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특집 _ 반미연대집회 10년]

처음 시작...

 문정현 신부님이 군산미군기지 민항공기 활주로 사용료 문제 등으로 소파(SOFA)개정운동을 시작하면서 ‘미 대사관 앞에서 집회 한번 해 보자’고 각 단체에 제안할 때였어요. 1999년 10월에 오두희 선생, 박순희 대표, 천주교 성심회 수녀님들과 자통협(평통사)과 미대사관 뒤편에서 집회를 했죠. 당시에는 시내에서, 더구나 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한다는 게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라, 경찰들의 탄압이 엄청 났죠. 집회를 시작하자마다 모두 연행됐지요.

 한번은 무척이나 추운 겨울이었는데, 길바닥이 얼음으로 덮혀 있었어요. 집회를 하려다가 모두 연행되어서 신설동 사거리에 내버려졌는데, 얼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문정현 신부님은 안경도 깨지고요. 정신을 추스리고 또 대사관 앞으로 와서 정리집회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또 광화문 사거리까지 끌려서 밀려나고요.

 집회 시작전부터 광화문 열린공원 입구를 경찰들이 가로막고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미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빙 둘러싸여 고착을 당하고요. 그러던 중 2002년 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연행이 되었고, 문정현 신부님과 늦게 온 몇 몇만 남았어요. 신부님이 “잡혀간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하시고, 결국 밤을 새워 새벽을 지나 다음날 오후까지 있었지요.
미대사관 근처라고 집회를 못하게 하니, (집회보다 더 강력한) 밤샘 농성을 해버린 것이죠. 그 뒤로도 몇 달을 더 고생했어요. 사람들이 잡혀가면 밤새워서 기다리고, 쇠사슬로 서로를 엮어서 연행에 저항하기도 했지요. 이런 저런 고생 끝에 집회 장소를 합법화할 수 있었어요. 투쟁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지요.

 

반미연대집회 10년, 돌아보니 내가 바뀌었구나

 문정현 신부님이 <불평등한소파개정운동본부>를 꾸리고 활동을 하시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 자통협-평통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죠.
사실 그때가 개인적으로는 큰 수술을 받아서 집에서 누워있을 때였어요. 무기력하게 정체된 느낌으로 누워서, 오한이 오면 진통제로 버티고 있는데 이미 내 나이 중년을 넘고 있었죠. 이제 뭔가를 해야한다면, 평화를 위한 일, 분단 극복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딱 때가 맞아 떨어진 거죠.

 집회 경험이 많지 않아서 반미연대집회 하면서 ‘원봉(원천봉쇄)’이라는 말도 처음으로 들어봤어요. 그러니, 경찰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벙하게 집회 참가 하러 갔다가 경찰들로 꽉 둘러싸이니까 어디 숨을 데도 없고, 너무 무서워서 천주교 후배들에게 ‘나 좀 사람들 가운데에 넣어줘’ 그랬다니까..(웃음) 반미연대집회 1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가장 변화된 점이 무엇이냐면 글쎄 난 잘 실감이 안나요. (잠시 생각) 그러고보니 나 자신이 제일 많이 변했네요. 10년동안....  

 

반미투쟁의 산실..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2002년 효순 미선이 투쟁때 시청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소파개정”을 외쳤을 때였어요. 그해 여름 우리 엄청 싸웠잖아. 초겨울에 미군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지고, 동두천 미군부대 앞에서 경찰에 깔리면서 싸웠구요. 그날 우리 장도정 동지가 분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게 인상적이었죠. TV에도 나오고요. 그렇게 싸워서 온 국민이 촛불을 드는 것을 보니 3년간 광화문 공원에서 싸워온 게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거야. 그때 ‘한 3년 열심히 싸우니까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화문 공원에서 소파개정을 요구하며 신부님들이 천막농성을 하는데, 대통령 후보들이 찾아오곤 했죠.

 미국 관련 모든 사안들이 적어도 한번씩은 반미연대집회를 거쳐 갔어요. 집회가 하나의 통로가 된거야. 매향리 투쟁 같은 경우도 천주교 평화지기들하고 최종수 신부님, 김용한 선생, 자통협 사람들하고 집회에서 다달이 보면서 정붙이던 사람들이 매향리 현장에서도 엄청 큰 시너지를 발휘해서 투쟁했어요. 서로베르토 신부님도 그렇고..
농로를 따라 경찰들과 싸워가면서 옷도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매향리도 들어갔던거, 기총 사격 연습 현장을 목격하고, 농섬이 내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가니 해가 지더라구... 그때 거기서 자장면 시켜먹던 거, 주민들이 밥을 솥단지째 해 갖고 오던 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제가 마티즈 차를 1999년 1월에 샀는데, 그것도 인연이었나 봐요. 사건 현장이 매향리, 평택, 동두천, 용산, 의정부 등 집에서 한두시간 거리니까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장으로 찾아가자’ 생각하고 막 찾아 다닌 거죠.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는 정보를 얻고 공부하는 자리이고, 박순희 대표(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가 표현대로 황금마차(마티즈) 타고 현장을 돌아다녔어요. 누가 얘기하던데, 제 차에 캠코더를 달아놨으면, 그대로 10년동안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겠다고요. 매향리에선 앞뒤유리도 왕창 깨졌고, 용산에서 맥팔랜드 수사하라고 농성할 때는 이틀 연속으로 견인되기도 하고, 외교통상부 앞에서 차량 채로 경찰에 고착되어 피켓을 들었더니 신문 1면에도 나고 했죠.

 

쉽지 않은 10년, “영혼이 맑은 사람들”

 10년이라니, 정말 쉽지 않아요. 매월 둘째주 화요일마다 집회를 연다는 것이... 물론 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나 민가협 엄마들의 목요집회도 있지만요. 아무튼, 정기적으로 열리는 게 중요해요. 매향리, 무건리, 대추리, 군산 등 미군의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연대라고 생각해요. 집회가 아니면, 이 사람들을 어디가서 만나겠어요? 천주교 신부님들, 수사님들, 성심회 수녀님들, 양비안네 수녀님, 임기란 어머님와 민가협 어머님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항상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시는 통일광장 선생님들도요. 집회 얘기를 하다보니, 평통사 사람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10년을 이끌어 온 사람들(실무자)들의 진정성이 느껴져요.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저도 자연스레 평통사 일을 하고 있지만, 평통사 사람들을 만난 게 삶의 큰 기쁨이에요. 자랑스럽고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 붙어있고 함께 하죠(웃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해요. 지금은 경찰들과 막 옥신각신 안하고 평화롭게 집회를 하다보니까 그림을 더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용어도 쉽게 써서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게 하고, 피켓도, 상징의식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앞으로도 재미있는 집회, 내용있는 집회를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거에요.

→ 관련글 : [10/13] 미 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10주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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