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으로의 폭주

―사민주의는 노동자·민중의 길이 아니다

오른쪽으로의


오른쪽으로의, 반동으로의 폭주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것도 일말의 망설임이나 수치심도 드러냄이 없이 당당하게, 극우․파시즘의 전통을 잇는 세력도, 이른바 진보를 주장하는 세력도 그렇게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폭주


아직 출범도 하기 전의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폭주는 애초부터 으레 그러려니 예상되었던 바이다. 그 때문에, 그 폭주를 어떻게 저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대한 실천적 과제이지만, 폭주 그것의 내용이나 그 성격․배경을 상론(詳論)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만 간단히 지적하기로 하자.

저들은 ‘비즈니스 후렌들리’라는 말로, 즉 ‘친기업적’이라는 말로 아예 노골적으로 재벌․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두잉 베스트”(2월 10일 이명박)하겠다고, 즉 목숨을 걸고 열심히 매진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모든 것을 거기에 종속시키고 있다. 사실상 모든 것을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그를 통한 경제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니 법인세 인하, ‘영어 몰입교육’, 공기업의 구조조정․사유화, 대운하 등 대형 토목사업, ‘능동적 복지’ 등등등등 ... 재벌 등 독점자본을 지원할 온갖 정책들, 온갖 궤변들이 쏟아진다.

이런 기조는 물론 새로운 게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포함한 과거 모든 정권의 정책기조였고,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와서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것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조금은 낯설고 새롭게 들릴지 모르는 ‘영어 몰입교육’만 해도 그렇다. 김대중 정권이 과거의 교육부 혹은 문교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개칭․개편했을 때 이미 그것은 바로 교육의 모든 목적과 임무는 자본의 축적과 착취를 위한 ‘인적자원’의 양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영어 몰입교육’은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편의 일부가 과도하게 강조되어 나타난 것에 다름 아니다. 연전에 일부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했지만, 교육의 목적과 임무가 그렇게 자본을 위한 인적자원의 양성으로 규정되는 한, 인문․교양 따위는 사실상 설 자리가 없고, 설혹 그것이 교육되고 진흥된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그에 봉사하는 한에서의 그것일 뿐이다.

‘능동적 복지’라는 것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몇 년을 연달아 ‘신년기자 회견’에서 일자리 창출을 최고의 국정 목표로 삼겠다며, 기술개발․기술혁신을 통한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역설하는 궤변을 농한 바 있다. 기술혁신․기술개발, 경쟁력 강화는 모두 감원과 구조조정, 따라서 실업의 증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데도 그것을 통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궤변을 연초부터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능동적 복지’라는 이명박 정권의 ‘복지 정책’은 그러한 궤변의 극치이다. ‘능동적 복지’ 정책의 요지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서 경제 규모를 증대시킴으로써 실업을 일소함으로써 아예 복지정책, 저들의 사고에 의하면 ‘수동적 복지’의 필요성 자체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그리하여 예컨대, 서울 지하철은 벌써부터 수천 명을 감원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새로 건설되어 개통될 서울의 지하철 9호선은 아예 역무실, 매표소 등이 없는 ‘5무 시스템’으로 하겠단다.

‘능동적 복지’를 위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기업이고 공기업이고 가릴 것 없이 감원의 구조조정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또 공기업의 사유화․민영화도 더욱 활발히 추진되고 실행될 것이다.

물론 다 좋다.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독점자본이, 자본이 자신의 묘혈을 파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미 남대문의 관리․유지 인원도 줄이고, 그 관리를 민영화하고 ... 그리하여 홀랑 태워먹지 않았던가! 마침 대공황도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다.



‘진보신당’파의 사민주의 폭주


그런데 또 하나의 오른쪽으로의, 반동으로의 폭주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야말로 일말의 망설임이나 수치심도 드러냄이 없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 다름 아니라, 이른바 ‘진보신당’ 소동이 그것이다.

저들은 민주노동당이 ‘친북․종북주의’ 세력이자 ‘민주노총당’이고, ‘운동권 정당’이며, 바로 그 때문에 ‘국민’의 외면․버림을 받아 대선에 참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성격들을 청산하려 하지 않으며, 청산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오른쪽으로부터의, 아니, 사실은 극우․반동적 관점에서의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극우․반동성 때문에 실제로 저들이 벌이고 있는 ‘진보신당’ 소동은 조선일보 등의 파쇼언론의 지원․각광을 받으면서, 아니 그들과의 합작․공조 속에서 화려하고도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필칭 ‘진보’를 떠들면서도 말이다.

저들이 벌이고 있는 민노당 ‘비판’이란 것은 그 동안 민노당이 가지고 있고 지향하던 그나마의 작은 긍정성마저 철저히 부정․배척하려 하는 것이다.

우선 오늘날 ‘평등파’가 문제 삼고 있는 ‘자주파’의 ‘친북․종북주의’란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형성되고 굳어진 저들 ‘평등파’ 자신의 반공적․냉전적 사고의 소산이요, 그러한 잣대를 들이댄 규정일 뿐이다. 저들이 매도하고 있는 ‘친북․종북주의’는 냉전적 사고를 거부하는 ‘자주파’의 민족주의적 태도의 일단이 저들 ‘평등파’에게 그렇게 투영된 것일 뿐인 것이다. 민노당에게 있어서, 혹은 소위 ‘자주파’에게 있어서 문제는 친북․종북주의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몰계급적 민족주의, 몰계급적 애국․국가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고 있는 저들 소위 ‘평등파’는 그러한 몰계급성을 비판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지 오래다.

저들 ‘평등파’는 오늘날 이른바 ‘북핵’에 대한 ‘자주파’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있지만, 이 역시 저들이 얼마나 냉전적 사고에 자신의 영혼까지를 팔아버리고 있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이른바 ‘북핵’ 문제 이전에 북의 체제와 존재 자체를 압살하려 드는 미국의 집요한 도발․위협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대량의 핵을 앞세운 위협이고, 도발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 이러한 제국주의적 위협과 도발이 북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고 실험하도록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문제를 ‘북핵’의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사실은 미국의 그러한 집요한 도발․위협을 은폐하며 그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민주노동당의 실패 원인을 ‘자주파’의 이른바 ‘친북․종북주의’에서 찾고 있지만 사실 실패의 주원인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는 몰계급주의, ‘국민’주의이다. 그리고 이 몰계급주의․국민주의는 오늘날 소동을 벌이고 있는 저들 소위 ‘평등파’ 자신들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주요 지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저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노동자․민중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민주노총당’이어서, ‘운동권당’이어서 대선에 참패했다는 망발조차 서슴지 않으면서 끝내 ‘국민’ 타령을 하고 있다. 그만큼 저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부대로서는 철저히 타락한 자들이며, 이미 부르주아화한 자들인 것이다.

저들이 ‘친북’이니, ‘종북주의’니, ‘북핵’이니 하면서 ‘진보신당’ 소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결국, 권력 맛을 보고 권력 냄새를 맡은 출세주의자들이 냉전적 폭압과 냉전적 법질서 속에서, 그리고 냉전적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배양된 대중의 반공․반북적 정서를 등에 업고, 또 그것을 더욱 자극하면서 그것을 무기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활로를 찾아보겠다는 더러운 음모에 불과하다.

저들이 추구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사민주의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 스스로도 유럽의, 그리고 남미 브라질 등의 사민주의를 모범으로 삼아 그 길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표명해왔다.

그런데 현대 사민주의는 어떤 정치노선, 어떤 계급의 어떠한 정치노선인가?

그것은 명백히 노동자계급을 역사적 포로로 잡고 있는 독점자본의 정치노선, 독점자본 좌파의 정치노선이다. 오늘날 ‘새로운 진보정당’이니 ‘진보신당’을 운운하는 자들이 과거 노동자계급운동을 벌여왔으나 이제는 노동귀족으로, 부르주아지의 앞잡이로 타락한 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하여 그들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포로로 잡아 독점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정치적 영달을 꾀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사민주의자들, 사민주의적 정치세력 역시 그러한 역사적 전력으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포로로 잡고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는 정치세력인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약간의 안락함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계속 독점자본의 임금노예로 묶어두고 있고, 그렇게 묶어두려는 게 사민주의의 실체이다.

서유럽에서 사민주의 정당들, 사민주의 정권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저질러온 온갖 역사적 범죄행위들은 차치하더라도, 1990년대 이후 유럽의 사민주의 정권들은 유고연방의 해체과정에서,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벌여왔고, 아직도 벌이고 있다. 이들 사민당 정권들은 자신의 국내에서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지난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쟁취해왔던 성과와 권리들을 유린하고 있다. 제3의 길이니, 새로운 중도니, 개혁이니 하는 기만적인 구호를 앞세우면서 말이다.

이것이 현대 사민주의이다. 그런데도 저들 ‘진보신당’을 얘기하는 자들은 사악하게도 진보의 이름과 온갖 궤변으로 그러한 사민주의를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을 통째로 들어서 독점자본의 재물로 바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일이라면 그토록 악의를 드러내며 게거품을 무는 조선일보 등의 파쇼언론이 오늘날 저들을 응원하고 노동자들의 여론을 조작하려 게거품을 물고 나서는 것도 바로 저들 사민주의자들의 역할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정치 중심을 굳건히 세우자


저들이 사민주의 책동을 노골화함으로써 지금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형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사실 이는 예정되어 있었던 바였다. 일찍이 1987년 말엽부터 저들이 합법주의로 합법주의로 달려가고 있을 때 그것은 바로 청산주의로서 이미 저들의 이러한 타락과 파탄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합법공간을 거부할 이유도 없고, 또 거부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더 많은, 더 넓은 합법공간을 쟁취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중심을 합법공간에 건설하려는 전략은 폐기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합법공간에 건설하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중심이란 그것이 아무리 ‘변혁적’이니 뭐니 하는 수사로 포장되어 있더라도, 이미 1987년 이후의 경험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은 기회주의와 사민주의, 출세주의의 탑을 쌓을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지형이 급변하고 있는 차제에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정치 중심을 어디에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돌아보면서 또 다시 합법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자. <노사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