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운동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머리말


머리말


지금도 집회에 가면 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투쟁 속에 살아 있음을 온 몸으로 느껴보세. 단결만이 살 길이요 노동자가 살 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단결 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철의 노동자’. 이 노래에는 민주노조운동의 힘과 역사, 강령이 모두 담겨 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민주노조운동의 강령, 투쟁으로 이룬 사랑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단결만이 살 길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힘과 전술. 이렇게 민주노조운동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에 이 노래는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이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투쟁력이 와해되고 운동성이 상실되고 노동자계급은 분열에 처하여 자본의 공세에 끊임없이 밀리고 있다. 이명박은 거침없이 공기업의 사유화를 밀어붙이고 있고 자본가들은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대응은 약하기만 하다. 형식적인 집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노동자대중을 단결시킬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끊임없이 밀리고 나서 이제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반동부르주아지의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변혁과 진보의 희망의 담지자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이다. 이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이 위기의 원인을 파헤치고 다시금 변혁의 주체로 나서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오래되었지만 그 원인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대안이 제시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위기라는 말이 관성화되어 있고 이를 해명하려는 진지한 시도조차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해명하고 노동운동의 변혁성을 회복할 전망을 가져오고 노동자계급이 다시금 노동해방 투쟁으로 나서는 길을 밝히는 것은 운동의 위기를 돌파하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1. 노동운동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는 민주노총의 수석부위원장이 뇌물을 수수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노동운동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자본가계급은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이 부패했고 위기에 처해있다고 공격을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민주노조의 상층부가 썩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운동의 건강성을 상실하고 노동운동이 이권운동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소위 민조노조라 불리는 곳의 다수 간부들이 접대부 있는 술집에 간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흉내를 내는 것이다. 운동의 목표를 상실하고 당장의 경제적 이익만 얻으면 된다는 사고가 이러한 부패 현상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현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조운동의 투쟁력과 운동성이 깊이 잠식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요 위기의 본질이다.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 노동법의 개악에 대해서도 변변히 싸움 한번 못하고 밀렸고 지금은 각 개별 사업장 차원의 구조조정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력의 와해, 운동성의 상실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은 실리주의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이름아래, 혹은 투쟁과 교섭의 병행이라는 입에 발린 말로 노동운동의 운동성이 갉아 먹히고 나서 이제는 무장해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성의 상실로 인해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무력했고 그 결과 노동자계급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분할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우연은 아니다. 민주노총의 성립과 출범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바로 민주노총 1기 집행부부터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노동자계급은 피착취계급이고 농민은 탈농정책으로 역시 제대로 국민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에서 대표되는 계급은 자본가계급인데 국민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자본가와 함께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자본가계급이 용인하는 한도 내에서만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세력, 국민파가 집요하게 사회적 합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의 노동운동 노선이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동적이고 어용적인 한국노총과 연대를 주장하여 투쟁력을 잠식했으나 그 결과는 한국노총의 배신과 반동부르주아지의 집결체인 한나라당에 대한 한국노총의 지지였다. 이들 국민파가 노동운동의 다수파를 점하면서 실리주의를 추구한 결과 민조노조운동 전체를 무기력하게 하고 투쟁력을 와해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바로 노동운동 내에 존재하는 부르주아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 노동자계급의 염원인 착취를 폐지하고 노동해방을 달성하겠다는 전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운동이 다시금 변혁의 전망을 찾기 위해서는 이들 실리주의 세력, 개량주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대중적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국민파와 더불어 노동운동의 3파라 불렸던 중앙파와 현장파 또한 현재의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해 무기력하기만 하다. 중앙파는 전노협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름대로 정치력과 전투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파를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파와 타협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중앙파는 노동대중의 건강성을 갉아먹는데 일종의 기여를 한 것이었다. 중앙파가 결집한 민주노동당의 전진그룹은 사회연대전략을 내세웠다. 정규직의 임금을 떼어내 비정규직을 지원하자는 이 전략은 겉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을 막고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노동자계급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의 원인이 대기업정규직에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기업노동자에 대해 노동귀족이라고 공세를 펴는 자본가계급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분열의 원인이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부에 있다는 것으로서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고 현실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올바른 투쟁노선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아직도 진보신당에서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하는데 자신들이 개량주의 세력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이른바 운동권당, 민주노총당, 친북노선을 비판하며 민주노동당에서 독립한 당으로서 스스로 (소)부르주아 정당임을 표방한 것이다. 이들의 갈 길은 전형적으로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의 뒷꽁무니를 좇는 것인데 그러나 이들은 유럽과 남한의 사회구성과 계급관계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민주노조운동에서 나름대로 독자적 세력이었던 현장파는 지금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들은 현장권력 쟁취를 중시하며 상층의 개량주의를 비판했지만 지금은 이들의 조직적 기반인 현장조직 또한 노조집행부 권력 장악을 위한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총체적인 사회변혁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의 이념의 최대치는 전투적 조합주의이다. 이러한 전투적 조합주의는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을 발전시키고 유지시킨 이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이념이 지금은 쇠퇴하고 있는 것이고 노동운동의 위기의 하나의 현상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현장권력 쟁취에 있으며 전투적 조합주의를 되살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기의 원인에 대한 매우 태만한 분석이며 변화된 현실에 적합한 이념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가릴 것 없이 모두 운동성을 상실하고 있는 원인에 대한 총체적 해명이 필요하다. 국민파는 국민과 함께 한다는 운동 노선 자체,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 자체가 운동성의 상실의 원인이고 중앙파는 사회연대전략에서 드러나듯이 개량주의와 타협하고 대안적 이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운동성 상실의 원인이며 현장파는 과거의 전투적 조합주의만 고집하고 현실에서 노조집행부 권력에 매달리면서 사회변혁의 전략을 제출하고 있지 못한 것이 운동성 상실의 원인이다.

그런데 이들 3파에 공통적인 것은 모두 지금의 변화된 현실에 맞는 노동운동의 노선, 사회변혁의 전략을 제출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 전체가, 노동자대중이 운동성을 상실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용해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본가계급의 덫에 빠져서 자신의 해방의 전망을 찾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평화로운 착취를 의미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노동해방의 전망, 사회주의 이념의 제시가 노동운동의 위기를 타개하는 참된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주체적 조건과 더불어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는 올바른 대안이념과 전략의 제시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1980-90년대의 반파쇼 민주화 투쟁 단계를 거쳐 1990년대 후반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하였다. 이 과정은 그러나 혁명적 이행방식이 아니어서 매우 불철저했고 대표적인 파쇼악법인 국가보안법도 그대로 살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외양을 띠었고 이에 따라 우리 사회의 변혁 단계는 민주변혁을 지나 사회주의 변혁단계로 변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올바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침체에 빠졌고 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변혁 단계에 걸맞는 올바른 노동운동의 노선이 제시될 때만 노동운동의 위기극복이 가능하고 나아가 노동해방투쟁으로 전진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운동 자체가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사회주의 이념, 노동해방의 이념으로 전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 1987년 대투쟁으로 전면화한 민주노조운동은 그동안 노동자의 최소한 경제적 지위의 향상, 주체역량의 강화, 조직의 강화, 나아가 민주주의 투쟁에 기여 등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 이념에 머물 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덫을 넘어설 수 없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계급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피억압계급을 이끌고 억압과 착취를 폐지하여 노동해방 세상, 인간해방 세상을 쟁취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체는 노동자계급이라는 자각이 없이 노동자계급의 운동성은 살아날 수 없는 변혁의 단계, 즉, 사회주의 변혁의 단계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운동성이 살아나고 사회가 진보의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자체가 민주노조운동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민주노조운동에서도 노동해방을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즉자적인 것이었고 과학적으로 정립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과학적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하여 해방된 세상을 향한 자신의 전략노선을 가져야 한다.



2. 노동운동의 강령정립을 위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결투쟁이라는 무기,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요구, 투쟁으로 이룬 사랑이라는 역사를 계승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요구와 내용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과학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노동운동의 강령을 사회주의 변혁의 단계에 맞게 재정립하는 것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엄격히 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다운 생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착취를 전제하고, 착취제도를 전제하고서 어떻게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자본가계급의 타도, 사적 소유의 철폐를 통하여 착취 자체를 전면 폐지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는 앞으로 변혁에서는 소유의 변경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바로 그 소유 때문에, 사적 소유제도 때문에 이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이 피착취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소유의 변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착취의 폐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만악의 근원인 사적 소유 자체를 철폐하고 전인민의 공동소유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서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는 이제는 노동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주장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새로운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노동해방을 넘어선 인간해방이라는 것은 유물론적 접근이 아니다.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해 관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주장은 불가능하다. 이 사회는 계급사회이고 그 억압과 착취가 노동자계급에 집중되고 있다. 자본가의 편에서 부가 축적될 때 노동자의 측에서는 빈곤과 억압이 축적된다. 따라서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고 현실적인 표현이다. 노동해방없이 인간해방을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노동해방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노동해방은 착취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착취를 행하는 주체는 자본가이고 자본가는 자본의 인격적 표현이다. 그런데 자본은 단지 과거의 노동의 축적일 뿐이다. 과거의 노동이 산 노동 즉,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할 때 자본주의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 과거의 노동이 산 노동의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산 노동, 즉, 노동자가 과거의 노동의 우위에 설 때 과거의 노동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라 산 노동 즉, 노동자를 위한 단순한 물적 조건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생산수단을 전 인민의 소유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사적 소유가 폐지될 때 산 노동이 과거의 노동의 우위에 서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해방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인간해방을 위해서도 노동해방은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된다. 노동자는 전 인민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에 변혁의 목표는 노동해방에 집중되어야 한다.

한편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의 철저한 완성을 자신의 강령으로 해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철저한 실현이 노동자계급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체적 조건이외에 우리사회의 (부르주아)민주주의로 이행이 매우 불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조건과 관련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주인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민중이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전적 정의를 보더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장 문 앞에서 민주주의가 멈춘다는 말이 있다. 이는 노동자가 자본에 예속된 상태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기만임을 뜻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를 확대하여 자본의 예속을 타파하는 민주주의로 전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은 전 민중의 전위투사이다. 전 민중을 위한 민주주의 실현에 적극 나설 때 노동자계급은 스스로의 해방도 앞당길 수 있다. 이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각종의 민주주의적 과제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실현할 조건을 마련하고 힘으로 강제하기 위해 민중권력 쟁취를 주장해야 한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자신의 강령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협소한 민족적 관점을 버리고 국제주의 관점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정치적 등장을 선언했던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마지막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 외침은 공산당 선언의 실천강령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살아 있을 때 운동은 전진했고 세계역사는 진보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파탄되었을 때 역사는 진보를 멈추었던 것이다. 또한 이념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자본가계급이 소위 ‘세계화’라는 것으로 공세를 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착취를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이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이념적, 정치적 무기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다.



3. 현장권력, 현장조직에 대하여


그간 민주노조운동을 지탱해온 것은 선진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의 전투성과 헌신성이 개량주의 세력의 횡행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민주노조운동을 유지하게 한 것이었다. 선진노동자들의 상당수는 공장과 사업장에서의 현장조직으로 묶여 있다. 이들의 바람을 대변하여 현장파는 그동안 현장권력 쟁취를 강조해 왔다. 여기서 현장권력 쟁취라는 구호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자본주의하에서 현장권력이 가능한가?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현장권력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현장권력은 혁명의 기초조직이 되기라도 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최소한이라도 답변을 해야 선진노동자들의 의식의 혼란을 막을 수 있고 나아가 과학적인 조직노선의 수립에 기여할 수 있다.

현장조직은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것은 노동조합과 더불어 운동의 민주성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장조직이 지금은 노조집행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에 따라 선진노동자의 운동성이 사라지고 있다. 현장파도 대안적 이념이 없는 상태에서 실리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제 현장조직들은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목표가 집행부권력인지 아니면 노동해방인지, 만약 노동해방이라면 그것을 위한 정치적, 이념적, 조직적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는 현장권력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현장권력은 사실 조금 더 좋은 경제적 조건을 따내고 노동조합과 대중의 활동의 자유를 넓히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현장권력이라는 것은 혁명기에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 권력체, 예를 들면 러시아 혁명에서 공장위원회와 쏘비에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생산을 통제하고 밑으로부터 노동자대중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장권력이라는 구호는 이러한 혁명기의 노동자들의 자주적 권력체와 거리가 멀다. 따라서 선진노동자들은 현장권력이라는 구호를 발전, 분화시켜서 노동해방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해야 한다. 노동해방을 위한 전위조직의 건설, 그리고 노동조합과 현장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서 공장과 노조를 사회주의의 학교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장조직들은 민주노조운동을 넘어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분화, 발전시켜야 한다. 즉, 노동해방의 이념과 전략을 발전시킬 전위조직의 건설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 등 노동자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활동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현장 조직은 그 자체로 노동해방의 추진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전위조직과 대중조직으로 분화되는 것을 통해 현장조직들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회운동노조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데 한편으로 노동운동의 위기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그에 대한 대안이념이 모색되고 있는데 그 하나로서 제출되고 있는 것이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는 생소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기존의 운동의 위기에 대해 하나의 대안이념으로 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무엇인지 그 실체는 모호하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진보연대가 주로 입장을 개진해 왔었는데 최근에 진보신당의 정책위원장으로 있는 노중기 교수가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대안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등의 자주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에 감명을 받은 서구의 학자들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운동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를 역수입하여 우리사회에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것도 서구의 이념적 꼬리표를 달아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그 내용이 모호하기 짝이 없다.

노중기 교수에 따르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개념은 크게 네 가지이다. 그것은 민주성, 자주성, 연대성, 변혁성이다1). 이들 이념은 겉보기에는 몹시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노중기 교수가 정리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의 연대성은 계급내적 연대성과 계급외적 연대성으로 나뉘어지는데 계급외적 연대성은 시민운동과의 연대를 지칭하고 있다. 시민운동과의 연대를 중간계급과의 연대라고 하는 것이다2). 그러나 이는 문제이다. 시민운동 세력은 그 출발부터 노동자운동에 적대하면서 생겨났다. 경실련이 그러했고 참여연대 또한 민중운동을 이념적으로 대체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소부르주아 우파 세력으로서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무력화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이들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은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노동자계급 내에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도입하려 하는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이들이 말하는 변혁성이라는 것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목표라는 추상으로 전락하고 있고 현실 규정력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3).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노조운동을 서구학자가 개념화한 것이 사회운동 노조주의라고 하지만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변혁 단계가 사회주의 변혁단계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사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운동노조주의는 레닌주의를 배척하는 흐름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4).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적 노동조합을 레닌주의적 노동조합이라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면서 사회운동을 하는 노동조합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말로는 사회운동을 말하면서도 실은 20세기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고 청산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과연 20세기를 규정했던 레닌주의를 부정하고 사회변혁적인 노동운동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사회운동은 과학적 노선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온갖 소부르주아적 요소가 결합된 잡탕의 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증법에서 지양이라고 하는 개념은 과거의 것을 부정하지만 그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이 변증법적 부정이고 지양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한국, 남아프리카, 브라질 등의 노동운동을 개념화했다고 내세우면서 실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청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노동운동은 20세기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노동운동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세계는 논리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규정 하에서 굴러가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일체의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싸우면서 자신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정립해가야 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기도 두려워하면서 사회운동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전망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이다. 단결투쟁이라는 무기,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염원, 노동운동의 역사 자체를 계승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를 담지하면서도 지금의 사회주의 변혁 단계에 걸맞게 자신의 강령을 정교하게 해야한다.

현재의 노동운동의 위기상황을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모두 해결하거나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민주노조운동 자체가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시기에 처했음을 말한다. 이는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전면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금 노동해방의 깃발을 올릴 뿐 아니라 그것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일체의 개량주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싸움을 하고 밑으로부터 투쟁을 옹호해야 한다. 사회주의 변혁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레닌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변혁에는 의식적 선진부대, 전위들이 결집한 전위조직의 존재가 필수이다. 한편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위조직의 건설, 나아가 사회주의 전위당의 건설투쟁을 힘차게 벌여야 한다. 그럴 때만이 현재의 노동운동의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있고 새로운 해방세상의 건설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노사과연>


1) 노중기,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후타니마스, p. 477-478.


2) 앞의 책, p. 421, 477.


3) 앞의 책, p. 478.


4) 앞의 책, p. 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