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ㆍ농민ㆍ농촌 문제에 대하여

농업ㆍ농민ㆍ농촌 문제에 대하여

머리말


한미 FTA협상이 마무리 되고 그것의 체결을 위한 미국의 전제조건인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제기된 배경이 바로 한미 FTA인데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미약한 실정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한미 FTA가 농업말살정책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한미 FTA는 미국의 시장과 한국의 농업을 바꿔치기하는 것으로서 농민들에게는 천근만근 삶의 조건을 내리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작년의 한미 FTA싸움이 패배로 끝나고 나서는 농업문제에 대한 이렇다할 제기가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진영, 사회주의 진영도 농민문제에 대해 이렇다할 투쟁목표, 분석 등을 제기하고 있지 못하다. 농업은 자본주의 하에서 어차피 몰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거나 혹은 그것이 경제법칙이라거나 하는 제기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농민은 사회주의 변혁의 주요 동맹자라는 점에서 농민의 이해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고, 동맹자를 발견하고 동맹의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농업은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산업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아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폐지라는 목표에서 보았을 때 농업과 공업의 결합, 농공복합체의 건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활적이라는 점에서 농업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농민은 천대받는 계층이 되고 있다. 자본가계급 정확히 말하면 독점자본가계급은 농민을 노동력의 제공자, 수탈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농업 자체를 발전시킨다는 관념과 정책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고, 이에 따라 농업ㆍ농민ㆍ농촌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지금의 농민들의 고령을 고려할 때 농업이 사라지는 것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농업ㆍ농민ㆍ농촌은 버려진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삼농(三農)문제라 일컬어지는 농업ㆍ농민ㆍ농촌 문제는 사회의 유지와 발전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변혁의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할 과제이다. 그리고 농민들 또한 사회주의 변혁에 동참함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



1. 농업과 농민의 현실


지금 농업ㆍ농민ㆍ농촌의 현실은 참담하다. 그동안 농업의 최후의 보루였던 쌀산업도 개방되어 10년이 지나면 쌀산업이 고사할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한칠레 FTA의 영향으로 폐농이 된 농가가 1만호가 넘는다. 만약 한미 FTA의 국회비준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많은 농가들이 폐가가 될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지금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부터 줄곧 이어져온 경향의 집약이다.

한국에서 농민수는 1994년의 520만에서 2005년 340만명으로 줄었고, 농가부채는 1994년 7백 80만원에서 2005년 2천 7백만원으로 늘었다. 그리고 농민의 연령을 보면 2005년 현재 60세 이상이 58.3%를 차지한다1). 그리고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은 1970년 23.3%에서 2001년 4.4%로 급격히 저하했다2). 이러한 수치는 농업이 우리사회에서 버려진 산업으로, 농민이 우리사회에서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때만 되면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겠다는 후보자들의 공약은 입에 발린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농가의 30대 남자의 51.3%가 미혼인 상태이다. 이는 농업과 농촌의 현실이 농민들의 최소한의 자연적 현상인 결혼조차 못하게 하는 현실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전망은 자본가계급의 측에서도 농민운동의 진영에서도 좀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자본가계급은 농업과 농민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파악하지 농업을 산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들은 개방농정이라는 이름 하에 외국산 농산물을 수입하여 농산물의 저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변혁운동의 성장과 함께 변혁적 운동으로 성장했던 농민운동 진영은 지금은 그러한 변혁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뚜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농민운동은 자본주의하에서 농업이 시장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고 있으나 이는 진정 꿈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변혁없이 농업과 농민이 시장지배력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농민운동이 개량주의 세력과 절연하고 있지 못한 것의 결과이다.



2. 농업문제의 쟁점들


1980년대 농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농민들의 요구와 과제가 많이 제출되었으나 그 후 현실화된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농업과 농민은 ’80년대 이후 가속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온 것이 현실이다. 극소수의 부농만 살아남고 대다수의 빈농과 중농은 고통스럽게 몰락의 길을 걸어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시빈민으로 전락해온 것이 현실이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농업의 발전을 외치고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정책은 있었으나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대단히 미약했다는 것이고, 역대 정권의 농업정책은 시장개방을 제외하고는 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농민운동의 변혁적 진출에 놀란 자본가계급은 농민운동, 나아가 농민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농업에서 부농, 기업농의 창출정책을 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남한의 자본축적 구조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른바 수출주도의 경제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외시장의 확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해외 시장을 확대시키는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대한 자본주의적 농업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국내의 시장을 끊임없이 개방해온 것도 농업의 몰락의 큰 요인이다. 이러한 농업의 몰락의 결과,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부진의 결과 농업에서 농민층의 분해는 일어나지만 부농과 기업농의 발전은 미약했고, 그에 따라 농업노동자의 창출도 대단히 미약했고, 농민계층에서 농업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국사회에서 농민의 대다수는 빈곤한 소농이고 부농, 기업농과 농업노동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한국의 농업체제는 여전히 소농중심의 체제이다. 이는 1950년대에 토지개혁으로 창출된 소농체제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본가계급과 정권이 농업의 육성을 말하지만 그들의 본심은 소농체제의 유지라는 것을 말한다.

사실 농업에서 소농체제는 자본가계급에게는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이들 소농은 노동력의 공급처로 역할했고 또 소농생산에서 필연적으로 낮은 농산물의 가격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하는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소농체제는 농산물의 가격을 필연적으로 낮춘다. 소농들은 토지가격을 생산물 가격에 반영할 수 없고, 또 자본가적 이윤이 없어도 심지어는 자신의 임금에 못미치는 생산물 가격하에서도 농사이외에는 업이 없기 때문에 매우 낮은 농산물 가격하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역으로 이러한 농민이 많을수록 농산물가격은 공급이 수요를 앞질러서 더욱 가격이 낮아진다. 이에 대해 맑스는 소농생산의 한계를 고전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소규모 토지소유 농민으로 하여금 경작을 중단하도록 하는 한계는 그를 소규모 자본가로 보는 한에서는 평균이윤이 아니며 그를 토지소유자로 보는 한에서는 지대의 필요가 아니다. 소규모 자본가로서 그에게 절대적인 한계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적인 비용을 공제한 후 자기자신에게 지불하는 임금이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물의 가격이 그에게 이 임금을 보상하는 한 그는 토지를 경작하며, 때때로 생산물의 가격이 육체적 최저수준의 임금만 보상하는 경우에도 토지를 경작한다3)


남한의 독점자본가계급이 이렇게 소농체제를 온존시킨 것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농 혹은 기업농의 육성은 농민운동과 농민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필요가 강했을 때만 등장하는 것이었고, 농민운동의 힘이 미약해지고 개량화되면서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동력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50년대 토지개혁이후 수십년간 한국 농업의 기본체제는 소농체제가 된 것이었다. 지금 농민 1인당 경지면적은 1.2ha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소농체제를 타파하고 농민해방의 길을 여는 것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변혁의 과정에서 농업의 협동화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앞으로도 소농체제가 유지되는 한 한국에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질곡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고 농민해방은 요원하다. 그리고 농민들은 비용가격에도 미달하는 가격으로도 농산물을 생산할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농민이 빈농으로 전락하는 것이 필연적이고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농업노동자계급의 형성은 저지된다.

이러한 농업에서 생산력의 정체,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미발달을 보여주는 것이 재생소작제이다. 1950년대 토지개혁이후 소농체제가 성립하고 이후 농민분해가 가속화되면서 다시 농업에서 지주-소작관계가 광범하게 성립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탈농한 농민들의 농지는 남아있는 농민들에 의해 소작으로 경영되는 사례가 많다. 농업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소작제가 재생되는 현실인 것이다. 이 재생소작제의 성격에 대해 1980년대 논쟁이 활발했다. 재생소작제는 자본주의적 성격인가 아니면 반(半)봉건적 성격인가인데 재생소작제는 농민이 생산한 잉여가치가 이윤의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지대로 실현된다는 점에서 반봉건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4). 그리고 이러한 재생소작제의 소작료가 고율인 것은 재생소작제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둘러쌓여 있어 지주들의 교환가치에 대한 욕망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재생소작제는 우리 사회가 식민지 반봉건사회라는 주장의 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농업생산력의 정체, 질곡을 보여주는 특수성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올바르다.

이러한 한국농업의 특수성,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미발달과 생산력의 정체로 인해 농민층은 분해되지만 그들이 농업노동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탈농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농민층의 계층구성에서 농업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하다. 이러한 상황은 농촌에서 사회주의 변혁의 기본주체가 되는 농업프롤레타리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변혁의 기본동력과 동맹의 문제에 대해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정확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농민층 가운데 부농의 비중은 미미한 실정이다. 부농층은 원예와 축산농가 중에서 일부 존재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쌀개방이 문제되면서 정부는 6ha 이상의 쌀전업농 7만호를 육성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쌀농사를 통해 부농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될 지는 미지수이다. 이것이 실현되면 농업에서 혁명의 저지를 위한 계층이 성립될 수 있는데 이러한 방침은 사실 쌀개방에 대한 농민의 불만과 분노를 무마하기 위한 생색내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중농층은 지속적으로 몰락하고 있다. 종자, 비료, 농약 등 생산수단의 가격은 높고 생산물가격은 매우 낮은 구조가 지속되면서 자가노동력으로 어느 정도 생계비를 벌 수 있는 이들 중농층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농가부채가 호당 2000만원이 넘는 현실은 이들이 사실은 빚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계층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농민의 대다수는 빈곤한 소농이다. 즉, 빈농이다. 빈농은 자기경작지가 일부 있으나 소작을 많이하고 또 빈농의 상당수는 품을 팔거나 농업이외의 영역에 고용되어 생계비를 보충한다. 이들 빈농은 사회주의 변혁의 기본적인 동맹세력이 될 수 있다. 남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몰락해가는 세력을 이들이 대변하는 것이다. 빈농들은 지금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아무런 이익을 볼 수 없고 반대로 독점자본의 농업지배로 인해 피해를 입는 계층이다. 이들에게 토지개혁, 농업의 협동화 등의 전망이 주어진다면 이들은 사회주의 변혁에 기꺼이 동참할 세력이다. 농민해방은 바로 빈농의 해방을 말하고 그 해방의 길은 농업의 협동화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민을 해방하고 농업을 재건하는 길은 농업의 협동화라는 사회주의적 길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농업의 협동화에 참여할 수 있는 세력은 빈농과 중농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농의 경우 농업의 협동화가 자신의 이윤의 기반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협동화에 반대세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부농의 존재는 매우 미미한 실정이고 빈농이 올바로 조직된다면 사회주의 변혁의 과정에서 농업의 협동화를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농민이 해방되는 길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폐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도시들은 농촌을 수탈하는 대가로 유지된다. 이것이 도시와 농촌이 대립하는 근본이유이다. 농민들이 ‘도시사람들’이라고 특정해서 자신과 도시사람을 구분하는 데에는 이런 반감이 스며있는 것이다. 특히 거대도시들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소비한다. 이러한 도시들은 사회주의 변혁의 과정에서 소멸되어야 하고 또 소멸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고전적으로 정식화한 바 있다.


‘가능한 한 인구를 전국에 평균적으로 분산시킴으로써 공업생산과 농업생산을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그를 위해 필요한 교통수단을 확장시킴으로써만 ―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폐지가 전제로 된다 ― 농촌주민이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는 방식으로 그날 그날을 살아온 고립과 우매라는 환경에서 그들을 끌어낼 수 있다. 인간의 역사가 형성해온 쇠사슬로부터 인간의 해방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폐지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니다’5)


소부르주아적 관점에서는 소유의 평등을 강조한다. 특히 프루동의 경우 그러한 입장의 전형이다. 그러나 소유의 평등은 소생산 특히 농업에서 소농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고 발달한 생산력에 걸맞는 생산관계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공업에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전인민적 소유가 확립됨과 아울러 농업과 농촌에서 협동적 소유가 창출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영구히 폐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건설되는 것이다.



3. 한국농업의 특수성에 대하여


한국농업의 특수성을 해명하기 전에 먼저 한국농업의 보편성을 파악해야 한다. 즉, 한국의 농업과 농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은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농민분해가 이루어지고, 농민이 대거 임금노동자로 전화되는 상황은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다. 또한 공업과 농업의 불균등발전이라는 법칙 또한 한국에서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다. 그에 따라 공업과 농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차이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 하에서 농업에 대한 고유한 법칙이 한국의 농업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성의 문제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서 한국농업의 특수성을 해명할 때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강령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한국의 농업정책은 탈농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 즉,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을 버려두고 단지 농민이 혁명의 길로 나서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업으로부터 공업에 대해 대규모로 노동력을 공급받고 소농체제를 유지하여 농산물 가격을 낮게 하는 것이 기존의 농업정책의 본질이었다. 이러한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미발전, 농업에서 생산력의 정체는 이른바 재생소작제의 존재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의 경우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대외적 종속성으로 인하여 시장개방으로 인한 농민 몰락의 가속화가 첨가된다. 이러한 탈농정책을 보여주는 지표가 식량자급율인데 식량자급율은 1990년 43.1%에서 2006년 25.3%로 낮아졌다6). 이는 농업을 버려두는 데서 더 나아가 시장개방을 통해 농업을 몰락시키는 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본가계급이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겠다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거나 생색내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국농업의 특수성의 해명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주의 변혁의 동력과 동맹, 나아가 농업강령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에서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미발달, 농업생산력의 정체로 인해 농업노동자계급이 미미한 현실은 농지를 포함한 사회전반의 토지국유화에 입각한 농업의 협동화의 길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농업의 특수성을 해명하기 보다 보편성의 해명에 머물고 그러한 보편성을 특수성으로 잘못 이해하는 주장이 있다. 김두한 씨는 소농의 몰락과 분해, 그리고 대농의 출현을 자본주의의 필연적 법칙으로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


요컨대 이 소자영농계급은 생산력의 발전을 배제하며,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몰락해가는 계급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대다수 소자영농민의 몰락에 수반하여 소수대농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대농들 중 일부는 타 노동력을 고용하는 자본주의적 농업으로 이행한다. 즉 대다수 소자영농의 전반적 몰락과 극소수 대농으로의 분화과정은 동시에 진행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이 초래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다7).


이러한 서술은 자본주의의 법칙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올바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자본주의 법칙의 관철의 결과 농업노동자가 창출되는가 여부가 중요한데 김두한 씨는 그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김두한 씨는 농민분해의 결과 노·농연대의 중요성이 감소되었다고까지 잘못 진단하고 있다.


부언하자면 자본주의 아래 농민의 급격한 감소는 자본주의 변혁이라는 관점에서 노·농연대의 중요성을 축소시켰다. 이런 점은 일제하의 반봉건성이 그나마 해방 후 농지개혁에 의하여 사라졌기 때문이다8).


이는 농민의 수의 감소만 주목하여 농민의 사회주의 변혁에서 역할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대다수 농민이 빈농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빈농이 사회주의 변혁에 참여할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김두한 씨의 관점에 따르면 농업과 농민에 대해 버려두고 농업을 몰락시키는 독점자본가 계급의 정책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농민분해에 의해 역사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두한 씨는 농민의 분화를 지적하는 점은 올바르지만 한국사회에서 농민분해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다.


소자영농 체제로부터 출발한 한국 농업의 전반적 축소와 농민의 급격한 감소는 다수 소자영농의 몰락과 소수 대농으로의 재편과정이었다9).


소자영농의 몰락과 소수대농의 재편이란 것은 특수성을 간과한 도식이다. 소수대농으로 인해 농업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는지, 농업노동자계급이 창출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농민분해의 과정을 단순한 도식으로 그리고 있다. 한국에서 농민분해의 특수성은 농업노동자계급이 거의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점은 사회주의 변혁의 동력파악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그가 문제에 대해 특수성을 보지 못하고 교조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김두한 씨는 자본가계급의 농업에 대한 요구,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도 잘못 짚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요구는 소자영농의 몰락과 대농체제로의 재편이며, 국가는 이런 자본의 요구에 따라 소자영농의 몰락의 법칙을 강화한다10).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분석이다. 남한 국가의 정책이 소자영농의 몰락과 대농체제의 개편이라는 것은 현상만 보고 본질을 짚지 못한 것이다. 수십년간에 걸친 남한 국가의 농업정책은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었고 소농체제의 유지였다. 소농체제를 통해 낮은 농산물가격을 유지하고 노동력을 공급받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신식민지적 성격으로 인해 시장개방을 통한 농업의 몰락을 도모한 것이 국가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김두한 씨처럼 소자영농의 몰락과 대농체제로의 재편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한국 농업에서 농업노동자의 부재와 빈농이 다수를 점하는 현실에 대한 해명이 못된다. 김영삼의 기업농 육성, 노무현의 쌀 전업농가 7만호 육성 등의 정책은 현상적으로는 소수대농으로 전환이라는 김두한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러한 국가의 정책들은 시장개방에 대한 농민달래기 성격으로서 국가정책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김영삼 당시의 기업농육성이라는 정책으로 인해 부농이 창출되기는커녕 당시 대상이 되었던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김두한 씨는 결정적으로 토지국유화와 그에 입각한 농민협동조합이라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11) 이 또한 교조적인 접근이다. 농업노동자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그리고 중농과 소농의 경우 영세하지만 토지소유자인 현실에서 토지국유화의 전면적 실시를 내거는 것은 이들을 사회주의 변혁에 대한 반대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는 김두한 씨가 농업강령에 대해 교조적이고 관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농업문제, 농민문제를 분석하는 이유는 농업이 몰락하고 있고 농민이 분해되고 있다는 현실자체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분해되는 농민 중에 어떤 층이 사회주의 변혁에 우호적일 것인가, 나아가 사회주의 변혁에 참여할 것인가,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어떤 농업강령을 내세워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농업문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4. 농업문제의 대안에 대한 검토


최근에 농업ㆍ농민ㆍ농촌 문제에 대한 강령적 연구가 제출되었다. 전농이 중심이 되고 민주노동당이 참여한 이 연구는 기존 농업문제를 총괄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속가능한 국민농업·통일농업 연구’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지금의 농업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고 시장 지배 하에서 벗어난 농업발전을 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시장 지배 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가는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상적이다. 그러면 차근차근 이 논문을 분석해보자.

먼저 이 논문은 지금의 농업정책을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시장개방이라는 것을 핵심적 규정으로 하는 것인데, 아쉬운 것은 토지문제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전농의 강령은 토지문제에 대해 ‘농민적 토지소유 실현’이라는 것을 내걸고 있는데 이는 막연한 규정이다. 위 논문에서 그리고 전농의 강령에서 토지문제가 분명하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농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빈농을 변혁에 참가시키기 위해서는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강령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빈농이 해방되는 것은 제 2의 토지개혁을 통하여 농지를 농민의 소유로 하고 나아가 농업협동화를 이루는 것인데 이러한 빈농적인 요구가 위 논문에서는 빠져 있는 것이다.

위 논문은 최근의 농업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1990년대부터 약 15년간 집중적으로 농업구조조정을 추진한 결과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은 급격히 해체되었으나, 규모화 및 비용절감을 통한 농업의 국제경쟁력을 실현하겠다는 농업구조조정은 실패로 귀결’12)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정확한데 위의 분석은 농업의 해체는 이루어졌으나 농업구조조정 즉,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90년대 이전까지 탈농정책으로 불렸던 정부의 농업정책의 골간이 그 이후에도 유효하게 관철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 즉, 한편으로 농업을 몰락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며 한편으로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겠다는 것이 자본가계급의 국가의 정책이었고 그동안 후자보다 전자가 현실적으로 관철되어 온 것이다. 이것은 ‘김영삼 정부의 42조원 투융자대책과 김대중 정부의 47조원 투융자대책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10년간 119조원 투융자대책은 모두 농업구조조정과 연착륙대책’13)에 관련된 것으로서 한편으로 시장개방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농업을 살리겠다는 모순된 정책의 결과인데 이러한 투융자대책은 모두 실패하고 농업해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감언이설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관철되어 온 것은 농업해체, 농민몰락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업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위 논문은 네 가지의 농정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안전한 먹거리의 공급, 둘째, 식량위기에 대비한 식량의 안정적 공급, 셋째, 환경과 농업의 조화를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토대 제공, 넷째, 통일경제공동체 형성에 기여를 들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개방농정 하에서는 이러한 대안농정을 실현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농정은 시장지배 하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렇게 시장지배를 벗어나야 함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타파와 사회주의 변혁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에서 먹거리 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대안으로 들고 있고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운동 등을 사례로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시장적인 먹거리체계의 형성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국가가 이러한 비시장적 체계를 지원한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고 설사 이루어진다 해도 농업문제의 근본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현 체제 하에서 개량을 바라는 것인데 이는 전농이 개량주의 세력인 민주노동당과 연합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위 논문은 농업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농업이 자연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농업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위 논문은 그러한 공공성을 헌법 등의 법제화를 통해서 관철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는 수십년간에 걸친 자본가계급의 국가의 역사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독점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현 국가는 농업의 공공성은커녕 농업을 해체하고 몰락시키는 정책을 취해온 것이 현실인데, 농업의 공공성을 법제화하고 그것을 통해 농업의 활로를 모색한다는 것은 공상적인 발상이다. 대안농정이 시장지배 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에 포위된 비시장적 농업이라는 것인데 이는 농민의 현실역량, 자본주의 경제법칙의 관철 등을 고려할 때 불가능하고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시장의 바다 위에 외롭게 존재하는 섬 같은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이 위 논문은 하나의 대안적 체계를 제시하고 있으나 자본주의에서 관철되는 경제법칙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대안으로 그치고 있다. 이는 농업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실현하자는 것인데 농업과 농민의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먼 개량주의적 정책이다.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민중의 권력을 수립하는 길 이외에는 가능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을 위 논문은 외면하고 있다.



5. 농업강령에 대한 모색


현재의 탈농정책, 농업의 해체와 농민의 몰락을 저지하고 농민해방을 이루는 길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길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위 논문이 시장개방이라는 것을 핵심적 문제로 제기하고 있지만 현재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혁명적으로 타파되지 않는 한 시장개방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농업이 재건되고 농민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제 2의 토지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빈농을 변혁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강령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강령이 다시금 소토지보유, 소농체제로 돌아가기 위한 것은 아니다.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강령과 더불어 농업의 협동화를 강령으로 제기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본주의의 타파와 민중권력의 수립을 주장해야 한다.

당면한 사회주의 변혁의 기본동력은 노동자계급이다. 그러나 농민 중에서 빈농의 경우 사회주의 이외에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빈농들도 사회주의 변혁에 참가할 수 있고 또 참가하도록 조직해야 한다. 사실 농민들 중 다수는 이미 빈농이다. 과중한 농가부채에 시달리고 생산비도 못 건지는 낮은 가격으로 농민들은 대부분 빈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농업에서 사회주의 변혁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중농이 있다. 중농은 자기의 땅을 갖고 있으면서 주로 가족노동력으로 생계를 충당하고 타인 노동에 거의 의지 하지 않는 계층이다. 이들 중농은 착취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세력이고 농업의 협동화에 동참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들 중농의 존재로 인해 토지국유화라는 강령이 일정하게 수정될 필요가 있다. 맑스는 토지국유화 강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래는, 토지가 국민적 토지소유로 될 수밖에 없다고 결정할 것이라고. 토지를 농업노동자의 협동조합에 주는 것은 모든 사회를 특별한 한 계급에 넘겨주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토지의 국유화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완전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결국 공업에서도 농업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을 모두 제거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계급차별과 여러 가지 특권은 그것을 만들어낸 경제적 토대와 함께 소멸하고 사회는 자유로운 생산자의 협동조합으로 변할 것이다. 타인의 노동에 의해 살아가는 것은 과거지사로 될 것이다!14)


토지국유화는 절대지대를 폐지한다는 점에서 농업에서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이고 따라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주계급을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사회의 발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맑스의 언급과 같이 토지를 국유화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소유자로서 중농의 경우 토지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이들은 토지국유화를 자신에 대한 국가의 수탈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엥겔스가 소농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정식화한 것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소농계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또 우리가 국가권력을 손에 넣는 그날,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더라도 토지소유자에게는 반드시 그래야겠지만 소농을 강제적으로 수탈(유상, 무상을 불문하고)하는 따위의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소농에 대한 우리들의 사명은 다음의 점에 있다. 즉 그들의 사적 경영과 사적 소유를 협동조합적 소유로 이행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원조의 실례를 보여주고 그러한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물론 우리는 그 점에서 소농에게 그러한 이점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충분하게 준비하고 있으며 이미 지금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15).


이러한 엥겔스의 소농에 대한 언급은 앞서 말한 맑스의 토지국유화에 대한 언급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의깊게 보면 맑스의 언급은 궁극적인 방향에 대한 언급이다. 즉, 사회주의 변혁의 과정에서 소농에 대한 주의깊은 정책을 펴려면 소농의 소유자적 성격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농과 중농을 고려하여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강령과 더불어 협동화를 제기하고, 그리고 토지국유화에 대해서는 ‘농지를 제외한 토지국유화’라는 것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농지의 경우 농민들의 협동조합화를 통한 공동소유를 지향해 나가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 그리고 농지가 협동조합적 공동소유를 넘어 공업에서와 같이 전인민소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책을 통하여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변혁의 동맹으로서 빈농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중농까지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농업강령을 세우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변혁의 과정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재 북한의 농업의 어려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농업은 사활적인 것이다. 사회주의 농업이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농민을 주체적으로 사회주의 건설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농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원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극복을 먼 미래의 것으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초기부터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극복을 의식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기존의 쏘련에서도 노동자계급과 농민은 우호적 관계였지만 농업과 농민은 비교적 낮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하여 집단농장의 농부는 직업의 선호도에서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대공장의 노동자가 선호되고 농민이 낮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극복을 사회주의 초기부터 의식적으로 과제로 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극복해하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의 극복을 의식적으로 수행할 때 사회주의 건설은 촉진되고 그리하여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 도약은 앞당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맺음말


농업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 해방의 관점이다. 농업에서 변혁을 수행하는 것은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 즉, 농민을 해방하는 것이다. 농민을 자본가계급의 수탈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통해서만 생산력의 해방은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토지개혁과 농업의 협동조합화가 중요하다.

또하나 농업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농민이 하나의 계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부농, 중농, 빈농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그 각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책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 각각에 대한 정교하고 과학적인 정책이 나올 때 사회주의 변혁의 동력과 동맹을 정확히 설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남한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농업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농민의 변혁성이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인해 농업노동자계급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농업에서 일거에 사회주의변혁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토지국유화 등 농업강령이 일정하게 수정되고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농업강령이 제시되고 농민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동맹정책이 지속될 때 농민운동은 개량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변혁세력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사과연>


1) 전국농민회 총연맹(이하 전농), 주요농업지표 변화[1995-2005]


2) 김두한,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한국 농민계급의 몰락과 분화」, ��현장에서 미래를�� 제 82호, 2002년 12월,  p. 251에서 재인용.


3) 맑스, ��자본론�� 3권, p. 990.


4)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 p. 43-63.


5) 엥겔스, 「주택문제」, ��맑스·엥겔스의 농업론��, 아침출판사, p. 215.


6) 대안농정 기획단, 「지속가능한 국민농업·통일농업 연구」, 2007년 12월, p. 15에서 재인용


7) 김두한,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한국 농민계급의 몰락과 분화」, ��현장에서 미래를�� 제 82호, p. 249.


8) 김두한, 앞의 책, p. 253.


9) 김두한, 앞의 책, p. 253.


10) 김두한, 앞의 책, p. 261.


11) 김두한, 앞의 책, p. 271-272.


12) 대안 농정기획단, ‘지속가능한 국민농업·통일농업 연구’, 2007년 12월, p. 9.


13) 대안농정 기획단, 앞의 논문, p. 12.


14) 맑스, 「토지국유에 대하여」. ��맑스·엥겔스 농업론��. p. 209.


15) 엥겔스, 「프랑스와 독일의 농민문제」, ��맑스·엥겔스의 농업론��, p. 336.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제37호(200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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