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촛불”, 그리고 파시즘

권정기 | 편집출판위원장

부르주아 시민의식 ― 투쟁의 동력이자 족쇄


지난 8월 15일로 촛불시위는 100회를 기록하며 끈질긴 투쟁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 급격히 약화되면서 촛불투쟁은 이미 정세를 추동하는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오랜 투쟁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성과를 얻지 못한 것에서 오는 대중들의 피로, 미국산쇠고기가 이미 시중에 풀려 버린 변화된 상황에서 투쟁 목표를 재설정하면서 발생한 혼란, “이명박 퇴진”으로 투쟁의 수위를 높이고 무정형적인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로 추동되는 투쟁형태를 발전시켜 노동자ㆍ농민 등 기층조직대중들로 핵심대오를 형성하고 지도부를 재정비하지 못한 것, 광우병대책위가 조계사로 후퇴하면서 투쟁을 회피한 것 등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 있다. “비폭력투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통제가 결정적인 고비마다 투쟁을 무력화시켰다. 여기에는 방송ㆍ신문ㆍ종교(시국미사) 등의 외부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광우병정국”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 그 자체에 있다.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으로 위협받았던 “국민” 대다수의 건강문제, “졸속협상”으로 표현되는 “국민”적 동의 절차를 무시했던 이명박 정부의 비민주성의 문제, “굴욕외교”로 표현되는 이명박정부의 미국정부에 대한 굴종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한미 쇠고기협상”은 지난 10년간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하에서 성장한 시민의 부르주아적 권리의식(건강권, 절차적 민주성, 국민적 자존심)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투쟁은 거대하게 분출하였다. 그러나 투쟁을 낳았던 부르주아적 시민적 권리의식은 동시에 의무를 내포하고 있었고 투쟁을 불임으로 만들어버렸다. 바로 준법의식/비폭력-평화적 방식의 투쟁이라는 의무를 부과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다. “성숙한 부르주아적 시민의식”은 “협상무효, 재협상” “이명박 퇴진”이라는 투쟁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부르주아적 시민의식은 경찰과의 전투와 청와대로의 진격이라는 투쟁의 방법을 부정하였다. 대중은 갈팡질팡하였다.

돌이켜보면 부르주아민주주의는 ’87년의 6월항쟁과 뒤이은 노동자들의 대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투쟁은 전혀 평화적이지 않은 피의 투쟁, 폭력투쟁이었다. 때문에 민주의식이 준법의무나 평화적 저항이라는 의무를 필연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그러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한계를 뚫고 더 나아가려는 의지, 노동자ㆍ민중이 권력의 주체로 서서 노동자ㆍ민중의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려는 투쟁의지가 꺾여버렸을 때, 노동자ㆍ민중은 얻어진 정치적 개량에 안주하게 되고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민주주의란 노동자ㆍ민중과 자본가계급과의 역관계에 근거한 타협―절대적으로 자본가계급에게 유리한―에 불과하다. 때문에 알량한 권리를 얻는 대신에 부르주아체제를 인정할 의무, 즉 준법의식과 비폭력ㆍ평화적 방식의 저항이라는 굴종을 강제 받게 된다. ’90년대부터 시작된 반동기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대중은 타협에 안주하게 되었고 타협체제는 절대화되어 준법의식이란 굴종을 이미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투쟁이 계속되며 투쟁이 강제하는 의식의 발전, 계급적 본능의 발현, 과거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부위의 참여 등의 효과가 작용하며 대중들은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점차 극복하기 시작했지만 “성숙한 부르주아적 시민의식”의 화신인 광우병대책위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였다. 일부 노동운동의 정치적 대오들이 개입하여 “광우병쇠고기수입반대” 투쟁의 계급적 성격, 즉 전선의 성격이 독점자본의 이윤을 위한 전위부대인 이명박 정권과 사회구성원 거의 대부분과의 투쟁이며, 따라서 독점자본과 가장 전투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노동자ㆍ농민을 핵심투쟁대오로 하여 대중투쟁을 더욱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지만 대세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촛불투쟁은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취약성 때문에, “준법ㆍ비폭력ㆍ평화”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하고 꺼져가고 있다.



파시즘 ― 노동자ㆍ민중투쟁의 족쇄까지 파괴시키다


그러나 다행히도 진실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준법ㆍ비폭력ㆍ평화”란 부르주아지의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굴종명령이라는 것, 그리고 오직 폭력만이 부르주아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라는 것을 웅변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백골단(경찰관 기동대)을 다시 만들어 비폭력 시위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촛불투쟁에 결합했다는 구실로(사실은 투쟁을 회피했고 자신을 방어할 힘도 없을 만큼의 무기력함이 드러났기 때문에) 금속노조 위원장을 체포하고 민주노총위원장을 수배했다. 그들은 비폭력을 비웃는다. 경찰ㆍ검찰ㆍ법원은 일심동체가 되어 “조중동에 광고 거부운동”을 한 누리꾼을 구속하며 합법적인 소비자불매운동을 처벌했다. 그들은 법을 비웃는다.1) 그런가하면 이명박은 방송법상 임명할 권리는 있지만 해임할 권리가 없는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해임하며 태연하게 범법을 저지른다.2) KBS사장 축출에 감사원이 동원되는가 하면, 인터넷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는 국세청이 동원되었다. 아고라토론방을 운영하는 “다음(Daum)”에 세금 40억 원을 추징했다. 국회도 뒤질세라 방송통신위에 인터넷 사이트 폐쇄권을 부여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3)    

시민저항을 폭력으로 분쇄하고, 의식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는 것에 더해 이명박정부는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한승수 총리는 국회 쇠고기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8월 7일과 11일 두 차례나 참석을 거부하며 국회를 무시하는가 하면,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6일 국회인사청문회 없이 공식 임명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폭력이 어떤 계급의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지 분명히 하고 있다. 8.15 광복절을 맞아 독점자본의 총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시켰다. 법인세 인하, 공기업 민영화, 재건축-재개발 촉진 등 독점자본의 이윤을 위해 광분하고 있다. 물사유화와 대운하건설까지 재론하고 있다. 1%의 가진 자들을 위해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인하를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집회와 양심의 자유ㆍ언론의 자유라는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고, 정치틀로서의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체를 부정하며,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테러를 특징으로 하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폭력체제인 파시즘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명박정부는 8월에 들어서면서, 특히 올림픽시기를 적극 활용하여 수세기를 마감하고 공세로 전환시켰고, 대대적 공세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하고 있다. 지금 저들은 촛불시위대를 무력화시켰다며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은 촛불시위대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대중들의 환상까지 파괴했다4). 부르주아사회는 그 안에서 발전한 대중들의 권리의식 ― 사상과 양심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평화에 대한 지향, 그리고 민주주의 ― 을 더 이상은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폭로되고 있다.



해방된 투쟁은 해방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촛불은 정권의 공세라기보다는 내부의 문제, “성숙한 시민의식”에 갇혀 꺼져가고 있다. 촛불투쟁이 약화되자 폭력적 공세가 진행되었지 그 역이 아니었다. “건강권, 절차적 민주주의, 부르주아 국가적 자존심”이라는 “시민의 권리”가 부정되었다. 권리없이 의무없다. 촛불과 더불어 “성숙한 시민”의식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투쟁은 해방될 것이며,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10여 년간의 부르주아민주주의하에서 노동운동진영을 혼란스럽게 하던 개량에 대한 환상, 의회주의에 대한 환상, 국가기구에 대한 환상은 파시즘의 공세에 의해 점차 힘을 잃을 것이다. 반동의 어둠이 깊어지자마자 벌써 노동운동의 정치부위에 대한 침탈이 진행되었다. 8월 26일 사회주의정치연합 집행부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서울경찰청 보안과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명박정부의 파시즘화를 보고 고무된 공안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파시즘을 밀고 갈수록 이들의 힘은 그만큼 강화될 것이다. 또 그만큼 노동운동진영의 이론적ㆍ조직적 무장을 강제할 것이다.              

전세계가 (대)공황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고, 한국 또한 공황의 본격화가 코앞에 닥쳐있다. 그럴수록 파시즘의 광기와 독점자본의 탐욕ㆍ발악은 노동자ㆍ민중들을 더욱 세차게 몰아칠 것이며, 노동자ㆍ민중과 몰락하는 소부르주아들의 투쟁은 다시 타오를 것이다. 머지않아 “준법ㆍ비폭력ㆍ평화”에 갇힌 “촛불투쟁”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밝히는 횃불로 타오르는 투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이명박정부는 투쟁을 이렇게 발전시킨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노사과연>


1) ��한겨레신문��,2008. 8. 20. 

   검찰, ‘불매운동 처벌 사례’ 못 찾고도 강행

   검찰이 광고주 압박 운동을 수사한 지 두 달 만에 무더기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함에 따라, 애초부터 처벌 근거가 미약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 이 사건 수사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근거가 될 만한 형사처벌 사례를 찾지 못한 검찰은 미국 노사관계법 조항을 다시 들추며 영장 청구를 합리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김수남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19일 2차 보이콧(불매운동)도 형사처벌할 수 있다며 미국 노사관계법인 태프트-하틀리법을 다시 거론했다. 이 법은 노조가 노사관계를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 회사와 관련 있는 제3의 업체에 압박을 가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검찰이 이를 검토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 노사관계법을 소비자 불매운동에 들이대는 견강부회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이날 검찰은 생존권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의 2차 보이콧을 금지한다면, 그보다 덜 절박한 시민사회에서의 2차 보이콧은 더더욱 금지되는 게 법리적으로 맞다는 주장을 펴고 나섰다. 이에 대해 박경신 고려대 교수(법학)는 “미국의 2차 불매운동 금지 조항은 소비자들의 행위는 규제하지 않는다”며 “누리꾼 불매운동의 위법성에 대한 논리를 대기 위해 태프트-하틀리법을 빗댄 것은 미국법의 기본을 모르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미국 노사관계법의 2차 보이콧 금지 조항은 노조의 담합행위가 공정거래 질서를 해할 수 있다고 봐 규제하는 것이지만, 소비자들의 집단적 불매운동을 처벌하는 법률은 다른 나라에서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검찰도 국내외를 뒤졌지만 결국 소비자들의 2차 보이콧에 대한 형사처벌 사례는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민사 판례는 확인했다”는 옹색한 설명을 했다. (김남일 기자, 신소영 기자) 


2) 촛불시위를 합법의 틀 안에 가두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커다란 역할을 했고, 그런의미에서 투쟁을 무력화시킨 일등 공신인 KBS가, 그 죄값을 톡톡히 받고 있다.

   이명박은 법의 이름으로 법을 부정하며 KBS사장을 해임했다. 재판부가 “임명도 해임권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사회에서 법은 노동과 자본의 투쟁의 산물이고 역관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법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제한적이다. 자본주의사회를 전제하는 한 노동과 자본의 역관계는 자본에게 유리한 것이 당연하고, 법은 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인 이상, 노동자 계급의 힘이 약화되면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법은 공문구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정반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법은 부르주아의 무기일 뿐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권력을 가진 자, 지배계급의 폭력이 된다. “KBS사태”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3)��한겨레신문��, 2008.7.26.

  ‘우향우 입법’ 홍수…‘거여’ 밀어붙이기

  한나라 마구 쏟아내는 법안들

   진성호 의원 등이 최근 발의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법 개정안’은 방송통신위원회에 불법 또는 명예훼손 게시물을 올린 사이트 폐쇄권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법률로도 불법이나 명예훼손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 또한 방통위에 사이트 폐쇄권까지 준 것은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4) 김대중ㆍ노무현정부 하에서 부르주아사회의 정치적 측면에서, 즉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등 시민적 권리에서 진전이 있었다. 노무현정부 말기에는 정치적 측면에서도 이미 반동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들이 거부된 이유는 주로 ‘경제적 측면(빈익빈 -부익부라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결과)’ 때문이었다. 김대중ㆍ노무현정부 하에서 노동자ㆍ민중은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환상이경제적 측면에서 깨어졌다면, 이명박정부 하에는 정치적ㆍ사회적 측면에서까지 깨지고 있다. 즉 부르주아사회의 모든 면에서 환상이 깨져나가고 있다.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제38호(2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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