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자본의 전투적 대변자 이명박 정부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국가의 본질과 기능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국가의 본질과 기능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자본의, 특히 독점자본의 전투적 대표자로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혹은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는 다짐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말이다.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는 저들의 다짐은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지난 3월 10일의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장에서는 대통령의 이른바 ‘공직자 머슴론’으로, 즉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서번트(servant), 쉽게 말해 머슴인데, 말은 머슴이라고 하면서 국민에게 머슴역할을 제대로 했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면서, “주인인 국민보다 일찍 일어나는 게 머슴이 할 일인데 머슴이 주인보다 늦게 일어나서야 되겠”으며, “이런 정신으로 공직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는 다짐이야, 다짐처럼 그렇게 섬기지 않고 말로만 그쳐서 문제지, 좋은 말 아니냐고 묻고 나올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서번트(servant), 쉽게 말해 머슴” 운운하는 수사(修辭)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연전에 내가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비판하면서 국가란 “계급지배의 도구”이며 부르주아지에 의한 “계급적 착취와 수탈을 영속화하기 위한 억압기구”인데도, 민노당의 강령은 “그 계급적 본질을 부르주아적으로 왜곡”하고 있고 “속 빈 미사여구가 현란하게 동원”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을 때,1) “그람시나 풀란차스가 마치 땅 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고색창연한 테제들에 만족하기까지 한다”2)고 응수해왔던 자들의 부류도 필시 그렇게 되묻고 나설 사람들 중에 속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국가’도, ‘국민’도 계급 중립적인 개념이고 중립적인 존재일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억압기구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그렇게 그 계급적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는 어릿광대들을 향한 미사여구를 남발하면서도, 그들이 그 계급적 이해에 얼마나 민감하며 그 이해를 관철시키는 데에 투철한가를 그 언동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계급지배의 도구, 계급적 억압기구로서의 국가의 본질을 그렇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근하게, 대통령과 정부는, 한편에서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 운운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법과 질서’ 혹은 ‘법과 원칙’을 내세우면서 “노동자들의 정치파업은 국민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엄단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여기에서 계급사회에서의 ‘법과 질서’ 혹은 ‘법과 원칙’ 그것의 계급적, 억압적 성격과 본질을 논할 여유는 없지만, 굳이 그것을 논하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의 정치파업은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 그 자체에서 이미 형식논리적으로도 ‘노동자들’은 ‘국민들’이 아님이 명확하다. 그것이 ‘정치파업’이든 ‘경제파업’(?)이든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인데, ‘노동자들’이 만일 저들이 말하는 ‘국민들’이라면, 저들의 말은 ‘노동자들 스스로가 스스로의 권익투쟁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당착으로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둥, “엄단하겠다”는 둥 서슬이 퍼렇게 나오면서도 자본에 대해서는 지성으로 그 ‘섬김’을 다짐하는 나머지 심지어 “‘섬김의 감독 서비스’에 최선을 다할 것”(3월 14일 전광우 금융위원장)이라는 분열증 환자의 헛소리 같은 발언마저 들리는데, 아무래도 기업을 위해 당장 ‘전봇대 뽑기’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대통령의 의지와 메씨지가 가장 명확해서 그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즉, “정부가 기업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하나 금년 안에 해결하려고 쉬운 말로 하면 작심하고 있다”(3월 13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제1차 회의)라고.

이에 이르면, “그람시나 풀란차스가 마치 땅 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고색창연한 테제들에 만족하기까지”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가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저들이 다짐하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란 게 구체적으로 누구를 섬기는 정부를 의미하는가, ‘국민’ 운운하는 수사(修辭)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동원되는가, 그리하여 국가란 누구의 이익을 위한 존재인가가 다소 명확해질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이명박 정부만에 대해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그 주요한 혹은 필수적인 특징의 하나로 되어 있는 좁은 의미의 사회주의, 혹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포함한 계급사회에서의 국가 일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의 국가란 그렇게 계급지배의 도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부야 그 계급적 성격을 노골화하고 있지만, 국가가 그렇게 지배계급의 이해 관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민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국민)참여정부”니 하던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음은 그들이 강행해온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서 절절히 경험한 대로이다. 그리하여, 지배계급 내부의 종파적 이해를 둘러싸고, 즉 착취된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싸고 치열히 싸우고 있는 저들 내부의 현 주류조차 “과거 정권도 ... 반기업적인 정권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3) 말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신․구 정권의 동일성과 차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잘 집약되어 있다. 즉,


“모든 계획은 액션플랜을 짜라고 한다. 로드맵은 이미 많이 짜여져 있으니 필요한 것은 액션”4)


이라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니 말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가야 할 방향과 이정표, 즉 ‘로드맵’은 이미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 의해서도 “많이 짜여져 있으니”(―바로 동일성―), 이명박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서둘러 실천하는 것, 즉 ‘액션’이고, 그 강행의 계획을 짜는 것(―이것이 차별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부가 기업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하나 금년 안에 해결하려고 작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장 단지를 만드는 데도 평균 30개월이 넘”어서 “어떤 분이 땅을 사서 허가받아 공장을 짓는다고 하면 지금 시작하면 내 임기 안에 착공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 와 있다”며, “가장 문제는 환경영향평가나 문화재 관계 이런 것들로 근 1년을 끈” 것으로서 “환경영향평가는 사계절을 다 거쳐 허가가 되기에 여러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가장 문제는 환경영향평가나 문화재 관계 이런 것들로 근 1년을 끈다.”

“환경영향평가는 사계절을 다 거쳐 허가가 되기에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 작심하고 규제를 완화하여 “6개월 이내에” 모든 절차를 끝낼 수 있게 하겠다! ‘국민’을, 즉 (독점)자본을 그렇게 섬기겠다!

이것이 바로 그와 그 정권의 의지, 발언의 요지이다! 환경에 대한 영향 혹은 그 파괴도, 문화재의 파괴도 결코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 그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친(親)기업’(?)


“용납하지 않겠다”거나 “엄단하겠다”는 엄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저들은 물론 독점자본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을 마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폭력으로만 그러한 지배, 착취가 가능한 게 아니다. 무한폭력은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와서 자신들의 종말을 너무나 앞당길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은 기만, 이데올로기 조작에 나서고, 그를 위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독점)자본을 섬기겠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고 “국민을 섬기겠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3월 13일에 있었던 ‘노동부 업무보고’에서의 발언들을 보자.

보도(��조선일보�� 2008. 3. 14.)에 의하면, 여기에서도 물론 대통령은, “이념적, 정치적 목적을 갖고 파업을 하는 일은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를 잊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 띄운 “국정브리핑” 자료에 의하면, 노동부 역시 “선진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노사관계 선진화 △활력있는 노동시장 △국민을 섬기는 따뜻한 노동행정 등 3가지를 노동분야 국정과제로 보고”하였으며, “특히, 올해는 노사관계가 경제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의 원동력이 되도록 노사관계를 선진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먼저,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해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며, “금년 상반기부터 현장의 노사협력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해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현장의 노사협력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 1996년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이 발표된 시절도 아니고, 이제는 이 모든 미사여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 것이다. 그런데도 친절하게도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


* 노사가 자율적으로 ... 임금인상 자제 및 무파업을 표명하는 등 노사협력선언을 확산하도록 지원...

* 노사분규 유형별 대응방안을 마련하여 법과 원칙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기조를 유지...

* 합법파업에 대해서는 노사자율 해결 원칙을 견지하면서 적극적으로 조정서비스를 제공...

* 그러나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노조의 폭력․파괴․점거 등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노사를 불문하고 엄정하게 의법조치...


그리고 고맙게도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 해결을 위해 법 개정을 통한 제도보완 등 다양한 방안을 추진”하고, “활력있는 노동시장을 만들어” 가겠다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정규직의 양보”가 거론되고 있고, “이와 아울러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정성이 제고될 수 있는 방향으로 법개정 등 제도보완도 추진”된단다! ‘노동자의 생활의 안정성이 제고될 수 있는 방향으로’가 아니고,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노동시장의 안정성이 제고될 수 있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추진하겠단다. 예컨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확대하고, 임금체계를 연공중심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개선토록 지원”하는 등 말이다. 그리고 “그리고 현재는 부당해고시 근로자만이 활용할 수 있는 금전보상제도를 일정한 요건 하에 사업주도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즉 눈 밖에 나고 저항하는 노동자는 ‘자신들이 만든 법’에 의해서도 명백히 ‘부당해고’일지라도 재고용의 의무를 지지 않도록 그렇게 ‘개선’해서 말이다!

바로 자신들이 다짐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을”, 즉 (독점)자본을 “섬기는 따뜻한 노동행정”이요, “활력있는 노동시장”이며, “노사관계 선진화”이다!

그런데 저들의 레토릭은 이러한 경제살리기, 즉 자본 살리기의 노사관계를 “일자리 창출”과 연결짓는다. “노사관계가 경제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의 원동력이 되도록 노사관계를 선진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일자리, 즉 고용과 실업의 문제는 노동자계급에게뿐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나아가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심각한 문제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장, 즉 확대재생산을 통해서 고용을 증대시키고, 그리하여 실업문제를 적어도 완화시킨다는 것이 저들 자본 측의 주장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 정부도 바로 그러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고, 바로 거기에서 이른바 ‘노사협력’이나 ‘노동시장 유연화’의 필요성도, 파업 엄단의 필요․당위성도 찾고 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은 이렇게 감동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고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어 위기인 상황에서 이념적, 정치적 목적을 갖고 파업을 하는 일은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

“무엇이 진정 노동자 권익을 찾고 계승하는 것인가, 무엇이 과연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책임도 노동자에게 있다.” “위기 때는 노도 사도 따로 없다. 합심해야 한다.”

“우리 경제가 연 7% 정도 성장하면 비정규직은 지금보다 절반 정도로 줄어들 것이나 경제가 나빠지면 제도를 아무리 보완해도 줄이기 쉽지 않을 것” 운운.5)


저들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대로 “노도 사도 따로 없이 합심”해도, 즉 노동자계급이 철저하게 자본에 무기력하게 종속되어도 “위기” 즉 공황은 주기적․필연적으로 오는 것이며, 그리하여 비근하게 지난 이른바 ‘IMF 사태’ 때에 겪었던 것처럼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는, 주지하는 것처럼, 지난 거의 200년에 걸친 경험을 통해서도, 경제과학에 의해서도6) 입증된 바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에서는 차치하기로 하자.

그러면 과연 경제성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용을 증대시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를 줄이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이 역시 자본주의에 고유한 인구법칙으로서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상대적 과잉인구, 자본이 그 필요에 따라 창출하는 산업예비군의 문제로서 경제과학에 의해서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도 그들의 주장이 기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호황과 위기․불황이 교체되면서 호황기에는 고용이 증대하고 실업률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지속적인 호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호황기라고 해서 실업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사실상 항상적․만성적으로 과잉생산이 일어나고 있어서 독점자본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리하여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비약적인 속도로 과학기술혁명이 전개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즉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완전한 실업도, 사실상 반(半)실업, 불완전 취업으로서의 비정규직도.

 실제로 지난 수년 동안의 우리의 경험이 이를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저들은 지배계급 내부의 분파적 이익투쟁 때문에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 운운하고 있지만, 지난 수년 동안은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실업과 비정규직이 줄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하여, 위와 같은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을 보도하고 있는, 그리고 물론 그 주장을 어느 누구 못지않게 강하게 지지하고 있는 바로 그 신문이, 다른 때도 아닌 바로 그 같은 날 신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글 전체의 분량에 비해서도 지나치게 길지만, 기사 전체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기업은 성장해도 일자리가 없다

제조업 생산 年8.4% 늘어도 취업 15만 줄어

설비 자동화 등 영향… 고용 창출 쉽지않아


충남 서산의 대산산업단지에 있는 삼성토탈 공장. 간척지를 포함한 330만㎡ 부지에 조성돼, 에틸렌·프로필렌 등 석유화학 기초 소재를 생산해 낸다.

지난 2001년 이후 이 공장의 성장 속도는 눈부시다. 연간 생산량은 37%(350만t→480만t) 늘었고, 매출(1조6000억원→3조6000억원)은 2.25배 늘었다. 하지만 공장 직원수는 해마다 줄고 있다. 1800여명이었던 직원은 2001년 구조조정으로 1020명이 됐고 지금은 950명뿐이다. 성장해도 고용은 그만큼 늘지 않는다는 ‘고용 없는 성장’조차 지나간 말이 됐다. 이젠 경제가 성장할수록 고용은 줄어드는 ‘고용 죽이는 성장’ 시대가 현실화되고 있다. 제조업이 설비 자동화와 해외 아웃소싱(업무 외부위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취업자 중 제조업 종사 비중이 17.5%에 불과하다. 제조업 취업자 비중은 1989년 27.8%로 최고점에 달했다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제조업이 불황이어서가 아니다. 최근 3년간 제조업 생산은 연 평균 8.4% 증가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제조업 취업자는 15만명 줄었다.

김종일 동국대 교수(경제학)는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제조업 취업자 비중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한국은 감소 속도가 너무 빠르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가는 사이에 제조업 고용 비중은 0.4%포인트(23.3%→22.9%) 줄었다. 반면 한국은 1만 달러(1995년)에서 2만 달러(2007년) 사이 제조업 고용비중이 6%포인트(23.5%→17.5%) 줄었다.

경제성장률을 7%로 끌어올려 매년 60만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새 정부의 구상도 벽에 부딪혔다. 김정운 기획재정부 인력정책과장은 “과거 개발경제 시대에는 경제가 1% 성장하면 일자리가 9만개 늘어났지만, 요즘은 6만개 늘어나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했다. 이 계산대로라면 경제가 7% 성장해도 일자리는 연 42만개 만들어지는 데 그친다.

송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제조업 투자가 더 이상 예전만큼 고용을 창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7)


“성장해도 고용은 그만큼 늘지 않는다는 ‘고용 없는 성장’조차 지나간 말이 됐다. 이젠 경제가 성장할수록 고용은 줄어드는 ‘고용 죽이는 성장’ 시대가 현실화되고 있다. 제조업이 설비 자동화와 해외 아웃소싱(업무 외부위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 바로 그대로다!

그리하여, “과거 개발경제 시대에는 경제가 1% 성장하면 일자리가 9만개 늘어났지만, 요즘은 6만개 늘어나는 것이 고작”이라는 기획재정부 인력정책과장의 말도, 그에 기초하여 “이 계산대로라면 경제가 7% 성장해도 일자리는 연 42만개 만들어지는 데 그친다”는 기자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사물의 한 측면만을 본 일면적인 주장일 뿐이다. 이는 그 기사에 같이 제시한 ‘한국은행․통계청’의 다음과 같은 통계도 입증하고 있다.

                   생산은 늘어도 고용은 감소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제조업 생산 증가율(%)

 10.5

  6.2

 10.5

  8.4

제조업 취업자 증가율(%)

  2.0

 -1.3

 -1.6

 -1.1

취업자 중 제조업 고용비율(%)

 19

 18.5

 18

 17.5


이는 물론 단발성 기사도 아니고, 한국 자본주의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발달한 현대 자본주의 일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독점자본의 전투적인 옹호자인 역시 ��조선일보��의 다른 기사를 부분적으로 인용하자면, 이렇다.


사실 인구 고령화는 국가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이지만, 많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져 왔다. 고령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은퇴를 하면 기업들이 그만큼 직원들을 새로 뽑아야 하기 때문에 취업난이 크게 풀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다...

왜 노동력의 고령화가 새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공장자동화의 확산이다. 기업들이 10여 년 전부터 컴퓨터와 자동화 기계 등 IT(정보기술) 투자를 대폭 확대하면서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산업현장에서 자동차나 배를 만들 때 로봇이 용접 일을 맡고, 재고 창고에서 부품을 실어 나르는 일도 무인 운반기계가 하고 있다. 특히 공장에서 사람의 일손을 점차 대체해가는 로봇의 발전은 눈부시다. ...

공장자동화는 생산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기업들은 노동자를 예전처럼 많이 고용하지 않고도 더 많은 생산을 이뤄내고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1997년 5만8000명의 직원으로 18조50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지난해 8만7000명의 직원으로 무려 63조1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지난 10년간 직원 수는 50% 늘어나는데 그쳤으나, 매출은 200% 이상 증가한 것이다. LG전자도 지난 10년 사이에 직원 수는 20% 증가한 데 비해 매출은 170% 증가하는 급속한 생산성 향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공장 자동화가 제조공장에서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없애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과 EU(유럽연합)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제조업 일자리가 매년 20만-40만개씩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20-30년 후면 현재 제조업 일자리의 90%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앞으로 블루칼라뿐만 아니라 화이트칼라 일자리도 급속히 감소할 것”이라는 진단까지 내놓고 있다. 리프킨의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추세가 날로 뚜렷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장 자동화가 블루칼라 노동자의 일자리를 줄여가고 있다고 한다면, 기업들이 수시로 실시하는 구조조정과 경영 혁신은 화이트칼라, 특히 중간관리직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있다. 구조조정의 목적은 물론 인건비 절감을 통한 수익 창출에 있다.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구별이 없으며, 또 금융업과 제조업 등 업종의 차이도 없다. ...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진전도 일자리의 창출을 어렵게 하고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대기업들은 요즘 전체 매출의 60-80%를 해외에서 올릴 정도로 시장이 국제화되어 있다. 그에 따라 대기업들은 선진국들의 무역장벽을 뚫기 위해 현지 생산 비율을 빠르게 늘려나가고 있으며, 강성노조의 파업을 피하기 위한 공장 해외 이전도 계속 이뤄지고 있다.8)


이것이 현재 전개되고 있는 사태의 진실이다. 그리고 다른 신문도 아니고 ��조선일보��가 그것을 대서특필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저들은 그러한 사태, 그러한 상황을 번연히 알면서도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바로 “국민을”, 즉 자본을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지금 이명박 정부 하에서 노동자․민중이 맞고 있는 상황은 그 기본적 혹은 근본적인 성격․방향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나 사태는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적 노선, 역할․기능이고, 특히 김영삼 정부 시절에 본격화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의해서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책, 현상,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 이명박 정부 하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과 사태는 동시에 이전과는 판이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그들이 독점자본의, 그 이해의 노골적이고 전투적인 대변자라는 점에서 그렇고, 그러한 그들이 10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고, 그들의 의지를 노골화할 수 있게 된 저간의 상황의 전개가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의 전개 중에서도 노동자계급은 지난 10년 동안 노동조합 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이 크게 약화되고 정치적․이념적으로 크게 후퇴했다는 점, 그 때문에 저들의 집권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지의 노골화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새로운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과거 1980년대까지의 민주노조운동,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체현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사실상 그것이 성립하면서부터 제도권 속에 안주해가더니, 지난 10년 동안에는 그간에 획득한 작은 경제적․조직적 성과에 만족하면서 그러한 경향이 특히 강화되었다. 여러 거대 노조들이 어떤 것은 노골적으로 어떤 것은 사실상 어용노조화해 갔을 뿐 아니라, 아직 자주성․민주성을 잃지 않고 있는 노조들조차 투쟁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투쟁은 조직화되지 못하거나 조직력이 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사실상 내맡겨져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저들의 집권을 허용하고 저들이 그 의도를 노골화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요인이다.

민주노총운동, 민주노총의 약체화는 물론 그 자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약체화는, 변혁적이고 위력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의 부재, 그러한 조직 형성의 실패, 그리하여 개량적․사민주의적이며 소부르주아적인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대중 속에 광범하게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상징하고 대표하게 된 상황, 그리하여 마침내는 노골적으로 사민주의를 내걸고 있는 이른바 ‘진보신당’까지 득세하게 된, 노동자계급의 그러한 정치상황, 그러한 정치적 혼란과 함께 나란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그러한 혼란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누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인가?

그 주체는 당연히 노동자 대중이다. 그러나 또 당연히 어떤 선도주체의 선도적이고 헌신적인 타개 노력이 없이는 노동자 대중이 저절로 설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선도주체는 당연히 노동자 대중 속에 널리 흩어져 있는, 노동운동의 선진 활동가들일 수밖에 없다. 이들 활동가들이 정치상황의 변화를 명확히 인식하고 심기일전하여, 한편에서는 정세가 요구하는 대정부․대자본 투쟁을 헌신적으로 조직․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정치적․이념적 발전을 위한, 변혁적 정치조직을 획득해내기 위한 논쟁, 내부의 정치투쟁을 철저하고 치열하게 벌여야 하고, 그 성과를 조직해가야 한다.

내부의 정치투쟁에 대해서 우선 간단히 얘기하자면, 어느 것이 과연 노동자계급의 변혁적인 정치적 이념이고, 과학이며, 그것을 체현한 정치조직인가 하는 것은 논쟁, 내부 투쟁이 전개되면서 입증되고 또 공고화돼 가고 확립되어 갈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어느 것이 그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만 그러한 작업을 전개하는 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 점만 얘기하고 싶은데, 그 하나는 조직노선에서의, 그리고 정치노선에서의 청산주의를 명확히 지적․비판하면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합법적 정치공간을 거부․기피해서도 안 되고, 합법적 개량을 거부․기피해서도 안 되지만, 합법 여부를 묻지 않는 공간의 주체, 그러한 정치적․전략전술적 노선을 경시하고 백안시하는 청산주의의 도달점이 바로 저 노골적 사민주의의 ‘진보신당’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청산주의, 특히 정치적 청산주의는 우측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여러 형태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 무정부주의, 특히 너무나 좌로 달려간 나머지 20세기의 사회주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극우의 그것과 맞닿아 있는 극좌적 청산주의, 자신들 주관에서는 코뮌주의일지도 모르고 맑스-레닌주의일지도 모르지만 실제 객관적으로는 반공주의인 극좌적 지식인들과야말로 치열한 정치적 투쟁이 요구될 것이다.

다음엔 패거리주의에 대한 경계이다. 평소에는, 그리고 조직 밖의 일에 대해서는 원칙을 얘기하고 변혁을 얘기하면서도 자신들 조직 내의 문제가 되면 소위 ‘인화․단결’이라는 이유에서든, ‘다양성’이라는 미명에서든, 자신들이 얘기하던 원칙을, 나아가 지난 ‘탄핵정국’에서의 경험처럼 심지어 특정 정세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 자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패거리주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과 인텔리 활동가들 사이에 만연한 그러한 소부르주아적 악습을 경계하고 청산하지 않고는 힘 있는 노동자 정치조직을 결코 획득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권위도, 특히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론적’ 권위, ‘이론적 진위’도 철저한 검증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주노총이,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 오늘날처럼 약화되고 정치적․이념적 혼돈에 빠진 데에는 저들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역할,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동안 민주노총은 물론 노동자 정치운동도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론적 진위’를 검증․비판하는 대신에 그들의 알량한 ‘이론적’ 권위에, 결국은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자신들의 정책, 그 정치적 색채를 내맡겨왔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야 본래 그러한 사람들, 그러한 경향의 집합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그 동안 민주노총이나 그 산하 연맹, 노조들이 어떤 색깔의 어떤 사람들, 어떤 지식인들을 정책위원, 정책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어떤 성격의 정책들을 내왔던가를 비판적으로 되돌아 볼 일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하는 선진 활동가들은 그러한 정책 활동, 이데올로기 작업을 강단의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내맡길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무책임을 범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스스로 감당해가야 한다. 운동과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한편, 지금 이명박 정권 하에서 요구되는 대(對) 자본 정세 관련 투쟁은 보다 다른 차원에서 보다 다른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본 대(對) 노동이라는 관련에서 노동자계급에게 고유한 투쟁과, 자본 일반을 넘어 독점자본의 정치적 대표자로서의 이명박 정권이나 그 정책에 대한 상대적으로 범(凡)계급․범계층적인 투쟁이 있다.

노동자계급에 고유한 투쟁은 물론 저들의 이른바 “선진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노사관계 선진화 △활력있는 노동시장 △국민을 섬기는 따뜻한 노동행정”과의 투쟁, 즉 임금 억제정책, 비정규직 확대정책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의 투쟁이고, 구조조정 그리고 공기업의 사유화 정책과의 투쟁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투쟁들이지만, 특히 공기업의 사유화 정책과 그를 위한 공기업의 구조조정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 대대적으로 추진될 것이다. 독점자본이 그것을 강력히 원하고 있고, 바로 그들을 그렇게 섬기겠노라고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특히 공공부문의 노동자들, 그 활동가들은 조만간에 가해질 저들의 대대적인 ‘민영화’=사유화 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 형태와 차원의 조직 구성, 조직 정비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광범한 노동자 대중 속에, 그리고 나아가서는 민중 계층 속에 그 ‘민영화’=사유화 정책의 본질과 그것이 가져올 해악 등을 폭로하는 여론화․선전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공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은 저들 독점자본의 기만과 탐욕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그리하여 저들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패배를 안겨줄 수 있는 고리의 하나이다. 한 이유는 이미 예컨대 노무현 정권 후기에 ‘수도 사업의 민영화’가 거론될 정도로 그 사유화 정책이 대대적으로 추진될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것이 광범한 노동자, 광범한 민중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기 때문에 그렇고, 다른 한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거짓 명분으로 포장하여 추진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지하는 것처럼, 공기업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민영화’해야 한다는 것이 저들의 중심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공기업이 아니라 사기업, ‘민영기업’이야말로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특히 경제위기, 경기변동에 취약한가 하는 자료, 그리하여 경제위기, 공황이 닥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기업이 도산하고, 또 얼마나 많은 도산 사기업을 ‘공적자금’이라는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 공기업화하는가 하는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 국민의 부담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기업을 그것이 수익성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거저 먹으려 드는 것이 바로 공기업의 ‘민영화’, 공기업의 사유화라는 사실을 여러 실례를 들면서 대중에게 정확히 상기시켜 주는 것만으로 저들의 철면피한 기만과 탐욕을 폭로할 수 있고, 저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조직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에게 고유한 이러한 투쟁 말고도 이명박 정권은 그 참을 수 없는 탐욕 때문에 FTA 관련 말고도 새로운 범계급적․범계층적인 투쟁들을 강요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투쟁이 이미 대중적으로 조직되고 있다.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투쟁이 그 하나이며, 민간의료보험제의 도입을 둘러싼 투쟁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의료보험제의 개편을 둘러싼 투쟁은, 지금 한쪽에서 진지하게 준비되고 있지만, 아직은 대중적으로는 그 성격․본질이 널리 이해되기 쉽지 않은 투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경제를 살려서 민생을 개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선전에 기초한 대중의 환상은 저들이 저 의료보험제 개편의 문제를 본격화하기 전에 이미 산산이 깨어질 것이고, 그것도 더구나 ‘대운하’를 반대하는 대대적인 투쟁과 더불어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그때쯤에 가면 그 문제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 투쟁도 지금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총선만 지나면 곧바로 본격화할 기세인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투쟁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범계급적․범계층적 투쟁이지만, 재벌․독점자본의 합리화를 꾀하는 참여연대 등의 소부르주아 어릿광대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재벌 개혁’ 투쟁이나 ‘재벌 해체’ 투쟁 같은 반노동자적․반민중적 투쟁이 아니라 민중적 투쟁이고, 더구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독점자본의 정권, 그 탐욕, 그 지배, 그 영향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투쟁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그것이 노동자계급에 고유한 투쟁이 아니라고 해서 오불관언하거나 소극적으로 나설 투쟁이 아니다. 만일 그러한 이유로 오불관언해야 한다거나 단지 소극적으로만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혹시 있다면, 그것은 정치력의 철저한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만일 현재의 기세대로 ‘한반도 대운하’ 공사를 밀어붙이려 들 경우, 사안의 성격상 그것은 이명박 정권과 범민중 간에 건곤일척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투쟁이 거세게 전개될수록 이명박 정부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여력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싸움에서 수세에 몰리고 패배할수록 지배력 일반을, 따라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배력 일반도 상실하고 말 것이다. 1996년 말, 97년 초의 노동자 총파업을 겪고 난 김영삼 정부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말이다.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투쟁, 민간의료보험의 확대 도입, 그 보험의 사유화․귀족화를 위한 의료보험제도의 개악을 반대하는 투쟁 ― 이들 투쟁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이, 따라서 민주노총 등이 다른 민중 계층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투쟁이며, 그 적극적, 그 주도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정치적 위상과 신뢰를 높이는 투쟁이다. <노사과연>


1) 채만수, “민주노동당 강령 비판”, ��진보평론�� 제3호, 2000년 봄, pp. 175-77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 (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 운동의 독자성��, 노사과연, 2008, pp. 117-19) 참조. 현재의 상황에서 말하자면, 이러한 비판은 물론 민주노동당에뿐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신당’에게도, 아니 ‘국민 타령’에 영일(寧日)이 없는 그들에게야말로 더욱더 해당된다. 


2) 장석준, “이제 출발이다 ―민주노동당 강령 논쟁과 우리의 과제―”, ��진보평론�� 제4호, 2000년 여름, pp. 207-08.


3) 구학서(신세계 부회장), “일자리 창출, 기업에 달렸다”, ��조선일보�� 2008. 1. 19.


4) 김성곤 기자, ��아시아경제��(www.newsva.co.kr), 2008. 3. 13.


5) 연합뉴스, “이 대통령, ‘정치적 파업 국민 용납않을 것’”, ��조선일보��, 2008. 3. 14.


6) 물론 사이비 경제과학으로서의 부르주아경제학에 의해서는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실, 그러한 공황의 주기적 필연성을 부인하고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요한 임무의 일부지만 말이다.


7) 김정훈 기자, “기업은 성장해도 일자리가 없다”, ��조선일보��, 2008. 3. 14.


8) 송양민 기자, “공장 자동화·구조조정… 줄어드는 일자리에 실업자 한숨은 계속”, ��조선일보��, 2007.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