무, 1987, pp. 243 이하) 참조.


4) K. 맑스, 같은 책, SS. 199, 201-02 (허교진 역, 같은 책, pp. 245, 247).


5) 더구나 저들은 한국의 노사관계를 파쇼적인 것이 아니라 ‘반봉건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제의 ‘강령’의 노동 관련 본문은 이렇다. “한 나라의 국민경제가 민주적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치창조의 생산과정에 직접 종사하면서 분배과정에서는 항상 소외되기 쉬운 다수 노동자들의 민주적 제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줌으로써 그들의 정치․경제 참여의 폭을 증대하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 주어야 한다.

5) 더구나 저들은 한국의 노사관계를 파쇼적인 것이 아니라 ‘반봉건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제의 ‘강령’의 노동 관련 본문은 이렇다. “한 나라의 국민경제가 민주적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치창조의 생산과정에 직접 종사하면서 분배과정에서는 항상 소외되기 쉬운 다수 노동자들의 민주적 제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줌으로써 그들의 정치․경제 참여의 폭을 증대하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노동삼권이 제한적이나마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의 근대적인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반봉건적인 노사관계가 전면 불식되지 못함으로써,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전근대적인 고용제도와 노동조건 속에서 저임금, 임금체불, 무단해고,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의 위협 속에서 가혹하게 착취당하고 있다. ...“ 운운.


6) 이상, 1986년 5월 21일자 ‘민통련’ 성명, “‘5․一항쟁’을 왜곡하지 말라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보고―”(��민통련,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평가서(I) ―자료편―��, 민족민주운동연구소, 1989, pp. 97-8) 에서 인용.


7) 같은 책, p. 209 참조.


8) 같은 책, p. 37.


9) 이하, 김성칠 회원으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정세와 노동�� 제25호, pp. 15-26에서.


* 이 글의 제3절 “6월 항쟁의 직접적 결과와 노동자계급”까지의 내용은 지난 6월 16일에 사회실천연구소의 월례토론회에서 “6월 항쟁과 노동자계급”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본래 토론을 위한 자료일 뿐 미완성의 논의이지만, 그 자체로서 김성칠 회원이 ��정세와 노동�� 제25호 (2007년 6월)에 실린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주의 문제”에서 6월 항쟁의 성격과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비역사적인 방법으로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보론] 김성칠 회원의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주의 문제’에 대하여”는 김 회원의 글이 가진 몇몇 문제점들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6월 23일의 연구소 ‘월례토론회’에서 이미 밝힌 것이지만, 그 토론회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과 기타 독자들을 위해서 이번에 여기에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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