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으며

— 역사의 갈림길에 다가가고 있다

논자에 따라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이나 성격 규정이야 판이하게 다르지만,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세기적인 대공황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사실상 아무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시장’이니, ‘규제완화’니, ‘워싱턴 컨센서스’니 하면서 세상을 호령하던 거대 금융ㆍ투기 자본들이 속속 쓰러지면서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이 가히 ‘패닉’ 상태에 빠져 허둥지둥 ‘대책’을 서두르고 있지만, 사실 이제 갓 시작되었을 뿐 앞으로야말로 위기는 더욱 엄청난 규모로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투기적 금융부문만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적 산업이기도 한 자동차, 철강, 조선, 반도체, LCD, 기타 전자산업 등등의 부문이 이미 모두 위기의 사정권 내에 들어와 있음은 부르주아 언론에 의해 “실물경제의 위기”라는 말로 전전긍긍 널리 보도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들 부문만이 아니다. 사실상 모든 산업부문에서, 건설이나 제조업뿐 아니라 유통과 이른바 써비스 산업을 포함한 가히 모든 산업부문에서 위기가 폭발하고 있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라는 국지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흥 중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반에 걸쳐서!

이 사태는 결코 ‘고삐 풀린 자본주의’, 즉 ‘규제완화’나, ‘시장만능주의’, ‘영미형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다. 혹은 ‘대처주의’나 ‘레이거노믹스’ 탓이 아니다. 말이 좋아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 운운하는 것이지, 자본주의란 것이 언제 고삐에 매어 있은 적이 있으며, 또 고삐에 매어 둘 수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고삐 풀린 자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비판적인 발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비판이 아니다. 그 정반대이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란 ‘비판’은, 그것이 무언가 본래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난, 예외적이고 이례적인 자본주의인 양 호도하는 변호론, 사기, 범죄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그것은 지금까지 어떤 자본주의 시대보다도 노동자계급에게 가혹한 고통을 강요해왔고, 또 그만큼 위기를 심화시켜온 요인일지 모르지만, 그 신자유주의조차 사실은 예외적인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면적 위기가 재격화된 시대의 자본주의 그 자체일 뿐이다.

현 사태는 명백히 자본주의에 고유한, 그리고 자본주의에 필연적인 과잉생산의 위기이다. 엄청난 규모의 과잉생산 위기의 폭발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하에서의 노동생산력의 폭발적 발전 및 자본의 누진적 축적ㆍ집중,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적대적인 생산체제가 강제하는 대중의 협소한 소비능력 ― 이 양자 간의 모순의 거대한 폭발인 것이다.

그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기, 어떤 공황도 자본주의 국가가 그것을 예방하거나 저지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금융 및 재정 조작, 불환은행권의 발권력을 동원한 모든 금융ㆍ재정 조작으로도 위기의 폭발, 그 전개를 결코 저지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정확히 가늠할 방법은 없다. 위기의 주요 근원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 자체가 그것을 가늠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공황 그것의 속성상 수많은 자본이, 수많은 공장이, 수많은 기업이, 수많은 회사, 수많은 가게가 도산하고, 문을 닫고, 조업을 단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국가와 자본은, 국가와 독점자본은 그 짐을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민중의 어깨에 전가하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그리고 파산하는 소상인ㆍ소자본가ㆍ농민들은 길거리로 길거리로 내몰리고, 임금을 삭감당하고, 극한적인 빈곤과 고통을, 그리고 타락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은, 민중은 눌려죽지 않으려면 일어나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겪은 바이지만, 아니 사실은 특히 지난 1970년대 이래 여러 차례 겪어온 위기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전개 양상을 보건대, 모르면 몰라도 사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난 ‘IMF 사태’ 때보다도 몇 배, 몇 십 배 훨씬 심각할 것으로 보이는 작금이다. 그다지 그 가능성이 커 보이지는 않지만, 설령 자본이 이번의 위기를 어찌어찌해서 넘긴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오는 ‘호황’은 하루살이 같은 호황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기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보도(<<프레시안>> 2008. 11. 3.)에 의하면, 민주노총의 핵심 지도자,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은 3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결단 해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결단)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임금 동결 결단도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어떤 전제, 무슨 조건을 달았든, 혹은 아무리 정치적 수사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한가한, 얼마나 물정 모르는 소리인가?!

더구나 현재 전개되고 있는 사태가 만일, 현재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1930년대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것이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발전ㆍ전개된다면, 문제는 그야말로 근본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 사회혁명이냐, 사실상 인류의 전멸을 초래할 대전쟁이냐? 바로 그것이다.

자본은 현재, 한편에서는 현 위기를 예컨대 ‘고삐 풀린 자본주의’ 탓으로, 심지어 불과 몇 달 전까지 미국의 ‘경제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우던 전(前) 연준(FRB) 의장 그린스펀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1907년의 금융위기 때에 J. P. 모건이 어쨌느니, 1930년대 대공황기에 루즈벨트가, 그의 뉴딜이 어쨌느니 하면서, 짐짓 그들을 영웅화하고, 그들의 어떤 활약, 역할, 정책이 그들 위기를 극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본능적으로 ‘사회혁명이냐, 대전쟁이냐’의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1930년대의 대공황에 비교할 수 없는 1907년의 공황과 그 속에서의 J. P. 모건의 영웅적 활약상을 거론하는 것은 루즈벨트와 뉴딜의 활약상ㆍ성과에 대한 설득력을 더하려는 것일 뿐, 루즈벨트도 뉴딜도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오직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파괴ㆍ대살육을 통해서만 그것이 ‘극복’되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짐짓 그렇게 떠들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위기의 원인을 ‘고삐 풀린 자본주의’ 등이나 그린스펀 등에게 돌리는 것은 물론 위기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에 필연적이라는 것, 그 운동법칙의 관철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이었고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정우 교수께서는 ‘진보적 지식인’을 대표하여 ‘진보적’ 신문 <<한겨레>>(2008. 10. 6.)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 기존 경제체제를 불신하고,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며,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인용자) 이번 위기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의 문제점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저들의 불안과 소망을 담은 발언이다.

그러나 상황은 당연히 저들의 불안이나 소망과 상관없이 전개되고 있다. 어쩌면 필시 사회혁명이냐, 대전쟁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면서. 다름 아니라 바로 노동자계급에게 그러한 선택을 강요하면서.

실제로 21세기 전반기가 사회혁명의 시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대전쟁의 시대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인민의 역량과 독점자본가계급의 그것 간에 어느 쪽이 힘의 우위를 점하느냐에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인민의 역량이 우세할 때 21세기 전반기는 사회혁명의 시대, 역사적 성과를 딛고 인류가 ‘자유의 왕국’으로의 관문을 여는 시대가 될 것이지만, 그 역(逆)의 경우에는 대전쟁의 시대, 인류 절멸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1930년대 대공황의 경험의 교훈이고, 최근 전개되고 있는 대공황이 예고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21세기 전반기가 사회혁명의 시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대전쟁의 시대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계급에게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선도(先導), 노동자계급의 지도 없이는 어떤 인민의 역량도 조직될 수도 발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노동자계급, 그 노동자계급의 운동이다. 사실상의 절멸상태에서 가까스로 부활했으나,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ㆍ붕괴를 보면서 정치적으로 후퇴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세계의 노동운동 전체가 20세기 후반기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크게 무력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 선진국 노동자들의 경우, 자신들의 이른바 복지국가가 어떤 역사적 조건과 맥락, 어떤 혁명적 투쟁의 산물인가를 망각한 채 거기에 안주하여 독점자본의 갖은 반공선동에 놀아나면서 그렇게 무력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물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이라는 대파괴ㆍ대살육의 경험이, 그리고 인류의 절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핵무기의 위력에 대한 공포가 노동자ㆍ민중에게 대체로 ‘대전쟁을 다시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전개되고 있는 대공황 그 자체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운동을 필연적으로 새롭게 불러일으켜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제3의 길’이니 ‘새로운 중도’니 하는, 신자유주의화한 사민주의가 웅변하듯이, 독점자본은 물론 더 이상 노동자계급에게 ‘복지국가’를 선물할, 노동자계급과 그렇게 타협할 여유도, 의사도 없을 것이다.

엄중하지만 그만큼 승산은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사회혁명이냐, 대전쟁이냐의 갈림길에 다가가고 있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운동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채워야 할 것인가? 노동자계급운동 그것을 어떻게 혁명적ㆍ정치적으로 발전시켜 갈 것인가? 어떻게 조합주의, 경제주의의 한계를 넘어 그렇게 발전시켜 갈 것인가? ― 이것이 바로 지금 선진 노동자, 선진 활동가들에게 주어져 있는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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