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으로 포장된 배신

― ‘민족해방파’에 대한 비판



지난 8월 23일 기아자동차공장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정규직 노동자로 구성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기아차지부는 3만 4천 조합원의 소중한 일터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지회의 점거파업에 대해 유감을 표명합니다. ... 도장공장은 1만 2천 조합원의 평생일터이며, 회사의 존폐를 가늠하는 공장이다. ... 특히 투쟁방식에 있어서 비정규직지회의 일터가 아닌 기아차 조합원의 소중한 일터를 침해하는 행위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기아차 지부 긴급속보>1)


공장을 자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일터”로 인식하면서, 노동자들과 자본가와의 적대성을 부정한다. 오히려 자본의 일부, 기계의 부속물이기를 거부하며, 공장을 세워 자본에 적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대한다. 정규직노동자들은 자본과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대등한 관계로서의 일체가 아니라 자본의 부속물로.

그런가 하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선 후보는 중소기업을 찾아가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역시 노동과 자본의 전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는 쏘련을 중심으로 하는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세계적인 노동과 자본의 역관계가 노동 측에 불리해지고, 한국의 노동자계급도 계급으로서의 해방의 전망을 상실한 것이 원일일 것이다. 즉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투쟁을 포기하고 자본에 투항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패배주의를 합리화하고, 투쟁을 포기하고 투항하는 것을 심지어 “변혁적”인 것으로 치장하는 이론 아닌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지도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민족해방파(NL, 혹은 자주파)”가 그들이다.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에서는 지난 10월 23일 “<한국사회성격과 변혁전략>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43페이지의 분량의 토론회 “자료집”에는 토론자의 발제문 6개와 사회자가 제출한 참고자료 하나가 실려 있다.

자료집의 내용이 “민족해방파”의 주장을 정리하고 있다고 판단되고, 그래서 이를 가지고 비판하고자 한다.


1. 2단계 “변혁전략”


이들은 “변혁전략”으로 현 단계 “변혁 목표”를 “자주적 민주정부의 수립”과 “민족경제”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그 다음 단계의 과제가 된다.


1) ‘반제반자본 사회주의변혁’이 아니라 ‘반제(반매판 반독점)’ 민주주의변혁이다

한국사회는 예속성이 심화되고 전근대성이 남아 있는 외세 지배하의 신자유주의사회이다. 그러므로 현 단계 한국사회변혁은 반제민주주의변혁, 즉 자주적 민주주의 변혁이다. 일부 진보운동이 조급하게 주장하는 반제 반자본, 즉 자주적 사회주의변혁단계가 아니다. ...(중략) 한국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예속자본주의사회를 자주적 민주사회로 바꾸고 분단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반제민주변혁에 있다. 다시 말해 자주적 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자주적 민주대개혁으로 자주적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동시에, 가능하다면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이전이라도 7천만 겨레의 대단결에 기초해 연방제 방식의 통일 위업을 실현하는 반제 반매판 반독점 민주주의 변혁에 우리민중의 살 길이 있다.

그런 다음에 이러한 자주적 민주주의변혁은 자주적 민주대개혁의 성과와 근로민중의 준비정도, 변혁과 반 변혁 간의 역관계, 해당 정세의 변화에 따라 반제 반자본의 자주적 사회주의변혁 단계로 전환, 발전되는 2단계 연속 과정인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이러한 2단계 연속 변혁의 길에 대해서는 진보운동 내부에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2)(강조는 인용자 ― 이하 같다)


이들은 또한 한국독점자본에 대한 투쟁을 자제하고, 한국독점자본을 지배하는 미국의 독점(금융)자본에 대해서 투쟁의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  


사실 ‘반제 반독점’이란 표현도 신중하게 사용되고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재벌은 초국적 금융자본 형태의 제국주의 독점자본에 기생, 결탁하는 주 측면과 경쟁, 대항하는 부 측면을 갖고 있다. 특히 IMF 위기 이후 더욱 집중된 독점형태를 띠고 있으나 제국주의 독점자본과의 관계에서 재벌의 독자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재벌을 ‘매판 독점자본’ 또는 ‘예속독점자본’으로 성격 규정해야 옳을 것이다....(중략)

그러므로 반독점이란 용어가 마치 한국재벌이 독자적 지위를 가진 독점자본인 것처럼 혼란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반제 과제와 반독점 과제의 비중과 선후를 구분하지 않고 반매판 반독점 투쟁을 반제투쟁 보다 앞세우거나 평균적으로 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반 매판 반독점 과제의 실현은, 우리나라의 통일과 변혁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볼 때, 더욱 정교한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외자 지분율 등 초국적 금융자본과의 관계에서 각 재벌 대기업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일부 재벌이라도 6.15시대 남북경협의 활성화와 민족경제의 균형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남북경협에 적극 참여하는 일부 재벌의 역할을 사전에 봉쇄하고 무차별적 제거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통일이 변혁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변혁이 통일의 질을 높이는 유기적 관계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3) 


2. 민족적인 자본가도 “변혁의 동력”에 포함

그들은 자본가까지도 변혁의 동력이라고 한다.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과학적인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모든 전략전술은 목표와 수단과 방법으로 구성되는데, 현 단계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전략전술도 반제민주변혁의 성격과 임무에 맞게 목표, 수단, 방법이 강구돼야 한다.

우선 그 목표에서 반미반제자주화를 앞세우고 반 매판 반독점 민주화를 밀접히 결합시켜야 하며, 그 수단에서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지식인을 위주로 소상인 및 자영업자, 도시빈민, 민족적인 영세자본가, 군사병과 중하층 장교, 양심적인 종교인 등 광범한 계급 계층에 대한 의식화, 조직화를 결합시켜야 한다.4)


3.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 


그러면 1단계 ‘변혁’인 “반제민주주의 변혁”을 통해서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이루려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박경순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21세기 진보운동의 대응전략”에서 그 사회는 “자립적 민족경제”가 실현되는 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초국적 독점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체제 구축,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국가적 장악과 민영화정책의 중단 및 국공기업의 공공적 성격의 유지, 중소기업 육성 및 내생적 발전전략 모색, 노동자와 민중의 민주적 권리보호와 생존권 보장이라는 핵심요소가 대안의 경제체제에서는 관철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명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립적 민족경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전략을 확고히 견지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5)


4. 1국가 2체제 실현


1단계 “변혁 목표”로 “자주적 민주정부”와 “민족경제”를 수립한 후 다음단계의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1국가 2체 2정부의 연방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국가란 지배계급의 국가이고 체제의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1국가 2체제가 가능하다는 것인지 이들의 사고가 신기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좀더 들어보자.

역시 동일한 2단계변혁론을 주장하지만 “자주적 민주정부”를 “자주적 민중정부”로 말만 바꾼 채 반복하는 “한국사회의 성격과 변혁전략”(김장민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 기획위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3. 집권노선: 자주적 민중정부

사회주의 세력이 제 계층을 묶어 과도기 정부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해도 사회주의 체제를 수 년 만에 확립할 수 없으므로 과도기 정부를 기반으로 사회 경제 정치체제를 사회주의 실현에 필수적인 환경으로 재조직해야 한다. 이렇듯 사회주의 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과도기 정부를 수립하는 것과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권 후 일정기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혁명을 통해 완성된다. 사회주의체제와 그 전 단계인 과도기 정부를 구분한다면 사회주의는 궁극적인 지향체제이며 과도기 정부는 이행기에 해당하는 집권노선이다.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간섭과 지배의 최종적인 물리적 장치는 주한미군이며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변혁과정에서 국내자본과 그 정권이 위태로워지면 제국주의 무력이 즉각 개입해 또다시 민족의 참상이 발생하므로 제국주의 무력이 개입할 수 없는 평화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안전장치는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통일을 통해 가능하다. 1국가 2체제 2정부에 의한 연방제통일이야 말로 평화적 통일을 통해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노동자, 농민과 같은 생산대중이 해방으로 가는 변증법적 통일방안이다.6) 



5. 사회성격


이들은 한국사회구성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기에 2단계 변혁을 주장하는 것일까? “자주적 민주정부, 자주적 민족경제”를 가진 사회란 결국 자본주의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는 변혁이 일단계 변혁이라면 당면 변혁은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사회가 봉건제사회이거나 혹은 봉건적 잔재가 광범위하게 남아있다는 말이 된다. 이들은 한국사회를 정말 봉건제사회라고 보는 것일까?

자료집에서 유일하게 ‘사회성격’에 대해 논한 박경순은 “한 사회의 기본성격은 국가 주권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한 사회의 기본성격은 국가 주권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는 모든 사회관계의 기초로 된다. 과거에는 경제적 제 관계가 모든 사회관계의 토대로 되고, 그것에 의해 사회의 기본 성격이 규정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일련의 제한성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식민지 반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견해가 그대로 관철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 나라들은 우월한 정치군사적 힘을 동원해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을 침략, 주권을 강탈해 식민지 정치권력을 수립하고, 이 힘으로 그 나라 토착 경제구조를 식민지 지배 목적에 부합되게 인위적으로 뜯어고쳤다. 이렇게 됨에 따라 그 나라에서는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가 조응한다는 마르크스 경제원리가 그대로 관철되지 않고, 기형적인 발전의 경로를 걷게 되었다. 7)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는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가 조응한다는 마르크스 경제원리가 그대로 관철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까? 맑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신적, 정치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8)


“사회의 경제적 구조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선”다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정치담당자들은 경제에서 나온 잉여생산물에 의해서 부양되며, 그래서 자신의 생명줄인 경제관계를 유지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경제관계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경제적 지배계급의 도구로서 역할 한다.

일제하의 식민지조선을 보아도 매판자본가와 매판 지주계급과 일제로 구성된 정치권력은 봉건적 경제의 구조라는 토대위에 구축되어, 직접생산자의 대다수를 차지던 소작인들과 형성되고 있던 노동자들을, 지배수탈하는 정치구조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정치권력을 수립하고, 이 힘으로 그 나라 토착 경제구조를 식민지 지배 목적에 부합되게 인위적으로 뜯어고친”것이 문제라면, 여기에 대해서 맑스의 다음의 말을 들어보자.


한 사회가 비록 자기의 발전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9)   


즉, 정치적 상부구조도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을 하지만 경제발전단계를 마음대로 뛰어넘을 수는 없고, 또 마음대로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즉 박경순의 표현대로 “인위적으로 뜯어고칠” 여지도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하여 봉건사회 조선을 일거에 자본주의로 만들 수도, 혹은 고대 노예사회로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상부구조가 토대에 대한 반작용이 보다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식민지사회라고 해도 상부구조는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한 것이다.


그들은 상부구조가 토대를 규정한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두 가지 징표 중에서 규정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주권의 소재이다. 왜냐하면 국가주권이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이고 전 사회적인 지배권이라는 데로부터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을 직접적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도 규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지배권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비하여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주도적 기능을 하게 된다.10)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두 가지 징표 중에서 규정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주권의 소재”라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 할 수 있다. 왜 어떤 나라는 주권을 잃고 지배를 받고, 어떤 나라는 지배를 하는가. 바로 경제적 힘이 규정적인 것이다. 또 침략을 하는 원인도 제국주의 국가의 자본이 원료를 확보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을 확보하고 자본의 투자처를 확보하기 위한 것, 즉 경제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격을 규정할 때 한국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든 혹은 식민지반자본주의로 규정하든,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라고 규정할 때 국가주권의 문제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제적인 것, 토대로부터 국가주권의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국가주권의 소재가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제적 토대에 의해 규정된 사회성격이 주요하게 국가주권소재를 규정한다. 이승만정권시기처럼 자본주의가 극도로 미약한 시기의 미국에 대한 예속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발전한 현재 한국의 미국에 대한 예속은 그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두 가지 징표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중에서 규정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토대이다. “국가주권의 소재”가 아니다.


1)식민지 혹은 신식민지

박경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한국을 식민지사회라고 규정한다.


그 나라의 자주권을 부분적으로 제약당해, 경제 외교 면에서 종속적 관계에 놓여 있지만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종속국들과는 달리 식민지란 한마디로 제국주의 지배에 의해 민족의 자주권(주권)이 침탈된 상태에 있는 나라나 지역을 가리킨다. 구식민지로부터 신식민지로의 지배방식의 교체로 인해 형식상 독립이 주어지고, 국가권력이 존재한다 해도 제국주의 지배에 의해 민족의 자주권이 상실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나라는 식민지라고 규정할 수 있다.11) 


그러나 필자는 “신식민지로의 지배방식의 교체로 인해 형식상 독립이 주어지고, 국가권력이 존재한다" 면 ”제국주의 지배에 의해 민족의 자주권이 상실상태에 빠지게”되더라도 (구)식민지가 아니라 신식민지라고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식적인 독립’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민족해방운동의 전진과 제국주의의 후퇴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민족자주권이 비록 “상실상태”에 있더라도 제국주의의 직접지배를 받는 구식민지보다는 그 정도가 덜할 수밖에 없다. 형식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반자본주의사회    

박경순은 한국을 다음과 같이 반자본주의사회라고 규정하고 있다.

계급적 견지에서 보면, 첫째 사상 문화 도덕의 모든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기풍이 지배하고 있으며, 둘째 소유형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압도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셋째 사회가 기본적으로 자본의 운동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넷째 노동계급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에 대한 사회 계급적 구속이 주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있다. 그러므로 사회발전단계의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범주에 속하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 출생에서부터 우리사회내부의  사회발전법칙에 따라 자생적으로 탄생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 지배의 필요성에 따라 미국의 식민지적 통치권에 의해 외래 독점자본과 매판자본이 증식된 결과 지극히 변칙적으로 탄생되고 발전해 온 기형적 자본주의이다. ...(중략)

한국자본주의의 기형적 변칙성은  정치경제 군사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를 보다 상세히 분석해 보면 정치 분야에서 기형성과 변칙성은 ▲ 정권의 성격이 국내 계급대립의 산물이 아닌 미국의 식민지 예속정권이라는 점  ▲ 권력구조에서 미국을 정점으로 정치적 하수인들(정권 담당세력)과 경제적 하수인들(매판자본가와 지주)들이 수직 종속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 정치적 하수인들과 경제적 하수인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 관계가 없다는 점  ▲ 정치의 내용에서 국내 특정계급의 이익보다 미국의 이익실현을 앞세우고 있다는 점 ▲ 정권교체가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경제 분야의 기형성과 변칙성은 ▲ 경제체제의 종속성 예속성이 체질화되어 있다는 점 ▲ 민족 산업의 파산몰락과 경제구조의 이중성 기형성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 ▲ 노동대중을 비롯한 근로민중과 해내외 독점세력사이의 적대적 대립이 극도로 첨예화되고 있다는 점  ▲ 농촌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구조적 본질적 변칙성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한국자본주의는 정치경제 군사적 구조전반이 미국에 의해 그 명맥이 장악당해 있고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는 완전히 예속화, 식민지화된 자본주의이며, 자본의 운동법칙이 식민지성에 의해 변칙적으로 불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기형화되고 불구화된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를 반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한국사회를 사회 계급적 견지에 보면 반자본주의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자본주의란 남의 손에 명줄이 쥐어져 있어 자본주의로서의 자기 구조와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예속적인 자본주의, 남의 힘에 의거하여 끌려가는 기형적인 자본주의, 절뚝거리며 끌려갈수록 더욱 예속화 기형화되는 온전치 못한 자본주의 예컨대 반신불수의 자본주의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와 봉건제가 절반씩 혼합되어 있는 사회로 보는 것은 잘못된 편향이며, 또한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사회로 넘어가는 과도적 사회로 보려는 것도 잘못된 편향이다.12)


그러나 이것은 비과학적이다. 그러면 자본주의사회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회의 성격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제도, 혹은 같은 말이지만, 지배적인 생산관계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사회가 현재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되는 것은 우리사회에 함께 존재하는 여러 생산관계ㆍ경제제도 중에서 자본제적 경제제도, 즉 자본―임노동 관계가 가장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면 ‘지배적 생산관계’, 혹은 어떤 생산관계가 ‘지배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어떤 생산관계가 ‘양적으로 우세한 생산관계’이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생산관계가 나란히 존재할 때, 그 가운데 양적으로 우세한 생산관계에 따라서 그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이지요.13)  


따라서 박경순의 표현대로 “소유형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압도적”이고 “노동계급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에 대한 사회 계급적 구속이 주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예속화, 식민지화된 자본주의”이고 “기형화되고 불구화된 자본주의”라서 반자본주의라고 한다. ‘양적으로 우세한 생산관계’가 사회성격을 규정한다고 할 때 반자본주의사회라면 ‘자본주의와 봉건제가 절반씩 혼합되어 있는 사회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반자본주의라는 해괴한 개념을 고안해 낸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주권소재로 여부로 사회성격을 규정해야 한다는 사고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이 개념 속에서는 국내자본 대 미국(자본과 정부)대립이 부각되게 된다. 국내에서의 자본과 임노동 관계라는 대립은 묻혀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목표는 미국에 예속되고 기형화된 자본주의를 정상적인 자본주의로 만드는 것 즉, “자주적 민족경제”를 만드는 것이 당면 ‘변혁’의 목표가 된다. 그래서 이들의 전선은 미국 대 한국 민족이 (나아가 남과 북의 민족 모두가) 된다. 극소수 매판독점자본가를 제외한 독점자본가들까지도 연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 즉 착취를 받는 직접 생산자들의 다수가 노동자계급인지, 아니면 봉건적인 소작인인지를 밝혀서, 변혁의 동력과 변혁의 내용(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를 밝히는 것이 사회성격을 규명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렇게 경제적 토대로부터가 아니라 국가주권의 문제로 사회성격을 규정해 버리면 착취와 피착취라는 계급 간 적대의 문제가 국가 대 국가의 적대로 변하게 된다. 이제 모든 사회는 주권이 있는 국가인가, 주권이 없는 국가인가로 사회성격이 구분된다. 지배―피지배 계급투쟁의 자리에 지배국가와 피지배국가 간의 투쟁에 들어앉는다. 그래서 (독점)자본가와도 손을 잡고 미제국주의와 투쟁하라고 주장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또 자주정부를 세워서 국가주권을 찾아오면 주권의 문제로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그들에게는 그것은 ‘변혁’이 된다. 진정 그들이 자신의 논리에 충실하다면, 그들은 2단계 변혁을 주장할 수 없다. 주권을 찾은 자주국가는 더 이상 역사가 발전할 수 없다. 그들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는 곧 ‘자주적 민족경제’ 즉 자본주의사회를 영원한 것으로 선언하고, 사회주의사회를 부정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부언하면 그들이 국가주권의 문제로 사회성격을 규명한 순간 식민지 규정만이 중요한 것이 되고, 자본주의나 반자본주의라는 규정은 수식어에 불과해 진다. 물론 그 식민지 규정도 국가주권의 문제라는 정치적 결과만 보고 그 원인인 경제적 토대를 못 보아 비과학적이기 마찬가지이지만. <노사과연>


1) “무엇이 기아 비정규직 파업에서 구사대의 폭력을 불렀는가” 노동자정치신문 <33호(통합450>, p. 5. 에서 재인용.


2) 정성희 소통과 혁신 연구소장, “세상을 바꾸는 이론 발전을 위하여”, <한국사회성격과 변혁전략>토론회 자료집(이하 자료집), p. 125.


3) 같은 글, pp. 126-128. 


4) 같은 글, p. 138.


5) 박경순 진보운동연구소 소장,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21세기 진보운동의 대응전략”, 자료집, p.111.


6) 김장민,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기획위원, “한국사회성격과 변혁전략”, 자료집 p. 28


7)박경순 진보운동연구소 소장, “한국사회의 성격과 6.15시대 변혁운동의 방향”, 자료집, p. 48


8)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박종철 출판사, pp. 477-8.


9)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 1판 서문,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p. 6.


10) 박경순 진보운동연구소 소장, “한국사회의 성격과 6.15시대 변혁운동의 방향”, 자료집, p. 49.


11) 박경순, 같은 글, p. 51.


12) 박경순, 같은 글, p. 61-62.


13) 채만수, [노동자교양경제학], p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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