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영남-대구를 흔들어 깨우자! 대구평통사 결성 비나리

[회원 이야기 마당]


△ 대구 청소년들이 미선·효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사진제공=대경대책위]

 2009년 10월 7일, 열 네 사람의 평통사 회원들이 대구평통사 결성 준비위원회를 세웠다.
드디어 내년초에 대구평통사가 결성된다. 대구에 평통사를 결성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 지 8년 만이다.
대구평통사 결성은 지난 5월 부산평통사 결성에 이어 영남지역에 평통사 뿌리를 내리는 숙원이 이루어지는 쾌거다. 어느 지역 평통사인들 소중하지 않을까마는 대구평통사 결성을 앞둔 감회가 남다르다.       

 대구에서 평통사를 조직하기 위한 시도는 2001년에 시작되었다. 한 회원이 직장을 대구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는 대구에서 평통사 활동을 만들어보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수구냉전적인 대구지역과 회사 분위기를 돌파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2002년, 대구에서도 여중생 촛불이 켜졌다.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시내로 나왔고 대구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동참하는 이 같은 촛불 시위가 참으로 오랜 만에 있는 일이었다. 중앙사무처에서 여중생 추모 대구백화점 앞 집회에 내려가 사진전과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근수 목사님의 소개로 대구 지역 목회자들게 연락을 넣어 간담회를 열었다. 대구에서 평통사를 해보자는 제안은 의외로 선뜻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어 2002년 12월 15일, 영남신학대학교 정경호 교수와 구민교회 김경태(대구 외국인노동상담소장)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이 ‘(대구 경북)지구촌의 평화와통일을일구는사람들(약칭 지통사)’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에 나서고 있던 정경호 교수는 대구의 정서를 고려하고, 한반도 뿐 아니라 전 지구의 평화에도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지통사’라는 명칭이 어색하긴 했지만 평통사는 지역평통사 결성과 활동에서 해당 지역의 실정과 주체적인 조건, 요구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정경호 교수와 대구분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지통사는 2003년 6월 재창립 평통사 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평통사 재창립의 의의를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창립 이후 중앙운영위 참가나 평통사 실천 과제에 대한 동참을 하지 않는 등 조직적인 활동에서 문제점을 보였다. “대구를 ‘지역’이라 하지 말고 ‘중앙’이라는 표현을 쓰지 마라” 하고 중앙사무처에서 대구를 방문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했다. 이에 홍근수 상임대표가 직접 대구에 내려가 조직적인 활동을 독려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지만 결국 지통사는 평통사 활동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해소되었다.

 지통사가 해소된 후에도 몇 몇 회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대구평통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용기를 주셨다. 그 분들이야말로 대구평통사 결성의 동력이다.
누군가 나서주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늘 속만 태우던 중 2007년, 놀랍게도 백창욱 목사가 대구평통사를 해보겠다고 자원하였다. 목정평(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에 나섰던 백 목사는 대추리 싸움 과정에서 평통사를 알게 되었고 평통사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높이게 되었다. 마침 대구로 내려가 목회를 하게 된 백 목사가 대구평통사 재결성해 나서겠노라고 한 것이다. 진심으로 기다리면 이런 일도 생기는가 싶었다.
2007년 9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에 나서기로 결의한 광주 일꾼 전진대회에 수줍은 듯 머쓱한 모습으로 나타난 백창욱 목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 목사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구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화협정 캠페인을 벌여 길잡이 수 백 명을 조직해내고 대구평통사의 이름을 대구지역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알려내었다. 평통사는 2008년 그에게 모범회원상을 시상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더 적극적인 활동을 독려하였다.  

 지금은 수구보수의 아성의 대명사가 된 대구는 한 때 정치적으로 ‘남한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며 남한 진보운동의 중추였다고 한다.
해방직후인 1946년 미군정의 폭압에 맞서 일어난 10월의 대구 인민항쟁은 1948년 제주 4·3항쟁과 10월 여순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유당 독재에 맞선 투쟁에서도 대구는 중심적 역할을 한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의거는 3·15 마산항거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 항쟁의 흐름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4.19혁명에서 정점에 이르고 4월 26일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박정희는 학생, 교사, 언론이 높은 결합력을 갖고 민주화 투쟁을 선도해온 대구,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대구가 두려웠다. 그는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해나선 6.3학생투쟁 직후 1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고,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8명을 즉각 처형함으로써 반유신세력을 거세하고 투쟁을 잠재우려 했다.  
대구에서 4.9인혁재단 활동을 하는 김찬수 대구평통사 결성 준비위원은 “‘인혁 학살’로 공포감을 느낀 대구 시민들은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정희는 영호남차별전략을 통해 대구인재들을 중앙정부에 등용하여 지역민심을 장악했다. 인혁당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재문 선생이 남민전을 결성, 다시 탄압받으면서 대구 진보세력의 불씨는 괴멸직전에 놓이게 되었다.1)고 평가한다.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진보운동의 중추 기지에서 수구보수의 아성으로 변해버린 대구. 이 대구에 미군은 캠프 헨리, 캠프 워커, K2 공항 등을 두고 대구를 주한미군의 병참기지, 정보통신첨단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전 전농회장 윤정석 회원은 “예전부터 영남을 태산명월이라 칭송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박정희 때부터 잘못되어 문딩이 같이 되었다. 영남 출신이란 게 부끄럽고 답답해서 속에 불이난다....하긴 태산은 태산이지 한 번 자리 잡으면 꿈쩍도 않는 태산이지...”하며 한탄하였다.  

 32년 전 참혹한 죽음을 당한 인혁당 희생자들이 지난 2007년 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우연일까? 대구에서 평통사가 오랜 침묵을 깨고 활동에 나선 것도 2007년이다. 이제 대구평통사가 각계각층의 동참아래 제대로 허리 펴 일어서면 태산같이 꿈쩍않는 수구보수의 아성, 미군들의 병참기지가 되어버린 대구도 긴 잠에서 깨어나리라. 비나리.


△ 지난 8월 17일 UFG 중단 촉구 캠프 워커 앞 기자회견. 당시 대구평통사(준)과 민주노총 대구본부 통일위원회 등이 공동주최했고 안동평통사 회원들도 참여했다.

→ 관련글 : [9/15~16 평통사 일꾼전진대회] 빛고을 광주에서 104명의 평통사 일꾼들이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에 앞장설 것을 결의...

→ 관련글 : ★ 평통사 2008년도 출범의 돛이 올랐습니다. - 14차 운영위원총회 결과 보고

 


1) '땅과자유학교' 김찬수 강의 후기에서 발췌함(출처 :  http://cafe.daum.net/narakhanal/BXZp/29)(본문으로 돌아가기)

태그

총회 , 대구 , 영남 , 평통사 , 전진대회 , 백창욱 , 일꾼 , 일꾼전진대회 , 지통사 , 대구평통사 , 백창욱목사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석분(회원사업팀장)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