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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비폭력 대화란

Bilingual


프란츠 파농(F. Fanon)이 말했다. 식민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모국어뿐만 아니라 통치 국가의 언어를 배워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여성 역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살아남아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여성/남성의 언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여성의 언어를 ‘수다’라는 이름으로 부차화 시키고 공적인 언어에 힘을 실어주는 데에 익숙하다. 그 공적인 언어라는 건 존댓말을 기본으로 하고, ‘-습니다’와 같은 군대식 어미,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글쓰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싸이 미니홈피에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은 쉽지만, 논문이나 보고서를 쓸라치면 금세 답답해지곤 한다. 그 이유는 공적인 자리, 문서에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서술하는 건 왠지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학습 받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과 괴리되어 말한다는 건, 분명 슬.픈.일.이다.


남성적-이성적-객관적 말하기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큰 용기를 내어 신고를 하더라도 수사과정에서 다시 상처를 받곤 한다. 보통의 폭력 피해조사와는 달리 성폭력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피해를 당한 경험이 사실이었음을 객관적으로 설명해낼 것을 요구받는다.(남성 조사관인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피해 당사자의 끔찍한 경험에 공감하지 못하고 조금 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증언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성의 언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성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단순히 그들을 비난하기에는 미안한 감도 있다. 그들 역시 이미 사회의 남성적-객관적-이성적-공적인 말하기에 자연스럽게 물든 죄밖에 없는 것이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언어 자체의 한계에 대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사실 우리 역시도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에 적지 않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감정적인 뉘앙스는 자제, 이성적인 글쓰기 부탁”?


앞서 03 문모, 김모 학우의 글을 보면 다소 감정이 섞인 표현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단순히 자기감정을 토로하는 목적의 글이라면 이 씨날 자유게시판은 약간 적절치 않을 것 같구요, 특히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한 글을 쓰실 때 감정적인 뉘앙스를 풍길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되도록 자제해 주시고 최대한 이성적인 글쓰기를 부탁드립니다.*


보통 이런 ‘친절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은 해당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더 높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문제의 본질은 사물함 사용에 있어서 고학번 우선 원칙이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대한 판단이었는데 그 선배는 학번주의(연령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당당하게(!!) 반박함과 동시에 후배들에게 좀 더 이성적으로 말할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이성적 글쓰기를 부탁하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의 불쾌함이라는 것은 감정이 아닌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졸지에 나는 사물함 사용에 있어서 학번주의의 부당성을 증명해 내야할 뿐만 아니라 내 의견이 얼마나 이성적인지, 또한 사적인 이해관계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음을 설명해 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게시판에서 논의의 흐름은 말 그대로 ‘감정’싸움이 되고 말았다.


비폭력 대화


우리가 진정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이 감정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기대어 서슴없이 자신의 말을 내뱉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용인되는 분위기인 것이다. 여성 혹은 피억압자들이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곧 그녀들이 그만큼 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하고, 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해야 하는 이들에게 ‘감정적인 말하기‘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그럼으로써 논의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그들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경계해야할 사람들이다.


나는 나의 말하기가 현재 내 감정에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마음이 충만해진다. 자유롭게 수다 떨 듯 얘기할 때 내 안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사물함 논쟁을 겪으면서, 아직 스스로 부족하긴 하지만, 나에게 비폭력 대화란 내 감정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성, 객관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사람들의 이면에서 나는 남성 중심적이고 연령중심적인 구조에서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속시키려는 그들의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성적으로 말하기를 요구하고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이들을 보면 스스로 행복하기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 내가 속한 학과 게시판에 한 선배가 썼던 글이다. 과 사물함을 사용할 때에 있어서 그동안 암묵적으로 통용되어왔던 고학번 우선 사용원칙에 대한 한 후배의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에 대한 선배의 반론 글(‘규정 도입의 목적과 취지, 그리고 논의진행의 당부’) 중에 담긴 내용이다. 굵은 줄은 필자. http://seenal.cyworld.com
덧붙이는 말

필자는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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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 , 남성적 , 이성적 , 객관적 , 감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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