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맑스-엥엘스, 레닌 세미나 후기> 세미나와 함께 한 1년 6개월






“휴...”


세미나가 거의 다 끝나간다1)는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숨 가쁘고 힘든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나에게 지난 1년 6개월 동안 진정으로 여유로웠던 날들,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던 날들이 며칠이나 되었냐라고 물어본다면, 난 정말로 단 하루도 없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나마 가장 여유 있게 쉴 수 있었던 몇 시간!은 세미나가 연기된다는 소식을 세미나 당일 날 들었을 때, 원래라면 세미나를 가야하지만 가지 않아도 되는 당일의 저녁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면 다시 다른 세미나 준비에 대한 압박이 밀려온다. 나는 왜 그렇게 무식하게! 세미나에 매달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한편으로 학창 시절 해왔던 ‘운동’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생활 6년 동안 이른바 한총련 ‘혁신’2)계열이라 불리는 곳에서 ‘운동’을 했다. “민중이 투쟁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나가”는 그러한 헌신성!, 대중을 믿고 대중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잘 융화되는 친화력!, 그것이 그 ‘운동’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체계적인 학습은 언제나 당면한 투쟁보다 뒷전이었다. 따라서 정세에 대한 판단은 머리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2003년 겨울이 왔고,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의 절박함을 분신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열사정국’의 고조된 열기는 그해 노동자 대회가 끝나자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급속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느낀! 정세는 패배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노동운동 지도부의 개량주의였고 따라서 중차대한 과제는 노동운동 내의 개량주의를 척결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몸담은 그룹이 ‘국민파’ 노동운동 지도부와 한 몸이 되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기만은 점점 더해갔다. 2004년의 탄핵사태에서 탄핵에 대한 그룹의 입장을 정하는 자리였다. 나는 노동자계급과 아무런 상관없는 그들만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결국 입장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그것은 “좌익소아병” 적인 태도이며 “민중이 투쟁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나가”야 한다고. 그때 나는 우선, 레닌이 “좌익소아병”을 어떤 조건에서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했는지 정확히 몰라서 당황했고 다음으로, 느낌을 논리 정연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어서 답답했으며 마지막으로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그렇게 헌신성과 친화력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던 나의 ‘운동’은 결국 ‘탄핵 반대’의 성과물을 열우당―개혁적 부르주아―에게 안김으로서 박살이 나버렸다.

한번 박살이 나니 계속해서 박살이 났다. 박살이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2004년 12월의 학생회 선거 슬로건을 정하는 자리에서 “강한 나라”라는 슬로건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박살이 났고, 2005년 비슷한 느낌!을 가진 몇몇 동지들과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나는 박살이 났다. 나는 순식간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때의 괴로웠던 어느 날 새벽 나는 생각을 했다. 2년 정도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시간을 가지자. 무식하게 열심히 해보자. 그러면 반드시 유식하게 되리라! 이것이 1년 6개월을 지탱해준 주된 동력 중의 하나이다.


*    *    *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나를 세미나에 붙들어 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미나 횟수가 늘어갈수록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바로 세미나가 주는 유익함이었다.

우선, ��자본론��� 세미나를 통해 얻은 것부터 시작해 보자.

첫째, ��자본론���을 읽기 전까지 나는 자본주의란 단순히 나쁜 것, 폭력적인 것이고 당연히 폐지해야 마땅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과감히 선언은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용기있고 인간적인가?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없애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할 정도로 아파왔다. 나에게 자본주의는 칼을 든 광인이 막춤을 추면서 인간 일반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론���에는 이러한 막춤 뒤에 흐르는 배경음악을, 즉 자본주의에서 우연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현상들을 관통하는 법칙을 냉철한 분석과 역사적인 고찰, 풍부한 사례를 들어 설명해 낸다. ��자본론���에 자주 등장하는 아담 스미스, 리카도, 맬더스, 프루동 등은 현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 그들이 제시한 이론이나 처방은 공문구에 그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 정당이나 언론이 ‘대미 굴욕 외교’니 ‘국민 건강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니 하면서 떠들어 댈 때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치를 위한 생산인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져다 준 참혹한 결과라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임금 노동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상 휩쓸리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진보신당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적 처방,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분배를 개선하는 것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공허한 약속들에 대해 나는 더 이상 휩쓸리지 않는다.

둘째,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태도’3)에 대한 경계심이다. 이것은 ��자본론���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다. 세미나 초반 이것은 강성윤 팀장님이 독특(?!)하게 강조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만사가 대충 대충이었던 나는 세미나가 거의 끝나 갈 때 까지도 이런 지적을 받아왔다. 물론, 지적의 빈도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자부한다. ��자본론���이란 책은 문장 자체가 난해하고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등장해서 오독하기가 굉장히 쉬운 책이다. 곧 대충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자본론���을 정확하게 읽은 것, 이것은 세미나에 참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가장 얻기 힘들고 어려운 - 이것은 1년 6개월간의 장기적인 지도와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 유익함 중의 하나였다.


다음으로, 맑스-엥엘스 세미나를 통해 얻은 것은,

첫째, 맑스와 엥엘스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켰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맑스가 직접 쓴 책을 읽은 것은 ��공산당 선언��� 한 권이 다였다. 그것도 새내기 시절, 단지 가슴에 열정만 가득했을 때 읽었고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으며 단지 제목에 공산당이 들어가니까 맑스가 공산주의에 대해 말을 하였다라고만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늘날 맑스의 저작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맑스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대한 내용이다. 그곳은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은 다들 불가능한 세계라고 이해하며 따라서 맑스의 이론 전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 또한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다. 하지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부터 6권까지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은 극히 적다. 그리고 그 적은 부분에서도 맑스와 엥엘스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이행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 대한 서술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오히려 저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지양이다. 맑스와 엥엘스의 저작은 여타 공상적 사회주의자와는 다르게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둘째, 사람들이 곧잘 하는 생각 “엥엘스는 그저 맑스의 생활비를 지원해주었을 뿐 그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라는 것. 그 생각은 ��맑스-엥겔스 저작선집���1권에 있는 엥엘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의해 무너져 내렸고 결국 ��선집���을 다 읽은 후에는 그 누군가의 말처럼 ‘맑스와 엥엘스는 몸은 둘이고 머리는 하나’라는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

셋째,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말, 학창시절 볼 수 있었던 수많은 개론서를 통해서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던 이 말은 유물론적 역사파악으로 쓰여진 역사서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보나빠르뜨와 브뤼메르 18일���, ��프랑스에서의 내전���과 엥엘스의 ��독일 농민 전쟁���,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등을 통해서 너무나도 쉽고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레닌 세미나가 남아있다.4)

첫째, 레닌이 경제주의자들, 멘세비키들과의 투쟁에서 보여준 노동계급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태도. 경제주의자들과 멘세비키들이 아무리 현란한 말로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레닌은 그들이 쓴 글에서 정말 신기하게도 소부르주아적 본성을 꼭꼭 짚어내었고, 결국 레닌이 비판했던 대로 그들은 실천적으로 부르주아지의 꼬리로서 행동하였고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은 혁명의 교훈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독자성을 잃고 부르주아지의 꼬리로서 행동할 경우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훌륭한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둘째, 레닌의 저작을 읽을 때에 전성식 팀장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던 내용, “레닌의 저작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을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읽었기 때문에 학창시절 혼자 레닌을 읽으며 쌓았던 레닌에 대한 이미지 즉,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유연한 혁명가, 막대를 잘 구부리는 혁명가의 이미지를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레닌은 유연하며, 막대를 잘 구부리는 혁명가가 맞지만, 당시 상황과 조건을 잘 고려해서 읽다보면 그가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훼손하는 전술이나 강령을 제안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만큼 그는 노동자 계급의 이해에서는 완고한 혁명가였던 것이다.

혹시나 오해를 하는 분들이 계실까봐 쓰는 말이지만 앞에서 나열한 세 개의 세미나에서 얻은 유익함은 세미나 중 어느 하나를 분리시켜 완벽하게 하나의 세미나에서 얻은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이 외에도 세 개의 세미나에서 얻은 유익함은 너무나 많지만, 시간관계 상, 그리고 지면관계 상 더 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정말로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미나 전체를 통해서 얻은 교훈이다. 그것은 바로 이론의 중요성이다. 2006년 11월, 2년 정도 체계적인 학습을 하자고 다짐하며 연구소 문을 두드리긴 했지만, 세미나 직전까지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직접적인 ‘실천’이었다. 어쩌면 2년 이라는 시간을 정한 것에서도 ‘학습은 2년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맑스와 엥엘스 그리고 레닌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이 온갖 종류의 그룹들과 논쟁하는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당시에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당시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이론들이 난무한다. 혼란 속에서 정확한 방향을 찾아나가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이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열심히-잘! 공부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더 이상 자본주의는 그저 나쁜 것, 두려운 것, 무서운 것은 아니다. 자본은 점점 집중화, 독점화되어가고 노동계급은 점점 불안함을 강요받는다. 동시에 증대하는 노동계급의 수, 생산력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생산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조직된다. 여기에 선진적 활동가들이 노동자계급운동의 독자성을 고수하면서 전진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분명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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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to


세미나 팀장님과 팀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세미나를 결코 끝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만큼 많은 것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세미나 안팎에서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신 강성윤 팀장님, 바쁜 와중에도 꼼꼼히 책을 읽어오던 JH님, 항상 현실과 연관지어 이야기를 해주셨던 YS님, 풍부한 사례를 들어 명확한 발제를 해오셨던 DY님, 무한 뒤풀이를 선호하시고 뒤풀이에서까지 토론을 주관 하시던 김해인 팀장님, 보기 쉽게 잘 정리된 발제를 해 오시는 발제의 귀재 HS님, 세미나 땐 말이 없고 뒤풀이 땐 말이 많은 SH, 매 페이지마다 꼼꼼하게 강독까지 해주셨던 전성식 팀장님, 차분하고 침착한 발제로 인상 깊은 SE님 모두에게 스페샬 땡쓰를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세미나 한다고 제대로 만나주지도 않는 남자친구 원망하면서 세미나를 말리고자 했으나, 결국 세미나에 말려버린 MH에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노사과연>


1) 이 글은 6월 1일 마지막 ��자본론��� 세미나만을 남겨두고 쓰여졌다.


2) 한총련 혁신그룹은 한총련을 혁신하고자 하는 소수의 그룹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지만, 내가 몸담았던 조직은 1998년 만도기계 파업을 계기로 한총련과 노동자계급과의 부족했던 연대에 대한 반성에서 나타났던 조직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좀 더 크게 보자면 이 그룹의 전반적인 움직임은 한총련 주류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다.


3) 이 말은 내가 강성윤 팀장님의 질문에 답할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4)  레닌 세미나는 2007년 3월, ��무엇을 할 것인가���중간부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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