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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산별 전환,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의 산별 전환, 무엇이 문제인가?


1. 현 시기 자본의 공세와 산별 전환


1) 자본의 공세 - 대공장 조직노동자가 타겟이다

- 현 시기 자본의 공세는 대공장 조직노동자를 정조준하고 있다. 정부가 하반기에 통과시키려고 하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로드맵)을 보면 현 시기 자본의 공세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정확히 드러난다.
정리해고의 요건을 완화하고, 사용자 대항권을 강화한다는 것, 쉽게 말해 ‘해고는 자유롭게, 파업은 어렵게’가 이 로드맵의 핵심 골자가 아닌가.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고, 대공장 조직노동자의 투쟁력을 와해시키려는 것, 한 마디로 정리해고와 노조 무력화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초 신경영전략 이래, 그리고 98년 IMF를 거치면서 자본과 정부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것이다. 그 동안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대공장 노조/ 대공장 조직노동자운동을 와해시키고 정규직 고용의 '경직성’을 깨는 일석이조를 마침내 달성하려는 순간이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의 고용과 생존권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다. 또 그 동안 고용과 생존권을 그럭저럭 지켜낸 대공장 노조운동이 존폐의 기로에 선 순간이다. 대공장이 무너지면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 따라서 대공장 조직노동자에 대한, 이 당면한 자본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대공장 노동운동의 투쟁계획과 조직발전 전망은 모두 이 공격을 막아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 공격을 비껴가는 그 어떤 계획과 전망도 비현실적이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대공장의 투쟁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을 강화하고,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을 현장투쟁기관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2) 대공장의 투쟁력을 하향평준화 시켜서는 안 된다

- 그런데 지금의 산별 전환은 이러한 정세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대공장의 투쟁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상급단체와 노조 지도부들은 산별노조를 통해 크게 단결하여 큰 투쟁을 만들자고 한다. 물론 로드맵 등 현 시기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큰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큰 투쟁을 위해 제출된 실제 정책과 방침들을 보면, 산별노조는 투쟁을 할 필요도 없고, 투쟁을 할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산별노조를 홍보하는 소책자나 선전물들을 보라. 큰 투쟁이든 작은 투쟁이든 투쟁 자체를 최소화하고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 금속연맹에서 발행한 조합원용 소책자 <<금속산별로 뒤집기 한판!>>에서는 “산별노조가 되면 파업을 더 많이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질문해 놓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대공장의 파업부담은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고 ‘안심’을 시켜주고 있다. “우리만 맨날 총대 매냐”는 일부 대공장 조합원들의 파업 기피 정서에 영합하여 대공장 파업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 산별 정신이라면 큰 투쟁은 고사하고 이제 투쟁 자체가 끝장나는 것 아닌가. 크게 단결하여 크게 투쟁한다는 것은 모두 말장난인가?

- 지금 코앞에 걸린 비정규직 개악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저지, 완전 폐기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총파업이 필요하다. 그런 상황에서 현자, 기아차 등 대공장의 파업 부담을 줄여주겠다고 대공장은 빠지고 중소사업장만 파업하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는가? 그나마 형식적인 총파업조차도 없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금속 대공장이 지금 같은 하루 파업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총대를 매고 무기한 파업을 통해 공공부문 등 여타 대사업장들이 파업에 나서도록 해야 만이 비정규직 개악안과 로드맵을 저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총파업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지금 구조조정/ 노동유연화와 노조 무력화/ 현장 초토화를 획책하는 자본의 공격이 전면화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투쟁력을 가지고 있는 금속 대공장이 총대 매고 나서도 쉽지 않은 마당에 대공장 파업부담을 줄여준다니?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대공장 파업부담을 줄여주는가? 그런 기조의 산별 건설이라면 비정규직 개악안과 로드맵 저지를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본의 공격 앞에서 대공장의 투쟁력을 극대화시켜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끌어내리고 하향평준화를 유도한다면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결국 자본의 공격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대공장의 파업부담은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우연히 들어간 문구가 아니다. 지금 지도부들이 추진하는 산별 건설의 정신이자 기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산별 교섭만 제대로 정착되면 투쟁을 안 해도 교섭으로 다 풀 수 있다’는 식으로 산별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솔직히 지금의 모습이 아닌가. 투쟁을 최소화하는 것이 산별 정신이라면 현 시기 자본의 공세로 봤을 때 산별 전환은 민주노조운동에 재앙이 될 것이다.


2. 단위사업장 현장투쟁과 산별 교섭


1)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 산별 전환

- 파업의 최소화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대공장 단위사업장의 현장투쟁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산별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별론자들은 조합원들에게 반복적으로 ‘기업별 투쟁’의 한계와 폐해를 열거한다. 그들은 집요하게 ‘기업별 투쟁’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 산별론자들로부터 실제로 공격받고 있는 것은 ‘기업별 투쟁’이라는 낙인을 둘러쓴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이다. 그들이 만악의 근원, 노동운동 위기의 주범으로 몰고 있는 ‘기업별 투쟁’이란 게 결국 무엇이겠는가? 대공장 단위사업장의 임단투이고 현장투쟁이 아닌가.

기업별 체제 하에서든 산별 체제 하에서든 대공장 임단투는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산별 체제 하에서도 대공장이 선도적으로 투쟁해야 하며 중소사업장도 그에 따라 임금과 단협이 상향평준화 되도록 해야지, 대공장 투쟁을 끌어내려 하향평준화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기업별 투쟁’을 매도하는 산별 만능주의가 04년 보건의료노조 산별 투쟁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금속 노동자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산별 체계 안착에 혈안이 되어 서울대병원 지부 현장투쟁을 억누르고 지부의 단협 개악을 강요한, 저 악명 높은 보건의료노조 산별협약 10장 2조를 상기하라. 단위사업장 임단투를 하향화시키고 현장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건설된 산별노조의 실상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렇듯 현재 ‘기업별 투쟁’의 한계 운운하면서 추진하는 산별 전환은 현장투쟁을 무력화시키고 소멸시키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을 가져올 것이다.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투쟁으로, 헛발질에 불과한 것으로 매도되고 있는데 산별노조 하에서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이 어떻게 활성화 될 수 있겠는가? 활성화는커녕 억눌려 고사당할 위기에 처할 것이다.

- 또한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은 고용안정과 사회복지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투쟁이라고, 산별론자들은 조합원들에게 악선전을 한다. 설상가상으로, 고용대책과 사회복지를 가져다 줄 산별노조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크게 단결하는 큰 투쟁, 산별 투쟁이란 것이 결국 단위사업장 현장투쟁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는 투쟁이라면 그게 무슨 투쟁이겠는가? 결국 그런 산별 투쟁은 투쟁하는 시늉에 불과할 것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처럼 대국민 캠페인이나 대정부 청원운동, 또는 지도부들만의 보여주기식 투쟁이 될 것이다.
자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이런 ‘투쟁’으로 고용안정과 사회복지를 쟁취한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자본에게 위협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당면한 자본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를 불러올 것이다. 구조조정과 현장 초토화 등 현 시기 자본의 공세로 봤을 때 현장투쟁을 약화,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산별노조는 자본의 공격에 길을 훤히 터주는 꼴만 될 것이다. 지금 산별 전환으로 산별 교섭체계를 안착시키겠다는 것은 자본의 공격이 조여 오는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을 위해 노사정위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논리이다.
단위사업장 현장투쟁과 임단투를 강화시키지 않고서 다른 길로 우회하는 것을 통해서는 고용과 생존권을 지킬 수 없다. 현장조합원들의 대 자본 투쟁력을 끌어올리는 길을 회피하고 산별 교섭과 산별 정책대안으로 산별 차원의 큰 투쟁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는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사회적 교섭과 사회개혁 정책대안으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만들겠다는 것만큼이나 기만적인 논리이다.

- 물론 단위사업장의 현장투쟁과 임단투는 사회복지 같은 대정부 요구를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산업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교섭”, 즉 산별 교섭과 사회적 교섭을 통해서 사회복지 요구를 가지고 싸우면 되는가? 노동자 투쟁의 역사로부터 볼 때 사회복지 같은 요구는 교섭이 아니라 공세적인 대정부 대자본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획득한 성과물이다. 정세의 고양기에 사회변혁적 투쟁이 분출할 때 사회변혁을 피하기 위한 자본의 개량책으로 던져진 것이 보통 사회복지 정책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공세적인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고용과 생존권, 그리고 현장의 권리들을 방어하는 투쟁을 위해 전선을 쳐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공격과 방어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지 않다. 언제든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자본의 직접적인 공격에 맞서는 대항 투쟁에 집중하지 않고 이를 회피하면서 공세적인 요구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은 허구이자 기만이다. 그것은 ‘공세적으로’ 노사정위에 들어가 결국은 정리해고를 수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2) 단위사업장 교섭과 전국단위 교섭

- 여기서 단위사업장 교섭(즉 산별론자들이 공격하는 ‘기업별 교섭’)과 산별 교섭/ 사회적 교섭의 차이를 검토해 보자. 단위사업장 임단협 교섭은 현재 단위사업장 노조의 투쟁회피적인 지도부들에 의해 투쟁과의 연결고리가 많이 묽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투쟁을 완전히 배제하고 갈 수가 없다. 교섭 대표자들이 현장조합원들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교섭 결렬시에 사측과의 투쟁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무한정 회피할 수가 없으며, 또한 투쟁하고자 하는 지도부의 경우 조합원들을 언제든지 곧바로 투쟁에 동원할 수가 있는 구조이다. 남한의 ‘기업별 노조’가 그 기원에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현장 대중투쟁기관으로 탄생한 것이며, 현재도 그 흔적을 많은 부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별 교섭이나 사회적 교섭처럼 전국 단위 교섭으로 가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전국 단위 교섭의 경우 단위사업장 교섭처럼 결렬을 선포하고 투쟁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지도부의 투쟁 의지나 투쟁 회피를 떠나 구조적으로 훨씬 더 어렵다. 전국 단위의 투쟁을 위해 단위사업장들 간에 조정과 복잡한 의결체제를 거치다가 투쟁의 시기를 놓치고, 거기다가 상층 관료들의 투쟁 회피 기도들이 훨씬 더 손쉽게 작용할 것이다.
현장 조합원들의 통제도 그만큼 미치기 어려워지고, 점점 수동화되고 방관자로 전락되기 쉽다. <단위사업장 교섭 → 단위사업장 투쟁>처럼 <전국 단위 교섭 → 전국 단위 투쟁>이 되는 것처럼 형식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산별로 크게 단결하는 큰 투쟁”을 말하는 것은 극히 단순 논리가 아니라면 사기이다. 더욱이 지금 87년과 같은 투쟁으로 산별노조가 건설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말할 것도 없다.

크게 단결하는 큰 투쟁이나 전국적인 투쟁은 교섭을 큰 단위로, 전국 단위로 한다고 되지 않는다. 투쟁력을 가진 대공장이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 전국 전선을 치고 여기에 다른 산업 부문의 대사업장과 중소사업장이 달라붙는 기존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패턴을 되살리고 이를 강화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3. 현 시기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은 단사의 요구만을 가지고 싸우는 투쟁인가?


-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을 ‘기업별 투쟁’으로 매도하거나 ‘경제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현 시기 자본의 공격 앞에서 무장해제를 부추기는 이적행위나 진배없다. 노동자에게 노동현장은 집단적 투쟁을 전개하는 원초적 공간이자 자본을 타격하는 투쟁 동력을 만들어내는 발전소와 같은 것이다. 현장투쟁은 노동자가 노자간 계급대립과 적대를 직접적으로 겪고 느끼며 계급의식을 체득하는 학습장이다. 그래서 단위사업장의 요구만을 가지고 싸우는 투쟁이라 하여 현장투쟁을 ‘계급적인’ 투쟁이 아닌 걸로 격하시키는 논리들은 배격되어야 한다.

- 현 시기 계급투쟁에서 순수히 단위사업장에 한정된 성격을 갖는 요구가 얼마나 있는가. 97년 기아차 부도 사태 때 노조의 ‘기아차 살리기’ 같은 노사협조적 요구를 제외한다면, 있다 하더라도 전체 노동자 투쟁에서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들일 뿐이다.
현 시기에 현장투쟁 사안이란 것이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불안, 노동강도나 현장통제,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사안들이 아닌가. 이들 범주에 포괄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노조 무력화/ 현장 초토화를 겨냥한 현 시기 자본의 공격에서 비롯하는 이런 사안들은 이미 계급적으로 일반화된 현안들이다. 노동자계급 전반에 걸쳐 해당되는 사안들이다.
오늘날의 노/자 관계에서 내 현장, 내 공장에만 있는 현안이나 요구란 사실상 없다. 따라서 오늘날 현장투쟁은 전체 계급전쟁을 구성하는 각각의 전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결코 단사의 요구만을 가지고 싸우는 투쟁이 더 이상 아니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일반화된 공격에 대항하는 전체 투쟁의 한 구성부분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단사에 국한된 특수한 요구를 가지고 싸우는 별개의 동떨어진 투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이런 계급적인 현안과 요구를 둘러싼 현장투쟁을 두고 ‘경제주의’라거나 ‘조합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현 시기 계급투쟁의 지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 무지의 소치이다. 혹여 그것이 아니라면 상층관료들이 자신들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나 ‘사회개혁투쟁’ 같은 탈계급적인 운동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벌이는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현장투쟁을 전공장 투쟁으로, 지역과 전체 산업 ․ 부문의 투쟁으로, 나아가 전 계급의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이다. 이러한 현장투쟁의 확대를 가로막는 노조 지도부의 단사주의나 조합주의가 문제일 뿐, 그러한 요구 투쟁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 현장투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현장투쟁 없이는 그 어떤 더 큰 투쟁도 가능하지 않다.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이든, 고용과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이든, 노동법을 비롯한 제도 개악을 저지하는 투쟁이든, 나아가 그 어떤 공세적인 투쟁이든, 모든 투쟁은 이 현장투쟁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실제적인 위력을 갖지 못하는 형식적인 투쟁으로 머무른다. 노동자가 집회 인원을 늘려주는 ‘쪽수’로 밖에는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현재의 형식적인 총파업이 그런 경우다.

그래서 현장투쟁의 활성화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계급 운동에 절대적인 관건이다. 현장투쟁이 약화되기 시작하면 전체 계급 역관계는 여지없이 자본에 기울고 전반적인 계급투쟁의 퇴조와 침체를 가져오며, 현장투쟁으로 쟁취했던 성과물들이 자본에 의해 되빼앗긴다.


4. 고용안정과 사회복지를 가져다주는 산별노조의 사회개혁투쟁?

- 그런데 지금 산별론자들은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들먹이며,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을 격하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와 거짓 선전을 무차별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여기서 현장투쟁은 “변화하는 노동환경”에 대응하지 못하는 철지난 투쟁으로 폄하되고 있다. 더 이상 고용과 생존권을 지킬 수 없는 투쟁이며, 특히 지금은 사회복지의 확충과 함께 조세, 의료, 연금, 교육 개혁 등 사회개혁투쟁과 사회 정치적 투쟁을 해야 하는데 단위사업장의 요구만을 가지고 싸우는 현장투쟁은 이러한 사회개혁투쟁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선전한다.

- 이들 산별론자들은 대개 독일 금속노조를 모범 사례로 떠받들면서, 고용안정과 사회복지 등 독일 노동자가 누리는 것들이 다 산별노조 덕택인 것으로 선전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거짓말이다. 현재 독일 금속노동자들이 한국에 비해 사회복지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 독일 노동자들이 활발한 단위사업장별 현장투쟁에 기반한 전투적 대중파업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특히 1917년 러시아 노동자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1918년 독일 혁명의 과정이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생존권적 요구를 내건 단사 현장투쟁들이 공장평의회 운동을 통해 산별노조의 관료적 통제를 뚫고 전계급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고, 투쟁하는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노동자평의회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노동자 혁명을 막는 데 이해관계를 같이 했던 독일 자본가계급과 개량주의 사민당 및 산별노조 관료들은 재빨리 노사정 타협체제를 구축하여 사회복지라는 개량을 던지는 한편,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가장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노사 합동으로 탄압을 집중하여 노동자 혁명을 압살했다.

사회복지는 이렇듯 지배계급과 개량주의 세력이 혁명을 막기 위해 내놓은 개량 조치였지만, 뒤집어서 보면 아래로부터의 격렬한 계급투쟁에 의해 강제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사회복지는 독일 금속노조의 이른바 사회개혁투쟁이나 사회 정치적 투쟁의 성과이기는커녕 오히려 산별 관료들의 그러한 기만적인 사개투 논리를 젖히고 터져 나온 현장투쟁으로 인한 것이다.

- 사회개혁투쟁, 좋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자본의 공격 앞에서 절박한 생존권 사수투쟁을 회피하고 이른바 “산업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교섭”을 통해 사회개혁투쟁을 한다는 것은 기만이다. 현장투쟁을 우회하고 자본과의 대결을 비껴가기 위해 개발된 사개투 논리가 현장투쟁을 약화시키는 현재와 같은 방식의 산별 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동원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장투쟁을 회피하기 위한 사회개혁투쟁으로 사회복지를 쟁취한다는 것은 노사정위에 들어가 사회적 교섭으로 비정규직 개악안을 막아내고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쟁취한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5. 독일 산별노조,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아야

또한 산별론자들은 독일 산별노조가 노사정 교섭을 통한 ‘고용협약’을 만들어냄으로써 독일에서는 고용불안도 없고 설사 해고돼도 모두 동일한 조건으로 재취업되는 것처럼 선전한다. 그러나 이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 자본주의의 전후 호황으로 30년 동안 지속됐던 ‘완전고용’ 상태의 고용안정은 70년대 중반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고, 80년대 이래 독일은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 90년대 내내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도 항상적으로 7-8% 대(현재는 12% 이상)의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그런데 산별노조의 교섭으로 인해 ‘고용안정이 확보’되어 있다니? 이 가장 기초적인 사실에서조차도 산별주의자들의 선전은 터무니없음이 드러난다. 산별노조가 고용을 지켜주기는커녕 산별노조의 교섭주의와 노사정 타협체제에 가로막혀 현장투쟁이 질식되고 씨가 마르면서 계급투쟁의 기풍이 소멸되어버렸다. 그래서 자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온 결과가 바로 지금과 같은 높은 실업률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독일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산별론자들이 모범으로 받드는 독일 산별노조는 이렇듯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무력화되고 현장이 초토화되는 길이다. 죽는 길은 막아야 한다.
산별 전환으로 인한 혼선을 빠르게 털어버리고, 비정규직 개악안과 로드맵 등 코앞에 다가온 자본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한 전투 대형을 하루 바삐 갖추어야 한다. 대공장의 파업 부담을 줄여준다는 산별의 투항 논리를 거부하고,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선도적으로 강력한 총파업전선을 쳐나가야 한다.


양효식(당건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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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 , 현장투쟁 , 대공장 , 기업별 투쟁 , 자본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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