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인권연대의 기관지 월간평화연대

낭만에 대하여

갑작스레 원고 청탁을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캠프에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고, 세세한 기억들은 거의 대부분 휘발되었으므로. 그리하여, 무작정 캠프 때 찍었던 사진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5일 동안, 첫 날의 저녁시간과 마지막 날의 낮 시간을 하루로 계산하면 4일의 시간동안, 400장이 넘는 JPG 파일들을 만들어내면서(캠프 기간 중에 나는 ‘찍새’를 자임했다) 내가 뭘 그리 붙잡으려 애썼던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가 포착하고자 하는 순간들은 대체로 기록을 위해서라는 표면적 이유를 달고 있었지만, 기록에 유용한 50여 장의 사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그 몇 배에 달하는 저 잉여생산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낭만’이라는 두 글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멜로디와 함께.


1. 왜 캠프에 가는가


평화캠프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할 때, 준비팀은 관습적으로 평화캠프의 소개 글을 작년의 그것에서 따왔다. 아니면 재작년에서? 아무튼, 요지는 평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건설하는 평화공동체로서 전쟁과 같은 구체적 폭력상황을 비롯해 군대와 군사주의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폭력에 대해 비폭력을 고민해본다... 그런 것이다. 평화캠프의 소개서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입소문들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인내, 자발성, 자연, 평화, 적극적 직접행동 등의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른들이 하는 4박5일의 ‘캠프’라는 것에 결정적으로 매료되는 듯하다. 마치 히피촌이 연상되는 듯... 그래서 사람들은 몽롱하면서도 자못 비장하게, 그 어떤 대안적 삶의 공간을 체험하러 온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므로 그렇게 만들어나간다.


2. 캠프에서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낭만을 실험하였다. 캠프의 기획단계에서, 나는 기존의 낭만적 환경을 캠프의 중요한 바탕으로 보고 바닷가 펼쳐진 부안을 제안했으나, 준비팀의 다수는 평택을 선택하였다. 평택이라니... 난 절망했었다. 확, 안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솔직히. 두려웠고, 피곤했고 쉬고 싶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에겐 그게 합리적인 것이었으니.


실제로 평택 하늘에는 하루 종일 헬기가 두두두 거리고, 예전과 달리 우리 눈앞에는 멋진 자연풍광 대신에 미군기지가 놓여있었다. 붉은 깃발들, 그야 말로 ‘강건체’로 쓰인 많은 플랭카드들, 학교 건물 바로 앞에 서 있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하며.... 내가 일 년 내내 기다려오던 꿈의 히피촌으로 보기엔 무리가 많은 공간.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의 낭만을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가꿔갈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어야만 했다.


나의 첫 번째 의문은 ‘과연 우리가, 혹은 내가 저 헬기 소리에 욕하지 않고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였다. ‘비폭력의 원칙들(둘째 날 프로그램에 있음)’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실제 비폭력의 원칙들 중에는 “고통이 따라야 하는 상황이라면 남에게 그것이 가는 것보다 기꺼이 자신에게 향하게 하기/ 모두의 변화 가능성을 믿기” 등이 있다. 일단 난 다른 사람만 헬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렇게 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미군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고백컨대, 둘째 날 오후 나는 또다시 오는 두두두 소리에 욕을 하고 말았다. ‘씨*’ 욕을 한 대서 폭력적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비폭력적인가? 저 날아다니는 헬기에 대한 분노는 차츰 차올라서, 새벽에 낮게 비행하면서 굉장한 소음을 유발한 헬기와 비행기들에 대해서 난 돌팔매질, 혹은 더 위험한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들었다. 아, 이 폭력적인 마음을 어찌하랴... 우리의 실험은 정말이지 실험다운 실험이었다.


나는 평정심을 잃고, 두 번째 비폭력 트레이닝 시간에는, 가람이(참가자 중 1인)와 거의 싸우다시피 말을 했다. 내 나름대로는 반대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반대자의 인간성에 호소하려고 했고, 그 모든 비폭력적 개인기를 발휘하여 설득하려 했지만 가람이는 내 성질을 돋우기만 했다. 그녀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군기지 확장이전 찬성주민의 역을 맡았다. 난 거의 울 뻔 했는데, 자유발언을 할 때, 가람이 “다른 사람이 나를 가르치려 들었을 때 기분이 나빴다. 전혀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진짜로 내가 주민과 이야기를 하면서 설득을 하려고 했을 때에도 실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창피했다. 난 진짜 울 것 같았는데, 울지 않았다. 아직 더 많은 실험이 남았으므로.


나의 두 번째 의문은, ‘어디까지 자발적일 수 있을까?’였다. 고동과 아침, 또 누군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날밤부터 맨날 열리는 피스바의 마담을 자임한 고동(참가자중 1인)은 정말이지 열심히 자발성을 발휘하였다. 안주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안주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기초적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심지어 사람들이 피스바에 모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하는 그를 보면서, 그리고 끼니때마다 설거지 가위바위보에 졌던 그를 보면서 난 자발성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그런데, 난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것과 자발성을 보호해주는 일이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발현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참여하여 이야기를 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들을 말할 때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우리가 어느 수위로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수평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나? 푼수(참가자중 1인)가, 그가 하는 프로그램 중에 청테이프 토큰을 나눠주고, 소그룹 안에서 발언권을 동등하게 갖도록 해주는 데에서 난 작은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조의 참가자 누구와 누구는 잘 말하려 하지 않았고, 나는 자꾸 말하려 하였다. 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자발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꼈다. 아침이 여는 마당을 하는 것을 보면서, 혹은 닫는 마당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쉬움과 연민과 동시에 나는 그 공간에서 무엇을 준비했는가, 혹은 얼마나 깊게 몰입했는가 등의 고민이 들었다. 매사에 우리는 최선을 다 할 수 없다. 피곤하고 귀찮기 때문에. 심지어 아주 좋은 목적으로 만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 각자 다른 타이밍에 각자 다른 정도로 피곤과 귀찮음을 느낀다. 그것이 편안하게 존중되면서도 자율적인 통제(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맥락을 봐 주세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은 과연 있는가? 애매하다.. 다행히 캠프의 분위기가 여유롭고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은 평화캠프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않고, 혹은 보이지 않는 강압을 하지 않고, 혹은 낭만적 분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때로 어려운 일이다.


3. 좀 더 다른 내용은 없는가?


왜 없겠는가? 넷째 날 밤에 거의 쓰러질 것 같은 긴 논쟁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대화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도 느꼈고, 밤새 직접행동을 준비하면서 억울하기도 했고, 술 먹고 보드게임하다 늦잠 잤을 때마다 내 자율성의 한계를 느꼈으며, 마지막 날 진짜 비폭력 직접행동을 전경들과 부대끼며 해댈 때의 그 묘한 느낌 등,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지면의 한계이다.


어쨌거나 많은 좋은 프로그램들(프로그램이 궁금하면 평화캠프 사이트에 가보라. 아님 곧 출시될 나의 자료집을 기다리라.) 속에서 나의 낭만적 캠프는 끝이 났다. 나의 사랑하는 동지들은 뒷풀이날 나와 가람이 만든 칵테일로 샤워를 하면서 낭만의 끝을 보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지막 질문에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화캠프의 낭만은 오래 지속될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낭만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덧붙이는 말

필자는 피자매연대 활동가입니다.

태그

폭력 , 군사주의 , 평화캠프 , 평화공동체 , 비폭력직접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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