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노동자들의 연대와 희망 월간금비

[인터뷰]강쨩이 만난 사람_고성진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위원장

외롭고 높고 쓸쓸한 ‘소망 하나’

"지금 단식농성중인데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 단식은 다시는 안 하고 싶습니다"

천막이 즐비했던 지난 연말 여의도 국회 앞. 비정규직 보호입법 쟁취를 위한 집회에서 연단에 나선 어떤 덩치 크신 분이 이런 말을 해서 추위 속에서도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유난스레 더 추운 올 겨울, 남들보다 더 춥고 외롭고 거기다 배고파 보이기까지 했던 사람. 바로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고성진 위원장이다. 노조 사무실은 몇몇 다른 노조들과 함께 충정로 2가 석당빌딩 4층에 있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무척이나 비좁아 보이는 책상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는 노동조합 홈페이지(http://bohum.nodong.org)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늘 동네 군고구마 장수 아저씨 같이 편안하게 투쟁조끼나 점퍼차림이던 그가 오늘따라 인터뷰 때문인지 좀 어색한 정장 차림이다. 낯선 모습이기도 했지만 노동운동 하기 전에는 아마도 이런 말쑥한 차림으로 보험 모집 영업을 하러 다녔겠지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했던 소박한 요구

“지난해 국회 앞이 아직 썰렁했던 10월 4일 특수고용 노동자라고 불리는 우리가 노동자성 인정을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죠. 온 나라가 비정규직 입법과 관련해서 떠들썩했지만 보험모집인이나 학습지교사, 흔히 우리가 특수고용직이라고 부르는 노동자들은 그 논의에서도 배제되어 있었기에 우리 처지와 형편을 알리려고 하는 최소한의 투쟁 이었습니다”

무슨 거창하게 차별철폐나 노동해방도 아니고 노동자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투쟁이라니 얼마나 쓸쓸한가.

이어 특수고용노조 대표자들은 천막농성에 그치지 않고 릴레이 단식농성에도 들어갔다. 거구인 고 위원장도 1주일씩 두 차례나 참기 힘든 단식농성을 해야 했다.

“단식농성이 그렇더군요. 처음 며칠은 배고프다는 생각만 자꾸 하게 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간 일들에 대해 더듬어 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 하는 고민들이 늘어갑디다. 보통 노동조합 위원장이 농성을 하면 조합원들이 지지방문도 와주고 하잖아요. 하지만 아직까지 합법적인 노조가 아니라 조합원들이 드러내 놓고 찾아올 수가 없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농성장에서 혼자 단식을 한다는 게 솔직히 힘들더구만요.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이 짓을 해야 하나 싶고...”

솔직한 말이다. 곁에서 함께 의지하며 손 맞잡은 동지가 없이 혼자하는 투쟁은 그저 외롭고 쓸쓸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묻히기 마련이라 노동자로 인정해 달라는 소박한 요구로 시작한 천막농성은 100일이 지나서야 끝낼 수 있었다. 그 사이 이목희 의원 등 많은 입법관계자들이 농성장을 방문해서 새해에는 꼭 특수고용노동자 보호입법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간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보험모집인은 노동자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도 많은 보험 모집인이 있다.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이 없어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던 선배 언니, 어느 날 몰아닥친 구조조정의 광풍에 명퇴로 일자리를 잃었던 동료 남직원. 증권회사에 다니던 선배들이 그나마 하던 일과 유사하다고 생각 되는지 퇴직 후 보험 모집인의 길을 선택하곤 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보험모집을 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전국적으로 40만명에 이르고 그 대다수가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우리나라 에선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왜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걸까? 실제로는 사용주를 위해 일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개인사업주로 돼 있어 근로기준법과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 관련 입법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노동권 보장은 아예 빠져 있다.

그래서 2000년 10월 작은 골방에 몇몇 아줌마들이 모여 두 팔을 걷어 부친 것이 보험모집인 노조의 탄생이었다. 다른 거창한 구호도 아닌 그저 “노동자”라는 이름표를 받자는 것이다. 그러나 노조 설립 신고서는 반려되었다.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비슷하기는 한데 특수한 그 무엇” 이라는 것이 이유다.

보험영업에 대한 환상을 걷어 내면...

보험회사는 해마다 보험여왕 등을 뽑으며 보험모집인이 억대의 수입을 받고 있다고 홍보한다. 그래서 마치 그들이 회사에 종속된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처럼 느껴지는 거다. 하지만 실제 다수의 보험모집인이 IMF이후 신용불량자거나 자신의 돈으로 계약을 유지하는 등 불법적인 요소가 많고, 부풀려진 거품의 희생자다. 고 위원장은 일례로 “어떤 여행사가 스타급 보험모집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상품을 만들었다가 쫄딱 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겉보기에 그럴싸해 보였던 그들이 대부분 해외여행을 갈만한 형편이나 생활수준이 아니더란 거죠. 엄청난 부채나 생활고에 시달려 여행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보험모집인 대부분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고 있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그들이 한국경제에 기여하고 노력한 역할에 비해 노동자로서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아온 게 사실이다.

“예전엔 비정규직이니 특수고용이니 하는 말 자체가 없었고 또 잔여모집수당이 있어서 그나마 좀 나았어요. 뭐 노동자로 인정받든지 말든지 별로 관심이 안 갔죠. 그래서 굳이 노동자가 아니라 부당하다 뭐 이런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잔여모집수당이 뭘까? 그가 보험모집인으로 일하던 90년대 초에는 모집인이 고객과 보험을 계약하면 수당을 10개월 안에 나눠주게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제가 한달 동안 올린 실적에 따른 수당이 모두 1백만원이라고 치면, 회사는 제게 한 달에 10만원씩 10개월에 걸쳐 나눠서 지급해요. 한꺼번에 1백만원을 주지는 않아요. 수당을 다 받기 전에 회사를 그만 둬도 잔여금액을 신청하면 나머지 금액을 다 받을 수 있었어요. 잔여수당이란 이런 거죠. 비록 퇴직금이 없는 비정규직이지만 당시에는 자기가 올린 실적은 보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96년 회사 돈 3천 7백만원을 가지고 가다 전철에서 도난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은행 빚을 내서 회사 돈을 갚았지만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다. 물론 퇴직금 한 푼 받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아 세운상가에서 자그마한 점포를 임대받아 컴퓨터 판매업을 시작했지만 곧이어 몰아닥친 IMF로 인해 투자한 원금 회수하기는커녕 집까지 팔게 됐다.

그래서 99년, 다시 교보생명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사이 보험회사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이전과는 달리 보통의 보험회사들이 30개월로 수당을 쪼개서 나눠주고 있었다. 더구나 그 기간 안에 회사를 관두게 되면 잔여 금액은 한 푼도 받을 수가 없었다. 잔여모집수당이 사라진 것이다. 보험모집인으로 10년, 20년 꼬박 일한 사람도 고정적으로 받는 임금은 정규직의 반도 되지 않았다. 각종 사내 복지혜택도 ‘노동자가 아닌 그들’에게는 언제나 ‘예외’였다.

파리목숨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절실해

맨 처음 사회생활을 책 세일즈로 시작해서 안 해 본 것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해 온 고 위원장은 처음 보험모집인을 하면서 신인왕을 타고 억대의 수입을 올리는 등 보험영업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자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인 보험모집인들을 교묘히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때 마침 2000년 10월 보험모집인 노조가 생기자 노동조합에 관심을 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에서 활동하자 그게 미웠던지 2001년 7월 회사로부터 일방적으로 해고 되었습니다. 월말이면 보험계약을 마감하는데 마감 직전에 제가 제출한 서류를 반려하는 등 치졸한 방식으로 제 실적을 깎아 먹더니 실적부진으로 해고 하더군요. 다른 동료들 역시 부당하게 해고 되었지만 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해 봤자 기각되는 걸 여러 번 봐 왔습니다. 보험모집인은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나가라면 나가야 되는데도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로 되어 있으니 말이 안되죠”

그는 초대 위원장이 사임한 이후 2004년 2월 2대위원장이 되었다.

10년만 더 빨리 시작 했더라면...

그러나 막상 노조활동은 그간 봐 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보험모집인으로 일할 당시 단체보험 가입 때문에 노동조합을 방문한 적이 많았다. 그때 드나들면서 보아 왔던 편안한 사무실의 밝은 분위기, 여유 있어 보이는 상근간부들의 표정과 그가 처한 환경은 거리가 멀었다. 임금 인상은 기본이고 조합원들에게 단체보험까지 가입해 단협에서 부족한 복리를 채워주고 있었던 이른바 대기업 정규직 노조와,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비정규직 보험모집인 노조의 현실은 같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변변한 사무실은 커녕 같이 상근할 간부도 없이 혼자서 일 해야 하고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이 많지 않아서 조직 사업을 할 기본 활동비조차 마련되기 어려운 열악한 조건이다. 그래도 열심히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 다녔다. 국회 앞이건 청와대 앞이건 인권위원회 앞이건 어디서든 보험모집인의 현실을 알리고자 1인 시위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으며, 유난히도 날씨가 추운 올 겨울에도 집에 들어간 날 보다는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한 날이 더 많을 정도다. 이제 찬 바닥에서 자면 무릎이 시릴 50대에 접어 든 고성진 위원장. 이 나이에 경제적 안정은 커녕 집에서 돈을 타다 썼으면 썼지 생활비를 줘 본 적이 오래다. 일찌감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에 다니는 딸과 이제 대학교 새내기가 되는 아들에게 등록금마저도 마련해 주기 어려워 미안하기만 한 아빠. 이렇듯 가장으로서 기본적인 역할조차 못 하면서도 노동운동 하겠다고 바깥으로 나돌면서 가족들에게 이해받기만 바라기는 겸연쩍다. 그저 그 동안 집사람에게 너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한 마음 뿐.

하지만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자신의 성격 탓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지칠법 한데 지치지 않고 오늘도 또 깨질 각오로 몸을 던진다.

노동운동이 하루아침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야 오죽 좋으랴. 새 구두를 신고 있다가 매일매일 구두축이 얼마나 닳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 날 문득 보면 구두축이 많이 닳아 있듯이 그렇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이 운동이 아니겠는가. 그래선지 이제 노동운동 5년차에 접어 든 그는 “내가 10년만 더 빨리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힘들어도 보람이 없다면 어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보험회사와 보험모집인의 불평등한 고용구조를 악용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언어적, 물리적 폭력.. 언제라도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하면 그날부로 해고를 당해야하는 사람들이 바로 보험모집인의 현실이다. 아직은 멀었지만 그래도 그는 노조가 생기면서 부터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보험모집인들이 가장 분개하는 잔여모집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행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힘들지만 그를 위로하는 큰 보람 중 하나다.

외롭고 높고 쓸쓸 함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힘들고 지칠 때 과연 무엇으로 버틸까.

필자의 경우 홈페이지에 조합원의 한 줄 댓글 에도 가슴이 찡하고 힘내라고 응원 해주는 전화 한통에도 가슴이 설렌다. 철야농성 이라도 할라치면 새벽녘이라도 거나하게 한 잔 걸친 채 치킨 한마리 튀겨서 방문해주는 조합원의 발그레한 얼굴에도 힘이 불끈 솟는 것. 사람이라면 누군가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주고 격려해 줄 때 힘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러나 그는 외롭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안도현님의 시집 제목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 그의 투쟁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기에 혼자서 투쟁해야 되니까 외롭고, 가야할 길이 아직도 너무나 높이 있고, 어느 순간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쓸쓸하게 되돌아보게 되는 것. 작년 10월 5일 노조창립 5주년에 화려한 창립기념식은 못할지언정 쓸쓸하게 차가운 소주잔을 혼자 기울이며 눈물을 흘렸던 일, 지난 연말 특수고용 입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할 때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지만 외롭게 견뎌 내던 일. 단지 외롭고 서운함 뿐 이었을까. 왜 이렇게 작은 소망조차 이루지 못하고 암울한 조건에서 투쟁해야 되는지.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승리 할 수 있을지 하는 초조함이 그를 더욱 괴롭혔을 터다.

그의 새해 소망은 우리나라에 100만명 이상 존재하고 있을 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3권을 쟁취해 내는 것이다. 정부 여당이 약속했던 상반기내 입법이 반드시 지켜지도록 하고 구체적 대안을 만들어 특수고용이라는 이름부터 벗어나 노동권 보장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더 이상 노동자성을 운운할 때가 아니라 구체적인 입법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게 그의 절절한 목소리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의 작은 소망이 올해는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움츠렸던 어깨를 쫙 펴고 “거봐, 내가 한다면 하잖아”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활짝 웃으며 큰 소리 한 번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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